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4권 2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4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2
▶論曰:此中身`身者`受者識,應知卽是眼等六內界. 彼所受識,應知卽是色等六外界. 彼能受識,應知卽是眼等六識界.
▷논문; 마땅히 알지니, 이 중에서 신식(身識)ㆍ신자식(身者識)ㆍ수자식(受者識)은 안계(眼界) 등의 여섯 가지 내적인 세계인, 육내계(六內界)라고 알아야 하며,
그 수용되는 소수식(所受識)은 색계 등의 여섯 가지 외적인 세계인, 육외계(六外界)라고 알아야 하고,
그 능히 수용하는 능수식(能受識)은 안식계 등의 여섯 가지 식의 세계인, 육식계(六識界)라고 알아야 한다.
其餘諸識, 應知是此諸識差別. 又此諸識, 皆唯有識,都無義故. 此中,以何爲喩顯示? 應知夢等爲喩顯示. 謂如夢中, 都無其義,獨唯有識, 雖種種色`聲`香`味`觸`舍`林`地`山` 似義影現,而於此中,都無有義. 由此喩顯應隨了知,一切時處,皆唯有識, 由此等言應知.復有幻誑 `鹿愛` 瞖眩等喩. 瞖 눈에 백태 낄 예, 흐릴 예
그 나머지 여러 식은 이 모든 식의 차별이며,
또한 이 모든 식은 오직 식만 있을 뿐, 의(義,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중에서 무엇을 비유로 하여 나타내는가? 꿈 등을 비유로 하여 나타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꿈속에서는 그 의(義, 대상)이 전혀 없고 오직 식만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록 갖가지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집ㆍ숲ㆍ땅ㆍ산 등이 의(義, 대상)으로써, 비슷하게 현현하지만, 이 중에는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이 비유가 나타내는 것에 의해서 마땅히 모든 시간의 일체시(一切時)과 모든 장소의 일체처(一切處)에서 오직 식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에 의해서, 다시 요술로 속임과 목마른 사슴이 물을 구해서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과
눈병으로 흐리고 보이는 예현(瞖眩) 등의 비유가 있는 것이다.
若於覺時,一切時處,皆如夢等. 唯有識者,如從夢覺,便覺夢中,皆唯有識.覺時何故,不如是轉? 眞智覺時, 亦如是轉. 如在夢中,此覺不轉,從夢覺時,此覺乃轉. 如是未得眞智覺時,此覺不轉,得眞智覺,
만약 깨어 있을 때에 모든 시간의 일체시(一切時)과 모든 장소의 일체처(一切處)에서 모두 꿈과 같이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면, 꿈에서 깨어난 후에, 꿈속의 모든 것에는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고 깨달아 아는 것과 같이,
깨어 있을 때에는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전전하지 못하는 것인가?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인 진지각(眞智覺)일 때에는 역시 이와 같이 전전하게 되는 것이다.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이러한 깨침이 전전하지 않지만 꿈에서 깬 후에는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아직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인 진지각(眞智覺)을 증득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 깨침이 전전하지 않는 것이다.
此覺乃轉.其有未得眞智覺者,於唯識中,云何比知?由教及理,應可比知.此中教者,如『十地經』薄伽梵說,如是三界,皆唯有心.又薄伽梵『解深密經』,亦如是說,謂彼經中,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증득하면 이 깨침이 곧 전전하게 되는 것이나,
아직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한 자는 유식에 대해서 어떻게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인가?
경전의 가르침인 교(敎)와 바른 논리의 이(理), 즉 마땅히 교리(敎理)에 의거해서 미루어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경전의 가르침이란 '십지경(十地經)'에서 박가범(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삼계(三界)는 모두 오직 마음(心)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또한 박가범(부처님)께서는 '해심밀경(解深蜜經)'에서도 역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그 경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ㅡ'해심밀경' 본문에는 ‘위빠사나 삼마지’로 되어 있다.
慈氏菩薩,問世尊言:諸三摩地所行影像, 彼與此心,當言有異`當言無異?
佛告慈氏: 當言無異.何以故?由彼影像,唯是識故. 我說, 識所緣,唯識所現故.
“자씨보살(慈氏菩薩, 미륵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모든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影像)은, 그것이 이 마음(心)과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그 영상(影像)은 오직 식(識)일 뿐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식의 인식대상인 식소연(識所緣)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는 때문이니라.’
世尊!若三摩地所行影像,卽與此心,無有異者,云何此心還取此心?
慈氏!無有少法,能取少法.然卽此心, 如是生時,卽有如是影像顯現. 如質爲緣,還見本質,而謂我今見於影像, 及謂離質別有所見影像顯現.此心亦爾,如是生時,相似有異所見影現.
‘세존이시여, 만약 그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이 곧 이 마음(心)과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마음(心)을 돌이켜 이 마음(心)을 취하는 것입니까?’
‘자씨여, 어떠한 작은 법이라도 능히 작은 법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없느니라. 그러나 이 마음(心)이 이와 같이 생겨날 때에 곧 이와 같은 영상의 현현함이 있느니라.
본질로써 인식대상을 삼아서 돌이켜 본질을 보는 것을 내가 지금 영상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나,
본질을 떠나서 별도로 보여지는 영상의 현현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느니라.
이 마음(心)도 역시 그러해서 이와 같이 일어날 때, 그 모습이 비슷하면서 다르게 보여지는 영상이 현현하는 것이니라.’”
미륵(彌勒) 보살은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파생한 마이트리야(Maitreya)라는 단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마이트리야는 자씨(慈氏)로 의역되므로 미륵보살은 흔히 자씨보살로도 불리우며, 미래불이다.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다. 현재에는 도솔천(兜率天, 지족知足)에 올라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부처가 되기 이전 단계에 있기 때문에 보살이라 부르며,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머무는 정토이며, 내원궁(內院宮)이라고도 한다.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있는 자세를 한 불상이 미륵반가사유상이다.ㅡ 다
卽由此教,理亦顯現.所以者何?於定心中,隨所觀見諸靑瘀等所知影像,一切無別靑瘀等事,但見自心.由此道理, 菩薩於其一切識中, 應可比知皆唯有識 無有境界. 又於如是靑瘀等中,非憶持識, 見所緣境現前住故.
聞`思所成二憶持識,亦以過去,爲所緣故,所現影像,得成唯識.由此比量,菩薩雖未得眞智覺,於唯識中,應可比知.
이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바른 논리도 역시 현현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선정의 마음 중에서 관찰하는 바에 따른, 고름나고 문드러진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등 알아야 할 모든 상에는 별도의 청어상(靑瘀相) 등의 모든 사물이 없는,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볼 뿐인 것이니,
이 도리에 의거해서 보살은 일체의 식(識)에 대해서 오직 식만이 존재하고 경계가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청어상(靑瘀相) 등은 기억하여 알고 있는 억지식(憶持識)이 아니니, 왜냐하면 인식대상의 경계인 소연경(所緣境)이 현전하여 머물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어서(聞) 이루거나 사유해서(思) 이루어진 두 가지 억지식도 역시 과거를 소연(所緣,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나타난 영상은 유식(唯識)을 이룰 수 있으니, 이 비량(比量)으로 인하여 보살은 아직 진실한 진지(眞智)의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유식에 대해서 마땅히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釋曰:此唯有識,由教顯示.如『十地經』言,如是三界,皆唯有心故. 『解深密經』中,我說識所緣唯識所現故者.謂識所緣, 唯識所現,無別境義. 復擧識者,顯我所說, 定識所行,唯識所現,無別有體.
▷해석;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전의 가르침에서 나타나 보인 바에 의거하는 것으로, '십지경'에서 “이와 같이 삼계는 모두 오직 마음(心)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해심밀경'에서 “나는 식의 소연(所緣, 인식대상)이 오직 식이 현현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니라”는 것은, 식의 소연(所緣, 인식대상)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일 뿐, 별도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식을 드는 것은, 박가범(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선정에서 식이 행해지는 것에서도 오직 식이 나타난 것으로 별도의 자체가 없음을 나타내었다.
然卽此心,如是生時者,謂卽由此品類生時. 相似有異所見影現者,謂定所行相似離識, 別有所取分明顯現.
‘그러나 이 마음(心)이 이와 같이 일어날 때’란, 곧 이로 인하여 마음의 대상인 갖가지 차별상의 품류(品類)가 생겨날 때를 말하는 것이며,
‘상(相)이 비슷하면서 다르게 보여지는 영상이 현현한다’는 것은 선정에서 행하여지는 비슷한 상(相)이 식을 떠나서 취하는 바가 있어서 분명히 현현하는 것을 말하며,
又於如是靑瘀等中,非憶持識見所緣境現前住故者, 謂靑瘀等,是三摩地所行影像, 非憶持識. 由此不卽在彼方處, 如昔所受還如是憶, 此住現前分明見故. 彼憶持識,所見暗昧, 此現前住所見分明.
‘또한 이와 같이 고름나고 문드러진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등에 대한 것은 억지식이 아니다.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이 현전에 머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란, 이른바 고름나고 문드러진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등은 삼마지에서 행하여지는 영상으로서 억지식이 아닌 것이니, 곧 이것은 그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예전에 받아들인 바와 같이 돌이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것이 머무는 것을 현전에 분명히 보기 때문이다.
그 억지식이 보는 것은 어둡지만, 현전에 머물며 보여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이니,
若有復謂如聞`思慧,由串習故, 境雖謝往, 纔作意時, 如昔而生. 此亦爾者.聞`思兩慧,境旣謝往`現無有體,於無體中,若更生時,但識影現似彼而生故. 聞`思慧不緣謝往曾所受境,是故唯識,由此彌彰所取義無,理亦成就.
만약 어떤 이가 다시 말하기를 “들어서 이루는 문혜(聞慧)와 사유해서 이루는 사혜(思慧) 같은 것은 자주자주 익히기 때문에, 대상이 지나가 버렸어도 작의(作意)할 때에는 예전처럼 생겨난다”고 하였으니, 이것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의 대상은 이미 지나가서 현재에 체가 없으나, 만약 체가 없는 것에서 다시 생겨날 때는 다만 식의 영상이 현현해서 그것과 비슷하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혜(聞慧)와 사혜(思慧)가 예전에 받아들여서 이미 지나가 버린 대상을 반연하지 않는 것이니, 따라서 유식(唯識)의 이치가 이로 인하여 두루 밝게 드러나는 것이며, 소취(所取, 인식대상)의 의미가 없는 이치도 역시 성취되는 것이다.
▶論曰:如是已說, 種種諸識,如夢等喩,卽於此中, 眼識等識,可成唯識. 眼等諸識旣是有色,亦唯有識,云何可見?此亦如前,由教及理.
▷논문; 이와 같은, 갖가지 모든 식을 꿈과 같다고 비유하여 말하는 것이니, 곧 이 가운데 안식(眼識) 등의 식은 유식(唯識)의 취지를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안식 등 모든 식에는 이미 물질(色)이 있으나, 역시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도 역시 앞에서와 같이 경전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의거하여야 하는 것이다.
▶釋曰:眼識等識,皆非有色,可成唯識;眼等諸識,旣是有色, 云何唯識?
此亦如前,由教及理者,此眼等識如前所引,理教顯示亦成唯識.
▷해석한다; 안식(眼識) 등의 식 모두에 물질(色)이 있지 않은 것이라며, 유식(唯識)의 취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안식(唯識) 등의 여러 식에는 이미 물질(色)이 있거늘, 어떻게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앞에서와 같이 경전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즉 이 안식 등은 앞에서 인용된 바른 논리와 경전의 가르침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역시 유식의 취지를 성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