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2권 3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2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② 3
▶論曰: 云何熏習無異無雜, 而能與彼有異有雜諸法爲因? 如衆纈具纈所纈衣, 當纈之時, 雖復未有異雜,
非一品類可得. 入染器後, 爾時衣上便有異雜, 非一品類染色絞絡文像顯現.
阿賴耶識,亦復如是, 異雜能熏之所熏習, 於熏習時, 雖復未有異雜可得, 果生染器現前已後,
便有異雜無量品類諸法顯現. 纈 홀치기염색 혈,
▷논문; 훈습에는 차이도 없고 잡염도 없는데, 어떻게 능히 그 차이가 나고 잡염된 제법의 원인이 되는 것인가?
여러가지 무늬를 만드는 홀치기 도구와 그 무늬로 물들여진 옷과 같은 것이니,
그것을 물들이기 전에는 다르고 잡염된 것이 아닌, 한 가지의 종류이었지만, 염색 그릇에 들어간 뒤에는 옷에 잡염되고 차이가 있게 되어서, 염색으로 물들여져서 같은 종류가 아닌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아뢰야식 역시도 이와 같아서 잡염의 다른 능훈(能熏)이 훈습하는 곳이다.
훈습하기 전에는 잡염된 다름이 없지만, 염색 그릇에 들어 간, 현전의 결과가 생긴 이후에는 문득 잡염되어서 무량하게 다른 품류의 제법이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ㅡ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개별이면서도 개별이 아닌 속성을 띄는 것을 말하는, 제8 인과별부별장(第8 因果別不別章).
▶釋曰: 云何熏習無異無雜, 而能與彼有異有雜諸法爲因者, 欲以譬喩顯斯道理, 故爲此問.
如衆纈具纈所纈衣, 當纈之時,雖無異雜文像可見, 入染器後, 便有異雜文像可見.
阿賴耶識,如所染衣,果生卽染器,故名果生染器.
入者, 卽是緣所攝義.於熏習時, 雖無異雜, 至果熟位,便有非一品類諸法因性顯現,如已染衣.
▷해석한다; ‘훈습자체에는 차이도 없고 잡염도 없거늘, 어떻게 능히 그 잡염되고 다른 제법의 원인이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비유로써 이 도리를 나타내고자 질문을 한 것이다.
여러 무늬를 내는 홀치기 도구와 그 무늬로 물들여진 옷과 같이, 그것을 물들일 때에는 아직 차이가 나지 않고 잡염된 것을 볼 수 없지만, 염색 그릇에 들어간 이후에는 문득 차이가 나고 잡염된 모습을 볼 수 있음과 같은 것이다.
아뢰야식은 물들여진 옷과 같은 것이니, 결과가 생기는 것은 염색 그릇으로 인하여, ‘결과가 생기는 염색 그릇의 과생염기(果生染器)’라 부르는 것이다.
‘들어간다는 입(入)’이란, 이러한 연(緣)에 포섭되는 뜻으로, 훈습할 때에는 잡염되어서 차이가 나지만, 결과가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문득 하나의 품류가 아닌, 제법의 인성(因性)이 나타나는 것은, 염색된 옷과 같은 것이다.
▶論曰:如是緣起, 於大乘中,極細甚深. 又若略說有二緣起: 一者分別自性緣起` 二者分別愛`非愛緣起.
此中依止阿賴耶識諸法生起, 是名分別自性緣起, 以能分別種種自性, 爲緣性故.
復有十二支緣起, 是名分別愛`非愛緣起,以於善趣`惡趣,能分別愛`非愛種種自體,爲緣性故.
▷논문; 이와 같은 연기(緣起)는 대승에서 극히 미세하고 심심(甚深)한 것이며,
또한 간략히 말한다면 두 종류의 이연기(二緣起)가 있으니,
하나는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이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생기는 제법을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라 하는 것으로,
능히 갖가지의 자성을 분별함으로써 조건(緣)의 성품이 되는 연성(緣性)이기 때문이다.
다시 12지연기(十二支緣起)가 있으니, 이것을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라 하나니, 살기 좋은 세계의 선취(善趣)와 괴로운 세계의 악취(惡趣)에 대해서 능히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갖가지의 체를 분별함으로써 조건의 성품인, 연성(緣性)이 되기 때문이다.
ㅡ연기(緣起)에 관하여 설명한, 제9 연기장(第9 緣起章).
12지연기(十二支緣起), 일반적으로 12연기(緣起)ㆍ12인연(因緣)이라 하며,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특히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을 열두 단계로 설명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의 무명(無明)→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의 행(行) →
식별작용ㆍ윤회의 주체인 식(識) →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의 명색(名色) →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입(入) →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의 화합인 촉(觸) →
감수작용의 수(受) → 갈애의 애(愛) → 애(愛)의 대상에 대한 집착하는 취(取) →
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인 유(有) → 태어남ㆍ삶의 생(生) →
늙고 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뇌 등의 괴로움의 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
▶釋曰:如是緣起,於大乘中,極細甚深者,異生覺慧,難了知故, 名爲極細. 阿羅漢等, 難窮底故, 名爲甚深.
又若略說有二緣起者,擧數.一者分別自性緣起`二者分別愛`非愛緣起者,列名.
此中依止阿賴耶識者,謂阿賴耶識爲因, 諸法生起, 是名分別自性緣起, 由能分別異類自性, 爲因性故.
若無明等,是名分別愛`非愛緣起,由能分別愛`非愛種種自體,爲因性故.
▷해석한다; ‘이와 같은 연기를 대승에서 극히 미세하고 심심(甚深)하다’고 하는 것은 이생(異生, 범부)의 지혜로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극히 미세하다’고 하는 것이며,
연각(緣覺)의 벽지불(僻支佛)인 아라한(阿羅漢) 등도 철저하게 궁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심오한 심심(甚深)’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간략히 말하여서 두 종류의 이연기(二緣起)가 있다’는 것은 숫자를 드는 것이며,
‘하나는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이다’라고 한 것은, 명칭을 열거한 것이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른바 아뢰야식이 원인(因)이 되어서 제법이 생기(生起)하는 것을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라 이름한다는 것이니, 능히 다른 품류의 자성을 분별해서 인성(因性)으로 삼기 때문이다.
만약 무명(無明) 등이라면,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라 하나니,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갖가지의 자체(自體)를 분별해서 인성(因性)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생(異生)은 갖가지 견해와 번뇌에 의한 여러 가지의 과보를 받아서 여러 세계(趣)에 태어난 중생이란 뜻이다. 또는 성인(聖人)과 다른 생류(生類)라는 의미로서, 곧 범부인 것이다.
▶論曰:於阿賴耶識中,若愚第一緣起, 或有分別自性爲因 `
▷논문; 아뢰야식에서, 만약 첫 번째의 분별자성연기에 어리석을 경우에는,
혹은 자성을 원인(因)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가 있고,
ㅡ인도의 6파철학(派哲學)의 하나인 상캬(Sāṃkhya)학파의 주장으로, 자성은 프라크리티(prakṛti)로서, 근본 원질(原質)ㆍ근본 자성ㆍ제1 원인인 승인(勝因) 등의 뜻이다. 상캬학파에서는 세계를 푸루샤(puruṣa, 神我, 순수 청정한 정신성)와 프라크리티의 2원론(元論)으로 파악하고, 세계를 25원리에 의해 설명하였다.
프라크리티(자성)는 라자스(rajas, 動質)ㆍ사트바(sattva, 純質)ㆍ타마스(tamas, 暗質)의 세 가지의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 만물의 차이는 이 세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고, 그 결합에서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한다. 프라크리티(자성)의 내적인 평형상태가 깨어져서 23원리 즉, 붓디(buddhi:大ㆍ智)→아만→5유량(唯量:色ㆍ聲ㆍ香ㆍ味ㆍ觸)→5대(大:地ㆍ水ㆍ火ㆍ風ㆍ空)→11근(根: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ㆍ손ㆍ발ㆍ입ㆍ생식기관ㆍ배설기관ㆍ心根)이 전개된다고 하였다.
或有分別宿作爲因`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因)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며,
ㅡ순세외도(順世外道, Lokāyatika)의 주장이다. 그들은 세간의 모든 원인은 다만 과거에 지은 것만 있을 뿐, 현재 노력하는 것은 결과를 초감할 수 없다고 하였다.
或有分別自在變化爲因`
혹은 자재천(自在天)의 변화를 원인(因)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고,
ㅡ자재천(自在天)을 섬기는 외도의 주장으로, 이들은 다만 자재천이라는 하나의 원인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자재천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천 계(界)를 주관한다고 하며, 혹은 욕계의 제6천주라고도 하며, 이 신(神)이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이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한다. 이 자재천의 인(因)이 자아 등으로 하여금 선악을 일으키고 생사에 윤회하게 하며, 나중에 혐오를 일으켜서 해탈을 구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或有分別實我爲因`
혹은 실체의 자아를 원인(因)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며,
ㅡ바이세시카(Vaiśeṣika, 勝論)학파의 주장으로, 이 학파는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유물론적(唯物論的) 다원론(多元論)으로서 세계의 구성을 여섯 가지 범주인 육구의(六句義), 즉 실체(實)ㆍ속성(德)ㆍ행위(業)ㆍ보편성(同, 大有性)ㆍ특수성(異: 同異性)ㆍ내재성(和合性)으로 설명하고, 이것들은 식을 떠나서도 별도로 상주하는 자체(自體)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或有分別無因`無緣.
혹은 원인도 없는 무인(無因)이고 조건도 없는 무연(無緣)이라고 분별하는 이도 있다.
若愚第二緣起,復有分別我爲作者`我爲受者.
만약 두 번째의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에 어리석을 경우에는 자아를 짓는 작자(作者)라 하고,
자아를 받는 수자(受者)라고 하여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니,
ㅡ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자아가 모든 것의 작자(作者), 즉 원인이고 또한 그 과보를 받는 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譬如衆多生盲士夫未曾見象, 復有以象, 說而示之. 彼諸生盲有觸象鼻`有觸其牙`有觸其耳`
有觸其足`有觸其尾`有觸脊梁.諸有問言: 象爲何相?或有說言,象如犂柄
,或說如杵`說如箕`或說如臼`或說如帚,或有說言,象如石山.
비유하자면, 일찍이 코끼리를 보지 못한 여러 선천적인 맹인들이, 어떤 이가 코끼리를 말하면서 그것을 보여주는 경우와 같은 것이니, 그 선천적인 맹인들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그 이빨을 만져보는 이도 있으며, 그 귀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그 다리를 만져보는 이도 있으며, 그 꼬리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등을 만져보는 이도 있어서,
어떤 이가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물으면,
혹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보습자루 같다고 말하고, 혹 절구공이 같다고도 하며, 혹 삼태기 같다고도 하고, 혹 절구 같다고도 하며, 혹 길다란 추(箒)와 같다고도 하고, 혹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산신제를 재낼 때 사용하는 산석(山石) 같다고도 하는 것과 같다.
若不解了此二緣起,無明生盲, 亦復如是, 或有計執自性爲因` 或有計執宿作爲因` 或有計執自在爲因`
或有計執實我爲因` 或有計執無因無緣, 或有計執我爲作者`我爲受者.
阿賴耶識自性`因性及果性等,如所不了象之自性.
만약 이 두 가지의 연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명의 선천적인 맹인이 코끼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이,
혹은 자성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자재천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실체의 자아를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자아를 짓는 작자, 자아를 받는 수자라고 헤아려서 집착하는 것이니,
아뢰야식의 자성(自性)ㆍ인성(因性, 원인)ㆍ과성(果性, 결과)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코끼리의 상(想)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釋曰:或有分別宿作爲因者,謂彼不許有士用因,故成邪執. 爲顯此等, 說生盲喩. 無明生盲者, 謂由無明, 故成生盲.
▷해석한다;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이 원인이라고 분별하는 이도 있다’는 것은, 사람의 공력(功力)을 원인으로 삼는, 사용인(士用因)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삿된 집착을 이루는 것이니, 이를 나타내어 보여주기 위해서 선천적인 맹인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무명의 선천적인 맹인이라는 생맹(生盲)'의 비유는 무명으로 인하여 선천적인 맹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阿賴耶識自性`因性及果性等, 如所不了象之自性者, 謂前所立此識自相, 說名自性,
所立因相說名因性,所立果相說名果性,
‘아뢰야식의 자체의 자성(自性)ㆍ인성(因性, 원인)ㆍ과성(果性, 결과)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코끼리의 상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안립한 이 식의 자상(自相)을 자체의 성품인 자성(自性)이라 하고,
안립된 원인의 인상(因相)을 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이라 말하며,
안립된 결과의 과상(果相)을 결과의 성품인 과성(果性)이라 하는 것이다.
由無明力,不了此等. 於阿賴耶識分別自性緣起,不解了故,執自性等,爲諸法因.
무명의 힘으로 인하여 이것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아뢰야식의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자성 등에 집착해서 제법의 원인이라 하는 것이다.
於第二分別愛`非愛緣起,不解了故,執有我爲作者`受者. 此中因謂阿賴耶識,諸法熏習,
於中持故.果者,卽是阿賴耶識,卽彼諸法,所熏習故.
두 번째인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를 알지 못한 까닭에 자아에 집착하여서 짓는 작자와 받는 수자라고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의 원인(因)은 아뢰야식이니, 제법의 훈습을 그 안에 지니기 때문이며,
결과도 곧 아뢰야식이니, 그 제법에 훈습되기 때문이다.
▶論曰:又若略說, 阿賴耶識, 用異熟識一切種子, 爲其自性,能攝三界一切自體一切趣等.
▷논문; 또한 간략히 말한다면 아뢰야식은 이숙식(異熟識)의 모든 종자를 사용해서 그 자체의 자성(自性)으로 삼고, 능히 삼계(三界)의 모든 것의 자체(自體)와 모든 윤회세계인 일체취(一切趣) 등을 포섭하는 것이다.
▶釋曰:阿賴耶識,用異熟識一切種子,爲自性者,謂得自體異類熟故`諸法種子熏在中故
一切趣等者,謂五趣等. 一切自體者,謂趣趣中同分`異分種種差別.
▷해석한다; ‘아뢰야식이 이숙식의 모든 종자를 사용해서 그 자체의 성품인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체가 다른 부류로서 성숙하기 때문이니, 식의 자체는 원인과 부류를 달리하여 성숙된 과체(果體, 이숙식)이기 까닭이고,
제법의 종자가 그 안에서 훈습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윤회세계인 일체취(一切趣)’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의 5취(五趣)를 말하는 것이며,
‘모든 것의 자체인 일체자체(一切自體)’는 윤회세계인, 취취(趣趣) 가운데에서 같거나 다른 갖가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論曰:此中五頌:
▷논문; 여기에 다섯 게송이 있으니,
“外內不明了, 於二唯世俗, 勝義諸種子, 當知有六種,
외부와 내부는 명료하지 않음과 명료함이니, 이러한 두 가지는
오직 세속과 승의(勝義, 아뢰야식)의 모든 종자이니, 여섯 종류가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섭대승론석 2권의 4에서 해석한것;
여기에서 ‘외부(外)’는 쌀 등을 말하고, ‘내부(內)’는 곧 아뢰야식이다.
‘명료하지 않다는 불명료(不明了)’는 외부 종자가 무기의 뜻임을 말하는 것으로, 외부의 종자는 그 성품이 선(善)도 아니고 불선도 아니므로 불명료라고 말한 것으로, 곧 무기(無記)이다.
‘두 가지에 있어서’는 아뢰야식은 선ㆍ불선의 두 가지 성품에 대해서 명료한 것은, 모두 유기(有記)이나,
혹은 다시 다른 의미로, 잡염과 청정의 두 가지에 대해서 명료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세속이라는 유세속(唯世俗)’은 외부 종자는 오직 세속에 있어서만 종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왜냐하면 그 역시 모두 아뢰야식에서 변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승의(勝義)’는 곧 아뢰야식으로, 이것이 제법의 참다운 종자이기 때문이다.
剎那滅俱有, 恒隨轉應知, 決定待衆緣, 唯能引自果.
찰나에 멸하는 찰나멸(刹那滅)과 함께하는 구유(俱有)는 항상 따라서 유전한다고 알아야 하나니,
결정적인 여러 조건의 중연(衆緣)을 기다렸다가, 오직 자기의 결과를 능히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섭대승론석 2권의 4에서 해석한것;
‘찰나에 멸한다는 찰나멸(剎那滅)’이란, 두 종자가 모두 생겨나는 즉시 반드시 소멸하기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마땅히 상주하는 상법(常法)이 종자의 체가 되지 않으니, 언체나 그 성품이 본래와 같아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찰나멸(剎那滅), 종자는 고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생기 소멸하면서 지속되는 찰나멸(刹那滅)의 뜻(義)이다.
‘함께 한다는 구유(俱有)’는, 종자가 현행하여 심리 인식작용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그 결과가 종자로서 훈습되는 순간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을 말하는 과구유의(果俱有義)이다.
‘항상 따라서 유전한다고 알아야 한다는 항수전응지(恒隨轉應知)’는, 선종자나 악종자는 한 부류로 상속해서 전후 찰나에 성질이 바뀌거나 단멸되지 않는다는 뜻 항수전의(恒隨轉義).
‘결정(決定)’은 선ㆍ악ㆍ무기를 일으킬 힘이 결정되어 있으므로, 선종자에서 악의 결과가 현행된다거나, 악종자에서 선의 결과가 현행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뜻의 성결정의(性決定義)이다.
‘여러 조건의 기다린다는 대중연(待衆緣)'은, 종자는 선ㆍ악 등의 성질이 결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현행되려면 중연(衆緣, 작의作意ㆍ감각기관ㆍ대상 등)과 화합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대중연의(待衆緣義)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이시인과(異時因果) 관계는 이루어질지라도,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동시인과(同時因果) 관계가 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능히 자신의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유능인자과(唯能引自果)는, 종자는 오직 자기 스스로의 결과만을 발생시킨다는 인과자의(引自果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