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야마궁중 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 4
6. 精進林菩薩의 讚歎 [金剛慧세계, 解脫眼佛]
[[精進林보살이란 善現行으로서 반야바라밀문을 주재한다. 반야로 온갖 행을 잘 나타냄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그 명호가 정진림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의 명호가 普眼長者인 것은 처음에는 身命을 구원하고 다음에는 음식을 베풀며, 마지막에는 함께 법을 설해서 하나하나가 근기에 따름을 밝힌 것이니, 이는 지혜의 성취를 밝힌 것이다. 정진림은 수행하는 사람이며, 金剛慧세계는 수행의 법이니 지혜로 번뇌를 타파하는 것의 명칭이 금강임을 밝힌 것이며, 解脫眼佛은 이 지위의 불과이다.]]
[[정진림보살은 부처님의 무차별 평등의 대지혜의 수승함을 드러내었다. 온갖 法은 모양이 없고, 차별이 없으며, 自性도 없으나 다만 분별 때문에 온갖 事相이 생겨난다. 비유하자면 1, 2, 3,…10·100·1000등의 갖가지의 숫자가 있지만 이 것은 모두 本數인 '1'에 1을 더하고, 다시 1을 더해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즉 각각의 숫자는 다른 것 같지만 이 들은 모두 本數인 '1'의 모임인 것이다. 그러면 本數인 '1'은 自性을 가진 고정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本數인 '1' 또한 나머지 數에 의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끝까지 이르신 부처님만이 아신다.]]
(1) 諸法能知 諸法의 법을 능히 알다.
爾時에 精進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諸法無差別을 無有能知者요 唯佛與佛知시니 智慧究竟故로다
爾時에 精進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이때에 정진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살피고 게송으로 말했다.
諸法無差別(제법무차별)을, 모든 법에 차별이 없음은 無有能知者(무유능지자)요. 능히 알 자가 없고
[諸法= 특별한 다른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존재의 근원자리, 無位眞人, 차별 없는 참 사람]
唯佛與佛知(유불여불지)시니,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시니
智慧究竟故(지혜구경고)로다. 지혜가 구경(究竟)했기 때문이로다.
[지혜가 구경= 최상, 마지막이다. 지혜로 아는 경지다. 지혜로 만이 아는 경지다.]
(2) 譬喩釋法 비유로써 법을 해석하다.
如金與金色이 其性無差別인달하야 法非法亦然하야 體性無有異로다
衆生非衆生이 二俱無眞實하니 如是諸法性이 實義俱非有로라
譬如未來世에 無有過去相인달하야 諸法亦如是하야 無有一切相이로다
譬如生滅相이 種種皆非實인달하야 諸法亦復然하야 自性無所有로다
涅槃不可取나 說時有二種하니 諸法亦復然하야 分別有殊異로다
如金與金色(여금여금색)이, 마치 금과 금빛이 其性(기성)이 無差別(무차별)인달하야, 그 성품에 차별이 없듯이
法非法亦然(법비법역연)하야, 법과 비법이 또한 그러하여 體性無有異(체성무유이)로다. 체성이 다르지 않도다.
[체성이 같은 겁니다. 사실 비법이라고 나눌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몽매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온갖 방편의 말= 가설 등이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법이니 비법이니 하는 말이 있을 뿐 같은 말이다.]
衆生非衆生(중생비중생)이, 중생과 비중생이 二俱無眞實(이구무진실)하니, 둘 다 진실이 없듯이
如是諸法性(여시제법성)이, 그렇듯 제법의 성품에도 實義俱非有(진실구비유)로라. 진실도 뜻도 다 없도다.
[중생ㆍ중생하지만,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이다. 금강경에서 우리가 일찍이 알고 있는 내용으로
편의상 중생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 근본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心不及衆生. 마음. 부처. 중생 차별이 없는 하나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譬如未來世(비여미래세)에, 비유컨대 미래 세상에 無有過去相(무유과거상)인달하야, 과거의 모양이 없듯이
[미래 세상에 과거 상이 없습니다. 내일도 아직 없고, 내일에 어제가 있나요? 내일도 없는데 내일에 어제가 있을 리가 있습니까? 이런 설명도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지어내지도 못하는 겁니다.]
諸法亦如是(제법역여시)하야, 모든 법도 그러하여 無有一切相(무유일체상)이로다. 일체의 모양이 없고,
[일체상이 없다.→ 없는 입장, 절대의 본질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譬如生滅相(비여생멸상)이, 마치 생멸상의
種種皆非實(종종개비실)인달하야, 여러가지가 다 진실이 아니듯이
諸法亦復然(제법역부연)하야, 모든 법도 다시 그러하여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로다. 자성=자체 성품이 있지 않도다.[고정불변 하는 自性은 있는 바가 없다.]
[우리 사람도 계속 생멸하고, 호흡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우리 몸을 형성하고 있는 60조 세포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또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모든 별들도 끊임없이 생멸하는 그 생멸변화가 진실이지, 그 현상은 금방 변해버리니까 진실이 없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밤하늘의 별들은 벌써 몇 억 년 전에 소멸해버린 별의 잔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유령의 별이라.” 그럽니다. 태양도 8분 전에 떠올라 온 것을 보게 되는 등 전부 실상이 없다. 즉 생멸 상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는 말입니다.]
涅槃不可取(열반불가취)나, 열반은 가히 취할 수 없으나
說時有二種(설시유이종)하니, 말할 때는 두 가지가 있듯이
[열반은 가히 취할 수 없으나, 이야기할 때는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有餘열반ㆍ無餘열반 = 남음이 있는 열반과 남음이 없는 열반. 이 열반은 소승불교에서 나온 것으로 대승불교에서는 그렇게 높이 사지 않는 용어인데요. 옛날 아라한들을 중심으로 한 초기불교. 또 소승불교는 열반을 최후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번뇌가 사라진 것을 유여열반이라 하고, 번뇌는 사라졌는데 이놈의 몸뚱이가 있으니까 계속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되고, 옷을 입어야 되고, 목욕도 해줘야 되고, 일거리가 아주 잔뜩 남아있습니다. 아무리 번뇌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 육신이 있는 동안은 일거리가 잔뜩 남아있다고요.
육신이 없는 것을 무여열반=남음이 없는 열반을 최고의 열반이라고 하는데, 무슨 그런 불교가 있습니까? 그런 불교설명하려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는가요? “죽은 뒤의 무여열반의 경지가 최고의 경지다.” 이것 이야기해 주려고 우리한테 온 것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지극히 소승적인, 세상이 귀찮고ㆍ인생이 귀찮은 사람들. 아주 소극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용어가 사실 열반입니다. 거기서 有餘열반ㆍ無餘열반=죽은 뒤의 무여열반이 최고열반이라는 소리 까지 나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대승불교, 최상승의 화엄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용어도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諸法亦復然(제법역부연)하야 分別有殊異(분별유수이)로다.
모든 법도 또한 다시 그러하여 분별로 인해 유수이= 다름이 있는 것이로다.[다른 것이 있음을 분별한다.]
(3) 譬喩能知者 비유로 능히 아는 사람.
如依所數物하야 而有於能數라 彼性無所有니 如是了知法이로다
譬如算數法이 增一至無量이라 數法無體性이로대 智慧故差別이로다
譬如諸世間이 劫燒有終盡이나 虛空無損敗인달하야 佛智亦如是로다
如十方衆生이 各取虛空相인달하야 諸佛亦如是하야 世間妄分別이로다
如依所數物(여의소수물)야 마치 셀 물건이 있어야 而有於能數(여의소수물)라. 그것을 셀 수 있듯이
[所數物= 헤아릴 바가 있는, 헤아릴 바의 물건을 의지해서 능히 헤아림이 있다.]
彼性無所有(피성무소유)니, 그 성품이 있지 않나니 [그러나 그 본성, 고정불변 하는 성품은 있는 바가 아니니,]
如是了知法(여시료지법)이로다. 이와 같이 법을 요지할지니라.
[예를 들어 대중을 150명쯤 앉혀놓고 헤아려서 “150명이다.” 그것은 정말 불필요한 假設가설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잠깐 필요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彼性無所有= 그 性은 고정 된 것이 아닌, 있는 바가 없다. 고정 된 성품은 없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대중들의 숫자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譬如算數法(비여산수법)이, 비유컨대 마치 수를 셈하는 법이 [算數法 = 헤아리는 법]
增一至無量(증일지무량)이라. 하나 씩 늘려가 무량한 수에 이르듯이 [하나를 더하고, 또 하나를 더해서 무량에 이른다.]
數法無體性(수법무체성)이로대, 셈법은 체성이 없으되
智慧故(지혜고)로 差別(차별)이로다. 지혜로 인해 차별이 있으며,
[숫자의 법은 고정된 體性이 없습니다. 하나라고 할 수도 있고, 둘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혜가 있기 때문에 하나에서 무량으로, 또 불가설ㆍ불찰 미 진수ㆍ아승지ㆍ무량 아승지. 이런 식으로 차별을 두고 헤아린다는 말입니다.]
譬如諸世間(비여제세간)이 劫燒有終盡(겁소유종진)이나, 마치 모든 세간이 겁 동안 불에 타면 끝내는 다하지만
[劫燒= 겁이 다해서, 겁이 불 탈 때, 이것도 현대 과학자들이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이 전부 불로 생성 소멸하는 겁니다. 불로생기고, 불로 소멸해요. 지구는 아직도 속에서는 불이 끓고 있어서 화산지대에는 지금도 불이 올라오고 있는 곳도 많고 나중에 지구가 파괴될 때 역시 불이 나서 파괴되는 것이 劫燒입니다.]
虛空無損敗(허공무손패)인달하야, 허공은 훼손되지 않듯이 [허공은 無損敗= 깨지고 파괴되는 것이 없다.]
佛智亦如是(불지역여시)로다. 부처님 지혜도 이와 같으며,
[세상은 번뇌에 비유해, 번뇌는 변화가 많지만 깨닫고 나면, 그 깨달음의 지혜는 허공과 같아서 변화가 없습니다. 마치 허공 안에 수많은 별들이 끊임없이 생성ㆍ소멸, 성주괴공하지만 허공은 여여 하듯이 부처의 지혜도 그와 같다. 우리 인간의 짤막한 지식, 상식이 끊임없이 번뇌의 역할로써 생성ㆍ소멸하는 변화를 가져 오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여여하다.]
如十方衆生이 마치 시방의 중생이 各取虛空相(각취허공상)인달하야, 저마다 허공의 모양을 취하듯이
諸佛亦如是(제불역여시)하야, 모든 부처님도 그러하시건만
世間妄分別(세간망분별)이로다. 세간이 망령되이 분별함이로다.
[중생들이 괜히 세간을 분별해서 그렇지 이것은 취할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할 바가 없는 여여히 그대로 있는 것이 부처의 지혜, 부처님의 경계다.]
7. 力林菩薩의 讚歎 [安樂慧세계, 深諦眼佛]
[[力林보살이란 無着行으로서 방편바라밀을 주재한다. 방편으로 세속에 처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그 行流를 같이 하면서도 세간에 처해 집착이 없고 대자비행을 이루는 것이 力林이 됨을 밝힌 것이다. 眞으로서 세속에 들어가 속박에 처하면서도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그 명칭이 역림이 된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의 명호가 無厭足王인 것은 대자비를 행할 때 스스로 몸을 화현해서 모든 不善을 끊어서 반드시 고통으로 다스리는데, 이처럼 실제 중생이 두려움으로 악을 끊게 함으로써 중생을 구하고 보호하면서도 사랑으로 저버리지 않는 것을 무염족이라 칭하는 것이다.
역림보살은 능히 행을 닦는 사람이며, 安樂慧세계는 행하는 바의 법이며, 深諦眼佛은 이 지위의 果이니, 이 지위가 대자비문을 성취하기 때문에 명칭이 안락세계인데, 이는 중생을 안락하게 함에 근거해 명칭을 얻은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가 審諦眼인 것은 중생을 반드시 어떤 법으로 교화할지 살펴서 앎으로써 비로소 조복하기 때문이다.]]
[[역림보살은 부처님의 '相을 여읜 眞智'를 드러내었다. 三世와 五蘊法을 세간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멸한 것을 非세간이라고 한다. 이처럼 諸法은 이름만을 빌린 것이지 자체의 성품이 없다. 따라서 세간이니, 非세간이니 하는 相을 여의어야 實相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과 부처님 법의 모양도 自性이 있는 것이 아니니, 부처님은 바로 이러한 '相을 여읜 이치를 깨친 眞智'를 갖춘 분이다.]]
(1) 世間普明 세간을 널리 밝히다.
爾時에 力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一切衆生界가 皆在三世中하고 三世諸衆生이 悉住五蘊中이로다
諸蘊業爲本이요 諸業心爲本이라 心法猶如幻하니 世間亦如是로다
世間非自作이며 亦復非他作이로대 而其得有成이며 亦復得有壞로다
世間雖有成이며 世間雖有壞나 了達世間者는 此二不應說이로다
爾時에 力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역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살피고 게송으로 말했다.
一切衆生界(일체중생계)가 皆在三世中(개재삼세중)하고, 일체의 중생세계가 다 삼세 가운데 있고
三世諸衆生(삼세제중생)이, 삼세의 모든 중생은
悉住五蘊中(실주오온중)이로다. 다 오온에 머물도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중생들= 우리 모두 그 속에 포함 되는 그들은 또 모두 오온가운데 머물고 있다.
오온= 色 受 想 行 識. 色 = 四大로 된 육신, 우리육신은 內 四大=我의 身은 內 四大지만, 육신 밖의 모든 물건, 汝의 身은 나에게는 外 四大입니다. 교리 상 內 四大ㆍ外 四大로 나눕니다.
그 사대육신과, 受 想 行 識은 마음작용으로 크게 줄여서 몸과 마음입니다. 그것뿐이지요. 모든 중생은 거기에 다 머물러 있는, 그것을 떠나있는 중생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五蘊=오음(五陰)= 무아, 즉 고정불변의 자아[我]가 없음[無]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
산스끄리뜨어로는 pañca-skandha. 『구사론』에 따르면 온(蘊, skandha)은 인과관계에 의해 생멸하는 유위법(有爲法)의 집적[和合聚]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온은 인간의 다섯 종류 유위법의 집적에 불과하며 그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오온의 가르침은 붓다가 심리 현상[心所]을 불변의 자아[我]로 착각하는 부류의 중생을 위해 설한 것이라는 『구사론』의 해석처럼, 오온은 우리의 자아의식을 부단히 변화하는 네 종류의 심리현상으로 해체하는데 초점이 있다.
각 온의 내용은 ①색(色, rūpa, 색온)은 가변적[能變]이며 불가침투적[質礙]인 물질현상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십이처(十二處) 중의 눈, 귀, 코, 혀, 몸 등의 다섯 인식능력인 오근(五根) 및 그것들 각각에 대응하는 색깔·형태, 소리, 냄새, 맛, 감촉 등의 다섯 인식대상인 오경(五境)과 비가시적 물질현상인 무표색(無表色)을 포함한다. ②수(受, vedanā, 수온)는 사유능력인 의근(意根)을 포함한 여섯 인식능력인 육근(六根)이 인식대상과 접촉한 뒤 일어나는 수동적 반응[領納隨觸]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좋아하는 대상, 싫어하는 대상, 좋지도 싫지도 않은 대상에 각각 대응하는 즐거움[樂], 고통[苦], 고통도 즐거움도 아닌 느낌[不苦不樂] 등 세 종류의 정서적 반응이다. ③상(想, saṃjñā, 상온)은 청황(靑黃), 장단(長短), 남녀(男女), 원친(怨親), 고락(苦樂) 등의 구별[相]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작용[能取像]을 의미한다. ④행(行, saṃskārā, 행온)은 마음이 어떤 행위를 하도록[造作] 만드는 의지작용[思, cetanā]을 말한다. ⑤식(識, vijñāna, 식온)은 각 인식대상의 고유한 특징[自相]을 통해 기타 대상과 식별[了別]하는 작용을 말한다.]]
諸蘊(제온)은 業爲本(업위본)이요, 모든 온은 업을 근본으로 삼고
諸業心爲本(제업심위본)이라. 모든 업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으며
[모든 온, 색수상행식은 전부 業으로 근본을 삼고 있으니까 각각 얼굴이 다르고, 음성도 다르고, 말하는 것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차별된 면으로 보면 각각 다른 것이 업 때문입니다. 그럼 그 업은? 諸業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사실은 전부 자기 마음의 표현입니다. 감나무의 가지는 그대로 전부 감나무일 뿐입니다. 그와 같이 諸業은 心爲本이라. 마음이 근본이다.
우리가 나눠서 보면 색수상행식, 내 사대니 외 사대, 수상행식, 마음작용이라 하지만, 그것도 전부 역시 내 마음의 가지들이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의 가지밖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전부 내 마음영역 안에 있는 겁니다. 만약 내 마음영역 밖에 있다면 그것은 나하고 상관없습니다. 내 마음영역 밖에 있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나하고는 관계없습니다.
나하고 관계있는 것은 내 마음 영역 안에 있는 것만 관계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만들었다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만든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 영역 안에 있는 것입니다.]
心法猶如幻(심법유여환)하니, 마음 법은 마치 환상과 같고
世間亦如是(세간역여시)로다. 세간도 또한 이와 같도다.[마음도 그렇고, 세간법도 또한 그렇다.]
世間非自作(세간비자작)이며, 세간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요
亦復非他作(역부비타작)이로대, 또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로되
[세간은 스스로 짓는 것도 아니고 또 누가 만드는 것도 아니라 사실은 저절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이다.ㆍ누구 때문이라 하지만 사실 전부 자신 때문입니다]
而其得有成(이기득유성)이며, 그것이 이루어짐이 있고
亦復得有壞(역부득유괴)로다. 또한 무너짐도 있도다.
[세간의 이루어짐이 있음을 얻으면 또한 무너짐도 얻는다. →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生老病死 안하는 사람 없고, 또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成住壞空ㆍ生住異滅ㆍ계절은 춘하추동이고, 새벽이 있으면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오후가 있고, 초저녁이 있고, 한 밤중이 있고, 또 자정을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成이 있고 壞가 있다는 말입니다.]
世間雖有成(세간수유성)이며, 세간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세간이 비록 成= 이루어짐이 있으며,
世間雖有壞(세간수유괴)나, 세간이 비록 무너지기도 하나
了達世間者(요달세간자)는, 세간을 요달한 이는
此二不應說(차이불응설)이로다. 이 둘에 대하여 말하지 않노라.
[세간을 了達= 꿰뚫고 아는 사람, 세간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성괴= 成住壞空, 生老病死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왜? 저절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말이 필요 없습니다.]
(2) 諸法
云何爲世間이며 云何非世間고 世間非世間이 但是名差別이로다
三世五蘊法은 說名爲世間이요 彼滅非世間이니 如是但假名이로다
云何說諸蘊이며 諸蘊有何性고 蘊性不可滅일새 是故說無生이로다
分別此諸蘊인댄 其性本空寂이라 空故不可滅이니 此是無生義로다
衆生旣如是인댄 諸佛亦復然이니 佛及諸佛法이 自性無所有로다
云何爲世間(운하위세간)이며, 어떤 것을 세간이라 하고
云何非世間(운하비세간)고? 어떤 것이 세간이 아닌가
世間과 非世間이 但是名差別(단시명차별)이로다. 세간과 세간 아님이 단지 이름이 다를 뿐이로다.
[다만 이름이 차별할 뿐이로다.]
三世五蘊法(삼세오온법)은, 삼세와 오온(五蘊)법을
說名爲世間(설명위세간)이요, 세간이라 이름하여 말하는 것이요[이름을 말하자면 세간이 되고]
彼滅非世間(피멸비세간)이니, 그것이 없어지면 세간이 아닌 것이니 [그 三世五蘊法이 멸하면 세간이 아니니]
如是但假名(여시단가명)이로다. 이처럼 다만 거짓 이름일 뿐이로다. [거짓 이름만 있을 뿐이다.]
云何說諸蘊(운하설제온)이며, 어떤 것을 말하여 오온이라 하고 [무엇을 여러 가지 蘊이라고 말하며,]
諸蘊有何性(제온유하성)고? 오온은 어떤 성품을 지녔는가
[모든 蘊들= 色 受 想 行 識= 몸과 마음의 작용들은 어떤 고정불변 하는 성품이 있느냐?]
蘊性不可滅(온성불가멸)일새. 온의 성품은 없앨 수 없기에
是故로 說無生(설무생)이로다. 그 때문에 무생이라 말하도다,
[無生이라 한다 → 역연히 현상으로써는 생멸이 있지만, 본래 생멸이 없는, 空한 이치, 공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分別此諸蘊(분별차제온)인댄, 이 오온을 분별해 보면
其性本空寂(기성본공적)이라. 그 성품이 본래 공적하여
[그 성품은 본래 공적한 것이다. 우리보다 몇 억년을 더 오래 사는 지구도 마찬가지고, 사람도 마찬가지고, 하루살이도 마찬가지로 其性本空寂= 그 본성은 본래 공적한 것입니다. 공적한 데서 인연에 의해서 이러고저러고 삶을 펼치다가 결국 공적한 데로 돌아가는,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모든 법은 본래로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것이 본고향입니다.]
空故(공고)로 不可滅(불가멸)이니, 공하기에 없앨 수 없는 것이니
此是無生義(차시무생의)로다. 이것이 생김이 없다는 이치로다.
[공의 입장에서는 생멸이 본래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멸 변화 속에서 삶을 엮어가지만, 그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전부 空이고 寂滅입니다. 그러면 生도 없고 滅도 없어서 生死涅槃相共和=생사와 열반이 하나입니다.]
衆生旣如是(중생기여시)인댄→ 중생기여신댄, 중생이 기왕 이러할진대
諸佛亦復然(제불역부연)이니, 모든 부처님 또한 그러하여
佛及諸佛法(불급제불법)이,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 법도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로다. 자성이 있지 않음이로다.
[인생이 하찮아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위대한 부처님 삶도 존재 하는 것이 아닙니다. 佛과 佛法도 自性無所有=그 자성은 있는 바가 없으니 하루살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실 하루살이나 부처님이나 그 원리는 똑 같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원리에 해당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실체화하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금방 없어질 것을 뻔히 알고, 금방 4년 있다가 내놓을 자리 뻔히 알면서도 그 4년 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이 화엄경을 펼쳐놓고 세상사 돌아가는 것을 비추어 보면, 참~ 우습기 그지없고 하찮기 그지없는 겁니다.]
(3) 利益
能知此諸法이 如實不顚倒하면 一切知見人이 常現在其前이로다
能知此諸法(능지차제법)이, 이 모든 법이 如實不顚倒(여실불전도)하면, 여실하여 전도되지 않은 줄을 알면
[능히 이 모든 법들이 사실과 같아서 顚倒되지 아니함을 알면 뒤바뀌지 않는다.
遠離顚倒夢想전도몽상을 멀리 떠나버린다.]
一切知見人이 일체지견인이 [一切知見人=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 부처님.]
常現在其前(상현재기전)이로다. 항상 그 앞에 보이리라.
[부처님이 내 앞에 있는 것을 항상 在其前=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부처라야 부처를 보는 것으로 내가 부처를 보면 나는 이미 부처지요. 부처를 본다는 것은 우리 아는 만치 부처를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불상보고 부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인 과거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우리 마음만 가지고 부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 모든 것을 합해서 부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자기 상식만치만 부처라고 하는 것이지요. 완전한 부처를 보는 사람은 자기가 이미 완전한 부처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