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成唯識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9권 3

Skunky 2025. 2. 8. 09:01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3

 

復有二種,謂利自他,所修勝行隨意樂力,一切皆通自他利行。依別相說,六到彼岸、菩提分等自利行攝,四種攝事、四無量等,一切皆是利他行攝。如是等行差別無邊,皆是此中所修勝行。此位二障雖未伏除,修勝行時有三退屈,而能三事練磨其心,於所證修勇猛不退。

다시  종류가 있으니, 자신을 이롭게 하는 자리(自利)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이니,

뛰어난 수행의 승행(勝行)을 닦는 의지의 즐거움인 의락(意樂)의 따라 일체 모두가 자리행과 이타행에 통하는 것이며, 

개별적인 별상(別相) 의해서 말한다면, 6바라밀과 보리분(菩提分, 37조도품) 등은 자리행에 속하며,

4섭법(四攝法)과 4무량심(四無量心) 등은 모두 이타행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와 같은 등의 수행의 차이가 수없이 많으나, 이 모두가  지위에서 닦는 뛰어난 수행의 수승행(修勝行)인 것이다. 

 지위에서는 이장(二障)을 아직 조복하여 제거하지 못하였므로 승행(勝行)을 닦   가지의 퇴굴심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삼퇴굴(三退屈)로써  마음을 연마함으로써 닦고 증득한 것에 대해서 용맹하게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37 조도품(助道品), 4념주(念住)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

4섭법(攝法)은 보살이 중생을 불도(佛道)로 인도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서, 보시섭(布施攝)ㆍ애어섭(愛語攝)ㆍ이행섭(利行攝)ㆍ동사섭(同事攝)이 있다.

4무량심(四無量心)은 자무량심(慈無量心)ㆍ비무량심(悲無量心)ㆍ희무량심(喜無量心)ㆍ사무량심(拾無量心)이 있다.


一聞無上正等菩提廣大深遠心便退屈,引他已證大菩提者練磨自心,勇猛不退;

첫째,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는 광대하고 심원하다는 말을 듣고서 문득 마음이 퇴굴할 때, 다른 이가 이미 대보리를 증득한 것을 상기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연마하여서 용맹심으로써 퇴전하지 않는 것이며, 


二聞施等波羅蜜多甚難可修心便退屈,省己意樂能修施等練磨自心,勇猛不退;

둘째, 보시  바라밀행은 닦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서 문득 마음이 퇴굴할 때, 스스로의 의지로 보시 등을 닦고자 즐거워한 것을 회상하여서 스스로의 마음을 능히 연마하여 용맹심으로써 퇴전하지 않는 것이며, 


三聞諸佛圓滿轉依極難可證心便退屈,引他麤善況己妙因練磨自心,勇猛不退。

셋째, 부처님의 원만한 전의(轉依, 전식득지) 증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서 문득 마음이 퇴굴할 때, 다른 이의 드러나는 선행, 즉 보시 등을 행할 때에 드러나는 장애가 있는 유장선(有障善) 상기하면서 스스로 승묘한 수행을 비교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연마하여 용맹으로써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전의(轉依, 전식득지)란 유식학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원리를 전식득지(轉識得智), 즉 현상계의 허망한 식(識)을 진여의 무분별지(無分別智)로 전환시키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전식득지는 전의(轉依)로써 이루어지며,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에서

‘전(轉)’은 ‘전사전득(轉捨轉得)’, 즉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를 전사(轉捨)하고 열반과 보리(菩提)를 전득(轉得)하는 것이며,

‘의(依)’는 전사전득(轉捨轉得)의 의지처인 소의(所依), 즉 의타기성인 8식 특히 7식의 근본적인 소의(所依)이며 지종의(持種依)인 제8식을 가리킨다.

자기 존재의 기체(基體)를 허망한 상태인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부터 진실한 상태인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질적(質的)인 전환을 함으로써 8식이 네 가지 지혜로 전환되는 것으로,

아뢰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말나식이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의식이 묘관찰지(妙觀察智)로, 5식이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되는 것이다.

 

由斯三事練磨其心堅固熾然修諸勝行。次加行位其相云何?頌曰:

이러한 삼사(三事) 의해  마음을 연마하여 여러 뛰어난 수행의 승행(勝行)을 견고하고 치열하게 닦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행위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유십송'의 27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ㅡ5( 2위인 가행위(加行位) 관하여 해설한다.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현전에 작은 사물인 소물(少物)을 건립하여서 유식성(唯識性)이라 말한다면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 즉 진여가 아니라 심소변(心所變)의 상(相)으로서 대상유소득(帶相有所得)의 관심(觀心)이기 때문에

진실로 유식성(唯識性)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ㅡ작은 사물인 소물(少物) ‘불원만(不圓滿’의 뜻으로서, 진여와 비슷한 () 의미한다. 

진여는 주변법계(周遍法界)하는 묘체(妙體)이나, 가행지(加行智) 변상(變相) () 협소하고 불원만하므로  체가 본체와 같지 않음을 ‘소물(少物)’이라 표현한 것이다.

 

論曰:菩薩先於初無數劫善備福德智慧資糧,順解脫分旣圓滿已。

爲入見道住唯識性,復修加行伏除二取,謂煖、頂、忍、世第一法。

▷논하여 말한다; 보살은 먼저 처음의 무수겁(無數劫) 동안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비축하여 순해탈분을 이미 원만하게 마쳤으나, 견도에 들어가서 유식성에 안주하기 위하여 다시 가행을 닦아서 2취(取)를 조복하고 제거하나니, 곧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을 말하는 것이다. 

ㅡ가행위에 관한  게송의 장행석(長行釋) 10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에서, 먼저  지위의 연유를 나타낸, 제일현위소유(第一顯位所有)이다.

 

가행위(加行位)는 초아승기겁(初阿僧祗劫)의 만심(滿心)에서 닦아 익히는 지위로써, 곧 제10회 회향에서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네 가지 선근(善根)을 닦는 것이다.


此四摠名順決擇分,順趣眞實決擇分故。近見道故立加行名,非前資糧無加行義。

4 가지를 총체적으로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 이름하나니, 참다운 결택분에 수순해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견도에 가까우므로 가행위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나, 이전의 자량위에서의 가행의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위의 총체적인 명칭을 해설한, 제이석위총명(第二釋位總名)으로, 

앞의 자량위(資糧位) () 배가해서 행하는 면에 있어서는 가행(加行)이라 이름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견도(見道) 가까운 측면에서 오직  지위만을 가행위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煖等四法依四尋思、四如實智初後位立。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 등의 4 가지 법은  가지 심사관인 사심사관(四尋思觀)과  가지 여실지관인 사여실지관(四如實智觀)의 처음과 나중의 지위에 의거해서 건립하나니, 

ㅡ가행위에서 닦는 법을 밝힌, 제삼출위소수법(第三出位所受法).

 

四尋思者,尋思名、義、自性、差別,假有實無。

 가지의 사심사관(四尋思觀)은 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 가유(假有)로서 실제는 비존재라고 추구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ㅡ명() 능전(能詮) 명칭ㆍ언어이고, () 소전(所詮) 대상을 말한다. 

 명칭과 대상에 각각 자성과 차별이 있으며,

자성(自性) 법체(法體) 자상(自相),  색법과 심법 등의 체성(體性)이고,

차별은  체성의 무상(無常)ㆍ고() 등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은 취하는 모든 인식대상인 소취경(所取境)이며, 이 4 가지에 일체법을 포함하는 것이다.

 

如實遍知此四離識及識非有,名如實智。

  가지도 식(識)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고, 식(識)도 아니고 실재도 아님을 사실 그대로 두루 아는 것을 여실지(如實智)라고 이름하나니, 

ㅡ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 소취(所取)의 네 가지 법이 식(識)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깊이 인정하는 인인(印忍)할 뿐만 아니라, 능취() 식(識)도 역시 비실재라고 인가(忍可)하는 것을 여실지(如實智) 이름한다.

 

名、義相異,故別尋求,二二相同,故合思察。

명(名)ㆍ의(義, 대상)은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추구하며, 명(名)과 의(義, 대상)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은 상이 같기 때문에 함께 사유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ㅡ명(名)과 의(義, 대상) 이상관(離相觀)이고, 자성과 차별은 합상관(合相觀)이다.


依明得定發下尋思觀無所取,立爲煖位,謂此位中創觀所取名等四法,
皆自心變,假施設有,

實不可得。初獲慧日前行相故立明得名,卽此所獲道火前相,故亦名煖。

명득정(明得定)에 의지하여 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을 일으켜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비실재라고 관찰하는 것을 난위(煖位)라고 건립하나니,

 단계에서는 처음으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 등의  가지 법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이 전변된 것으로서,

가정적으로 시설해서 존재하는 유(有)이며, 실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며,

처음으로 지혜의 태양이 현전에서 작용하는 행상(行相)을 얻기 때문에 명득정(明得定)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니, 여기에서는 도(道)를 획득하는 불꽃이 현전해 있는 상이기 때문에 난위(煖位, 명득정)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ㅡ네 가지 선근(善根) 명칭을 해설한, 제사석사지명(第四釋四地名).

 

명득정(明得定), 무루지혜의 태양인 혜일(慧日)을 광명과 같은 지혜의 명(明)이라 이름하며, 난위(煖位)에서 처음으로 이 무루지혜의 태양이 현전(現前)에서 작용하는 상을 얻기 때문에, 광명과 같은 지혜를 얻는 선정의 명득정(明得定)이라 이름한다.


依明增定,發上尋思觀無所取,立爲頂位,謂此位中重觀所取名等四法,皆自心變,假施設有,

實不可得,明相轉盛,故名明增。尋思位極,故復名頂。

명증정(明增定)에 의지하여 상품(上品)의 심사관(尋思觀)을 일으켜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비실재(無)라고 관찰함을 정위(頂位)라고 건립하나니,

 단계에서 거듭하여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 등의  가지 법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이 전변한 것으로서 가정적으로 시설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실로 실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라고 관찰한다. 

광명과 같은 지혜인 명(明)의 상이 점차 증성하기 때문에 명증정(明增定)이라 이름하며,

심사관 단계의 끝이기 때문에 또한 정위(頂位, 명증정) 이름하는 것이다.


依印順定,發下如實智,於無所取決定印持,無能取中亦順樂忍。旣無實境離能取識,寧有實識離所取境?所取、能取相待立故。印順忍時摠立爲忍,印前順後立印順名,忍境識空,故亦名忍。

인순정(印順定)에 의지하여 하품을 여실 그대로 아는 지혜인 여실지(如實智)를 일으켜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비실재(無)임을 결정적으로 인가하여 지니는 인지(印持)하고,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도 비실재인 이치에 수순해서 즐겁게 인가하나니,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의 식(識)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대상인 실경(實境)이란 없거늘, 어찌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의 식(識)이 있겠는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는 서로 배대하여 건립하기 때문이다. 

인가(印可)와 수순(隨順)함을 인정하는 시기를 총체로 인위(忍位)라고 건립하나니,

이전의 하품의 하인(下忍), 즉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비실재(無)라고 깊이 인정하는 인인(印忍) 인가하고,

이후의 상품의 상인(上忍), 즉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인 식(識)도 비실재인 무(無)라고 인순(印順) 수순하므로 인순정(印順定)이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으로,

대상(境)도 식(識)도 공(空)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또한 인위(忍位, 인순정)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依無閒定發上如實智,印二取空,立世第一法。謂前上忍唯印能取空,

今世第一法二空雙印,從此無閒必入見道,故立無閒名。異生法中此最勝故,名世第一法。

무간정(無間定)에 의지하여 상품의 여실지를 일으켜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의 공(空)함을 인정하는 것을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건립하나니,

이전의 상인(上忍)에서는 오직 인식 주체인 능취(能取)가 공한 것만을 인가하였으나, 지금의 세제일법에서는  가지 공을 다같이 인가하는 것이니, 여기서부터 바로 다음 찰나에 반드시 견도(見道)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간정이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이며, 중생의  중에서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세제일법(世第一法, 무간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如是煖、頂依能取識觀所取空,下忍起時印境空相,中忍轉位於能取識如境是空順樂忍可,

上忍起位印能取空,世第一法雙印空相。

이상과 같이 난위(煖位)와 정위(頂位)에서의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의 식에 의지해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공(空)이라고 관찰하나니,

하품의 인가인 하인(下忍)이 일어나는 때에는 대상(境)의 공한 공상(空相) 인가하며,

중품의 인가인 중인(中忍)이 전전하는 단계에서는 인식 주체인 능취(能取)의 식에 대해서 대상과 같이 공한 것으로 수순하여 인가함을 즐거워하며,

상품의 인가인 상인(上忍)이 일어나는 단계에서는 인식 주체인 능취(能取)가 공함을 인가하나니,

세제일법에서는 겹으로 공의 양상을 인가하는 쌍인공상(雙印空相)인 것이다.


皆帶相故未能證實,故說菩薩此四位中猶於現前安立少物,謂是唯識眞勝義性。

以彼空、有二相未除,帶相觀心有所得故,非實安住眞唯識理,彼相滅已方實安住。依如是義故有頌言:

그런데 모두가 현전에 공(空)이라는 상을 띄고 있 때문에 아직 능히 참다운 성품을 증득할  없으므로 보살이   가지 단계인 사위(四位) 중에서 아직 현전에 작은 사물인 소물(少物)을 안립해서 이것이 유식의 참다운 승의(勝義)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공(空)과 유(有, 실재)의  가지 상, 즉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을 없애지 못하였으므로 가지고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기 때문에, 진실로 참다운 유식의 도리인 유식리(唯識理)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상을 없애고 나서 비로소 참으로 안주하게 되나니, 이상과 같은 뜻에 의거하기 때문에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륵(彌勒의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게송으로, 무착(無着) '섭대승론(攝大乘論)' 인용되어 있다.


菩薩於定位 觀影唯是心, 義相旣滅除 審觀唯自想。

보살은 정위(定位)에서 영상(影)은 오직 마음뿐인 유심(唯心)이라고 관찰하나니, 

ㅡ마음 내부의 대상인 영상(影像) 관찰하여서,  영상은 오직 내부의 마음일 뿐, 외부에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삼는 것으로, 이것은 난위(煖位)이다.

 

대상의 표상(변계소집성인 마음 밖의 대상의 상)을 이미 소멸시켜 멸제(滅除)하고

확실하게 오직 스스로 표상일 뿐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오직 내부의 마음만이 존재한다고 관찰한다)

 

정위(定位)는 가행위가 산위(散位)가 아님을 나타내며, 자량위는 외문(外門)에 많이 안주하지만, 가행위에서는 대부분 선정의 내문(內門)에서 수행하기 때문이다.


如是住內心 知所取非有, 次能取亦無 後觸無所得。

이와 같이 내심(內心)에 안주하여,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는 실재가 아닌 비유(非有)라는 것을 알며, 

다음에 인식주체인 능취(能取) 역시도 비실재인 무(無)라는 것을 알며

그러한 다음에야 무소득(無所得)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