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成唯識論) 제 8권 3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8권 3
→분별을 일으키는 양상으로, '삼십송' 제18게송 중 제4句를 자세하게 해설한, 연생분별(緣生分別)이며,
이 두 가지 중에서 처음에 현행을 일으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먼저 종자생(種子生)을 판별한다.
本識中種容作三緣,生現分別,除等無閒,謂各親種是彼因緣,爲所緣緣於能緣者
근본식 중의 종자는 인연, 소연연, 증상연의 삼연(三緣)이 되어 현행의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 인정되나, 등무간연을 제외하며, 각각 가까운 종자는 그것의 인연이 된다.
소연연이 되는 것은 능히 반연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능히 종자를 반연하는 심왕ㆍ심소법에 대해서, 종자를 그것의 소연연(所緣緣)으로 삼는다.
若種於彼,有能助力或不障㝵,是增上緣。生淨現行應知亦爾。現起分別展轉相望容作三緣,無因緣故。
만약 종자가 그것에 대해서 능히 돕는 힘이 있거나 혹은 장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증상연이 되며, 청정의 현행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며,
현행의 분별은 전전하여 서로 배대하는데 세 가지 연이 되는 것이 인정되나니,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 현행생(現行生)을 판별한다. 현행은 직접 자체를 판별하지 않으므로 인연이 없는 것이다.
謂有情類自他展轉容作二緣,除等無閒。
유정의 무리는 자신과 타인으로 전전하여 소연연(所緣緣)과 증상연(增上緣)의 두 가지 연(緣)이 되나, 등무간연은 제외한다.
→자신과 남(他)의 몸으로 서로 배대하여 소연연과 증상연이 되고, 등무간연은 오직 각각 하나의 식(識)에만 국한되므로 제외된다.
自八識聚展轉相望,定有增上緣,必無等無閒,所緣緣義或無或有。
자신의 8식의 모임인 자팔식취(自八識聚)는 전전하여 서로 배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증상연이 있으나, 등무간연은 필히 없으며, 소연연의 뜻은 혹 없기도 하고 혹 있기도 하다.
팔식취(八識聚), 8식 하나하나와 아울러 그 상응법(심소) 등의 견분과 상분 등을 총체적으로 팔식취라 한다.
八於七有,七於八無,餘七非八所仗質故,第七於六五無一有,餘六於彼一切皆無,第六於五無,餘五於彼有,五識唯託第八相故。
제8식은 7식에 대해서 소연연의 뜻이 있으나, 7식은 제8식에 대해서 없으니, 나머지 7식은 제8식이 의지하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며,
제7식을 6식에 대해서 말한다면, 5식에는 없으나 제6식에는 있으며,
나머지 6식은 그 제7식에 대해서 일체가 모두 없으며,
제6식은 5식에 대해서 없으나, 나머지 5식은 제 6식에 대해서 있으니, 5식은 오직 제8식의 상분에만 의탁하기 때문이다.
自類前後第六容三,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의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에 관하여 말하자면,
→자신의 8식의 하나하나의 자기 부류인 자류(自類)를 이전 찰나와 이후 찰나로 서로 배대한 전후상망(前後相望)을 논한다.
제6식에는 세 가지가 있는 것이 인정되나,
→이전 찰나의 제6식은 이후 찰나의 제6식에 대하여 소연연ㆍ등무간연ㆍ증상연의 삼연(三緣)이 되는 것으로, 인연(因緣)을 제외한 것은 현행을 상망(相望)하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餘除所緣,取現境故,
나머지 7식에서는 소연연을 제외하나니, 현재의 대상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제6식을 제외한 나머지 7식에는 소연연(所緣緣)을 제외하나니, 이 7식은 이전 찰나의 생각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인연이 없다.
許五後見緣前相者,五七前後亦有三緣,前七於八所緣容有,能熏成彼相、見種故。
5식의 이후 찰나의 견분이 이전 찰나의 상분을 인식대상으로 한다고 진나(陳那, Dignāga)의 '관소연연론(觀所緣緣論)'에서인정하므로, 전5식과 제7식의 이전 찰나의 것이 이후 찰나에 대해서 역시 인연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연(緣)이 있다고 하였으니,
7식은 제8식에 대해서 소연연이 능히 그 제 8식의 상분ㆍ견분의 종자를 훈습하는 일이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同聚異體展轉相望,唯有增上。諸相應法所仗質同,不相緣故。或依見分說不相緣,依相分說有相緣義。謂諸相分互爲質起,如識中種爲觸等相質。不爾,無色彼應無境故,設許變色亦定緣種,勿見分境不同質故。
같은 모임인 동취(同聚)의 다른 자체가 전전하여 서로 배대함에는 오직 증상연이 있으니, 모든 상응법(심소)은 의지하는 본질이 같으므로 서로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견분에 의해서는 서로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상분에 의해서는 서로 반연하는 뜻이 있다고 말하나니, 모든 상분이 서로 본질이 되어 일어나므로, 식(識) 중의 종자를 촉(觸)심소 등의 상분의 본질로 하는 것과 같으니,
그렇지 않다면 무색계에서 촉(觸) 등의 5변행심소(遍行心所) 등이 대상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사 무색계의 제8의 심왕ㆍ심소가 색법을 변현한다고 허용할지라도 반드시 종자만을 반연하나, 견분의 대상이 같은 본질인 동질(同質)이 아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同體相分爲見二緣,見分於彼但有增上,見與自證相望亦爾。
자체가 같은 동체(同體)의 상분은 견분의 소연연과 증상연의 연(緣)이 되나니,
견분은 그 상분에 대해서 오직 증상연만 있을 뿐이며, 견분이 자증분을 서로 배대하여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견분은 자증분에 대해서 소연연과 증상연이 되고, 자증분은 견분에 대해서 오직 증상연만 되고,
또한 견분은 증자증분에 대해서는 오직 증상연만 된다.
餘二展轉俱作二緣,此中不依種相分說,但說現起互爲緣故。淨八識聚自、他展轉皆有所緣,能遍緣故。唯除見分非相所緣,相分理無能緣用故。
나머지 두 가지인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전전하여 소연연과 증상연이 되나니, 여기에서는 종자의 상분에 의거해서 말하지 않고 다만 현행이 서로 연(緣)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정한 제8식의 모임인 정팔식취(淨八識聚)는 자신과 타인으로 전전하여 모두 소연연이 있으니, 능히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나, 오직 견분이 상분의 소연연이 아닌 것만을 제외하나, 상분은 이치에는 능연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旣現分別緣種現生,種亦理應緣現種起,現種於種能作幾緣?
▷묻겠습니다; 이미 현행의 분별이 종자ㆍ현행을 반연하여 일어남을 말하였습니다.
종자도 이치가 역시 현행ㆍ종자를 반연하여 일어나야 하나니, 현행ㆍ종자는 종자에 대해서 능히 몇 가지의 연이 되는 것입니까?
→종자를 일으키는 것을 밝힌다.
種必不由中二緣起,待心、心所立彼二故。現於親種具作二緣,與非親種但爲增上,
種望親種亦具二緣,於非親種亦但增上。
▷답한다; 종자는 반드시 중간의 두 가지 연(緣)인 등무간연과 소연연에 의거해서는 일어나지 않나니, 심왕ㆍ심소를 기다려서 그 두 가지를 건립하기 때문이다.
현행은 직접 훈습한 종자인 친종(親種)에 대해서는 모두 인연과 증상연의 두 가지 연이 되며,
직접 훈습하지 않은 종자인 비친종(非親種)에 대해서는 다만 증상연이 될 뿐이다.
종자를 자신이 직접 훈습한 친종(親種)에 배대하여 역시 두 가지 연을 갖추나니,
자신이 직접 훈습하지 않은 종자인 비친종(非親種)에 대해서는 다만 증상연이 될 뿐이다.
依斯內識互爲緣起,分別因果理教皆成,所執外緣設有無用,況違理教何固執爲?
이러한 내부의 식이 서로 연(緣)이 되어 일어나는 것에 의거해서, 분별(심왕ㆍ심소)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이 모두 성립되는 것이다.
집착된 외부대상인 소집외연(所執外緣)이 설사 있다고 할지라도 작용이 없거늘,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하면서 고집하는 것이 무엇에 쓸모가 있겠는가?
→총체적으로 결론 맺으면서 소승에서 주장하는 바의 마음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대상인 심외연(心外緣)을 논파하였다.
雖分別言,摠顯三界心及心所,而隨勝者諸聖教中多門顯示,或說爲二、三、四、五等,如餘論中具廣分別。
‘분별(分別)’이라는 말은 총체적으로 삼계의 심왕과 심소를 나타내지만, 수승한 것을 따라서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서 여러 부문으로써 나타내 보이고 있으니, 어떤 곳에서 둘ㆍ셋ㆍ넷ㆍ다섯 가지 등으로 말하나니, 본 논서의 3성(性) 부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다른 논서, 즉 '유가사지론'의 제38권ㆍ제73권ㆍ제74권 등에서 갖추어 자세하게 분별한 것과 같다.
雖有內識,而無外緣,由何有情生死相續?頌曰:
비록 내부의 식, 즉 내식(內識)만이 있다고 말하지만, 외부의 대상인 외연(外緣)이 없다면, 무엇에 의거해서 유정이 생사에 상속하겠는가? '삼십송'의 제19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모든 업습기(業習氣)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2취(二取)의 습기와 함께함으로써
이전에 생겨난 과보(果報)인 이숙(異熟)이 이미 멸한다면,
다시 다른 이숙(후에 생겨나는 과보)을 생겨나게 한다네.
→유정상속(有情相續)의 연유를 밝힌 것으로, 유정의 상속에는 내심(內心)의 종자를 인(因)으로 하고 연(緣)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심외실경(心外實境)이 없을지라도 그 상속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는 것이다.
이숙(異熟)은 vipāka의 번역으로 과보라는 뜻으로, 이숙이라는 의미는 선 또는 악의 업인(業因)에 의해서 이것과 성질이 다른 무기(無記), 즉 비선비악(非善非惡)인 결과를 산출하는 것을 말한다.
論曰:諸業謂福、非福、不動,卽有漏善、不善思業。
▷논하여 말한다.
‘모든 업, 제업(諸業)’이란, 복(福, 낙과)과 복이 아닌 비복(非福, 고과)과 부동(不動)을 말하는 것으로, 곧 유루의 선ㆍ불선의 의지로 짓는 사업(思業)인 것이다.
→복(福), 욕계의 선업으로서 즐거움의 과보인 낙과(樂果)를 초감할 만한 것.
→비복(非福), 욕계의 악업으로서 괴로움의 과보인 고과(苦果)를 초감할 만한 것.
→부동(不動), 색계와 무색계에 속하는 선정의 의업(意業).
業之眷屬亦立業名,同招引滿異熟果故。
업의 권속도 역시 업(業)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은 인업(引業)과 만업(滿業)의 이숙과를 초감하기 때문이다.
此雖纔起無閒卽滅,無義能招當異熟果。而熏本識起自功能,卽此功能說爲習氣,是業氣分熏習所成,簡曾、現業,故名習氣。如是習氣展轉相續,至成熟時招異熟果,此顯當果勝增上緣。
이 현행의 업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다음 찰나에 멸하여 능히 미래의 이숙과(異熟果)를 초감할 만한 뜻이 없지만, 근본식에서 자신을 일으킬 만한 세력의 자공능(自功能)을 훈습하나니, 곧 이 세력인 공능(功能)을 습기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업의 기분(氣分)으로, 훈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전의 업과 현재의 업을 가려내기 때문에 습기라 이름하며,
이와 같이 습기가 전전하고 상속하여서 성숙한 때에 이르러서는 이숙과를 초감하나니,
이것은 미래 과보의 뛰어난 증상연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전의 업이란, 설일체유부에서 과거에 체(體)가 있다고 하는 증업(曾業)을 말하는 것이며,
현재의 업이란, 순세외도(順世外道)에서 일체의 과보는 오직 현재의 업이 얻는 것으로서, 지을 때 곧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相見、名色、心及心所、本末,彼取皆二取攝。彼所熏發,
親能生彼本識上功能,名二取習氣,此顯來世異熟果心及彼相應諸因緣種。
상분과 견분, 정신적인 요소인 명(名),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 심왕과 심소, 근본 제 8식과 지말의 제 7식 및 여덟 가지에 의한 인식인 팔취(八取)은 모두 2취(二取)에 포함되나니,
그 팔취(八取)에 훈습되고 능히 그것을 직접 일으키며,
근본식에 있는 공능(功能)을 2취(二取)2취 습기(習氣)라고 이름하나니, 이 이취습기(二取習氣)는 미래세의 이숙과(異熟果)의 심왕과 그 상응법(심소)의 모든 인연종자를 나타내는 것이다.
→ 이취습기(二取習氣)는 명언종자(名言種子)로서 업종자와 다른 것이다.
俱謂業種二取種俱,是疏親緣互相助義,業招生顯,故頌先說。
제19게송에서 ‘함께함의 구(俱)’란, 업종자와 2취종자(二取種子)와 함께함으로써 소소연연(업종자)과 친소연연(2취 종자)으로서 서로 돕는다는 뜻이며,
‘업(業)’은 태어남의 생(生)을 초감하는 작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게송에서 먼저 말한 것이다.
前異熟者,謂前前生業異熟果。餘異熟者,謂後後生業異熟果。雖二取種受果無窮,而業習氣受果有盡,由異熟果性別難招,等流、增上性同易感。
게송에서 ‘이전의 이숙인 전이숙(前異熟)’이라 한 것은 전전생(前前生)의 업의 이숙과(異熟果)를 말하는 것이며,
‘다른 이숙의 여이숙(餘異熟)’이라는 것은 다음다음 생인 후후생(後後生)의 업의 이숙과를 말하는 것이며,
2취종자(二取種子)는 과보를 받음이 끝이 없지만, 업습기는 과보를 받는 것이 다함이 있으며,
이숙과(異熟果)는 성품이 다른 것에도 있고, 초감하기 어려운 것도 있으며,
등류과(等流果)와 증상과(增上果)는 성품이 같은 것에도 있고 초감하기 쉬운 것도 있기 때문이다.
由感餘生業等種熟,前異熟果受用盡時,復別能生餘異熟果。由斯生死輪轉無窮,何假外緣方得相續?此頌意說由業、二取、生死輪迴皆不離識,心、心所法爲彼性故。
미래의 다른 생을 초감하는 업 등의 종자가 성숙함으로써, 이전의 이숙과를 수용하는 것이 다할 때, 다시 별도로 능히 다른 이숙과를 생겨나게 하나니, 이것에 의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 다함이 없는 것이다.
어째서 마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외부대상인 외연(外緣)을 의지하여 비로소 상속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가?
이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으니, 업습기와 이취습기에 의해서 생사에 윤회하고,
업습기와 2취 습기 모두는 식(識)을 떠나지 않으니, 심왕과 심소법을 그 생사의 자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비판에 답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