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원문과 해설

20 야마궁중 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 2

Skunky 2021. 8. 3. 14:08

2. 慧林菩薩의 讚歎 [幢慧世界, 無勝眼佛]

 

[[慧林보살 지혜가 숲처럼 광대하고 많다는 이다. 이는 饒益行이니 지혜로써 일체 중생을 요익해서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며, 戒바라밀을 행함이니 지위가 지혜로써 계율의 體를 삼기 때문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10 선지식인 釋天동자가 계바라밀을 행할 算法과 相法과 印法으로써 바로 村營城邑의 길흉의 땅을 안치한 것이 바로 지혜인 것이니, 10 안에서는 법신으로 계의 體를 삼았지만 10행에서는 지혜로써 계의 體를 삼는 이다.

혜림보살은 수행하는 사람이며, 幢慧세계는 수행하는 바의 이니 슬기를 계의 體로 삼아서 생사 속에 기울지 않는 것이며, 無勝眼佛은 행하는 이니 슬기의 눈으로 근기를 알아서 나머지 사람들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혜림보살은 부처님이 無碍自在, 無所不住, 無着의 德을 갖추고 어디에나 계시며, 누구라도 뵙기만 하면 惡道에서 영원히 나오지만, 만나 뵙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진실한 법을 알지 못하고는 누구도 부처님을  뵙지 못하는 것이다.]]

 

    (1)億劫 難遭遇 억겁 동안 만나기 어렵다

爾時에 慧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世間大導師 離垢無上尊이여 不可思議劫에 難可得値遇로다

佛放大光明하시니 世間靡不見이라 爲衆廣開演하사 饒益諸群生이로다

如來出世間하사 爲世除癡冥하시니 如是世間燈이여 希有難可見이로다

已修施戒忍과 精進及禪定과 般若波羅蜜하사 以此照世間이로다

如來無與等하시니 求比不可得이라 不了法眞實이면 無有能得見이로다

佛身及神通이 自在難思議라 無去亦無來하사대 說法度衆生이로다

若有得見聞 淸淨天人師면 永出諸惡趣하야 捨離一切苦로다

 

爾時에 慧林菩薩이 그때 혜림보살이 承佛威力(승불위력)하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普觀十方하고, 시방을 두루 살피고 而說頌言(이설송언)하사대, 게송으로 말했다. 

 

世間大導師(세간대도사) 세간의 대도사요  離垢無上尊(이구무상존)이여, 때를 여의신 무상존 

不可思議劫(불가사의겁)에 불가사의한 겁 동안에도 難可得値遇(난가득치우)로다. 만나 뵙기 어렵도다 

[불가사의한 세월동안 아무리 찾고 궁구해 봐도 그것 손에 잡히지 않는, 난가득치우라. 이것을 擬佛化(의불화)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부처님으로 그려서 설명을 했지, 사실은 참 나에 대한 설명입니다. 

설사 나 아닌 부처님에 대한 설명이라 하더라도, 불교적인 관점에서 나 아닌 부처님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一切唯心造, 모두가 내 마음의 작용이라면서요? 나 아닌 부처님이라고 설사 가정하더라도, 나 아닌 부처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 빼버리고 설명할 길이 없고 또 설명하면 맞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교의 사상에 안 맞습니다.]

 

佛放大光明(불방대광명)하시니, 부처님이 대광명을 놓으시니 

世間靡不見(세간미불견)이라. 세간이 보이지 않는 것 없고 

[光明은 제가 100보 양보해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화엄경이다.’이렇게만 알아도 상당히 잘 아는 겁니다.]

爲衆廣開演(위중광개연)하사, 중생을 위해 널리 開演=열어 펼치시어 연설하사

饒益諸群生(요익제군생)이로다.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시네.

대중을 위해서 널리  = 열어서 연설하사

[직접적인 것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이 화엄경이 가장 가깝고 친절한 것입니다. 보다 더 차원 높게 설명하려면 얼마든지 차원 높은 경지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100보 양보해서 바로 우리 눈앞에 펼치고 있는 이 종이로 된 이 경전이야말로 佛放大光明이고, 世間靡不見明이고, 爲衆廣開演 대중을 위해서 널리 열어서 연설하는 것이고, 그 가르침을 통해서 수많은 중생들이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如來出世間(여래출세간)하사, 여래는 세간에 오시어 

爲世除癡冥(위세제치명)하시니, 세간의 깜깜한 어리석음을 없애시니

如是世間燈(여시세간등)이여, 이러한 세간의 등불은  希有難可見(희유난가견)이로다. 희유하여 보기 어렵다네. 

[이해하기 쉽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그 부처님은 희유해서 찾아보기 어렵고, 또한 우리 마음의 그 끝 또한 더욱 더 찾아보기 어렵다.]

 

施戒忍(이수시계인)과, 이미 보시, 지계, 인욕과 精進及禪定(정진급선정)과, 정진, 그리고 선정과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하사, 반야바라밀을 修=닦으시어  

以此照世間(이차조세간)이로다. 그로써 세간을 비추시네.

[화엄경에서는 10바라밀이지만, 여섯 번째 반야바라밀과 열 번째 지혜바라밀은 비슷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6바라밀이 보살, 불자가 실천해야할 제일 덕목입니다. 사실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이지만 보시만 제대로 한다면, 그 나머진 다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무슨 수행ㆍ무슨 수행, 힐링, 위빠사나, 간화선 등 어지럽게 떠들고 있지만, 6바라밀이면 끝이고, 6바라밀 중에서도 보시면 끝입니다. 뭘 보시하든지 상관없지만 그 가운데 진리의 가르침으로 보시하면 더욱 빛나고 좋습니다.

수능시험 때가 되면 기도가 한창이지요? 부모로써 할 일이 기도밖에 더 있나요? 하지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당사자가 공부를 잘해야 됩니다. 그 공부하는 것이 염려스러워서 부모는 그저 기도로써 마음 달래는 겁니다. 또 그 인연으로 절에 오게 되어서 부처님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如來無與等(여래무여등)하시니, 여래는 더불어 대등할 이가 없고 

求比不可得(구비불가득)이라. 비교하려 해도 할 수 없는지라 

不了法眞實(불료법진실)이면, 법의 진실에 요달하지 못하면 

無有能得見(무유능득견)이로다. 아무도 볼 수 없으리로다.

[뭐니ㆍ뭐니 해도 불법=법의 진실은 그 이치가 강점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가르치신 것이 많지만 그 중 간단하게 연기법ㆍ인과법이 法眞實입니다. 不了法眞實이면 無有能得見이라. 이 진실한 이치를 모르고는 부처님 봤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위대한데, 그 위대한 것을 조금이라도 내 것으로 하려면 법의 진실한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佛身及神通(불신급신통)이, 부처님 몸과 신통은  

自在難思議(자재난사의)라. 자재하심이 난사의하며

無去亦無來(무거역무래)하사대, 가고 옴이 없으시되 

 [往復이 無際니까 가고 오는 것이 끝이 없으니까 종국에는 감도 없고 옴도 없으시니,]

說法度衆生(설법도중생)이로다.  법을 설하시어 중생 제도하시네.

 

若有得見聞(약유득견문) 淸淨天人師(청정천인사)면, 만약 어느 중생이 청정하신 천인사를 만나뵈면 

永出諸惡趣(영출제악취)하야, 모든 악도에서 영원히 벗어나 

捨離一切苦(사리일체고)로다. 일체의 고통을 버리어 떠나리로다.

[天人師를 객관적인 부처님이라 해도 좋고, 참 나를 발견했다. 見性= 성품을 보았다고 해도 다 맞는 말입니다.]

 

(2) 殊勝義  수승한 의미

無量無數劫 修習菩提行이라도 不能知此義 不可得成佛이로다

不可思議劫 供養無量佛이라도 若能知此義 功德超於彼로다

無量刹珍寶 滿中施於佛이라도 不能知此義 終不成菩提로다

 

無量無數劫(무량무수겁)무량 무수의 겁 동안 

修習菩提行(수습보리행)이라도, 보리행=깨달음의 행을 닦고 익힐지라도 

不能知此義(불능지차의)이 이치를 능히 알지 못한다면 

不可得成佛(불가득성불)이로다성불하지 못하리라.

[此義=이 뜻→ 만약에 어떤 사람이 淸淨天人師를 見聞 보고 들을 것 같으면 영원히 惡趣에서 벗어나는 도리, 법의 진실을 아는 것이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바카리 경에서 바카리 비구에게 부처님이 마지막 설법하신 내용이,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썩어빠질 몸뚱이가 썩어빠질 몸뚱이한테 절 한 번 더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 네가 늙고 병들면 죽는 줄 알아야 된다. 나도 마찬가지로 너의 뒤를 따라서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다.

이 법= 진리= 인연의 도리를 알면 번뇌가 끊어져버립니다. 

내가 그렇게 안 풀리도록 인연을 그렇게 지어 놨으니까 안 풀리는 것으로 알면 번뇌가 싹 사라집니다.

내가 지은 공덕이 여기까지이고 내가 닦은 인연이 여기까지인 것을...’하면 열반입니다]

 

不可思議劫(불가사의겁)불가사의한 겁 동안 

供養無量佛(공양무량불)이라도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했더라도

若能知此義(약능지차의)이 이치를 알 수 있다면

功德超於彼(공덕초어피)로다공덕이 그 보다 크리라. 

[부처님께 절하는 공덕이 아주 굉장하지만 연기의 이치를 바로 알고, 인연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 공덕이 훨씬크다.]

 

無量刹珍寶(무량찰진보)한량없는 세계의 진귀한 보배로  

滿中施於佛(만중시어불)이라도가득히 부처님께 보시하더라도 

[금 은 보화를 3천 대천세계에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 하더라도 금강경에 있는 말 그대로입니다.] 

不能知此義이 이치를 능히 알지 못한다면 

[此義=이 뜻을 알지 못하면 = 금강경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終不成菩提(종불성보리)로다끝내 보리를 이루지 못하리라.

[우리가 익히 아는 금강경의 이치, 사구게 이치만 다 알고 또 사구게를 남을 위해서 설명한다 하더라도 3천 대천세계에 금 은 보화를 가득 채워서 보시하는 것 보다 훨씬 수승할 것이다.]

 

3. 勝林菩薩 讚歎 [寶慧 세계, 無住眼佛]

[[勝林보살 바로 거스름이 없는 행으로서 인바라밀을 주재하는 것이니, 모든 중에서 忍行이 최고로서 행에 忍이 없으면 행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명호가 승림보살인 것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지위 선지식인 우바이의 명칭이 '具足' 것은 인바라밀이 온갖 행을 모두 거두어서 慈·悲·喜·捨가 모두 속에 있는 것이다. 우바이란 자비행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며, 하얀 옷과 피발(被髮) 戒忍의 相이며, 하나에 처해서 방의 문이 열리는 것은 중생을 자비로 기르는 4섭법을 나타낸 것이며, 十千의 시녀는 만행을 갖춘 것이며, 하나의 작은 그릇으로써도 구제와 은혜가 무궁한 것은 오만하여 스스로 높다 함을 여의고 4섭법이 무한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하나하나의 바라밀이 서로 작용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승림보살은 행을 행하는 사람이며, 寶慧 세계 수행하는 바의 법이니, 이는 忍을 온갖 행의 보배로 삼음으로써 귀중함을 밝힌 것이며, 無住眼佛 바로 중의 佛果이니, 비록 인행을 행하더라도 행한 바를 염두에 두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위의 혜림보살이 부처님을 만나 뵙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여기의 승림보살은 이유에 대해 밝혔다. 태양의 光明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눈뜬 사람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니  소경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넓고 넓은 德은 衆生의 分別智로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또한 法體의 깊고 깊음을 드러냈는데, 諸法은 性品이 없고, 오고 곳도 없고, 지은 자도 없으며, 生滅도 없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면 여래를 것이며, 어떤 것에도 미혹하지 않고, 이치를 설하게 되는 이익을 얻는다.]]

 

   (1) 佛功德 無邊

爾時 勝林菩薩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譬如孟夏月 空淨無雲曀하면 赫日揚光輝하야 十方靡不充이로다

其光無限量하니 無有能測知有目斯尙然이어든 况盲冥者

諸佛亦如是하사 功德無邊際하시니 不可思議劫 莫能分別知로다

 

爾時 勝林菩薩이 때에 승림보살이 承佛威力하사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普觀十方하고시방을 두루 살피고 而說頌言하사대게송으로 말했다.

 

譬如孟夏月(비여맹하월)비유컨대 孟夏=한 여름날에 

空淨無雲曀(공정무운에)하면,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는데 

赫日揚光輝(혁일양광휘)하야불타는 태양이 찬란한 빛을 발하여 

[부처님의 진리의 가르침은 이 세상을 다 가득 채우고도 남는 가장 빛나는 가르침입니다.]

十方靡不充(시방미불충)이로다시방에 온통 가득함이로다    

 

其光無限量(기광무한량)하니그 광명이 한량이 없어서  

無有能測知(무유능측지)헤아려 알 수 없을 터인데 

有目斯尙然(유목사상연)이어든, 눈 뜬 사람이 오히려 그러하거니와 

况盲冥者(하황맹명자)하물며 어찌 눈 먼 사람이리오  

 

諸佛亦如是(제불역여시)하사모든 부처님들도 그러하시어 [諸佛= 진리의 가르침]

功德無邊際(공덕무변제)하시니공덕이 끝 없으시니 [功德無邊=우리 마음의 功能= 무한한 능력입니다.] 

不可思議劫(불가사의겁), 불가사의한 겁 동안에도 

莫能分別知(막능분별지)로다분별하여 알 수 없으리로다.

[객관적인 부처님으로 봐도 좋고, 내 마음의 어떤 공능, 내 마음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객관적인 부처님도 내 마음 없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결국은 내 마음의 영역 안에 있는 겁니다.

역사적인 석가모니부처님도 내 마음의 영역 안에 있고, 청정법신비로자나불도, 진리의 부처인 법신부처님도 내 마음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확장되어있는가에 따라 법신불을 얼마나 깊이ㆍ널리 아는 것은 각자 몫입니다.]  

 

   (2) 諸法深深  모든 법이 깊고 깊다.

諸法無來處 亦無能作者無有所從生일새 不可得分別이로다

一切法無來일새 是故無有生이니 以生無有故 滅亦不可得이로다

一切法無生이며 亦復無有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 斯人見如來로다

諸法無生故 自性無所有如是分別知하면 此人達深義로다

以法無性故 無有能了知如是解於法하면 究竟無所解로다

所說有生者 以現諸國土能知國土性하면 其心不迷惑이로다

世間國土性 觀察悉如實하니 若能於此知하면 善說一切義로다

 

諸法無來處(제법무래처)모든 법은 오는 곳이 없고 

亦無能作者(역무능작자)또한 짓는 자도 없으며 [제법의 존재는 부처님하고도 관계없습니다.]

無有所從生(무유소생)일새나오는 곳도 없고   [그냥 그대로 본래 있는 겁니다.]

不可得分別(불가득분별)이로다분별할 수도 없음 이로다[본래 있는 것이니 이렇게 저렇게 차별할 필요도 없습니다.]

一切法無來(일체법무래)일새일체법이 오지 않으니  

是故 無有生(무유생)이니그 까닭에 생이 없고  

以生無有故(이생무유고)생이 없기 때문에  

滅亦不可得(멸역불가득)이로다도 역시 얻을 수 없도다.

[반야심경에서 不生不滅이라 했고 또 법화경도 是法 主法位하야 世間相 常住. 이 현상은 진리의 입장이고 진리의 자리입니다. 법의 자리에 주해서 世間相 常住이 모습, 이 현상 이대로 항상 있는 겁니다. 그저 옷만 갈아입을 뿐이고, 형태만 변화할 뿐이지 영원히 불생불멸입니다.

휴지 한 장! 불면 날아가고 불태우면 순식간에 타버릴 가벼운 종이 한 장도 어떠한 과학적인 기술로도 영원히 없애지 못하고 새로 만들지도 못합니다. 그저 변형시킨 것일 뿐입니다. 또 태웠다 하더라도 기체로 돌아가고 뭘로 돌아가고 해서 그 휴지 한 장은 질량 불변의 원칙으로 그냥 있다가 또 어느 때 이리 저리 인연이 맞아 떨어지면, 지수화풍으로 사람도 되고 동물도 되고 나무도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어떤 간단한 물질 하나도 없앨 수 없고, 새로 만들 수 없는 不生不滅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너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1600년 전에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그냥 말로 해 치워버리고 말아버립니다.

이제는 질량불변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초등학교만 나와도 다 고개 끄덕거리는 이치입니다.

불교에는 아침저녁으로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아주 무식한 시골 할머니도 그저 不生不滅이고 유식한 사람도 不生不滅입니다. 진리에는 유식ㆍ무식이 아무 상관없습니다.]

 

一切法無生(일체법무생)이며, 일체법이 생이 없고 

亦復無有滅(여부무유멸)이니, 또한 멸()도 없나니 

若能如是解(약능여시해)하면,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斯人見如來(사인견여래)로다. 이 사람은 여래를 보리라.[斯 이 사, 어조사 사]

[一切法無生일체 법은 불생이고 亦復無有滅불멸이다.

나 이나, 글자도 별로 안 바뀌고요. 若能如是解하면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면 斯人見如來로다이 사람이야 말로 여래= 진리를 본다. 不生不滅을 알면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一切法無生 亦復無有滅 若能如是解 斯人見如來중요한 겁니다.]

 

諸法無生故(제법무생고)일체법이 무생= 생김이 없음으로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자성이 있지 않나니 [자성이 생긴 것이 없으므로, 고정된 어떤 실체가 없다.] 

如是分別知(여시분별지)하면이와 같이 분별해 알면 

此人達深義(차인달심의)로다. 이 사람은 깊은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로다.

 

以法無性故(이법무성고), 법의 성품= 자성이 없는 까닭에 [性= 법ㆍ본 자성ㆍ고정불변 하는 실체] 

無有能了知(무유능료지)요달하여 알 것도 없나니 [능히 이것이라고 알 것이 없으니,]

如是解於法(여시해어법)하면이와 같이 법을 이해하면 

究竟(구경) 無所解(무소해)로다구경에는 이해할 것도 없으리라.

[구경에는 아는 바가 없다. 이상한 말이지요?

법을 이와 같이 알면 구경에는 아는 바가 없다. 모르는 경지가 다 아는 경지입니다. 

분별심이 없어야 신령한 앎이= 空寂靈知(공적영지)가 나타나고, 空寂靈知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많이 알면 아주 어수선하게 알 뿐이지, 분별해서 아는 분별지가 다 사라져야 空寂靈知가 되는 겁니다.

우리 본성은 분별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분별지는 유식하고ㆍ무식하고, 많이 알고ㆍ적게 알고, 영리하고ㆍ우둔한 사람이 있는, 아주 천차만별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걸 가지고 평가하고 따지지 않고 무분별지= 空寂靈知= 空寂한 가운데 신령스럽게 아는 것. 천하에 멍청이도 그것은 다 가지고 있는 동등지입니다.

如是解於法 이와 같이 법을 알면 究竟 無所解 궁극에는 아는 바가 없다 → ‘분별지가 사라진 空寂靈知 자리다.’ ]

 

所說有生者(소설유생자)말한 바 생이 있다는 것은 

以現諸國土(이현제국토)로써 모든 국토를 나타낸 것이요, 

 [“나타낸다.  하는 것은우리가  ‘인식한다.’] 

能知國土性(능지국토성)하면, 능히 그 국토의 성품을 알아야, 능히 국토의 본성을 알 것 같으면 

其心不迷惑(기심불미혹)이로다. 그 마음이 미혹하지 않으리라.

 

世間國土性(세간국토성)세간 국토의 성품을  

觀察悉如實(관찰실여실)하니다 여실하게 관찰하여 

若能於此知(약능어차지)하면, 능히 여기에서 안다면 

善說一切義(선설일체의)로다모든 이치를 잘 설하리라.

[일체 국토는 국토로 이렇게 존재하긴 하지만, 사실 그 본성ㆍ자성은 불변, 고정불변 하는 성품은 없다는 그것을 관찰해서 다 안다. 만약에 능히 여기에서 이러한 도리에 대해서 잘 알 것 같으면 그 원리가지고 다 설명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우리 몸도 설명이 가능하고, 무슨 명예니, 경제적인 富 이런 것도 전부 그 원리 안에 다 포함되는 겁니다. 세계가, 세계의 국토가 그 원리 속에 있는데, 그 위에 얹혀사는 우리 사람, 산천초목이야 말할 것도 없고, 또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얹혀있는 富貴功名(부귀공명)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이 전부 그 원리 속에 다 포함되니까 국토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전체를 이해하는 것과 똑 같은 겁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그것가지고 善說一切義 일체도리를 다~ 잘 설명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