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成唯識論) 제 7권 6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7권 6
如何五俱唯一意識,於色等境取一或多?
▷묻습니다; 어째서 5식(五識, 전오식)과 함께하는 의식인 오구의식(五俱意識)에는 오직 하나의 의식(意識, 제육식)뿐인데, 색경(色境) 등에 대해서 하나 또는 여럿을 취하는 것입니까?
→비판하여 묻기를, 5식과 함께하는 의식인 오구의식(五俱意識)은 오직 하나뿐인데, 어떻게 그것이 색경(色境) 등 여러 대상을 취하는가라고 한 것이다.
如眼等識各於自境取一或多,此亦何失?相見俱有種種相故。
▷답한다; 안식 등이 각각 자기의 대상에 대해서 하나 혹은 여럿을 취하는 것과 같이, 이것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무슨 과실이 있다는 것인가? 상분(相分, 소취상所取相)과 견분(見分, 능취상能取相) 모두가 각각으로 갖가지의 양상이 있기 때문이다
→견분(見分)이 하나 또는 여럿인 것은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이 하나 또는 여럿인 것에 의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안식 앞에 꽃ㆍ나무ㆍ나비 등 여러 대상이 동시에 있을 때에는 동시에 그들 여러 대상을 취한다.
견분이 그 상분(相分)의 수(數)에 응하여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므로, 따라서 하나의 의식이 여러 대상을 취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답변한 것이다.
何故諸識同類不俱?
▷묻습니다; 어째서 모든 식에 있어서 같은 종류는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를 들면 안식이 한 찰나에 둘ㆍ셋ㆍ넷 등 여러 안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여러 식이 함께 일어남을 인정한다면, 같은 종류의 여러 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고 묻는 것이다.
於自所緣若可了者,一已能了。餘無用故。
▷답한다; 자기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요별할 수 있으면, 오직 하나만 요별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것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若爾五識已了自境,何用俱起意識了爲?
▷묻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5식이 이미 자기의 대상을 요별하였는데, 어째서 함께 의식을 일으켜서 요별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까?
五俱意識助五令起,非專爲了五識所緣。又於彼所緣能明了取異於眼等識。
故非無用。由此聖教說彼意識名有分別,五識不爾。
▷답한다; 5식(전오식)과 함께하는 의식(意識)인, 오구의식(五俱意識)은 5식을 도와서 일어나게 하며, 오로지 5식의 대상을 요별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의식이 그것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에 대해서 능히 명료하게 취하는 것이 안식 등과 다르므로, 따라서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에 의거해서 성교인, '해심밀경' 제1권에서 그 의식을 유분별(有分別)이라 이름할 뿐, 5식(전오식)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은 것이다.
무분별(無分別), 전5식은 감성적 인식일 뿐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식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혜(慧: 판단)의 작용은 없고 심(尋)과 사(伺)의 작용만 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불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 즉 확정적인 분별, 식별, 요별 또는 앎이 없다'는 뜻에서 무분별(無分別)이라 한다.
유분별(有分別), 의식 즉 제6의식의 오성적 인식과 기억 또는 재인식이 더해짐으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비로소 대상에 대해 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을 가지게 되는, 즉 심(尋)ㆍ사(伺) 심소가 함께하는 확정적인 분별, 식별, 요별 또는 앎이 있다'는 뜻에서 유분별(有分別)이라 한다.
한편 전5식의 본질적 성질로서의 무분별(無分別: 불확정적인 인식)은 반야바라밀다의 무분별지(無分別智)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므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위키
多識俱轉何不相應?
▷묻습니다; 여러 식이 함께 전전(展轉)한다면, 어째서 상응하지 않는 것입니까?
非同境故。設同境者彼此所依體數異故。如五根識互不相應。
▷답한다; 대상이 같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제6식과 제8식은 많은 대상을 반연하고, 5식과 제7식은 하나의 대상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설사 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이것과 그것이 의지처(감각기관)의 자체와 수(數)가 다르기 때문이니,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오식근(五根識)이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數)가 다르다는 것은, 5식은 네 가지 의지처인 4소의(四所依)가 있고,
제6식은 두 가지의 의지처인 2소의(二所依)가 있으며,
제7식과 제8식은 하나의 의지처 의지처인 1소의(一所依)를 갖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능변식 자체의 능변일이(能變一異)를 밝힌다.
八識自性不可言定一,行相所依、緣相應異故。又一滅時餘不滅故,能、所熏等相各異故。
8식의 자성은 반드시 하나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행상(行相, 인식작용)ㆍ소의(所依, 의지처, 감각기관)ㆍ소연(所緣, 인식대상)ㆍ상응법(相應法, 심소)이 다르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가 멸할 때에 나머지 다른 것이 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능훈과 소훈 등의 양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며,
팔식(八識),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을 전5식(前五識) 또는 5식(五識)이라 하며, 의식 · 말나식 · 아뢰야식을 후3식(後三識)이라 한다. 전5식은 색(물질)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識)으로, 그 인식대상들을 각각 색경(색깔, 모양, 크기) · 성경(소리) · 향경(냄새) · 미경(맛) · 촉경(감촉)이라 하며 이들을 5경(五境)이라 한다. 후3식 중 의식(意識)은 5경(五境)에 법경(法境)을 더한 6경(六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으로 제6의식이라고도 불리는데,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며, 다시 말나식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다 - 위키
亦非定異,經說八識如水、波等無差別故,定異應非因果性故,如幻事等無定性故。
또한 반드시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니, '입능가경' 제9권에서 말씀하시기를 “8식은 마치 바닷물(제8식)과 파도(제7식) 등의 관계와 같아서 차별이 없다”고 한 때문이다.
반드시 다른 것이라면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고,
요술 등과 같이 결정적인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바닷물은 제8식을, 파도는 제7식을 비유한다.
如前所說識差別相,依理世俗,非眞勝義,眞勝義中心言絕故。如伽他說:
앞에서 말한 식의 차별상(差別相)은 세속제에 의거한 것으로, 참다운 승의제는 아니니,
참다운 승의제 중에서는 마음을 표현하는 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입능가경'의 게송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心意識八種 俗故相有別, 眞故相無別 相所相無故。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여덟 가지는
속제에 의거해서는 상(相)의 차이가 있고,
진제에 의거해서는 상의 차이가 없으니,
작용(相)과 자체(所相)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식(識)이 전변된 것임을 밝힌, 유식소변(唯識所變)이다.
已廣分別三能變相,爲自所變二分所依。
云何應知依識所變,假說我、法,非別實有,由斯一切唯有識耶?頌曰:
이미 3 가지 능변식의 양상을 자체가 전변한 2분(分)의 의지처로 삼음을 자세히 분별하였다.
식이 전변한 것에 의거해서 가정적으로 자아ㆍ법으로 말하는 것으로, 별도로 실유는 아니므로, 따라서 일체는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삼십송'의 제17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으니;
→유식상(唯識相)을 밝히는 세 가지 큰 분단인 대단(大段) 중에서 이상 능변식의 양상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마치고, 이하는 식전변(識轉變)에 의거해서 가아(假我)와 가법(假法)을 건립하는 일단(一段)이다.
먼저 “그것은 식이 전변한 것에 의거한다는 피의식소변(彼依識所變)”를 자세히 해설한다.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이 모든 식(識, 8식과 그것에 상응하는 심소를 포함한 것)이 전변(轉變)하여
→전변(轉變)은 개전(開轉)ㆍ변현(變現)의 뜻으로서, 심왕ㆍ심소의 자체분에서 능취(能取)의 견분, 소취(所取)의 상분이 현출(現出)됨을 의미한다.
분별(分別, 견분見分)과 분별되는 것의 소분별(所分別, 상분相分)이네.
이것에 의거해서 이것의 차(此, 실아實我)ㆍ그것의 피(彼, 실법實法) 모두 존재하지 않으니,
→심외(心外)에 실존한다고 망집(妄執)하는 아(我)ㆍ법(法)을 가리킨 것으로, 범부나 외도가 집착하는 것과 같이 심외에 아ㆍ법이 실존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그것은 다만 견분ㆍ상분 위에 가립된 것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일체는 오직 식뿐인, 유식(唯識)이네.
→유식(唯識)의 이치를 판별한 것이다.
‘식이 전변한 것의 식소변(識所變, 의타기성의 상분과 견분)’의 상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나,
능변식(能變識)의 종류를 구별하면 오직 세 가지이니,
첫째는 이숙식(異熟識)으로, 곧 제8식이며, 대부분 이숙성(異熟性)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사량식(思量識)이니, 곧 제7식이며, 항상 살피고 사량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니, 곧 전6식(前六識)으로,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요별하기 때문이다.
('유식삼십송.의 제2게송에서) ‘및(及)’이라는 말은 여섯 가지 식을 합해서 한 종류가 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세 종류를 모두 능변식(能變識)이라 이름한다. - 성유식론(成唯識論) 제2 권 4
論曰:是諸識者,謂前所說三能變識及彼心所。皆能變似見、相二分,立轉變名。
논하여 말한다. ‘이 모든 식, 제식(諸識)’이란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삼능변식(三能變識) 및 그것의 심소(心所, 마음작용)를 말하는 것으로, 모두 능히 전변하여 견분ㆍ상분으로 사현하므로 전변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다.
→먼저 안혜와 호법의 해설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안혜와 호법은 다 같이 식(識)의 자체분으로부터 견분과 상분을 변현한다고 설명하면서도, 2분(分)의 가실(假實) 문제에 있어서는 입장을 달리한다.
즉 안혜에 의하면, 그 전변된 견분과 상분은 변계소집성으로서 자체(體)가 없는 법으로, 다만 의타기성의 유(有)처럼 사현할 뿐이며, 자체분만이 의타기성으로서 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 중기 유식학파의 두 가지 사조(思潮) 중에서 무상유식론(無相唯識論, nir-kra-vijnavda)의 입장으로서, 식의 표상화 작용 그 자체를 궁극적으로 소멸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표상은 인식의 본질이 아니라 허망한 것으로서 사량 분별을 떠난 인식의 본질은 형상이 없는 ‘비춤 그 자체’, ‘순수한 조출성(照出性)’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유방법은 중관학파와 비슷하다.
이에 반하여 호법은 견분과 상분을 의타기성의 자체가 있는 법으로 설명한다. 식의 자체분이 전변하여 의타기성의 2분(分)을 현현하고 그것이 변계소집의 아(我)ㆍ법(法)에 비슷하므로 여기에 아(我)ㆍ법(法)의 모습을 가립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 skra-vijnavda)의 입장으로서, 식상(識上)의 형상은 의타기성이라서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인식상황 속의 형상의 진실성을 인정한 이유는 유식학의 심식론을 인식논리인 인명(因明)으로써 설명하고 증명함으로써, 깨달음의 가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所變見分說名分別,能取相故。所變相分名所分別,見所取故。
전변된 견분(見分)을 ‘분별(分別)’이라고 이름하나니, 능히 상(相)을 취하기 때문이며,
전변된 상분을 ‘분별되는 것의 소분별(所分別)’이라 이름하나니, 견분에 취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세친(世親)이 식전변설을 수립한 의도가 잘 나타난다.
그는 식전변설의 체계 속에 인식성립의 역학적 구조를 담고 싶었던 것으로, 식(識) 본래의 기능은 분별, 즉 대상 인식작용이다. 종래의 ‘식=분별’에 세친은 분별하게 되는 원리로서 전변의 개념을 도입하여 ‘식=전변=분별’로 설명하였다.
식전변(識轉變)은 단순히 아뢰야식의 종자로부터 7식과 현상적 존재가 생겨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변의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능변식(8식과 이에 수반되는 심소)이 견분(見分, 능취상能取相)과 상분(相分, 소취상所取相)을 변현시키는 것이다.
由此正理彼實我、法離識所變,皆定非有。離能、所取無別物故。非有實物離二相故。是故一切有爲、無爲若實若假皆不離識。唯言爲遮離識實物,非不離識心所法等。
이러한 바른 이치인 정리(正理)에 의거해서 그 실아(實我)ㆍ실법(實法)은 식이 전변된 것을 떠나서는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떠나서는 별도의 사물이 결정코 없기 때문이며,
실유로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두 가지 상을 떠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위법(有爲法, 식이 전변된 식소변識所變)ㆍ무위법(無爲法, 식의 체성體性)은 실법(實法)이건 가법(假法)이건 간에 모두 식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삼십송'의 제17게송에서 ‘유(唯, 오직)’이라는 말은 식을 떠난 실체의 사물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식을 떠나지 않는 심소법 등은 아닌 것이다.
或轉變者,謂諸內識轉似我、法外境相現。此能轉變卽名分別,虛妄分別爲自性故。謂卽三界心及心所。此所執境名所分別。卽所妄執實我、法性。由此分別變似外境假我、法相,彼所分別實我、法性決定。皆無前引教理已廣破故。
혹은 ‘전변(轉變)’은 내부의 모든 식이 전환해서 자아와 법이 외부대상의 외경상(外境相)으로 사현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능전변을 ‘분별(分別)’이라고 이름하나니, 허망분별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며, 곧 삼계의 심왕(心王, 마음)과 심소(心所, 마음작용)를 말한다.
이것의 집착된 대상을 ‘분별되는 것의 소분별(所分別)’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곧 망령되게 집착하는 실아(實我)ㆍ실법(實法)의 성(性)이며, 이 분별이 변하여 외부대상의 가아(假我)ㆍ가법(假法)의 양상으로 사현하기 때문에 그 분별되는 것인 실아ㆍ실법의 체성은 결정적으로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본 논서 제1권ㆍ제2권에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을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를 인용하여 이미 자세하게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난타(難陀)의 견해로써,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그는 이분가(二分家)로서 자체분(自體分)을 건립하지 않고, 견분의 식이 의타기(依他起)의 상분을 전변하여 아(我)ㆍ법(法)의 외부대상의 모습으로 사현한다고 말한다.
다만 견분과 상분이 다 같이 의타기법(依他起法)이긴 하지만, 가실(假實)의 차이가 있어서 견분은 참다운 실(實)이고, 변현된 상분은 허망한 가(假)이다.
상분도 역시 참다운 것이라고 하면, 곧 유식(唯識)의 의리(義理)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是故一切皆唯有識。虛妄分別有極成故。唯旣不遮不離識法故,眞空等亦是有性。
由斯遠離增、減二邊,唯識義成契會中道。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것에서 오로지 식(識)만이 존재하는 것이니, 허망분별로써 존재(有)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유(唯, 오직)’라고 말하는 것은 식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면 부정되지 않기 때문이며, 참다운 진공(眞空) 등도 역시 자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극단을 멀리 떠나서 유식(唯識)의 뜻이 성립되고,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결론 맺은 것으로, 마음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심외법(心外法)이란 없기 때문에 증익(增益)의 극단을 부정하고, 허망한 마음이 존재하므로 손감(損減)의 극단을 막음으로써, 유식(唯識)의 뜻이 성립되고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