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成唯識論) 제5 권 8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5 권 8
意識俱者,有義唯憂,逼迫心故、諸聖教說意地慼受名憂根故。慽 근심할 척, 친척 척
핍박하는 모든 수(受)가 5식(五識)과 상응한다면 항상 고수(苦受)라 이름하며,
의식과 함께하는 것에 대한 안혜의 견해는, 의식의 고수(苦受)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우수(憂受)라고만 하는 것은 마음을 핍박하기 때문이며,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제6식인 의지(意地, 의식)의 근심의 감수작용의 척수(慽受)를 우근(憂根)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핍박하는 수(受)가 의식에 상응하는 것에 관한 해설이다.
'瑜伽論'說:‘生地獄中諸有情類,異熟無閒有異熟生,苦憂相續。’又說:‘地獄尋、伺憂俱,一分鬼趣,傍生亦爾。’
'유가사지론 제 55권에서 말하기를 “지옥에 태어난 모든 유정의 무리는, 이숙식(異熟識)의 바로 다음 찰나에 이숙생(6식)의 고수(苦受)ㆍ우수(憂受)가 상속한다”고 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유가사지론 제 5권에서 말하기를 “지옥에서의 거친 살펴 봄의 심(尋)ㆍ정밀한 살펴 봄의 사(伺) 심소는 우수(憂受)와 함께하며, 일부의 아귀세계와 축생에서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이숙식(異熟識)은 제8식은 능히 생사를 인기(引起)하는 선업 · 불선업이 다르게(異) 익어서(熟) 나타난 이숙과(異熟果)이기 때문에 이숙식이라고 하며, 이 명칭은 범부 · 2승 · 보살의 지위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부처의 지위인 여래지(如來地) 또는 불지(佛地)를 제외한다.
이숙생(異熟生)은 제8아뢰야식은 선악업의 총 결과로서의 이숙과, 즉 이숙인(異熟因)의 총체로부터 생겨난 총체적 결과 또는 과보 즉 총보(總報)인데, 특별히 제8아뢰야식이라는 총보로서의 이숙과를 이숙(異熟) 또는 진이숙(眞異熟) 즉 진정한 이숙 또는 참다운 이숙이라 하고, 제8아뢰야식으로부터 생겨난 제6의식의 이숙과, 즉 부귀와 가난, 현명함과 어리석음, 잘생기고 못생김 등의 별보(別報)로서의 과보를 이숙생이라 한다. 즉 이숙생은 제6의식의 갖가지 고락(苦樂) 즉 각종의 피하고 싶은 것과 가지고 싶은 것들을 말한다.
한편, 제7말나식은 전의(轉依)를 획득하기 이전까지는 언제나 4번뇌와 상응하는 유부무기이고 전의(轉依)를 획득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선이므로 이숙성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제8아뢰야식의 이숙의 종자 즉 이숙습기(異熟習氣)로부터 생겨난 식이 아니므로 이숙과가 아니며 따라서 이숙생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제7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의 등류의 종자 즉 등류습기(等流習氣)로부터 생겨난 등류과이다.
결론적으로, 이숙과는 제8아뢰야식의 진이숙과 제6의식의 이숙생을 통칭하는 말이다 - 위키
故知意地尤重慼受,尚名爲憂。況餘輕者?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하나니, 제6식의 의지(意地)의 더욱 무거운 근심의 감수작용인 척수(慽受)조차 오히려 우수(憂受)라고 이름하거늘, 하물며 가벼운 것들이겠는가?
有義通二,人、天中者恒名爲憂,非尤重故。傍生、鬼界名憂名苦,雜受純受有輕重故。柰落迦中唯名爲苦,純受尤重,無分別故。
호법의 주장으로, 그는 의식이 우수(憂受)와 고수(苦受)에 통한다는 견해가 있으니,
인간세상과 천상에서는 항상 우수(憂受)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더욱 무겁지 않기 때문이며,
축생과 아귀세계라면 우수라고도 하고 고수라고도 이름하는 것으로, 잡된 감수작용인 잡수(雜受), 즉 가벼운 경우수(輕憂受)와 순수한 감수작용인 순수(純受), 즉 무거운 중고수(重苦受)이니, 가볍고 무거움이 있기 때문이며,
지옥에서는 오직 고수(苦受)라 이름하는 것으로 순수한 감수작용인 순수(純受) 더욱 무거운 중고수(重苦受)이며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瑜伽論'說:‘若任運生一切煩惱,皆於三受現行可得。’廣說如前。又說:‘俱生薩迦耶見,唯無記性。’
'유가사지론' 제 59권에서 말하기를 “만약 자연히 생겨나는 번뇌라면, 모두 세 가지의 삼수(三受)에 대해서 현행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중간에 자세하게 말하여지는 부분은 앞에서와 같으며,
또한 '유가사지론' 제 58권에서 말하기를 “선천적으로 함께 일어나는 아견은 오직 무기성(유부무기)이다”고 하였다.
彼邊執見應知亦爾。此俱苦受非憂根攝,論說憂根非無記故。
그것의 극단적인 견해 역시도 마땅히 그러다는 것으로 알아야 하며,
이것과 함께하는 것은 고수(苦受)이며, 우근(憂根)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니, 논서, '유가사지론' 제 57권에서 우근은 무기(無記)가 아니라고 설한 때문이다.
又'瑜伽'說:‘地獄諸根餘三現行定不成就,純苦鬼界、傍生亦爾。’餘三定是樂、喜、憂根,以彼必成現行捨故。
또한 '유가사지론' 제 57권에서 설하기를 “지옥에서는 모든 감각기관인 제근(諸根)에 나머지 세 가지의 현행이 반드시 성취되지 않는, 즉 지옥에서는 반드시 제7식과 제8식이 있어서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현행의 사근(捨根)을 성취하며, 순전히 고통스러운 아귀세계와 축생에서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나머지 세 가지라는 것은 반드시 희근(喜根)ㆍ낙근(樂根)ㆍ우근(憂根)이며,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현행의 사근(捨根)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豈不客捨彼定不成?
어째서 객(客)의 사근(捨根)이 거기에서 반드시 성취되지 않는 것인가?
'유가사지론' 제57권에서 지옥에는 세 가지 근(根)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안혜가 희근(喜根)ㆍ낙근(樂根)ㆍ사근(捨根)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호법이 희근(喜根)ㆍ낙근(樂根)ㆍ우근(憂根)의 입장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寧知彼文唯說客受?應不說彼定成意根,彼六客識有時無故。不應彼論唯說客受,通說意根無異因故。
정녕코 알아야 할 것이니! 그 문장은 오직 객(客)의 수(受)만을 말하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반드시 의근, 즉 객수(客受)의 의지처인 6식(六識)을 성취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나니, 거기에서는 여섯 가지 객(客)의 식이 어떨 때에는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논서, '유가사지론' 제57권에서는 오직 객수(客受)만을 말하는 것이며, 주체와 객을 통틀어서, 즉 제7식과 제8식을 의근(意根)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다른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又若彼論依客受說,如何說彼定成八根?
또한 만약 그 논서는 객의 수(受)에 의해서 말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지옥에서 반드시 8근(根)인 5근(根)ㆍ의근(意根)ㆍ명근(命根)ㆍ사근(捨根)을 성취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앞의 제일사(第一師)의 견해와 같이 지옥에서 성취되지 않는 3근 중에 사근(捨根)이 있다면, 성취되는 8근 중에는 사근이 없어야 하는 것으로, 즉 5근ㆍ의근ㆍ명근의 7근뿐인 것이니 8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若謂五識不相續故定說憂根爲第八者,死、生、悶絕寧有憂根?
만약 5식(五識)은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우근(憂根)을 말하여 제8로 삼는다고 한다면, 죽을 때와 태어날 때 또는및 기절했을 때에 어떻게 우근이 있는 것인가?
태어나고 죽을 때 등의 지위에서 제6식이 없다면, 상응하는 우근(憂根)도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有執苦根爲第八者,亦同此破。設執一形爲第八者,理亦不然,形不定故,彼惡業招容無形故。
고근(苦根)을 고집하여 제8로 삼는 것 역시도 이와 마찬가지로 논파해야 하는 것이니,
남녀이근(男女二根) 중에서 설사 하나의 형상에 집착해서 제8로 삼는다고 말한다면, 논리적으로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니, 형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거기에서는 악업에 초감되어 있으므로 형상이 없는 것도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彼由惡業令五根門恒受苦故,定成眼等。必有一形,於彼何用?非於無閒大地獄中可有希求婬欲事
故。由斯第八定是捨根,第七、八識,捨相應故。
다섯 감각기관인 오근(五根)으로 항상 고통을 받게 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근 등을 이루고, 반드시 하나의 형상이 있다고 하는 것에 무슨 작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간지옥에서는 음욕을 바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8은 반드시 사근(捨根)이니, 제7식과 제8식은 오직 사근(捨根)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如極樂地意悅名樂,無有喜根故。極苦處意迫名苦,無有憂根。故餘三言,定憂、喜、樂。
지극한 즐거움을 받는 색계의 제3선(第三禪)의 의식이 기뻐하는 것을 낙근(樂根)으로만 이름할 뿐, 희근(喜根)이 없는 것과 같이, 지극한 괴로움을 받는 지옥의 의(意)에는 의식이 핍박받는 것을 고근(苦根)으로 이름할 뿐, 우근(憂根)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니,
따라서 나머지 세 가지라는 말은 반드시 우근ㆍ희근ㆍ낙근인 것이다.
餘處說彼有等流樂應知彼依隨轉理說
다른 곳에서 설하기를, 지옥에는 등류(等流)의 낙근(樂根)이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근기에 따른 방편문인 수전이문(隨轉理門)에 의한 것이니,
다음은 논서의 위배되는 점을 회통한다. 만약 지옥에서 오직 고근(苦根)만 있다면, 어째서 세친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2권에서 지옥에 등류(等流)의 낙근(樂根)이 있다고 말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었으므로, 논주가 그것을 회통하여 답변하는 것이다.
或彼通,說餘雜受處。無異熟樂,名純苦故。
혹은 거기에 통하여 다른 잡수처(雜受處, 아귀와 축생)를 말하는 것이니, 이숙의 낙근이 없으므로 순전히 고통만 받는 순고처(純苦處)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세친의 '섭대승론석'에서는 다른 아귀ㆍ축생의 잡수처(雜受處)에 등류의 낙근이 있다고 말한 것이지, 지옥 중에 등류의 낙근이 있다는 뜻이 아니며, 지옥에서는 이숙의 낙근이 없으므로 순전히 고통만 받는 곳이라는 순고처(純苦處)라고 이름한다고 회통한 것이다.
然諸聖教,意地慼受,名憂根者,依多分說或隨轉門無相違過。
그런데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인 '아비달마잡집론' 제7권에서 제6식인 의지(意地)의 근심의 감수작용인 척수(慽受)를 우근(憂根)으로 이름한 것은, 많은 다분(多分)에 의해 말한 것이며, 혹은 근기에 따른 방편문인 수전리(隨轉理)인 것이므로 위배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瑜伽論'說生地獄中,諸有情類,異熟無閒,有異熟生,苦憂相續,又說地獄尋伺憂、俱。一分鬼趣、傍生亦爾者,亦依隨轉門。
'유가사지론' 제 66권에서 말하기를 “지옥에 태어난 모든 유정의 무리에게는 이숙식(異熟識)의 바로 다음 찰나에 이숙생(異熟生)의 고근과 우근의 상속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유가사지론' 제 5권에서 말하기를 “지옥의 거친 살펴 봄의 심(尋)ㆍ정밀한 살펴 봄의 사(伺) 심소는 우근(憂根)과 함께하며, 아귀세계와 축생의 일부에서도 역시 그러하다”고 한 것도 역시 근기에 따른 방편문인 수전리(隨轉理)에 인 것이다.
又彼苦根,意識俱者,是餘憂類,假說爲憂。或彼苦根,損身心故,雖苦根攝,而亦名憂。
또는 지옥의 고근(苦根)이 의식(意識)과 함께하는 것은, 다른 곳, 즉 아귀와 축생의 잡수처(雜受處), 인간과 천상의 우근(憂根)의 부류이므로 가정적으로 우근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혹은 그곳의 고근(苦根)은 몸과 마음을 훼손하기 때문에 비록 고근에 포함되지만, 역시 우근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如近分喜,益身心故,雖是喜根,而亦名樂。顯揚論等,具顯此義。然未至地,定無樂根。說彼唯有十一根故。
제2선(第二禪)의 상지(上地)의 선정인 근분정(近分定)의 희근(喜根)은 몸과 마음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희근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역시 낙근(樂根)이라 이름하는 것과 같다고 '현양성교론' 제 2권과 '유가사지론' 제 57권 등에서는 이러한 뜻을 말하고 있으나,
초선천(初禪天)의 근분정(近分定)에 아직 이르지 않은, 미지지(未至地)에서는 낙근(樂根)이 없는 것으로, 거기에서는 오직 11 가지의 십일근(十一根)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근분정(近分定)은 근본정(根本定)에 가까운 선정의 의미로써, 하지(下地)의 수소단의 번뇌인 수혹(修惑)을 은복하고 억압하여서 얻는 상지(上地)의 선정이다.
색계의 초선천부터 무색계의 유정지(有頂地)까지 각각 하나의 근분정이 있어서 모두 여덟 가지 근분정이 있다.
미지지(未至地)는 초선천(初禪天)의 근분정(近分定)에 특히 아직 이르지 않은 지위이며, 아직 욕계의 산지(散地)로부터 상계상지(上界上地)의 근본정(根本定)에 이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십일근(十一根), 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3무루근(無漏根,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ㆍ의근(意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이다.
由此應知意地慼受,純受苦處,亦苦根攝。此等聖教,差別多門,恐文增廣故,不繁述。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제6식인 의지(意地)의 근심의 감수작용인 척수(慼受)가 순전히 고통만을 받는 곳에 있으면, 고근(苦根)에만 포함될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갖가지 다른 법문이 많이 있지만, 다 열거하면 문장이 너무 길어질까 염려되므로 간략히 서술할 뿐이다.
有義六識,三受不俱。皆外門轉,互相違故。五俱意識,同五所緣,五三受俱,意亦應爾,便違正理故,必不俱。
제1사(第一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6식(六識)에는 세 가지 삼수(三受)가 함께하지 않으니, 모두 감각기관인 외문(外門)에서 전전하면서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5구의식(五俱意識)은 5식(五識)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같이하며, 5식이 삼수(三受)와 함께한다면, 의식도 역시 그러해야 할 것이니,
만약 그러하다면 문득 바른 논리인 정리(正理)에 위배되는 것으로, 따라서 반드시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삼수(三受)와 함께하거나 함께하지 않는 구불구(俱不俱)를 판별한다.
'瑜伽'等說藏識一時,與轉識相應三受,俱起者,彼依多念,如說一心,非一生滅無相違過。
'유가사지론' 등에서 장식(藏識)은 일시에 전식과 상응하는 삼수(三受)와 함께 일어난다고 말한 것은, 여러 찰나의 생각에 의한 것으로, 일심(一心)이라고 말할지라도 하나의 생멸인 일생멸(一生滅)이 아닌 것과 같은 것으로, 따라서 위배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