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원문과 해설

18 명법품(明法品) 10

Skunky 2021. 7. 27. 14:36

③ 十種自在

善知衆心故로 能普現身하며 善巧說法故로 音聲無碍하며 得心自在故로 巧說大法에 無能沮壞하며

得無所畏故로 心無怯弱하며 於法自在故로 無能過者하며 於智自在故로 無能勝者하며

般若波羅蜜이 自在故로 所說法相이 不相違背하며 辯才自在故로 隨樂說法에 相續不斷하며

陀羅尼自在故로 決定開示諸法實相하며 辯才自在故로 隨所演說하야 能開種種譬喩之門하며

大悲自在故로 勤誨衆生에 心無懈息하며 大慈自在故로 放光明網하야 悅可衆心하나니라

 

善知衆心故(선지중심고), 대중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能普現身(능보현신)하며몸을 두루 나타낼 수 있고

善巧說法故(선교설법고)선교하게 법을 설하므로 音聲無碍(음성무애)하며음성에 걸림이 없으며,

得心自在故(득심자재고)마음에 자재함을 얻었기에 巧說大法(교설대법)큰 법을 교묘히 설함을

無能沮壞(무능저괴)하며저지할 수 없으며,

得無所畏故(득무소외고)무소외를 얻었으므로 心無怯弱(심무겁약)하며, 겁약한 마음이 없으며,

於法自在故(어법자재고)법에 자재함을 얻었기에 無能過者(무능과자)하며능가할 이가 없으며,

於智自在故(어지자재고)지혜에 자재함을 얻었기에 無能勝者(무능승자)하며능히 이길 자가 없으며,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自在故(자재고)반야바라밀이 자재한 까닭에 

所說法相(소설법상), 말하는 법 모양[法相] 不相違背(불상위배)하며서로 위배되지 않으며, 

辯才自在故(변재자재고)변재가 자재하기 때문에

隨樂說法(수락설법) 相續不斷(상속부단)하며좋아하는 대로 연속하여 끊임없이 법을 설하며,

陀羅尼自在故(다라니자재고)다라니에 자재하므로 

決定開示諸法實相(결정개시제법실상)하며제법의 실상을 결정코 열어 보이며, [決定=분명하게]

[불교의 꽃은 보살행이지만 諸法實相= 緣起ㆍ因緣ㆍ空ㆍ無我ㆍ無常 등의 이치에 대해서 확연하게 이해함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보살행을 해도 아까운 생각, 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辯才自在故(변재자재고)변재가 자재한 까닭에 隨所演說(수소연설)하야연설할 내용에 따라

能開種種譬喩之門(증개종종비유지문)하며, 갖가지 비유의 문을 열 수 있으며,

大悲自在故(대비자재고), 대비가 자재한 까닭에  [가르칠 회)

勤誨衆生(근회중생)중생을 힘써 가르치기에  心無懈息(심무해태)하며, 마음이 쉬지 아니하며,

大慈自在故(대자자재고)대자가 자재한 까닭에 

放光明網(방광명망)하야광명망을 놓아 悅可衆心(열가중심)하나니라대중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諸法實相 일체 만법의 진실한 체상 즉,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면모를 의미하는 불교교리.

범어 dharmatā, sarva-dharmāṇāṃ dharmatā, dharmāṇāṃ gambhīra-dharmatā, bhūta 등의 한역이다. 초기불교의 삼법인(三法印)과 같이, 대승불교에서 진리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제법(諸法)은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말하며, 나아가 일체 존재나 일체 현상을 포괄하는 말이다. 실상(實相)은 진실한 체상이나 평등한 실재(實在) 또는 불변의 이치[理] 등의 뜻이다. 초기불교에서 ‘일체법은 오온이다’고 하거나 혹은 십이처·십팔계라고 설하고, 그것은 모두 무상(無常)이며 고(苦)이며 무아(無我)라고 설한다. 이때 오온·십이처·십팔계는 곧 ‘제법’이며, 무상·고·무아는 ‘실상’에 해당한다.

제법실상에 관한 교설은 대승불교 경전 가운데 주로 반야경류와 『법화경』에 설해져 있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권17 「심오품(深奧品)」 제57 (T.8, 0345c08)에서, “제법실상은 설할 수 없으나,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 설하신다[諸法實相不可說 而佛以方便力故說].”고 한다. 『법화경』 권1 「방편품(方便品)」 제2에서는, “부처님이 성취한 가장 희유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법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이라야 제법의 실상을 완전히 다 알 수 있다[佛所成就第一希有難解之法 唯佛與佛乃能究盡諸法實相].”고 하였다. 경문에 의하면, 제법실상은 곧 부처님이 깨달아 성취한 내용을 가리키며 부처가 아닌 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 제법실상은 말로 나타낼 수 없으며 오직 방편을 써야만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법화경』에서는 위의 문장에 이어서 “이른 바, 제법의 여시상(如是相)·여시성(如是性)·여시체(如是體)·여시력(如是力)·여시작(如是作)·여시인(如是因)·여시연(如是緣)·여시과(如是果)·여시보(如是報)·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는 제법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인 것으로, 십여시(十如是)라고 한다.

천태 지의(天台智顗)는 여기서 ‘제법’을 십법계(十法界)로 해석하였다. 십법계는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6도(道)와 성문·연각·보살·부처의 4성(聖)의 세계를 말한다. 이 열 가지의 법계는 육범사성(六凡四聖)이라고도 하는데, 탐욕·성냄·미혹으로 뒤덮인 지옥계로부터 인간과 천상계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과 깨달음을 이룬 부처의 세계를 모두 포함한다. 결국, ‘제법의 십여시’라고 함은 지옥부터 부처의 세계에 이르는 일체 존재에 각각 십여시가 모두 갖춰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제법실상이라는 것이다.

십여시에서 상(相)이란 제법의 외형적으로 차별된 모습이고, 성(性)은 존재에 내재하는 본성, 체(體)는 그러한 모습과 본성을 갖춘 주체, 력(力)은 주체에게 갖춰진 잠재적인 원동력, 작(作)은 밖으로 표출되는 작용, 행위 등이고, 인(因)은 작용의 직접적인 원인, 연(緣)은 간접적인 조건, 과(果)는 행위에 따른 결과이며, 보(報)는 시간이 지나서 받는 결과이다.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에서 처음의 상(相)과 마지막의 보(報)가 궁극에 같다는 뜻이다 즉, 이상의 여시상으로부터 여시보까지가 모두 한결같은 실상(實相)으로 돌아가므로 궁극에 평등하다고 한다.

여러 대승 경전과 논서에서는 이와 같은 제법실상에 대하여 다양하게 설하고 있다. 『대품반야경』의 주석인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8에서는 “제법실상은 곧 반야바라밀이다.”라고 한다. 예를 들어, 성문(聲聞)의 경우에 무상·고·공·무아 등을 제법의 실상이라고 보더라도 그것은 겨우 자신의 해탈을 구하는 것에 그칠 뿐, 일체 중생을 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함이 아니므로 제법실상을 모두 완전히 갖춘 것이 되지 않는다. 오직 보살이 처음 발심(發心)할 때부터 큰 서원을 세우고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서, 크고 날카로운 지혜로서 일체의 치우친 선정에 머무르지 않고 마침내 모든 언어의 표현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으로 행할 바가 모두 사라진 곳[心行處滅]에 이르러야만 이것을 마침내 제법실상을 다 아는 것이라고 한다.

『중론(中論)』 권3 「관법품(觀法品)」에서는 불생(不生)·불멸(不滅)·부단(不斷)·불상(不常) 등의 모든 희론(戱論)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행함[心行處]이 사라진 것을 제법실상이라고 하였다. 삼론종(三論宗)의 길장(吉藏)은 『대승현론(大乘玄論)』 권4에서, “실상은 반야의 진실한 지혜[實智]가 비추는 바이다”라고 하고, 천태의 『마하지관(摩訶止觀)』 권1에, “실상은 원돈지관(圓頓止觀)이 비추어보는 바의 경계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법화현의』 권8 하와·권9 상에서는 실상의 여러 가지 이명(異名)을 들었다. 즉, 묘유(妙有)·여여(如如)·허공(虛空)·불성(佛性)·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 등 수많은 명칭들이 곧 실상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또, 정토종의 경우는 제법실상을 아미타불의 명호라고도 하며, 진언종에서는 아자(阿字)가 본래 생겨남 없음이 곧 제법실상이라 한다. 또 화엄종에서는 일진법계(一眞法界)를 제법실상이라 하며, 법상종에서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제법실상이라 한다. 선종에서는 제불(諸佛) 혹은 역대조사(祖師)들의 오도(悟道)를 표현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 곧 제법실상이라고 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법실상은 대승불교와 중국불교의 모든 종파에서 중요시 되어온 개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법화경』의 핵심 내용이라는 점이다.

원효는 『법화종요(法華宗要)』에서, “법화경은 바로 광대하고 심원한 일승(一乘)의 실상(實相)을 종(宗)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또 ‘실상이란 여래장(如來藏)이며, 법신(法身)의 체(體)이며 변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불 여래의 법신의 성품은 모든 범부나 성문·벽지불 등과 같아서 차별이 없다.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있는 바이므로 능히 일체 존재가 함께 본원(本原)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법화경』에서는 성문·연각·보살이라는 삼승(三乘)의 방편문을 열어서[開] 일승의 진실문을 드러냄[顯]을 궁극의 목적으로 한다[開三顯一]. 제법실상이란 바로 일승 진실의 구체적 내용이다.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바이지만, 그것은 모든 범부와 일체 존재가 동등하게 갖추고 있는 진실한 체상임을 일깨워주고자 한 교설이다.

**제법실상 불교의 근본진리를 가리키는 용어의 하나로, 용수(龍樹:150∼250?)에 의해 공(空)의 의미도 포함한 것으로 강조된 이래 대승불교를 일관하는 근본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내용은 종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론종(三論宗)에서는 공리(空理)를 제법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공리는 유(有) ·공(空)을 함께 파(破)하며,
파하는 일 그 자체도 집착(執着)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이라 한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제법실상을, 3중(三重)으로 구별한다.
초중(初重)은 인연(因緣)에 따라 생긴 제법이 그대로 공임을 가리켜 실상이라고 한다.
차중(次重)은 공과 유를 제법으로 규정하고 별도로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의 이치를 세워 실상이라고 한다.
말중(末重)은 차별의 현상을 모두 제법이라 하고, 그 제법이, 삼제(三諦:空 ·假 ·中)가 원융(圓融)된 참 모습을 가리켜 실상이라고 한다. 즉 일체가 완전히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선종(禪宗)에서는 본래의 진면목(眞面目)이 제법의 실상이라 한다.
정토종(淨土宗)에서는 진여(眞如)를 제법실상이라 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명호(名號)를 실상법이라고 한다.
이러한 실상은 대승불교의 현실긍적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④ 演說如來法

菩薩이 如是處於高廣師子之座하야 演說大法에 唯除如來와 及勝願智諸大菩薩하고

其餘衆生은 無能勝者하며 無見頂者하며 無暎奪者라 欲以難問으로 令其退屈이 無有是處니라

 

菩薩如是處於高廣師子之座(여시처어고광사자지좌)하야, 보살이 이렇게 높고 넓은 사자좌에 앉아서 

演說大法(연설대법)대법(명법품)을 연설하는 것은 如來(유제여래), 오직 여래와 

及勝願智諸大菩薩(급승원지제대보살)하고수승한 원력과 지혜를 지닌 대보살을 除=제외하고는

其餘衆生(기여중생)그 밖의 다른 중생들은 無能勝者(무능승자)하며이길 수 있는 이도 없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서른네살 부터 통도사 강주했습니다. 거절할 수가 없어서 덜렁 수락해 놓고, 실력도 부족하고 지혜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감당해야 되는가 해서, 보수동 헌 책방에 가서 대학에서 공부하는 교육학에 관계되는 책은 다 사고, 그 다음에 장안에서 강의 잘 한다고 소문난 사람들의 강의 잘하는 법에 관한 책들을 사서 독파를 했는데, 딱 한 마디 결론은  “준비밖에 없다. 그래서 그 때부터 제 스스로 약속하기를 ‘한 시간 강의를 위해서 무조건 열 시간 이상 준비한다.’는 것이 저의 좌우명이 되었습니다無能勝者 자기가 그렇게 준비하는데 누가 이기겠습니까?]

無見頂者(무견정자)하며이마를 볼 수 있는 이도 없으며 → 가장 높은 사람이며

[부처님 탄생하셨을 때에 부처님 이마를 보려고 하니까 그 이마가 非想非非想處天까지 올라가서 도저히 볼 수 없더라는 식으로 부처님의 높음을 표현하는 것이 無見頂者입니다.] 

無暎奪者(무영탈자)빼앗을 수 있는 이도 없어서 [비칠 영빼앗을 탈]

欲以難問(욕이난문)으로어려운 문제로 令其退屈(영기퇴굴)그를 굴복시키고자 해도 

無有是處(무유시처)니라방법이 없으리다.

[그 사람을 아주 난처하게 할 어려운 질문꺼리를 준비 많이 해서 그 사람을 굴복시키려 해도 할 수 없다]

 

⑤ 正法受持 自莊嚴  정법을 수지해서 스스로 장엄한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得如是自在力已에 假使有不可說世界無量廣大道場에 滿中衆生하야

一一衆生의 威德色相이 皆如三千大千世界主라도 菩薩이 於此에 纔現其身에 悉能暎蔽如是大衆하야

 以大慈悲로 安其怯弱하며 以深智慧로 察其欲樂하며 以無畏辯으로 爲其說法하야 能令一切로 皆生歡喜하나니

 

佛子 菩薩摩訶薩불자여, 보살마하살이 得如是自在力已(득여시자재력이), 이렇게 자재한 힘을 얻으면 

假使有不可說(가사유불가설) 世界無量廣大道場(세계무량광대도량), 가사 어떤 불가설 세계의 무량 광대한 도량에 

滿中衆生(만중중생)하야중생들이 가득하야 一一衆生(일일중생)그 낱낱 중생의

威德(위덕) 色相(색상)위덕과 색상이

皆如三千大千世界主(개여삼천대천세계주)라도모두 삼천대천세계의 주인과 같다 해도 

菩薩於此(어차)보살이 거기에 纔現其身(재현기신)잠시만 나타나도 [겨우 재]

悉能暎蔽(실능영폐)如是大衆(여시대중)하야, 그런 대중의 위세를 능히 덮어버리고 

以大慈悲(이대자비)대자비로써 安其怯弱(안기겁약)하며그들의 겁약(겁내고 두려워함)을 안정시키고  

以深智慧(이심지혜)심오한 지혜로 察其欲樂(찰기욕락)하며그들의 욕락을 살피며 

以無畏辯(이부외변)으로두려움 없는 변재로 爲其說法(위기설법)하야그들에게 법을 설하여 

能令一切 皆生歡喜(능령일체 개생환희)하나니모두를 기쁘게 합니다.

 

⑥ 正法受持 十種德  정법을 수지하는 열 가지 덕

何以故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成就無量智慧輪故며 成就無量巧分別故며 成就廣大正念力故며

成就無盡善巧慧故며 成就決了諸法實相陀羅尼故며 成就無邊際菩提心故며 成就無錯謬妙辯才故며

成就得一切佛加持深信解故며 成就普入三世諸佛衆會道場智慧力故며 成就知三世諸佛同一體性淸淨心故며

成就三世一切如來智와 一切菩薩大願智로 能作大法師하야 開闡諸佛正法藏하며 及護持故니라

 

何以故왜냐하면佛子 菩薩摩訶薩불자여 보살마하살이

成就無量智慧輪故(성취무량지혜륜고)무량한 지혜륜을 성취한 때문이요 

成就無量巧分別故(성취무량교분별고), 한량없는 교묘한 분별을 성취한 때문이며, 

成就廣大正念力故(성취광대정념력고)광대한 정념의 힘을 성취한 때문이요

成就無盡善巧慧故(성취무진선교혜고)다함 없는 선교한 지혜를 성취한 까닭이며,

成就決了諸法實相陀羅尼故(성취결료제법실상다라니고), 제법의 실상을 결정코 요지하는 다라니를 성취했기 때문이요

成就無邊際菩提心故(성취무변제보리심고)끝없는 보리심을 성취한 때문이며,

成就無錯謬妙辯才故(성취무착류묘변재고), 착오없는 미묘한 변재를 성취한 때문이요[ 그릇될 류]

成就得一切佛加持深信解故(성취득일체불가지심신해고), 모든 부처님의 가지를 얻어 깊은 신해를 성취했기 때문이며, 

成就普入三世諸佛衆會道場智慧力故(성취보입삼세제불중회도량지혜력고),

삼세제불의 중회도량에 두루 들어가 지혜력을 성취했기 때문이요

成就知三世諸佛同一體性淸淨心故(성취지삼세제불동일체성청정심고),

삼세제불이 동일한 체성임을 알아 청정심을 성취했기 때문이며,

成就三世一切如來智(성취삼세일체여래지)삼세의 모든 여래의 지혜와 

一切菩薩大願智(일체보살대원지) 모든 보살의 큰 서원의 지혜를 성취하고 

能作大法師(능작대법사)하야능히 큰 법사가 되어 

開闡諸佛正法藏(개천제불정법장)하며, 부처님들의 정법장을 열어 펼치고 

及護持故(급호지고)니라수호하여 지키기 때문입니다."

 

四, 重頌

(1) 成就 修行體

爾時에 法慧菩薩이 欲重宣其義하사 承佛神力하고 而說頌言하사대

心住菩提集衆福하며 常不放逸植堅慧하며 正念其意恒不忘일새 十方諸佛皆歡喜로다

念欲堅固自勤勵하며 於世無依無退怯하며 以無諍行入深法일새 十方諸佛皆歡喜로다

佛歡喜已堅精進하야 修行福智助道法하야 入於諸地淨衆行하며 滿足如來所說願이로다

如是而修獲妙法하고 旣得法已施群生호대 隨其心樂及根性하야 悉順其宜爲開演이로다

菩薩爲他演說法호대 不捨自己諸度行하며 波羅蜜道旣已成에 常於有海濟群生이로다

晝夜勤修無懈倦하야 令三寶種不斷絶하며 所行一切白淨法으로 悉以廻向如來地로다

不捨自己諸度行=솔선수범 

爾時 法慧菩薩 欲重宣其義하사 承佛神力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 법혜보살이 그 뜻을 거듭 펼치고자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게송으로 말했다.

[지금까지의 중요한 내용을 게송=산문으로 간단하게 다시 요약합니다.] 

心住菩提集衆福(심주보리집중복)하며, 마음을 보리에 두어 集衆福= 여러 복을 모으고

常不放逸植堅慧(상부방일식견혜)하며방일하지 않고 견고한 지혜 심으며

正念其意恒不忘(정념기의항불망)일새그 뜻을 바로 생각하여 잊지 않으니

十方諸佛(시방제불) 皆歡喜(개환희)로다시방의 부처님들 모두 환희하시네 

 

念欲堅固自勤勵(념욕견고자근려)하며念欲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욕 견고히 스스로 힘써서[ 힘쓸 려]

於世無依無退怯(어세무의무퇴겁)하며세상에 의지함도 물러섬도 없고

以無諍行入深法(이무쟁행입심법)일새. 다툼 없는 행으로 심오한 법에 드니

十方諸佛皆歡喜(시방제불개환희)로다시방의 부처님들 모두 환희 하도다

 

佛歡喜已(불환희) 堅精進(견정진)하야, 부처님 기뻐하시니 더욱 정진하여

修行福智助道法(수행복지조도법)하야복덕 지혜 조도법을 닦아 익혀서

入於諸地淨衆行(입어제지정중행)하며, 모든 지위 들어가 모든 행 청정히 하여

滿足如來所說願(만족여래소설원)이로다여래가 설하신 원을 만족히 하네

[부처님은 兩足尊= 복과 지혜가 만족한 분. 福智가 주 바라밀이라면 그 나머지는 助道法= 그것을 돕는 여러 가지 방법들도 골고루 다 해서 無邊勝福(무변승복). 가이없는 勝福= 수승한 복을 다 갖춰야 되는 것 아닙니까? 편식하면 건강에도 안 좋듯이 원만한 인격자가 되는 데는 치우친 수행은 안 되는 겁니다.

저도 한 때는 무당을 비판하고 얼굴 찡그리고 그랬는데, 나이가 들고 철이 드니까, 그것도 다 까닭이 있고 이유가 있고, 그 나름대로 소득이 있습니다. 거기에 떨어져 버리면 안 되지만 꼭 배척할 것만은 아닙니다.

봉암사 결사를 높이 평가하는데에 오점이 칠성각, 산신각 없애고 심지어 두드려 부쉈다는 소문까지 날 정도니까 성철스님도 그 때는 젊은 객기에 그렇게 했지, 철이 들어서는 아마 후회했을 겁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협소하지 않고 광대합니다. 다 이해하고 감싸고 받아들여서 바른 길로 회향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산신각에 왔다고, 그것은 불법 아니라고 배척하는 것은 참 좁은 소견이지요.  “열심히 산신각에 가서 기도해라. 칠성단에 실 긴 것 많이 올려라. 아이 명줄 길어진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날 정법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올 수가 있는 것이지요. 助道法조도법도 필요합니다.]

 

如是而修獲妙法(여시이수획묘법)하고, 이렇게 닦아서 묘법을 얻고  [굳게 정진해서복과 지혜와 조도 법을 수행해서, 모든 지위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행을 청정하게 닦으면 결국은 미묘한 법을 얻게 된다]

旣得法已(기득법이)하야 施群生(시군생)호대, 법을 기왕 얻으면 중생에게 베풀되 [旣 이미 기]

隨其心樂及根性(수기심락급근성)하야그들의 바램이나 근성에 따라 

悉順其宜爲開演(실순기의위개연)이로다. 그 합당한 대로 열어 펼치네 

 

菩薩爲他演說法(보살위타연설법)호대보살은 남을 위해 법을 설하면서도 

不捨自己諸度行(불사자기제도행)하며, 자기의 바라밀행을 버리지 않아서

[不捨自己諸度行 남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터 먼저 바라밀행을 솔선수범하는 것]

波羅蜜道旣已成(바라밀도기이성), 바라밀도를 기왕 이루게 되면

常於有海濟群生(상어유해제군생)이로다. 항상 삼유의 바다에서 중생을 제도하네

[有海삼유= 욕계ㆍ색계ㆍ무색계]

 

晝夜勤修無懈倦(주야근수무해권)하야, 주야로 힘써 닦기에 게으르지 않고  [倦 게으를 권, 懈 게으를 해]

令三寶種不斷絶(령삼보종부단절)하며, 삼보의 종성을 끊기지 않게 하며

所行一切(소행일체) 白淨法(백정법)으로, 행한 일체의 청정한 법으로 

悉以廻向如來地(실이회향여래지)로다모두 여래의 지위에 회향하도다

[白淨法= 선법

승의법(勝義法) 열반(깨달음)은 常이고 善이며, 不變不易의 가장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勝義法이라고 하고, 여기에 대해서 불교의 교리를 法相法이라고 한다. (俱舍論 卷一)

승의(勝義)는 第一義·眞實이라고도 하며, 最勝眞實의 道理를 말하며, 世俗 世間通俗慣用을 말함. 眞如나 열반과 같이 世間通俗을 넘어선 眞理를 勝義諦, 世間通俗에 있어서의 眞理를 世俗諦라고 한다. 無爲의 善法은 勝義善으로, 有爲의 善法 혹은 有漏의 善은 世俗善이다. 모든 有漏心에 의한 行은 世俗으로, 그런 까닭에 有漏心을 世俗心, 世俗을 대상으로 하는 有漏智를 世俗智, 世俗智에 의해서 번뇌를 끊는 것을 世俗道라고 한다. 

또 勝義의 말은,「勝義法과 法相法」,「勝義根과 扶塵根」으로도 쓰인다. 成唯識論 卷八에는 勝義·世俗을 각기 3종으로 나누어, 3勝義·3世俗을 세운다.

(1) 義勝義(뛰어난 지혜의 대상이 되는 것. 곧 眞如). (2) 得勝義(證得해야 할 열반). (3) 行勝義(正行勝義라고도 한다. 훌륭한 境界에 향해서 이루는 無漏智). 이것들은 四勝義諦중의 제4·제3·제2에 해당함. 또 遍依圓의 三性에 배대하여 3世俗을 세운다. (1) 假世俗(自性實體가 없어서 잠정적으로 이름 뿐인 것[遍計所執性]). (2) 行世俗(모든 有爲法. 변천하는 無常이기 때문에[依他起性]). (3) 顯了世俗(번뇌에 더럽혀진 依他起를 끊고 遍計所執이 없는 곳에 나타나는 眞如[圓成實性]). 이것들은 四世俗諦중의 제1, 제2·3, 제4에 해당한다. 同卷九에서는 이 3世俗을 모두 依他起性에 거두어 勝義라 함은 圓成實性이라고 한다. 顯揚聖敎論 卷十六에는, 7종의 眞如를 勝義諦로 하고, 同卷六에는 3世俗을 세운다. (1) 世間俗(밭이나 집과 같이 그 체가 없이 다만 이름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 (2) 道理俗(蘊·處·界와 같이 그 體가 있어서 세워지는 것). (3) 證得俗(四沙門果와 같이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세워지는 것). 이것들은 四世俗諦중의 처음의 3에 해당한다.]

 

(2) 修行成德

菩薩所修衆善行이 普爲成就諸群生하야 令其破闇滅煩惱하며 降伏魔軍成正覺이로다

如是修行得佛智하야 深入如來正法藏하야 爲大法師演妙法하니 譬如甘露悉霑灑로다

慈悲哀愍徧一切하며 衆生心行靡不知하야 如其所樂爲開闡 無量無邊諸佛法이로다

進止安徐如象王하며 勇猛無畏猶師子하며 不動如山智如海하며 亦如大雨除衆熱이로다

爾時에 法慧菩薩이 說此頌已에 如來가 歡喜하시며 大衆이 奉行하니라

 

菩薩所修衆善行(보살소수중선행)보살이 닦아 익힌 모든 선행은

普爲成就諸群生(보위성취제군생)하야모든 중생을 성취하기 위함이라

令其破闇滅煩惱(영기파암멸번뇌)하며어두움 깨뜨리고 번뇌를 멸하게 하며 

降伏魔軍成正覺(항복마군성정각)이로다. 마군을 항복시켜 정각을 이루게 하네 [항복할 항]

 

如是修行得佛智(여시수행득불지)하야이렇게 수행하여 부처님 지혜 얻고 

深入如來正法藏(심입여래정법장)하야여래의 정법장=정법의 창고에 깊이 들어가

爲大法師演妙法(위대법사연묘법)하니, 큰 법사되어 묘법을 연설하니

譬如甘露悉霑灑(비여감로실점쇄)로다. 마치 감로수를 고루 뿌려주는 것 같네 [ 젖을 점,  뿌릴 쇄]

 [마치 감로수가 뿌려져서 모든 이를 골고루 적시는 것과 같도다]

 

慈悲哀愍遍一切(자비애민편일체)하며자비로 일체를 두루 애민하며 [두루 편]

衆生心行靡不知(중생심행미불지)하야, 중생의 심행=마음, 마음 씀씀이 모르는 것이 없어서

如其所樂爲開闡(여기소락위개천), 그들 좋아하는 대로 [열 개, 열 천]

無量無邊諸佛法(무량무변제불법)이로다무량 무변한 불법을 열어 펼치네 

 

進止安徐如象王(진지안서여상왕)하며, 진행과 멈춤이 안정되기는 코끼리 같고 [象王큰 코끼리]

[나아가고 멈추는 것이 편안한 徐= 서행을 해야 됩니다.]

勇猛無畏猶師子(용맹무외유사자)하며, 용맹하고 두려움 없기는 사자 같으며

不動如山智如海(부동여산지여해)하며부동하기 태산 같고 지혜는 바다 같으며

亦如大雨除衆熱(역여대우제중열)이로다. 모든 열을 식혀주는 소나기 같네

 

이때에 法慧菩薩(법혜보살)법혜보살이 說此頌已(설차송이)이 게송을 설하자

如來 歡喜(환희)하시며, 여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大衆 奉行(봉행)하니라대중들이 받들어 행했다. 행하더라.

[[과학과 종교의 차이

연구실에서 과학자가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토대로 계속적으로 다른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장미꽃을 연구하는 과학자입니다. 그는 지금 장미꽃의 색깔에 있는 효소와 분자의 배열을 연구 중입니다. 그런데 하얀 장미였든지 붉은 장미였던지 간에 분자 배열은 같게 되었다라는 것도 확인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는 장미의 속에 있는 녹색을 띠는 색소도 함께 연구 중입니다. 이러한 연구의 성과로 앞으로는 청장미, 흑장미 여러 가지의 장미꽃이 탄생될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는 별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그는 별의 자전주기와 어떤 별은 크기와 형태 또는 온도 등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틀린지를 연구하는 것이 그의 주된 과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체망원경도 필요하고, 고성능 계산기가 필요하며, 고성능 컴퓨터도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지구와의 거리와 별이 갖고 있는 특성들을 캐내는 과학자는 정열을 쏟기 때문입니다.

이상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지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과학자는 이것이 왜라는 질문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분석입니다. 어떻게, 혹은 , 언제,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죽는 알아내는 것이 과학자가 해야 과제입니다. 그래서 장미는 무엇 무엇 때문에 장미꽃이 핀다든지, 혹은 무엇 무엇 때문에 붉은 장미가 핀다든지 하는 것을 캐내는 그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종교에서는 장미꽃이 것을 학문으로 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 꽃이 피느냐' 라든지 '어떤 구조로 되었는가' 라든지에 관심은 있으나 그것은 학문의 분야입니다. 정신의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신은 '! 장미가 어느 봄날 차가운 땅을 뚫고 나오더니 약간은 붉은 색을 연초록 색의 잎이 나고, 얼마 있다가 꽃봉오리가 맺더니 꽃이 피는구나' 하면서 꽃에 감사를 드립니다.

꽃이 피기까지는 속의 수분과 양분등의 필요한 모든 물질을 그가 좋을 대로 성장하는 썼을 것이고, 가시를 만들어야 영양, 잎을 만들어야 영양, 먼저 만든 잎을 유지하며 키워가는 영양과 앞으로 키가 있는 영양과 이루 헤아릴 없는 복잡한 과정을 하나도 잘못됨이 없이 수행해 나가는 과정과 신비.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장미 나무가 자라며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냐? 하는 장엄한 생명을 신성시하는 태도를 종교라고 보면 것입니다. 작년에 했던 그대로 하나도 어김없이 똑같은 잎을 만들며 꽃을 만들어 내는 그의 실행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영리하고 모든 것을 같아도 실은 모두 모릅니다. 장미는 스스로 조절할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있습니다. 완전히 自己化시키는 천재성이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가 담당하는 과정이 있고, 잎이 갖고 있는 능력은 다른 곳에서 노력할 것입니다. 녹색을 띠게 하는 색소 공장과 기타 여러 가지의 화학 공장이 바로 잎이라는 것을 알면 것입니다. 잎을 통하여 장미는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디에선가는 모든 기능을 통제도 하며 기능도 발휘하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몸의 줄기인지 또는 뿌리인 지도 모릅니다.

장미나 어떤 식물이라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노하우를 그들 식물은 절대로 잃어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만 위대한 알지만 실은 작은 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위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땅을 지키고 있는 것만이라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만약 식물도 동물처럼 움직여야 겠다고, 움직이는 식물이 되어 모두 좋은 곳을 차지하고 산다고 합시다. 정말로 때부터는 모두 죽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식물들은 어떠한 환경이라도 아무 불평 없이 그들이 태어난 자리를 조금도 이동하지 않고 지켜 나갑니다. 땅의 황폐를 막아주고 기름진 땅을 만들어 주는 공덕이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땅에 찾아온 공덕주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식물을 찬탄하는 것이 바로 종교일 것입니다. 장미가 갖고 있는 위대성을 인간에게 일깨워 주는 일은 종교의 몫입니다. 종교인은 지구상에서 있는 모든 존재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있도록 하여 주는 심성을 키워 주어 그들이 갖고 있는 위대성을 지켜 보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 그들과 우리들 사이에 얼만큼의 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내 것이 과학입니다. 그러나 ' 별이 생겼는지, 별은 곳에 생기지 않으면 되었는지, 그리고 별은 크기로 있는 것인지, 지금 생겼는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닌 종교는 별을 그러한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몰라도 괜찮습니다. 참으로 신비하지 아니한가? 옛날 옛적에 허공은 지구를 잉태하여 낳아 두었듯이 지금도 그런 일은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신비할 뿐입니다.

그대는 허공의 별을 세지 말라. 그것은 모두 헛수고이다. 왜냐하면 별은 지금도 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이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별들의 생성, 혹은 소멸되는 모든 것을 종교적으로 관찰하면, 그것은 위대한 부처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어느 분이 부처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까 부처님이 창조를 하셨느냐고 질문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이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를 부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봐도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창조라는 단어는 없어도 수도 없이 부처님의 속에서 이루어지고, 사라지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주의 진리는 아는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우주는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길, 인연법으로 생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봐도 그것은 우주공간에서 일어나는 많은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모두 경외스러울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줌을 창조해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반드시 업이 있듯이 물질에게도 모두 업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 업은 바로 我라는 존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각기 갖고 있는 업의 소산인 것입니다. 업은 인연들 맺어 오게 됩니다. 이러한 업이 다른 날에는 저런 업을 안고 오며 때로는 자신이 다른 모양으로 변질되기도 하고, 하여간 없는 일을 업은 한번도 쉼이 없이 계속 그렇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관찰하는 것은 종교의 몫입니다. 이런 것은 심오하기 때문에 청정한 정신을 소유한 자만이 思惟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욕심을 갖지 않고 오직 법계의 질서를 경외심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출처] 임기영 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