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成唯識論) 제4 권 10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4 권 10
有十種,此何唯四?有我見故餘見不生。無一心中有二慧故。
번뇌(번뇌심소)에 열 가지가 있으나, 어째서 이 제7식에는 오직 네 가지뿐인가?
아견(我見)이 있기 때문에 다른 견해의 여견(餘見)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한 마음의 일심(一心)에는 두 가지의 혜(慧)심소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 가지 번뇌심소는 분(忿)ㆍ한(恨)ㆍ부(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해(害)ㆍ교(憍)
如何此識要有我見?二取、邪見但分別生,唯見所斷。此俱煩惱唯是俱生,修所斷故。
어째서 이 제 7식에는 반드시 아견만 있는 것인가?
두 가지 취착된 견해인 이취(二取)인 계금취견(戒禁取見)과 견취견(見取見)과, 사견(邪見)은 다만 후천적으로 분별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인 견소단(見所斷)이며,
이 제 7식과 함께하는 번뇌는 오직 선천적으로 함께 생겨나는 구생(俱生)으로, 수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인 수소단(修所斷)이기 때문이다.
5견(五見, 5견五見 또는 5악견(五惡見), 자세히는 유신견(有身見, 薩迦耶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5가지 잘못된 견해로 나뉘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단순히 견(見)이라 부르기도 한다.
①유신견(有身見, satkāya-drsti, view of individuality, self view, identity view)은 소의신(所依身), 즉 5온(五蘊)의 화합체를 실유(實有)라고 집착하는 견해, 즉 5온의 화합체를 실재하는 나(我) 또는 아소(我所)라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줄여서 신견(身見) 또눈 원어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하여 살가야견(薩迦耶見), 삽가야견(颯迦耶見) 또는 삽가사견(薩迦邪見)이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허위신견(虛偽身見), 괴신견(壞身見) 또는 이전신견(移轉身見)이라고도 한다.
②변집견(邊執見, anta-grāha-dṛṣṭi, extreme views, extreme view)은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 완전히 소멸된다는 견해로, 즉 인과의 상속, 업(業)의 상속 또는 심상속(心相續)을 부정하는단(斷, 단견)과
세간(世間)과 자아(自我)는 사후(死後)에도 없어지지 않고 항상하다는 상(常, 상견)의 두 극단(邊)에 집착하는 견해로, 줄여서 변견(邊見)이라고도 하며, 2가지 변견이라는 뜻에서 2변(二邊)이라고도 하며, 극단적인 견해 또는 두 극단이라고도 한다.
③사견(邪見, mithyā-dṛṣṭi, false view, evil view)은 인과의 도리,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부정하는 견해, 즉 원인[因] · 결과[果] 또는 작용(作用)을 부정하거나, 혹은 선한 일[善事]을 허물거나 파괴하는 오염된 지혜이다. 그리고 사견의 본질적 작용[業]은 선근을 끊고 불선근을 견고히 하고 불선을 낳고 선을 낳지 않는다 것이다
④견취(見取, drstiparāmarśa, adherence to views, view of attachment to views)는 견취견(見取見)이라고도하며,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등을 일으킨 후 이를 고집하여 진실하고 뛰어난 견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면 견취는 저열한 것[劣] 즉 무루성혜[聖] 또는 성도[聖]에 의해 끊어지는 유루(有漏)를 뛰어난 것[勝] 즉 무루(無漏)라고 여기는 것이다
⑤계금취(戒禁取, śīla-vrata-parāmarśa, adherence to observances and rituals, view of rigid attachment to the precepts)는 그릇된 계행(戒行)과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바른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인(因) 아닌 것을 인이라 하고, 참된 해탈도(解脫道)가 아닌 것을 참된 해탈도라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말한다. 계금취견(戒禁取見) · 계금취결(戒禁取結) · 계금등취견(戒禁等取見) · 계도견(戒盜見) · 계도결(戒盜結) · 계취(戒取) · 계취견(戒取見) 또는 계취결(戒取結)이라고 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대자재천(大自在天, Mahesvara)이나 생주신(生主神, prajāpati)을 세간의 참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 개나 소 따위가 죽은 뒤엔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여서 개나 소처럼 풀을 먹고 똥을 먹으며 개와 소의 행동을 하면서 이것이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고 바른 길이라고 집착하는 것, 또는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갠지스강에 목욕하거나 불속에 뛰어드는 것 등이 계금취에 해당한다.
我所、邊見依我見生。此相應見不依彼起。恒內執有我故,要有我見。由見審決疑無容起。愛著我故瞋不得生。故此識俱煩惱唯四。
나의 소유라는 아소(我所)와 변견(邊見, 변집견)은 아견(我見)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니, 제7식과 상응하는 아견은 아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항상 내면적인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므로 반드시 아견이 있는 것이다.
아견(我見)이 살피고 결정하기 때문에 의(疑)심소가 일어날 수 없으며,
아애(我愛)가 자아에 탐착하기 때문에 진(瞋)심소가 일어날 수 없으므로,
이 식과 상응하는 번뇌는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의 네 가지 뿐인 것이다.
見、慢、愛三如何俱起?行相無違,俱起何失?
아견(我見)과 아만(我慢) 및 아애(我愛)의 세 가지 번뇌가 어떻게 함께 일어나는 것인가?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거스러지 않으므로 함께 일어난다고 하는 것에 어떤 과실이 있겠는가?
'瑜伽論'說:“貪令心下,慢令心擧。”寧不相違?
▷외인(外人)의 질문; '유가사지론' 제 58권에서 말하기를, 탐욕은 마음을 비열하게 하고, 아만은 마음을 높인다고 하였거늘, 어째서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分別俱生,外境內境,所陵所恃,麤細有殊。故彼此文義無乖返。
▷답한다; 분별과 구생(俱生), 외부 대상인 외경(外境)과 내부 대상인 내신(內身), 업신여겨진 것과 믿어진 것, 두드러진 것과 미세한 것의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그 문장과 이 문장의 뜻이 어긋나거나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전의를 득하지 못한 상태 즉 아직 번뇌에 물들어 있는 상태의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의 3성의 관점에서의 성질은 유부무기(有覆無記)로, 아뢰야식의 견분(見分: 의식작용)을 끊임없이 자신의 내적 자아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오염된 자아의식으로 작용한다. 구체적으로는,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은 항상 아치(我痴)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4번뇌 즉 4가지의 근본적인 번뇌성의 마음작용과 함께 일어나며, 이들 4번뇌 외에도 함께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는 변행심소에 속한 5가지 마음작용 모두와 별경심소에 속한 혜(慧) 그리고 대수번뇌심소에 속한 8가지 마음작용이 있다. 이들과 4번뇌를 합하면 총 18가지의 마음작용이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과 상응하여 언제나 함께 일어난다.-위키
此意心所唯有四耶?不爾。及餘觸等俱故。有義。此意心所唯九。前四及餘觸等五法。卽觸、作意、受、想與思。意與遍行定相應故。前說觸等異熟識俱,恐謂同前亦是無覆,顯此異彼故,置餘言。及是集義。前四後五合與末那恒相應故。
이 말나식의 심소는 오직 네 가지 뿐인가? 그렇지 않으니, 이밖에도 촉(觸) 등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제1사(第一師)가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말나식의 심소는 오직 아홉 가지로써, 앞에서 말한 ‘아치(我痴)와 아견(我見) 및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네 가지 외에 즉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 등의 다섯 가지 법이니, 말나식은 변행심소와 반드시 상응하기 때문이다.
본 논서 제3권(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9)의 아뢰야식에 상응하는 심소를 설명할 때, 촉(觸) 등은 이숙식과 함께한다고 하였으니, 제 8식에 상응하는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5변행심소와 마찬가지로 역시 덮어서 가릴 수 없는 무부무기(無覆無記)라고 말할 것이 염려되어서, 이 제 7식의 촉 등은 그 이숙식의 촉 등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 외의 여(餘)’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더불어 급(及)’이라는 말은 모음의 집(集)의 뜻이니, 앞의 네 가지와 뒤의 다섯 가지가 합하여 말나식(제 7식)과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는 8식 모두에 언제나 상응해서 함께 작용하는 보편적인 심리작용으로, 이 심소는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성(性) 모두에 두루 일어나며, 3계(界)ㆍ9지(地)의 일체제(一切地)어디에서나 작용하는 것으로,
유심무심(有心無心)의 모든 순간의 일체시(一切時)에 일어나고, 변행의 5심소는 언제나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체구(一切俱)이다. 이에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의 오심소(五心所)가 있다.ㅡ성유식론(成唯識論) 제3 권 1
此意何故無餘心所?謂欲希望未遂合事,此識任運緣遂合境,無所希望,故無有欲。
어째서 이 말나식에는 다른 심소가 없는 것인가? 욕(欲)심소는 이루지 못한 일을 희망하는 것으로, 이 식은 이루어진 대상을 자연적으로 반연하는 것으로 희망하는 바가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말나식에는 욕심소가 없으며,
勝解印持曾未定境,此識無始恒緣定事,無所印持。故無勝解。
승해(勝解)심소는 예전에 결정되지 않은 대상을 분명히 지니는 것으로, 이 식은 아득한 부시로부터 일정한 것을 반연하면서 분명히 지니는 바가 없으므로, 따라서 말나식에는 승해심소가 없으며,
念唯記憶曾所習事。此識恒緣現所受境,無所記憶。故無有念。
염(念)심소는 오직 예전에 익힌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 식은 항상 현재에 받아들인 대상을 반연하며, 기억하는 바가 없으므로, 따라서 말나식에는 염(念)심소가 없으며,
定唯繫心專注一境,此識任運剎那別緣,旣不專一。故無有定。
정(定)심소는 오직 심왕(마음)을 붙잡아서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게 하는 것으로, 이 식은 자연적으로 찰나마다 다른 대상을 반연하며,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므로, 따라서 말나식에는 정(定)심소가 없는 것이며,
慧卽我見。故不別說。善是淨故。非此識俱。
혜(慧)심소는 곧 아견이므로 별도로 말하지 않겠으며,
선(善)심소는 청정한 것이므로 이 말나식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별경심소(別境心所), 별도의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 일어나거나 작용하며, 또는 '특정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 일어나거나, 작용한다는 뜻으로 '두루 작용한다'는 뜻의 '변행(遍行)'의 반대말이다. 별경심소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특정한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서 일어날 때에만 그 마음(8식,심왕, 심법)과 더불어 함께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작용(심소법)들을 말한다
욕(欲, chanda) · 승해(勝解, adhimoksa) · 염(念, smrti) · 정(定, 三摩地, samādhi) · 혜(慧, prajñā)의 5가지.
隨煩惱生必依煩惱,前後分位差別建立,此識恒與四煩惱俱,前後一類,分位無別,故此識俱無隨煩惱。惡作追悔先所造業,此識任運恒緣現境,非悔先業,故無惡作。
수번뇌(隨煩惱)가 생겨나는 것은 반드시 번뇌의 전후 찰나의 분위(分位)의 차이에 의해 건립되는 것이나, 이 말나식은 항상 네 가지의 사번뇌(四煩惱)와 함께해서 전후 찰나에 한 종류로서 분위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 말나식과 함께하는 수번뇌심소는 없는 것이다.
오작(惡作)심소는 예전에 지은 업을 후회하는 것으로, 이 식은 자연적으로 항상 현재의 대상을 반연하며 이전의 업을 후회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오작심소가 없는 것이며,
수번뇌(隨煩惱, upakleśā)는 수혹(隨惑)이라고도 하며,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근본번뇌(根本煩惱, mūla-kleśa)를 따라 일어난 2차적인 번뇌라는 뜻으로, 이 경우에는 수번뇌를 근본번뇌와 구분하여 지말번뇌(枝末煩惱) 또는 지말혹(枝末惑)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는 마음(心, citta)을 따라 일어나서 유정을 괴롭고 혼란스럽게하는 마음작용, 즉 근본번뇌라는 뜻이다.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의미를 통칭하는 것으로, 이 경우의 수번뇌는 곧 일체(一切)의 번뇌 즉 모든 번뇌를 말하며, 이 경우 수번뇌는 번뇌의 여러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睡眠必依身心重昧,外衆緣力有時暫起,此識無始一類內執,不假外緣,故彼非有。尋、伺俱依外門而轉,淺深推度,麤細發言。此識唯依內門而轉,一類執我,故非彼俱。
면(眠)심소는 반드시 신심(身心)의 깊은 어두움과 외부의 여러 연(緣)의 세력에 의하며, 때때로 잠시 일어나는 것이나, 이 식은 아득한 무시로부터 한 종류로 내부에 집착하는 것으로, 외부의 연(緣)을 의뢰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수면 심소는 없는 것이며,
심(尋)ㆍ사(伺) 심소는 함께 감각기관의 외문(外門)에 의지해서 전전하는 것으로, 얕거나 깊게 헤아리며, 구체적이거나 미세하게 언어를 일으키는 것이나, 이 식은 오직 내면에 의지해서 전전하고 한 종류로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말나식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有義。彼釋餘義非理。頌別說此有覆攝故。又闕意俱隨煩惱故。煩惱必與隨煩惱俱,故此餘言顯隨煩惱。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가 ‘그 외의 여(餘)’라는 말의 뜻을 해석한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니, 게송에서 별도로 이것을 유부무기에 포함된다고 말한 때문이며, 또한 식과 함께하는 수번뇌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번뇌는 반드시 수번뇌와 함께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그 외의 여(餘)’라는 말은 수번뇌를 나타내는 것이다.
此中有義。五隨煩惱遍與一切染心相應。如集論說惛沈、掉擧、不信、懈怠、放逸,於一切染污品中,恒共相應。若離無堪任性等染污性成,無是處故。煩惱起時,心旣染污故,染心位必有彼五。煩惱若起必由無堪任、囂動、不信、懈怠、放逸故。掉擧雖遍一切染心,而貪位增但說貪分。如眠與悔雖遍三性心,而癡位增,但說爲癡分. 囂 떠들썩할 효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다섯 가지 오수번뇌(五隨煩惱)가 두루하여서 모든 잡염심과 상응한다고, '대승아비달마집론' 제 4권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ㆍ방일의 심소는 모든 염오심 중에서 항상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며,
무감임성(無堪任性, 혼침) 등에서 떠나서는 염오성이 된다고는 이 '집론'에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번뇌가 일어날 때에는 심왕(마음)이 이미 염오성이므로, 잡염심의 지위에서는 반드시 그 다섯 가지의 오수번뇌(五隨煩惱)가 있는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무감임성(혼침)ㆍ시끄러운 움직임의 효동(囂動, 도거)ㆍ불신ㆍ해태ㆍ방일에 의거하기 때문이며,
도거(掉擧)심소는 모든 잡염심에 두루하지만 탐(貪)심소의 지위에서 증성하므로 다만 탐심소의 일부라고 말하며,
면(眠)ㆍ회(悔) 심소는 세 가지 성품의 삼성심(三性心, 선 불선 무기)의 심왕에 두루하지만, 치(癡)심소의 분상에서 증성하므로 다만 치심소의 일부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제2사가 '삼십송'의 제6게송의 ‘그 외(餘)’라는 말이 수번뇌(隨煩惱)를 가리킨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그에 해당되는 수번뇌의 종류를 열거한 것이며, 이에 다시 네 가지 견해가 있다.
雖餘處說有隨煩惱或六或十,遍諸染心,而彼俱依別義,說遍非彼實遍一切染心。
'유가사지론'의 여러 곳에서는 수번뇌가 혹은 여섯 가지, 혹은 열 가지가 있어서 모든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모두 다른 뜻에 의해서 두루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실제로 모든 잡염심에 두루한 것은 아니다.
본 논서 제55권에서 수번뇌로서 여섯 가지를, 제58권에는 열 가지를 들고 있다.
謂依二十隨煩惱中,解通麤細,
20 가지의 수번뇌 중에서 인식작용, 즉 해(解)가 두드러진 추(麤)와 미세한 세(細)에 통하고
분(忿), 한(恨), 뇌(惱), 부(覆), 광(誑), 첨(諂), 교(憍), 해(害), 질(嫉), 간(慳) 심소 등 열 가지 소수번뇌인 소수혹(小隨惑)은 이해(解)가 오직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성의 마음작용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수번뇌(隨煩惱: 근본번뇌를 의지하여 근본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2차적인 번뇌)라는 것을 뜻하며, 소수번뇌(小隨煩惱)라는 말은 각기 따로 일어나는 2차적인 번뇌를 뜻하며, 각각 따로 일어난다는 것이란, 소수번뇌심소에 속한 마음작용들은 심한 번뇌들, 불선(악)으로 분류되는 번뇌들, 즉 더 오염된 마음작용들이다. '소(小)'가 심하지 않은 번뇌 또는 덜 오염된 마음작용을 의미한다고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無記不善,通障定慧相顯,說六。
무참(無慚)ㆍ무괴(無愧) 심소는 오직 불선(不善)으로서 무기와 불선의 두 가지 성품의(二性)에 통하지 않기 때문이며,
공통적으로 선정(定)과 지혜(慧)를 장애하는 상이 드러나는 혼침ㆍ도거 심소에 의거해서 불신ㆍ해태ㆍ방일ㆍ실념(失念)ㆍ산란ㆍ부정지(不正知) 심소의 여섯 가지로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