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成唯識論) 제4 권 7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4 권 7
有義。前說皆不應理。未了所依與依別故。依謂一切有生滅法,仗因託緣而得生住。諸所仗託皆說爲依,如王與臣互相依等。若法決定,有境爲主,令心、心所取自所緣乃是所依。卽內六處。餘非有境定爲主故。此但如王非如臣等。
호법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바른 논리가 아니어야 하는 것으로, 의지처인 소의(所依)와 의지하는 의(依)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의(依)란, 모든 생멸하는 법이 원인에 의지하고 연(緣)에 의탁해서 생겨나고 머무는 것을 말하며,
의지하고 의탁하는 모든 것을 의지하는 의(依)라고 말하는 것이다.
왕과 신하가 서로 의지하는 것 등과 같이, 어떤 법이 결정적이고, 대상이 있으며, 주체가 되고, 심왕과 심소로 하여금 자신의 인식대상을 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소의(所依, 의지처)이니,
곧 내부의 여섯 인식기관인 내육근(內六根)으로, 다른 것은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인 것도 아니며,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의(所依, 의지처)는 다만 왕과 같으며, 신하 등과 같은 것은 아니다.
故諸聖教唯心、心所名有所依。非色等法無所緣故。但說心所心爲所依,不說心所爲心所依。彼非主故。
그러므로 여러 성교(聖敎)인,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오직 심왕과 심소만을 의지처가 있는 유소의(有所依)라고 이름하였으니, 색법 등이 아니고 인식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심소(마음작용)는 심왕(마음)을 소의(所依, 의지처)로 삼는다고만 말하고, 심소를 심왕의 소의(所依, 의지처)로 삼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그 심소(마음작용)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心, citta)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등에 따르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6식(六識)을 말하며,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 등에 따르면 6식에 제7식의 말나식과 제8식의 아뢰야식을 더한 8식(八識)을 말한다.
마음을 주체(主體) 또는 주관(主觀)의 뜻에서 심왕(心王)이라고도 하며, 집기(集起, citta)의 뜻에서 심법(心法)이라고도 한다. 또한, 마음을 장소 또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지(地, bhūmi)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이란 온갖 심소법(心所法)들, 즉 선(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의 온갖 마음작용들이 일어나고(生) 작용하고(住) 변화하고(異) 사라지는(滅) 공간이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법체계에 따르면, 이러한 주체 또는 공간으로서의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도 유위법(有爲法)의 일종이므로 온갖 마음작용(심소법)들과 마찬가지로, 엄정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 하에, 일어나고(生) 작용하고(住) 변화하고(異) 사라지는(滅) 그러한 법(法, 구체적 존재)이다.
마음작용의 다른 이름인 심소법(心所法)과 심소(心所)는 모두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소유한 법'이라는 뜻의 심소유법(心所有法)의 준말이다. 여기서 '소유(所有)'는 '가지고 있다'는 의미나 '일부분'이라는 의미보다는, 심왕(心王, 즉 마음, 즉 6식 또는 8식, 즉 심법)이 거느리는 권속(眷屬) 또는 신하(臣下)의 뜻이 강하다.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임금(심왕)이라 하고 마음작용(심소, 심소법)을 권속이나 신하(심소)라고 칭하는 명명법에는, 마음과 마음작용을 별개의 실체, 즉 별개의 법(法)으로 여기며 또한 이들 간의 관계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평등한 관계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반면, 모든 것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입장에 있었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당연히 마음작용은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지어낸 것이며 마음에 종속된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마음작용은 현상계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것이므로, 예를 들어 현상계에서 지각작용(受)과 표상작용(想)과 의지작용(思, 즉 行)이 다르고 또한 믿는 마음작용(信)과 믿지 않는 마음작용(不信)이 다르듯이, 현상계의 여러 마음작용들은 서로 확연히 차이가 있으며 또한 이들 마음작용들은 마음과도 그 성질이 확연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 여러 마음작용들을 별도의 실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작용 사이에 작용하는 원리인 '마음과 마음작용의 상응(相應)'을 마치 별도의 실체인 것처럼 가설(假設: 임시로 설치함)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교의를 설명함에 있어 편리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은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 나오는 용어의 대다수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다른 시각에서 일체 존재를 보면서 자신들의 5위 100법의 법체계를 성립시켰다.
그래서 마음작용(심소법)은 '마음과 상응(相應)하는 법들'이라 정의할 수 있다. - 위키
然有處說依爲所依,或所依爲依,皆隨宜假說。由此五識俱有所依,定有四種:謂五色根、六、七、八識。隨闕一種必不轉故。同境、分別、染淨、根本所依別故。
그런데 '유가사지론' 제1권에서는 의지하는 의(依)를 소의(所依, 의지처)로 삼는다고 말하고, 혹은 소의(所依, 의지처)를 의지하는 것으로 삼는다고 한 것은 모두 편의에 따라 가정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에 의거해서 5식의 구유소의(俱有所依)에는 반드시 네 가지가 있으니, 오색근(五色根)ㆍ제6식ㆍ제7식ㆍ제8식을 말하며, 그것들에 수순해서 하나라도 없을 때에는 절대 유전(流轉)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인 오식(五識), 분별(제6식), 잡염ㆍ청정(제7식), 근본(제8식)의 의지처인 소의(所依)가 다르기 때문이다.
聖教唯說依五根者,以不共故,又必同境近相順故。
성교(聖敎)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에서 오직 오근(五根)에 의지한다고만 말한 것은 함께하지 않는 불공(不共)이기 때문이며, 또한 반드시 같은 대상인 동경(同境)이고, 가까우며 서로 수순하는 근상순(近相順)이기 때문이다.
第六意識俱有所依,唯有二種:謂七八識。隨闕一種必不轉故。雖五識俱取境明了,而不定有故非所依。
제6의식의 구유소의(俱有所依)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으니, 제7식(잡염ㆍ청정의 소의所依)과 제8식(근본의)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들에 수순해서 하나라도 없을 때에는 절대 유전하지 않기 때문이며,
5식과 함께하고 대상을 취하는 것이 명료하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독두의식(獨頭意識)이므로 소의(所依, 의지처)는 아닌 것이다.
소의(所依, āśraya)는 의존처(依存處) · 의지처(依止處) · 의지(依止) · 근거(根據) 또는 발동근거(發動根據)를 뜻하며, 능의(能依: 의지하는 자)의 반대이다. 예를 들어, 나무와 풀은 땅에 의존하여, 의지하여, 또는 근거하여 자라는데, 이 때 나무와 풀은 능의에 해당하고 땅은 소의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신(信, 믿음, 청정)은 별경심소에 속한 욕(欲: 희망, 욕구)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작용(業)을 한다.
다른 예로는, 무탐선근(無貪善根) 또는 무탐(無貪)은 '악행을 일으키지 않는 일(惡行不起)'이 일어나는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작용(業)을 한다.- 위키
聖教唯說依第七者,染淨依故。同轉識攝近相順故。
성교(聖敎)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2권에서 오직 제7식에 의지한다고만 말한 것은, 제7식이 잡염ㆍ청정의 소의(所依, 의지처)이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전식에 포함되고 가까우며 서로 수순하는 근상순(近相順)이기 때문이다.
第七意識俱有所依,但有一種謂第八識。藏識若無,定不轉故。如伽他說:
제7식의 구유소의는 다만 한 가지이니, 제8식을 말한다. 만약 장식이 없을 때에는 제7식이 반드시 유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능가경' 제9권의 게송에서 아래처럼 말씀한 바와 같으니;
阿賴耶爲依 故有末那轉, 依止心及意 餘轉識得生。
아뢰야식을 의지하여서 말나식이 전전하며,
심(心, 제8식)과 의(意, 제7식)에 의지하여서 다른 전식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阿賴耶識俱有所依亦但一種,謂第七識。彼識若無,定不轉故。論說藏識恒與末那俱時轉故。又說藏識恒依染污,此卽末那。
아뢰야식의 구유소의도 다만 한 가지이니, 제7식을 말하는 것이며, 만약 제 7식이 없다면 제8식이 절대 유전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장식은 항상 말나식과 동시에 전전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3권에서는 장식은 항상 염오(染汚)에 의지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곧 말나식인 것이다.
而說,三位無末那者,依有覆說。如言四位,無阿賴耶非無第八。此亦應爾。雖有色界亦依五根,而不定有非所依攝。
그런데 '삼십송'의 제 7게송에서 “아라한ㆍ멸진정ㆍ출세도의 삼위(三位)에 말나식이 없다”고 말한 것은 유부무기(有覆無記, nivrtāvyākrta)에 의해서 말한 것이며,
성문ㆍ독각ㆍ불퇴전보살ㆍ여래의 네 가지 지위에는 아뢰야식이 없다고 '유가사지론' 제51권에서 말할지라도, 제8식이 없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도 그러한 것이다.
색계에서는 역시 오근(五根)에도 의지하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지처인 소의(所依)에 포함되지 않는다.
유부무기(有覆無記, nivrtāvyākrta)는 '가림의 부(覆) 또는 장애의 장(障)이 있는 무기(無記)'로,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지만 번뇌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무기를 말하며, 줄여서, 유부(有覆)라고도 한다.
유부무기(有覆無記)는 일단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이숙과(異熟果: 현생에서 타고나는 몸과 마음)를 낳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도(聖道: 출세도, 8정도, 도제, 또는 무루지에 의한 정도)를 가리고 덮은 부(覆)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런 뜻에서 유부무기를 부정(不淨: 맑고 명료하지 못함)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유부무기는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맑고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행에 방해가 되는 무기이다.
예를 들어, 욕계의 번뇌들 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의 2가지 염오견과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 즉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들이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하며,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은 번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유부(有覆)이고 선정의 힘에 의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무기(無記)이다.
識種不能現取自境,可有依義而無所依。心所所依隨識應說,復各加自相應之心。若作是說妙符理教。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은 자신의 현재 대상을 취할 수 없으니, 의지하는 의(依)의 뜻은 있을 수 있지만 소의(所依, 의지처)는 아니며,
심소(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의지처)는 식에 따라서 말해야 하며, 다시 각각 상응하는 심왕을 더하는 것이니, 이렇게 말하면 바른 논리와 성교에 승묘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後開導依,有義五識自、他前後不相續故,必第六識所引生故,唯第六識爲開導依。第六意識自相續故,亦由五識所引生故,以前六識爲開導依。第七、八識自相續故,不假他識所引生故,但以自類爲開導依。
다음 개도의(開導依, 등무간연의)에 대해서 난타 등이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5식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전후 찰나에서 상속하지 않기 때문이고, 반드시 제6식에 이끌려 생겨나기 때문에 오직 제6식만을 개도의로 삼으니,
제6의식은 스스로 상속하기 때문이고 또한 5식에 이끌려 생겨남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전 찰나의 6식을 개도의로 삼으니,
제7식과 제8식은 스스로 상속하기 때문이고, 다른 식에 이끌려 생겨난 것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자기 부류를 개도의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有義。前說未爲究理。且前五識未自在位遇非勝境,可如所說。
若自在位,如諸佛等於境自在,諸根互用任運決定,不假尋求。彼五識身寧不相續?
안혜가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앞에서 말한 것은 아직 바른 논리를 갖추지 못한 것이나, 5식이 자재하지 못한 지위 및 뛰어나지 않은 대상을 만나게 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고 할 수 있으니,
만약 자재한 지위라면, 모든 부처님 등의 8지 이상은 대상에 대해서 자재하고 제근(諸根)이 서로 작용하며, 스스로 일어나고 결정적이며, 심(尋, 찾고 탐구함)ㆍ사(伺, 정밀하게 살핌) 심소를 의지하지 않으니, 그 5식이 어째서 상속하지 않는 것인가?
마음작용간의 차이점으로, 사(伺)는 정밀한 살펴봄의 마음작용 즉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작용으로 사찰(伺察, 정밀하게 살펴봄)이라 하고,
심(尋)은 거친 살펴봄의 마음작용 즉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작용이으로 거친 살펴봄의 심구(尋求: 찾고 탐구함)라 한다.
等流五識旣爲決定、染淨、作意勢力引生,專注所緣未能捨頃,如何不許多念相續?
등류심(等流心)의 5식이 이미 제 6의식의 결정심(決定心)ㆍ염정심(染淨心)ㆍ작의(作意)의 세력에 의해 이끌려 생겨나서, 대상에 집중하여 능히 버릴 수 없는 순간에, 어째서 많은 생각이 상속한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5심(五心)은 객관대상을 인식할 때 일어나는 다섯 가지 마음으로서, 처음 대상에 작용하는 찰나의 마음의 솔이심(率爾心)ㆍ대상이 무엇인지 알려고 추구하는 마음의 심구심(尋求心)ㆍ대상이 어떤 것이라고 결정하는 마음의 결정심(決定心)ㆍ대상을 결정한 후에 선심(善心)이나 악심(惡心) 등을 일으키는 염정심(染淨心)ㆍ염심이나 청정심이 찰나마다 상속해서 같은 마음이 계속되는 등류심(等流心)이다.
故'瑜伽'說:“決定心後,方有染淨,此後乃有等流眼識,善、不善轉。而彼不由自分別力。乃至此意不趣餘境,經爾所時眼、意二識,或善或染相續而轉。如眼識生,乃至身識,應知亦爾。”彼意定顯經爾所時,眼、意二識俱相續轉。
그러므로 '유가사지론' 제 1권에서 말하기를 “결정심 이후에 비로소 염정심이 있고, 그 다음에 등류심의 안식이 있어서 선과 불선으로서 전전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분별력에는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나아가 의(意)가 다른 대상에 나아가지 않을 때에는 그곳의 시간을 지나서 안식과 의식이 혹은 잡염심이나 혹은 청정심으로서 상속하여 전전하며,
안식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신식(身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의 의미는 반드시 그곳의 시간을 지나서 안식과 의식이 함께 상속하여 전전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旣眼識時,非無意識。故非二識互相續生。若增盛境相續現前,逼奪身心,不能暫捨時五識身理必相續。如熱地獄、戲忘天等。
이미 안식이 작용할 때에도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니, 따라서 두 식이 서로 상속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만약 증성(增盛)한 대상이 상속하고 현전하여서 몸과 마음을 바짝 조이는 핍탈신심(逼奪身心)하여서 잠시도 버릴 수 없을 때의 5식은 당연히 반드시 상속하는 것이니, 마치 뜨거운 열 지옥과 육욕천(六欲天)에서 위의 4천(天)인 희망천(戱忘天) 등과 같은 것이다.
논주가 그 해명발언을 논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