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成唯識論) 제4 권 6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 김묘주 번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4 권 6
眼、耳、身根卽三識種,二界、五地爲難亦然。又五識種旣通善惡,應五色根非唯無記。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신근(身根)은 곧 세 가지 식(識)인 안식ㆍ이식ㆍ신식의 종자라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지위인 이지(二地, 계 界)와 오지(五地)에 있어서 비판이 되는 것도 역시 그러하며,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신근(身根)이 각각 안식ㆍ이식ㆍ신식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이 세 가지 식(識)이 욕계와 색계 초선천(初禪天)인 2계(界)ㆍ2지(地)에만 한정되며, 그 원인인 세 가지 근(根)도 2계ㆍ2지에 한정되어야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근이 색계의 4지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 결과인 세 가지 식도 역시 5지(地, 욕계지 색계의 4地)에 항상 있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5식의 종자인 오근(五根)은 이미 선과 악에도 통하고 다섯 가지의 오색근(五色根)은 오직 무기(無記)만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5근(根)이 무부무기인 것은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그것이 5식(五識)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5근도 3성(性)에 통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又五識種無執受攝,五根亦應非有執受。又五色根若五識種,應意識種卽是末那。彼以五根爲同法故。
또한 5식(五識)의 종자를 집수가 없는 무집수(無執受)에 포함시키면, 오근(五根)도 역시 집수가 있는 유집수(有執受)가 아니어야 하며,
또한 오색근(五色根)이 만약 5식(五識)의 종자라고 말한다면, 의식의 종자는 곧 말나식이어야 할 것이니,
'섭대승론석' 제1권에서 다섯 감각기관으로써 같은 동법(同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집수(有執受, upātta)는 사람(유정)의 몸 중에서 감각이 있는 부분을 말하고, 엄밀하게는 심법(心法: 마음)과 심소법(心所法: 마음 작용)이 함께 집지(執持) · 포섭(包攝)하여 의처(依處), 즉 소의(所依: 도구, 감각 기관)나 경계(境界: 대상)로 삼는 색(色, 물질)을 가리키며, 달리 말하면, 현재 시점에서 마음의 지각작용, 즉 5온 중 수온(受蘊: 지각작용)의 소의(所依: 도구, 감각 기관)나 경계(境界: 대상)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무집수(無執受, anupātta)는 머리카락이나 손톱처럼 몸 중에서 감각이 없는 부분을 말한다. 한편, 호흡(숨, 즉, 들숨과 날숨)도 몸에 속한 것으로 보는데, 숨은 무집수에 속한다. 숨을 몸에 속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불교의 4념처 수행에서,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인 지식념 또는 수식관이 법념처가 아닌 신념처에 속하며, 엄밀하게는, 뜻이 없는 색(色, 물질)을 말하며, 현재 시점에서 마음의 지각작용, 즉 수온의 소의나 경계가 되어 있지 않은 것과 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又瑜伽論說眼等識皆具三依。若五色根卽五識種,依但應二。
又諸聖教說眼等根皆通現、種。執唯是種,便與一切聖教相違。
또한 '유가사지론' 제 1 권에서 안식 등은 종자로써 구유근을 삼기 때문에 모두 세 가지 의지처를 갖춘다고 말하였으니,
만약 오색근(五色根)이 곧 5식(五識)의 종자라고 한다면, 의(依, 의지처)는 다만 둘이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여러 성교(聖教)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에서 안근 등은 모두 현행과 종자에 통한다고 설하였으니,
오직 종자뿐이라고 고집한다면, 곧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인 성교(聖教)에 위배되는 것이다.
有避如前所說過難,朋附彼執、復轉救言,異熟識中,能感五識,增上業種,名五色根。非作因緣、生五識種。妙符二頌,善順瑜伽。彼有虛言,都無實義。應五色根非無記故。
어떤 사람은 앞에서 말한 내용과 같은 과실과 비판의 과난(過難)을 피하면서, 그 집착된 견해에 무리지어 덧붙여서 다시 부연 주장하기를, 이숙식 중에서 능히 5식(五識)을 초감하는 증상(增上)의 업종자만이 아니라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의 현행업도 취해서 오색근(五色根)이라 이름하고, 인연이 되어서 5식(五識)을 생겨나게 하는 종자는 아니라고 말하였다.
ㅡ '유식이십론'과 '관소연론'의 두 게송에 미묘하게 부합하고 '유가사지론'에 잘 수순한다고 말한다.ㅡ
그러나 그것은 허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으니, 오색근(五色根)은 무기(無記)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又彼應非唯有執受,唯色薀攝,唯內處故。鼻、舌唯應欲界繫故。三根不應五地繫故。感意識業,應末那故。眼等不應通現、種故。又應眼等非色根故。
또한 그것은 오직 유집수(有執受)가 아니어야 하고, 오직 색온에만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니, 오직 내부의 감각기관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며,
5근(根)도 현행업(現行業)을 취하는 이상, 색온(色蘊)과 행온(行蘊)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비근과 설근은 오직 욕계에 계박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며,
안근ㆍ이근ㆍ신근의 세 가지 감각기관인 삼근(三根)은 다섯 가지 지위인 오지(五地)에 매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며,
의식을 초감하는 업은 말나식(제 7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며,
안식 등은 현행과 종자에 통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안식 등은 색근(色根)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정적으로 타인의 해명발언을 시설하여 논파한 것이다.
又若五識皆業所感,則應一向無記性攝。善等五識旣非業感,應無眼等爲俱有依。故彼所言非爲善救。
또한 만약 5식(五識)이 모두 업(業)에 초감된다고 말한다면, 곧 오로지 무기성(無記性)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며,
선(善) 등의 잡염(雜染)의 5식(五識)은 이미 업에 초감되는 것이 아닌 것일 것이며,
안근 등을 구유의(俱有依)로 함이 없어야 할 것이므로,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훌륭한 해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구유의(俱有依, 증상의增上依), 구유(俱有)란 상호 인과가 되고 서로 의지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을 의지하고 안근이 안식을 의지함을 뜻한다. 만약에 그 하나가 결핍되면 쌍방 모두가 작용할 수 없게 된다.
증상이란 그 효과를 증가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뜻으로 수행으로 그 능력을 무한히 증장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월제
又諸聖教處處皆說,阿賴耶識變似色根及根依處、器世閒等。如何汝等撥無色根,許眼等識變似色等,不許眼等藏識所變?如斯迷謬深違教理。
또한 성교(聖敎)인, '해심밀경(解深密經)' 제1권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뢰야식(제 8식)이 전변하여 승의근(勝義根, 색근)ㆍ근의처(根依處, 부진근)ㆍ기세간(器世閒) 등으로 사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대들은 색근이 없다고 부정하고, 안식 등이 색법 등으로 사현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어째서 안식 등을 장식(藏識)이 전변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은 미혹된 오류는 성교(聖敎)의 가르침과 바른 논리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다.
*사현(似現, pratibhāsa)의 현현(顯現ㆍ변사 變似)라고도 하며, 식이 인식대상을 닮은 형상을 띠는 작용을 말한다. pratibhāsa는 원래 물에 비친 달 등의 영상을 의미하는 용어였는데, 유식교학에서는 마음속에 나타난 사물의 영상 또는 주체 쪽의 인식작용을 의미하게 되었다.
然伽他說,種子功能名五根者,爲破離識實有色根。於識所變似眼根等,以有發生五識用故,假名種子及色功能,非謂色根卽識、業種。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유식이십론'의 게송에서의 종자와 '관소연론'의 게송에서의 공능(功能)을 5근(五根)으로 이름한다고 말한 것은, 식(識)을 떠나서 참으로 색근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다.
식(識, 근본식)이 전변된 사현(似現)의 안근 등에 대해서 5식(五識)을 발생하는 작용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가정적으로 종자와 색법의 공능으로 이름한 것일 뿐, 색근이 곧 식(識)과 업(業)의 종자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又緣五境明了意識,應以五識爲俱有依。以彼必與五識俱故。若彼不依眼等識者,彼應不與五識爲依。彼此相依勢力等故。
또한 다섯 대상인 오경(五境)을 반연하는 명료한 의식, 즉 5식과 인식대상을 같이하는 의식의 오동연의신(五同緣意識)은 5식(五識)으로써 구유의(俱有依)로 삼아야 하는 것이니, 그 제6식은 반드시 5식(五識)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안식 등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5식(五識)의 의지처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제 6식과 이 5식(五識)이 서로 의지한다는 것은 세력이 같기 때문이다.
又第七識雖無閒斷,而見道等旣有轉易,應如六識有俱有依。不爾彼應非轉識攝。便違聖教轉識有七。故應許彼有俱有依。此卽現行第八識攝。
또한 제 7식(말나식)은 단절됨이 없지만, 견도 등에서 변화하는 일이 있으므로 6식과 같이 구유의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전식에 포함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만약 그러하다면 곧 성교(聖敎)인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전식에 일곱 가지가 있다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제7식(말나식)도 구유의(俱有依)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이것은 곧 현행의 제8식에 포함되는 것이다.
如瑜伽說:“有藏識故,得有末那。末那爲依,意識得轉。”彼論意言,現行藏識爲依止故,得有末那,非由彼種。不爾,應說有藏識故,意識得轉。由此彼說理、教相違。
'유가사지론' 제 51권에서 말하기를 “장식(藏識, 아뢰야식, 제8식)이 있으므로 말나식(제 7식)이 있을 수 있고, 말나식을 의지처로 하여 의식이 전변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논서에서 의미하는 것은 현행의 장식을 의지처로 함으로써 말나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제 8식의 종자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장식이 있음으로써 의식이 전변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근거한다면, 그 주장은 바른 논리와 성교(聖敎)에 위배되는 것이다.
마음이 찰나 찰나로 상속한다고 말하며 이것을 심상속이라고 한다. 심상속에 근거하여 마음을 전찰나의 마음(前刹那의 心)과 후찰나의 마음(後刹那의 心)으로 두 가지로 나누어 명명한다. 이 쌍을 다른 말로는 전념(前念)과 후념(後念), 또는 전식(前識)과 후식(後識)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나눌 때, 마음(6식 혹은 8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이란 곧 전찰나의 마음, 전념(前念), 혹은 전식(前識)을 말한다. -위키
是故應言,前五轉識一一定有二俱有依,謂五色根同時意識。第六轉識決定恒有一俱有依,謂第七識。若與五識俱時起者,亦以五識爲俱有依。第七轉識決定唯有一俱有依,謂第八識。唯第八識恒無轉變,自能立故無俱有依。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니, 다섯 가지 전식인 전오식(五轉識)은 하나하나가 반드시 두 가지 구유의(俱有依)를 가지니, 오색근(五色根) 및 그것과 시간을 같이하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제6전식(第六轉識)에는 반드시 항상 하나의 구유의가 있으니, 제7식을 말하며, 만약 5식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역시 5식으로써 구유의로 삼는 것이다.
제7전식(第七轉識)에는 반드시 오직 하나의 구유의가 있으니, 제 8식을 말하며, 오직 제 8식만은 항상 전변함이 없이 스스로 능히 건립되므로 구유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안혜의 정의를 서술하였다.
8식 중에서의 앞의 5가지 식, 즉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을 전5식(前五識) 또는 5식(五識)이라 하며,
뒤의 3가지 식, 즉 의식 · 말나식 · 아뢰야식을 후3식(後三識)이라 한다.
전5식(前五識)은 색(물질)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識)으로, 그 인식대상들을 각각 색경(색깔, 모양, 크기) · 성경(소리) · 향경(냄새) · 미경(맛) · 촉경(감촉)이라 하며 이들을 5경(五境)이라 하고,
후3식 중 의식(意識)은 5경(五境)에 법경(法境)을 더한 6경(六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으로 제6의식이라고도 불리는데,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며, 다시 말나식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다.
8식 중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제외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을 전6식(前六識)이라고도 한다.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 등 대승불교에서는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을 7식(七識)은 모두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 또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통칭하여 7전식(七轉識) 또는 전식(轉識)이라 부른다.
한편, 미륵 → 무착 → 세친 → 덕혜(德慧, Gunamati: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 안혜(安慧, Sthiramati: 475~555 또는 510~570) → 진제(眞諦: 499~569)의 섭론종으로 이어진 무상유식파(無相唯識派)[13]의 논서들에서 전식(轉識)은 제7 말나식을 제외한 전6식(前六識)만을 의미한다.- 위키
有義。此說猶未盡理。第八類餘旣同識性,如何不許有俱有依。第七八識旣恒俱轉,更互爲依斯有何失?
정월(淨月, Śudhacandra)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상과 같이 말한 것은 아직 바른 논리를 갖추지 못하며, 제 8식도 제 7식과 비슷한, 마찬가지의 식성(識性)인데, 어찌 구유의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제7식과 제8식은 항상 함께 전전하므로, 이에 서로 의지처가 된다고 말하는 것에 무슨 과실이 있는 것인가?
許現起識以種爲依,識種亦應許依現識。能熏、異熟爲生長住依。識種離彼,生長住故。
현행식이 종자(인연의)로써 의지처(구유의)로 삼는다고 인정한다면,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도 역시 현행식에 의지한다고 인정해야 하며, 능훈(能熏)과 이숙식은 새로운 종자를 생겨나게 하고, 본유종자를 증장케 하며, 이숙식을 머물게 하는 의지처가 되나니,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은 그것을 떠나서는 생겨나고 증장하여서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능훈(能熏)의 7전식은 생장의 의지처인 생장의(生長依)가 되는 것으로, 이것은 본유종자를 증장시키고, 신훈종자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숙식은 종자가 머무는 의지처인 주의(住依)가 되는 것이다.
又異熟識,有色界中能執持身,依色根轉。如契經說,阿賴耶識業風所飄,遍依諸根恒相續轉。
또한 이숙식이 색계 중에서는 능히 몸(身)을 유지한다면, 색근(色根)에 의해서도 전전하는 것이니,
'입능가경(入楞伽經)' 제 9권에서 말씀하시기를, 아뢰야식은 업(業)의 바람에 나부껴서 모든 감각기관에 두루 의지하여서 항상 상속하면서 전전한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瑜伽'亦說:“眼等六識各別依故,不能執受有色根身。”
'유가사지론' 제 51권에서도 역시 말씀하시기를 “안식 등 6식은 각각 별도의 의지처가 있기 때문에 몸(身)를 집수(執受)할 수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유가사지론' 제51권의 인명작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다.
종(宗), 6전식은 능히 집수하는 능집수(能執受)가 아니어야 한다.
인(因), 두루하는 의지처인 편의(遍依)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喩), 번개가 번쩍이는 전광 등과 같은 것이다.
若異熟識不遍依止有色諸根,應如六識非能執受。或所立因有不定失。
만약 이숙식이 두루 감각기관(根)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6식과 같이 능히 집수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며,
혹은 건립된 이유인 인(因)에 일정하지 않은 부정(不定)의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인명논리에서 부정(不定)의 과실이란, 3지(支) 중의 이유인 인(因)이 비유의 유(喩) 중의 동품(同品)과 이품(異品) 전부에 두루 통하는 경우를 말한다.
是故藏識若現起者,定有一依謂第七識。在有色界亦依色根。若識種子,定有一依謂異熟識。初熏習位亦依能熏。餘如前說。
그러므로 장식(藏識)이 현행하면 반드시 하나의 의지처가 있으니, 제7식을 말하며, 색계에 있을 때에는 역시 색근에도 의지한다.
만약 식의 종자인 식종(識種)이라면 반드시 하나의 의지처가 있으니, 이숙식을 말하며,
처음의 훈습하는 지위인 초훈습위(初熏習位)에서는 역시 능훈에도 의지하며, 다른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정월의 정의를 서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