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成唯識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제2 권 10

Skunky 2025. 1. 5. 09:01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2  10

 

此中了者,謂異熟識,於自所緣,有了別用。此了別用,見分所攝。

여기서 ‘요별(了)’이란, 이숙식이 자기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에 대해서 요별의 작용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요별의 작용은 견분(주관의 식)에 포함된다.

여기서의 소연(所緣)은 제8식의 상분(相分)으로서, 곧 종자(種)와 몸(유근신 有根身) 및 기세간을 말한다.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은 종자(種)종자ㆍ와 몸(유근신 有根身)ㆍ기세간(器世間, 자연계)이다.

아뢰야식은 자체 안의 종자를 대상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작용이 발생되며, 또한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대사(代謝) 작용의 흐름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것으로,

사실 아뢰야식이 종자와 신체를 유지하는 작용은, 그것들을 인식대상으로 끊임없이 요별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然有漏識自體生時,皆似所緣、能緣相現。彼相應法應知亦爾。

그런데 유루식(有漏識) 자체가 일어날 때에는 모두 인식대상과 인식주관의 모습으로 사현(似現, pratibhāsa)하는 것으로, 그것의 상응법(심소)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이하 4분의(分儀)를 밝히는 것으로, 안혜(安慧)와 정량부(正量部) 등이 소연의 모습이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르며,

또한 설일체유부 등이 행상(行相)은 있지만 심외(心外)의 대상을 취한다고 하는 것과도 다흔 것이다.

 

似所緣相,說名相分,似能緣相,說名見分。

인식대상으로 사현하는 상을 상분(相分, 객관으로서의 식)이라 하고, 

인식주관으로 사현하는 양상을 견분(見分, 주관으로서의 식)이라 이름한다.

심왕의 상응법인 심소(心所)도 역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의 심분(心分)이 있다.

 

若心、心所無所緣相,應不能緣自所緣境。

만약 심왕과 심소가 소연(所緣)의 양상이 없다면, 자기의 소연의 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을 능히 반연할  없어야 하며,

안혜와 정량부의 주장을 논파하는 것이다.

 

或應一一能緣一切,自境如餘,餘如自故。

혹은 하나하나가 능히 모두를 반연해야 하고, 자기의 외부대상도 다른 사람의 대상과 같으며,

다른 사람의 대상도 자신과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능연식(能緣識)이 자신의 상분(相分)을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안식이 자신의 상분인 색경(色境)을 반연하고, 이식(耳識)이 자신의 상분인 성경(聲境)을 반연하는 등의 일이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일체의 대상을 반연하고, 자신의 대상인 자경(自境)을 다른 이의 감각기관인 타근(他根)이 반연하고, 다른 이의 대상인 타경(他境)을 자신의 감각기관인 자근(自根)이 반연하는 등이 되는 것이다.

 

若心、心所,無能緣相,應不能緣。如虛空等。或虛空等亦是能緣。故心、心所,必有二相。如契經說。

만약 심왕과 심소에 능연(能緣)의 양상이 없다면, 능히 반연할  없어야 할 것이니, 비유하면 허공 등과 같으며,

혹은 허공 등도 역시 능연이어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심왕과 심소는 반드시  가지의 양상인 이상(二相)이 있으니,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一切唯有覺 所覺義皆無, 能覺所覺分 各自然而轉。

일체는 오직 인식하는 각(覺)이 있을 뿐이니, 

인식대상인 소각(所覺, 심외실경心外實境)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식주체인 능각분(能覺分, 견분)과  인식대상인 소각분(所覺分, 상분)이

각기 다르게 자연히 전전하는 것이다. - 후엄경(厚嚴經)

여기서의 각(覺)은 심왕(心王)ㆍ심소(心所)의 총명(總名)이며, 

견분(인식주체)과 상분(인식대상)이 각각 자연히 그 인연화합에 따라 일어나므로, 마음과 독립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인 심외실경(心外實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執有離識所緣境者,彼說外境是所緣,相分名行相,見分名事。是心、心所自體相故。心與心所同所依、緣,行相相似。事雖數等而相各異。識、受、想等相各別故。

식(識)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은 외부대상을 소연(所緣)으로, 상분을 행상(行相, 인식작용)으로, 견분을 자체(事)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이것은 심왕과 심소의 자체상이기 때문이다. 

심왕과 심소는 의지처인 소의(所依)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함께하고, 인식작용인 행상(行相)이 서로 비슷하며,

자체(事, 사체事體, 심왕과 심소의 자체)는 비록 수(數)가 같은, 즉 심왕과 심소의 자체가 하나 뿐인 것으로, 많이 있는 것이 아니나,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각각 다른 것은 식(識)ㆍ수(受)ㆍ상(想) 등의 행상(行相, 인식작용)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達無離識所緣境者,則說相分是所緣,見分名行相。相、見所依自體名事,卽自證分。此若無者,應不自憶心、心所法。如不曾更境,必不能憶故。

식(識)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없음을 통달한 사람은 상분을 소연으로, 견분을 행상이라 이름하며,

상분(인식대상)과 견분(인식주체)이 의지하는 자체분을 사(事)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자증분(自證分)이다. 

만약 이 자체분(자증분)이 만약 없다면, 스스로 심왕과 심소법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니, 예전에 인식하지 않았던 대상은 반드시 기억할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心與心所,同所依根,所緣相似,行相各別。

심왕과 심소는 의지처인 감각기관이 같고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서로 비슷하나, 인식작용인 행상(行相)이 각각 다른 것으로,  

즉, 소연(所緣)이 비슷하다는 것은 심왕과 심소가 변현한 상분(相分)이 서로 비슷하다는 뜻이며,

행상(行相)이 다르다는 것은, 예를 들면 심왕과 심소가 하나의 대상을 반연할  심왕은 요별의 행상으로 대상을 반연하고, 작의(作意)심소는 경각(警覺)의 행상으로 반연하며, 수(受)는 영납(領納)의 행상으로 반연하는 등이다.

 

了別領納等作用,各異故。事雖數等,而相各異,識、受等,體有差別。

요별하고(識) 받아들이는(受) 등의 작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니,

심왕과 심소의 자체가 각기 하나씩이라서 자체(事)는 비록 수(數)가 같지만, 행상이 각각 다른 것이니,

식(識)ㆍ수(受) 등의 자체(體)가 다르기 때문이다.

 

故然心、心所一一生時,以理推徵,各有三分,所量、能量、量果別故。相、見必有所依體故。如‘集量論’伽他中說:

그런데 심왕과 심소가 하나하나씩 일어날 때,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각각  가지 심분인 삼분(三分)이 있으니,

인식되는 것의 소량(所量)과 인식하는 것의 능량(能量)과 인식의 결과인 양과(量果)가 다르기 때문이며, 

상분과 견분은 반드시 의지처인 자체분이 있기 때문이다.

'집량론'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진나(陳那)는 식의 3분설(三分說)을 주창하였다. 이것은 어느 하나의 인식인 양(量, pramāṇa)이 성립하는 데는 인식되는 것인 소량(所量, prameya), 인식하는 것의 능량(能量, pramāṇa), 인식의 결과인 양과(量果, pramāṇa-phala)의 세 요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견해로써,

예를 들면 옷감의 길이를 자로 재는 경우에 옷감이라는 사물, 자(尺)라는 계량기, 치수를 읽는 인간의 인지력(認知力)이 필요한 것으로, 이 셋을 차례로 말해서 소량(所量)ㆍ능량(能量)ㆍ양과(量果)이고,

4분(分)에서 말한다면 상분ㆍ견분ㆍ자증분이다.

 

似境相所量 能取相自證, 卽能量及果 此三體無別。

대상으로 사현한 형상은 인식대상인 소량(所量)이니, 

능히 형상을 취하고 자증(自證)하는 것이  인식주체인 능량(能量)과 인식결과인 양과(量果)이며,

 셋은 자체(體)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자체(體)는 하나의 식(識)이지만,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각각 다르므로 셋으로 구분한 것이다.

 

又心、心所若細分別,應有四分。三分如前,復有第四證自證分。此若無者,誰證第三?心分旣同,應皆證故。又自證分應無有果。諸能量者必有果故。不應見分是第三果。見分或時非量攝故。由此見分不證第三。證自體者必現量故。

또한 심왕과 심소를 상세하게 분석한다면,분(四分)이 있어야 마땅한 것이니,

3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나, 이에 다시 제4의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있으니, 만약 이것이 없다면 무엇이 제3분을 증명하겠는가? 

심분(心分)이란 이미 같은 것으로써 모두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증분은 인식결과인 양과(量果)가 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모든 인식하는 것인 능량(能量)은 반드시 인식결과인 양과(量果)가 있기 때문이다. 

견분이 제3분의 인식결과인 양과(量果)이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견분은 혹은 잘못된 인식인 비량(非量)에 포함되기 때문이니, 즉 제7식의 견분은 항상 비량(非量)이며, 제6식의 견분은 3량(量)에 통하므로 비량(非量)일 때도 있는 것이므로,

따라서 견분은 제3분을 증명하지 못하며, 자체분을 증명하는 것은 반드시 현량(現量)이기 때문이다.

 

호법(護法)의 주장으로, 진나(陳那)의 이론에서 양과(量果), 즉 확인 작용을 증명하는 제4의 심분(心分)인 증자증분(證自證分)을 설정하였고, 이 이론을 4분설(四分說)이라고 한다.

호법은 인식을 상분ㆍ견분ㆍ자증분ㆍ증자증분의 네 부분으로 나누고 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하나의 인식이 성립한다고 한다. 상분ㆍ견분은 식의 자체(자증분)에서 마치 달팽이가 자기 몸에서 두 뿔을 내밀듯이 나타나며,

자증분ㆍ증자증분이 서로 동시에 상응하여서 증명하고 그 작용을 증지(證知)한다고 하였으며,

그렇게 확인 작용이 무한히 소급되는 모순을 해결한 것이다.

 

此四分中,前二是外,後二是內。

 4분(四分) 중에서 앞의 둘인 상분과 견분은 외부(外)이고, 나머지 둘인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내부(內)이다.

상분은 외부 본질인 경(境)의 영상을 떠올리므로 외부라고, 견분은  상분을 반연하기 때문에 역시 외부라 하나, 외부라고 하여 물론 체(體)가 외부라는 뜻이 아니다.

자증분과 증자증분은 오직 체내(體內)이며 외부를 향해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내부(內)라 한 것이다.

 

初唯所緣,後三通二。謂第二分,但緣第一。或量非量,或現或比。第三能緣第二第四。證自證分唯緣第三。非第二者,以無用故。第三、第四皆現量攝。

처음의 하나(상분)는 오직 소연(所緣)이고, 나머지 셋은 능연ㆍ소연의 둘에 통하며,

제2분(견분)은 다만 제1분(상분)만을 반연하며, 바른 인식(量)이기도 하고 잘못된 인식인 비량(非量)이기도 하며, 현량 혹은 비량(比量)이기도 하다. 

제3분(자증분)은 능히 제2분(견분)과 제4분(증자증분)을 반연하며,

증자증분은 오직 제3분(자증분)만을 반연하는 것으로 제2분(견분)이 아닌 것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며, 

제3분(자증분)과 제4분(증자증분)은 모두 현량에 포함된다.

 

故心、心所,四分合成,具所能緣,無無窮過,非卽非離,唯識理成。是故契經伽他中說:

따라서 심왕과 심소는 4분(四分)이 합해서 이루어지고, 소연과 능연을 갖추므로 끝없이 소급해 들어가는 과실이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므로 유식의 도리가 성립되는 것이니, 경전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衆生心二性 內外一切分, 所取能取纏 見種種差別。

중생심에는 내외(內外)의 두 가지 체성이 있으니, 

내부(자증분ㆍ증자증분)와 외부(상분ㆍ견분)의 일체분이

소취(所取, 상박相縛)와 능취(能取, 추중박麤重縛)의 계박(繫縛, 전纏)이 있으니, 

견분(見, 능연의 의미)에는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이다. - '후엄경(厚嚴經)'에 설해져 있다고 하며, '불지론(佛地論)' 제3권에 인용되어 있다

유루심(有漏心)의 4분(分)은 계박(繫縛)이고, 무루심에는 이러한 계박이 없다.

 

此頌意說。衆生心性二分合成。若內若外皆有所取、能取纏縛。見有種種,或量、非量,或現或比,多分差別,此中見者是見分故。

위의 게송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중생의 심성은 2분(分)이 합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내부이든 외부이든 모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계박(繫縛)이 있으며, 

견분은 갖가지 바른 인식(量), 잘못된 인식인 비량(非量), 현량(現量) 혹은 비량(比量) 등의 여러 차이가 있으니, 게송에서의 ‘견(見)’은 견분(見分)이기 때문이다.

 

如是四分或攝爲三。第四攝入自證分故。或攝爲二,後三俱是能緣性故,皆見分攝。此言見者,是能緣義。或攝爲一,體無別故。如入楞伽伽他中說:  

이와 같은 4분(四分)을 '집량론(集量論)'에서는 포괄적으로 3분(分)으로 하는 것은 제4분(증자증분)을 자증분에 포함시킨 때문이며,

'후엄경(厚嚴經)'에서는 거두어서 2분(分)으로 하였으니, 뒤의 셋인 견분ㆍ자증분ㆍ증자증분은 모두 능연의 성질이기 때문에 모두 견분에 포함시킨 것이다.

위의 게송에서 ‘견(見)’이라고 말한 것은 능연의 의미이며,

어떤 곳에서는 안혜의 일분설(一分說)과는 다르게 넷을 합해서 하나로 거두어 일분(一分)으로 하였으니, 체(體)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입능가경'의 게송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으니, 

 

由自心執著 心似外境轉彼所見非有 是故說唯心。

스스로의 마음의 집착에 의해서 마음이 외부대상으로 사현하여 전변하며, 

그 인식대상인 소견(所見, 심외실경心外實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직 마음, 즉 유심(唯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입능가경(入楞伽經)' 제9권

 

심외실경(心外實境), 마음과 독립적으로 외부에 실재한다는 대상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