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 (鳩摩羅什, Kumarajiva)
구마라집( 鳩摩羅什) 쿠마라지바(कुमारजीव) Kumārajīva (344 – 413)
한자 표기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羅什), 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출생 구자국(龜玆國, 현재의 중국 신장 쿠차(Kucha) 현에 속함) (위구르어: كۇچار, 중국어 간체: 库车, 정체: 庫車, 屈支 ,屈茨, 丘玆, 중국어 간체자: 龟兹, 정체자: 龜玆) 또는 구자국(龜玆國)은 오늘날 쿠차 현에 위치하던 도시국가이며, 인도, 페르시아 제국, 박트리아와 실크로드 교역국들의 갈림길이었다.
● 구자국, 쿠차 (Kucha, 신장)은 서한 때에는 36국 가운데에서 9대국에 속하는 나라였으며, 왕성은 연성(延城)으로, 장안에서 7,480리이며, BC 1세기에 이미 불교를 받아들여서, 서역에서 불교가 가장 흥성한 나라였다.
9세기 중엽에 위구르(튀르크)인들이 침입하여 위구르왕국을 세우자, 위구르인들에게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구자국은 중국에 불교를 전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여서, 구자국의 많은 스님들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포교와 경을 번역하는 역경(譯經)에 종사하였으며, 위진 북방의 부견, 요흥 남조의 양무제 등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한서에 따르면 쿠차는 현재 위구르 자치구의 지역에 존재하며 사막이기 때문에 인구는 항상 희박하여서 4만명 정도이었으며, 2만 명 정도가 무기를 지닐 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쿠차는 원래 토하라인들이 살았으나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인도화되었고, 이후에는 대부분의 토하라인들이 인도 북부로 이주하였으며, 위구르(튀르크)인들이 들어와 위구르인들이 살게 되었다. 얼마 뒤에 토번에 의해 당나라가 공격당하면서 안서도호부도 점령당하였고 쿠차는 토번의 영토가 되었으며,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무역이 불가능해졌다.
쿠차는 실크로드에서 서역북도(西域北道)의 중심도시로써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신라의 고승 혜초도 이곳을 지나면서 '왕오천축국전'에서 구차국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중국의 진서에 따르면 3세기에 쿠차에는 수천개의 불탑과 사원이 있었으며, 이 때의 쿠차 승려들은 중국으로 여행하기 시작하였고, 4세기에는 불교가 왕국에 더욱 성장하여서 왕국은 불교도의 수도원을 닮아갔다고 하며, 부처의 석상이 있었고 도시 주변에는 수도원이 많았다고 한다.
● 이 무렵의 대표적인 분이 구마라집 (344 – 413)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구자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이며, 구마라집이 7세일 때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서역(西域)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인 카슈미르(옛 이름은 카슈가르Kashgar:또는 카슈가Kaxgar, 객십喀什)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다가, 야르칸드에서 수리아사마라고 하는 대승불교도에 의하여 대승(大乘)을 공부하게 되었고, 나중에 중관학파(中觀學派)로 개종했다.
인도에 유학하면서 두루 여러 선지식을 참례하여 여러 방면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며, 후에 육식을 하지 않는 우전국(코탄)에서 대승불교를 공부하고 구자국으로 왔을 때에는 이미 그의 명성이 서역과 중국의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338-385)이 여광을 보내서 구자국을 공격한 원인 중의 하나가 구마라집을 데려오기 위한 것이었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그의 덕이 뛰어나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 여광(呂光)과 군사를 보내어, 384년 쿠차로 쳐들어왔을 때, 구마라집은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다. (여광이 서쪽으로 가서 구자국을 정벌하여 구마라집을 체포했으나, 돌아오는 도중에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광 자신이 하서(河西)에서 자립하여 왕이 되어 7년간 통치했다.)
군사(軍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여광을 돕기도 했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 취급하여서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의 잔학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년 동안 여광과 여찬(呂纂) 밑에서 양주(涼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서기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 영접되어서 402년에 장안(長安)으로 오게 되었으며,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하여,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현자로서 인도학 및 베다학에 관하여 백과전서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의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불리며, 훗날 현장(玄奘) 등의 많은 삼장이 등장하여서, 현장과 함께 2대 대역성(大訳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訳経家)로 꼽히며,
쿠마라지바의 역문은 유려하여서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般若經) 연구가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함)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에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여서,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다시 일어나 여광을 멸망시킨 뒤, 구마라집은 401년(동진 隆安) 장안(長安)에 도착해서, 요흥이 예를 갖추어 그를 국사로 봉하고 소요원(逍遙園)에 머물게 하여 승조(僧肇), 승엄(僧嚴) 등과 함께 역경에 전념하게 하여서, 그는 403년(후진 弘始 5) 4월부터 번역에 몰두하여서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불설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30권),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유마경』(維摩經) 3권,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 『중론』(中論) 4권,
백론(百論) · 십이문론(十二門論) · 아미타경(阿彌陀經) ·십송률(十誦律) 등 35부 348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했다
일부 경전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의 의역이라고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가 번역한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 얼마나 큰 영향이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었고, 번역된 뒤에는 「신역」(新譯)이라 불리는 반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 (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
백과 사전들과 여러 분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