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100권 5
大智度論 釋囑累品 第九十 卷第一百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90. 촉루품(囑累品)을 풀이함 2
問曰:若囑累,何以乃爾慇懃鄭重?
묻나니, 부촉하신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은근하고 정중하게 하신 것입니까?
答曰:佛隨世俗法引導衆生,譬如估客主,欲遠出他國,雖以財寶囑累於子,大價妙寶偏獨慇懃,以其子未識妙寶價重故。餘人以估客主是識寶價人而慇懃囑累,必知其貴;若聞其子讚說寶價,則不信之。佛亦如是。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세속법을 따라 중생들을 인도하시는 것이니, 마치 장사꾼의 우두머리인 객주(客主)가 다른 나라로 멀리 나고자 할 때, 재보를 그의 아들에게 맡기면서 큰 값어치가 있는 묘한 보물은 유독 은근하게 부촉하는 것과 같으니, 그 아들은 그 묘한 보물의 귀중한 값어치를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장사꾼의 우두머리인 객주(客主)가 그 보물의 값어치를 잘 아는 사람이므로 은근히 부촉한다면, 반드시 그것이 귀중한 것임을 알아차리겠지만, 만약 그의 아들이 그 보물의 값어치를 찬탄한다면 그 아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復次,若於餘人異衆中讚歎般若囑累,人則譏佛自稱讚法,疑而不信;自於弟子中囑累,則無嫌。
復有人言:佛上品中說寂滅相無戲論,是一切智,是中無有決定法可取,則人以爲無所可貴;今慇懃囑累,則知佛不著空法。一切衆生中,愛念般若無過佛者,佛知般若恩深故,貴重是般若而慇懃囑累。
또한 만약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대중 가운데에서 반야를 찬탄하면서 부촉한다면, 사람들은 부처님을 비방하기를, “자기 자신의 법을 칭찬하는구나”라 하면서 의심하고 믿지 않겠지만, 자신의 제자들에게 부촉한다면 싫어 할 이가 없는 것이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앞의 상품(上品)에서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요, 쓸모없는 희논이 없으니, 그것이 곧 일체지(一切智)이니, 이 에는 결코 취할 만한 어떠한 법도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그리 귀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은근히 부촉한다면, 곧 부처님께서는 공한 공법에 애착하지도 않지만, 일체 중생들 중에서 반야를 사랑하는 것은 부처님보다 더한 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반야의 은혜가 깊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 반야를 귀중히 여기시어 은근히 부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有人言:佛欲現中道故囑累:先說諸法空,以遮有邊;今慇懃囑累,則破無邊,是則中道。
若人謂佛貪心愛著此法,佛以種種因緣說般若波羅蜜空相;若人謂佛墮斷滅中,是故慇懃囑累。如是,則離二邊。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중도(中道)를 나타내시고자 부촉하신 것이니, 앞에서는 제법은 공하다고 말씀하셔서 저들의 ‘있다는 치우친 소견의 유변(有邊)’을 막으셨고, 여기에서는 은근히 부촉하시어 곧 ‘없다는 치우친 소견의 무변(無邊)’을 깨뜨린 것이니, 이것이 곧 중도(中道)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는 탐내는 탐심(貪心)으로 이 법에 애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의 공상(空相)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는 아주 없다는 단멸(斷滅) 가운데에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은근히 부촉하신 것이니, 이와 같이 하여서 곧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여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曰:佛知阿難是弟子,何以故問阿難:“汝是我弟子不?我是汝師不?“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무엇 때문에 “아난아, 너는 바로 나의 제자인가? 내가 바로 너의 스승인가?”고 물으신 것입니까?
答曰:佛有惡弟子須那剎多羅等,有少因緣故作弟子,欲於佛所取射法,佛不爲說,於是反戒言:“我非佛弟子。”又如須尸摩爲盜法故作弟子。如是等,是名字弟子。
답하나니, 부처님에게는 삿된 제자로서 수나찰다라(須那刹多羅, Sunakaṣatra. 선숙 善宿) 등이 있었으니, 그들은 조그마한 인연으로 제자가 되었는데 부처님으로부터 활 쏘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자, 이에 배반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우리는 부처님의 불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수시마(須尸摩, Susīma) 같은 이들은 법을 훔쳐가기 위하여 제자가 되었던 것이니, 이와 같은 이들은 바로 이름만 있는 제자였던 것이다.
又復外道等謂阿難不得已而在佛邊 阿難曾作外道弟子,著草衣,求神仙;今以佛是其親族,尊重故給侍。
以如是等事故,於大衆中問阿難:“汝是我弟子不?”若言是眞弟子,當隨我勅。是故阿難爲欲令人信故重答。
또한 외도 등이 말하기를 “아난은 마지못하여 부처님 곁에 있는 것이다. 아난은 일찍이 외도의 제자로 있으면서 풀 옷인 초의(草衣)를 입고 신선이 되고자 하였었는데, 부처님은 그의 친족이라서 존중해야 되기 때문에 시봉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들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서 아난에게 물으시기를, “네가 바로 나의 제자인가?”고 하였으며,
그가 만약 “진실한 제자입니다”라고 한다면, “마땅히 나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에 아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자 일부러 거듭하여 대답한 것이다.
佛告阿難:“弟子所應作法,汝盡具足。”弟子法者,所謂以善身、口、意業供給師。有弟子心好,身、口業不稱;有弟子身、口業好,而心不稱。若弟子以善心深愛樂師,身、口相稱,不惜身命、不難懃勞,自捨其心,隨師教勅 阿難盡具足此事。佛告阿難:“汝今現在恭敬於我,我滅度後,恭敬般若,亦當如是。”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법을 너는 모두 다 갖추었느니라”고 하셨으니,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법이란, 이른바 착한 몸(身)과 입(口)과 뜻(意)의 업으로 스승에게 공양하는 것이니,
제자에는 마음은 좋으나 몸과 입의 업이 합치하지 않는 이가 있고,
제자로서 몸과 입의 업은 좋으나 마음이 합치하지 않는 이도 있으며,
만약 제자가 착한 마음으로 스승을 매우 좋아한다면, 몸과 입이 서로 합치하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고생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며,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스승의 가르침만을 따르나니,
아난은 이러함을 모두 다 갖추었으니,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지금 나를 공경하고 있지만 내가 멸도한 뒤에 반야를 공경함도 역시 이와 같아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問曰:般若是諸佛師,而阿難何以不恭敬其師,而恭敬佛?
묻나니, 반야가 곧 모든 부처님의 스승인데, 아난 존자는 무엇 때문에 그 스승을 공경하지 않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까?
答曰:阿難雖得初道,漏未盡故,不深知法實,如佛所知。是故佛告阿難:“汝恭敬般若,如恭敬我。”
답하나니, 아난은 비록 첫 번째 도과인 초도(初道, śrota āpatti-phala, 예류과預流果)를 얻었을지라도 번뇌를 아직 다하지 못한 까닭에 법의 진실을 앎이 부처님만큼 깊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야를 공경하기를 마치 나를 공경하듯이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며,
復次,衆生見佛三十二相、八十隨形好、大光明、金色身,多愛敬;般若波羅蜜微妙甚深,無形、無色,智者能知。佛身相好,愚、智視之,皆無厭足,是故佛以身喩般若。佛在世時,能自遮魔,是故佛告阿難:“我滅度後,好守護般若。”
또한 중생들은 부처님의 32상호와 80수형호(隨形好)와 대 광명을 지닌 금색신(金色身)을 뵙게 되면 거의 모두가 사랑하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나,
반야바라밀은 미묘하고 매우 깊으면서도 형상과 빛깔이 없는 무형무색(無形無色)이므로 지혜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으니,
부처님 몸의 상호(相好)는 어리석은 이나 지혜가 있는 이거나 간에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몸으로써 반야에 비유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몸소 악마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멸도한 뒤에도 기꺼이 반야를 수호하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一囑累則足,何以至三?
묻나니, 한 번 부촉하신 것으로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세 번이나 이르신 것입니까?
答曰:佛深愛般若波羅蜜故三囑。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을 깊이 사랑한 까닭에 세 번이나 부촉하신 것이다.
問曰:若深愛者,何限於三?
묻나니, 만약 그렇게도 깊이 사랑하셨다면, 어찌 세 번만 하신 것입니까?
答曰:諸佛常法,語不過三。若過三不從,執金鋼神則以杵擬之;又執金鋼神意:若過三不從,則是逆人,便當殺之。是故佛問不過三。復次,若一說,猶緩;過三,太急,似如凡夫貪著者。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통상법으로는 말씀이 세 번을 초과하지 않는 것이니, 만약 세 번을 초과하여 말씀하셔도 따르지 않게 되면, 집금강(執金剛, Vajrapāņi) 신이 그의 지팡이인 금강저(金剛杵, vajrayudha)로 그를 다스리게 되며,
집금강신이 만약 세 번을 초과하여 말씀하셨는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곧 거역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서 죽이고자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물으실 때에는 세 번을 더 초과하지 않으시는 것이며,
또한 만약 한 번만 말한다면 아직 느슨하고, 세 번을 초과하게 되면 너무 지나져서, 마치 탐착하는 범부와 같이 되는 것이다.
復次,受者心有三種,鈍根者至三乃生善心;阿難雖復利根,心向聲聞,但一身求度,是故三告。
所以囑累者,爲不令法滅故。汝當教化弟子,弟子復教餘人,展轉相教;譬如一燈復然餘燈,其明轉多。
또한 받아들이는 수자(受者)의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근기가 둔한 둔근자(鈍根者)는 세 번까지 말을 해야 비로소 착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아난이 비록 근기는 영리하다 할지라도 마음은 성문(聲聞)을 향하고 있어서 자기 한 몸만을 제도하고자 할 뿐이었기 때문에 세 번을 말씀하신 것이며,
부촉하는 까닭은 법이 소멸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니, ‘너는 마땅히 제자를 교화하고 그 제자는 다시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면서 차츰차츰 서로서로를 교화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하나의 등불로부터 다른 등불을 옮겨서 밣혀 나간다면, 그 광명이 갈수록 더 많은 것과 같은 것이다.
莫作最後斷種人者,世人有子,若不紹繼,則名斷種,最爲可恥。佛以此喩告阿難:“汝莫於汝身上令般若斷絕!”
‘최후에 종자를 끊는 단종인(斷種人)이 되지 말라’고 함이란, 세상 사람에게 아들이 있으나, 만약 그 후사가 끊어진다면 그것을 바로 종자를 끊는다고 하는 것이니,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니,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비유로써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신상(身上)에서 반야로 하여금 단절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如先品中明“般若波羅蜜,說亦不增、不說亦不減,畢竟寂滅相”,今何以言“莫令斷滅”?譬如虛空,誰能滅者?
묻나니, 앞의 품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은 설하여도 또한 늘어나지 않고, 설하지 않아도 또한 줄어들지 않아서 필경에는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단절(斷絶)되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비유하자면,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거늘 그 누가 끊어 없앨 수 있다는 것입니까?
答曰:般若波羅蜜雖寂滅、無生無滅相、如虛空、不可戲論,而文字語言書般若波羅蜜經卷,爲他人說,是此中般若,於此因中而說其果。
답하나니, 반야바라밀은 비록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라서 나고 멸함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상(相)으로 마치 허공과 같아서 희론을 펼 수 없지만,
문자와 언어로 반야바라밀의 경권을 서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하기 위한 것으로, 이 가운데서의 반야는 이 원인의 인(因) 가운데에서 그 결과의 과(果)를 말하는 것이다.
凡人聞般若波羅蜜微妙,卽生著心,取般若相,分別諸法,所謂是善、是不善,是世閒、是涅槃等;以分別故,於是法中生著心,著心故鬪諍,鬪諍故起諸罪業 如是人名爲滅般若波羅蜜。
범부인은 반야바라밀은 미묘하다는 말만 듣고 곧 애착하는 마음을 내어 반야의 상(相)을 취하면서 제법을 분별하나니,
이른바 ‘이것은 착하다, 이것은 착하지 못하다. 이것은 세간이다, 이것은 열반이다’라고 하는 등이 그것이며,
분별하기 때문에 이러한 법 가운데에서 애착심을 내고, 애착심 때문에 투쟁하게 되며, 투쟁하기 때문에 모든 죄업(罪業)을 일으키게 되나니,
이와 같은 사람들을 곧 반야바라밀을 소멸하게 하는 이라 하는 것이다.
佛告阿難:“汝當如般若波羅蜜相,莫著文字語言,教化衆生。”是名不滅。“
阿難!隨般若在世幾時,則知爾許時佛在世”,如經中廣說。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반야바라밀의 상(相) 그대로, 문자나 언어에 집착하여서 중생을 교화하지 말아야 하나니, 이것을 곧 소멸하지 않게 하는 불멸(不滅)이라 하는 것이니라.
아난아, 반야가 이 세상에서 얼마 동안이라도 있는 한, 그 만큼의 시간 동안에는 부처님도 세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으니, 경에서 자세히 말씀한 바와 같다.
佛慇懃囑累,在會衆生有疑,是故佛說囑累因緣。所謂“有般若在世,則爲佛在”。所以者何?般若波羅蜜是諸佛母,諸佛以法爲師。
法者,卽是般若波羅蜜。若師在、母在,不名爲失利。所以者何?利本在故。是故說:“若般若在世,佛亦在世。”
부처님께서 은근히 부촉하실 때, 그 모임에 있었던 중생들이 의심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부촉하는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반야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 때에는 부처님도 세상에 있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불모(佛母)요, 모든 부처님은 법(法)을 스승으로 삼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법(法)’이라 함이란, 곧 이 반야바라밀이니, 만약 스승이 있고 어머니가 있으면 이익을 잃는다고 하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 이익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가 세상에 있으면 부처님도 역시 세상에 있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又法寶不離佛寶。菩薩有三十二相、八十隨形好,不名爲佛,得法寶故名爲佛。法寶卽是般若波羅蜜。如人從佛得利,乃至得解脫涅槃;若人於般若中能信行,亦以三乘法而入涅槃。是故說般若在世,如佛在世,說法無異。
“阿難!若有人聽受般若,及書、持等,當知是人不離見佛、聞法、親近諸佛。”
또한 법보(法寶)는 불보(佛寶)를 여의지 않으니, 보살에게 32상호와 80수형호가 있어도 부처님이라 하지 않으며, 법보를 얻은 까닭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니, 법보가 바로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마치 사람이 부처님으로부터 이익을 얻어서 나아가 해탈과 열반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이,
만약 사람이 반야 가운데에서 능히 믿고 행한다면 역시 3승(乘)의 법으로써 열반에 드는 것이니,
이러한 때문에 반야가 세상에 있으면, 마치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는 것과 같아서 법을 설함에는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난아, 만약 어떤 사람이 반야를 듣고는 받아서 지니고 서사하여 지닌다면,
이 사람은 언제나 뵙는 견불(見佛)을 여의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법을 듣는 문법(聞法)을 여의지 않으면서, 언제나 부처님을 친근히 하는 친근불(親近佛)한다는 것으로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