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9권 2

Skunky 2024. 12. 11. 09:02

大智度論 釋曇無竭品 第八十九 卷第九十九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9. 담무갈품(曇無竭品) 풀이함 2

 

爾時,曇無竭菩薩七歲一心入無量阿僧祇菩薩三昧,及行般若波羅蜜、方便力。

薩陁波崙菩薩七歲,經行、住立,不坐、不臥,無有睡眠,無欲、恚、惱,心不著味;但念:‘曇無竭菩薩摩訶薩何時當從三昧起,出而說法?’

그 때에 담무갈보살이 7년 동안을 일심(一心)으로 무량한 아승기의 보살삼매(三昧)에 들어가서 반야바라밀의 방편력을 행하고 있었으며, 

살타파륜보살도 역시 7년 동안을 거닐고 다니면서  있었으니, 앉거나 눕지 않으면서 잠도 자지 않았으며, 탐욕이나 성냄의 번뇌도 없고 마음은 맛의 미(味)에 탐착하지 않으면서, 다만 ‘담무갈 보살마하살이 언제 삼매에서 일어나셔서 법을 설하시게 될까’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薩陁波崙菩薩過七歲已,作是念:‘我當爲曇無竭菩薩摩訶薩敷說法座,曇無竭菩薩摩訶薩當坐上說法。我當灑地淸淨,散種種華,莊嚴是處,爲曇無竭菩薩摩訶薩當說般若波羅蜜及方便力故。’

7년이 지난 뒤에 살타파륜보살이 생각하기를 ‘나는 담무갈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설법하실 자리를  놓아야겠다. 

담무갈 보살마하살께서  위에 앉아 법을 설하실 것이니, 나는 땅에 물을 뿌리고 깨끗하게 하며, 갖가지의 꽃도 흩어서 이곳을 장엄해야 되겠구나’고 하였으니, 

그것은 담무갈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과 방편력을 설할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是時,薩陁波崙菩薩與長者女及五百侍女爲曇無竭菩薩摩訶薩敷七寶牀,五百女人各脫上衣以敷座上,作是念:‘曇無竭菩薩摩訶薩當坐此座上,說般若波羅蜜及方便力。’

이 때에 살타파륜 보살이 장자의 딸과 그리고 5백의 시녀들과 함께 담무갈 보살마하살을 위하여보로  평상을 펴놓았으며, 오백의 여인들은 저마다 그들의 상의(上衣, 겉 옷)를 벗어서 자리 위에  뒤에 생각하기를 ‘담무갈 보살마하살께서는  자리 위에 앉으셔서 반야바라밀과 방편력을 설하시리라’고 하였다.


薩陁波崙菩薩敷座已,求水灑地而不能得。所以者何?惡魔隱蔽,令水不現。

魔作是念:‘薩陁波崙菩薩求水不得,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行乃至生一念劣心、異心,則善根不增、智慧不照,於一切智而有稽留。’

살타파륜보살이 자리를  놓은 뒤에 물을 구하여 땅에 뿌리고자 하였으나 물을 구할 수가 없었으니,

왜냐하면 악마가 물을 은폐시켜 드러나지 못하게 때문으로, 악마가 생각하기를 ‘살타파륜보살이 물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행에 대하여  생각의 일념(一念)만이라도 하열한 마음이나 다른 마음을 낸다면, 그의 선근이 더하지 못하고 지혜도 밝아지지 못한  일체종지에 이르는 것이 지체되리라’고 했던 것이다.


爾時,薩陁波崙菩薩作是念:‘我當自刺其身,以血灑地,令無塵土來坋大師。

我何用此身!此身必當破壞。我從無始生死已來數數喪身,未曾爲法。’卽以利刀自刺,出血灑地,薩陁波崙菩薩及長者女幷五百侍女皆無異心,惡魔亦不能得便。

그 때에 살타파륜보살이 생각하기를 ‘나는 자신의 몸을 찔러서 그 피를 땅에 뿌려서 먼지가  스승을 더럽히지 않게 해야 하리라. 

나에게  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몸은 반드시 파괴되고  것이며, 나는 시작도 없는 무시(無始)의 세상으로부터 생사(生死)하면서 삭삭(數數, 자주자주)하게 몸을 잃었으나, 아직 일찍이 법을 위하여 잃은 일이 없었다’고 하고는, 

즉시 날카로운 칼로써 손수 그의 몸을 찔러서 피를 내어 땅에다 뿌렸다. 

살타파륜보살과 장자의 딸과 그리고 5백의 시녀들 모두도 다른 마음이 없었으므로, 악마 또한  편(便, 기회)을 얻지 못하였다.


是時釋提桓因作是念:‘未曾有也!薩陁波崙菩薩愛法乃爾,以刀自刺出血灑地!

薩陁波崙及衆女人心不動轉,惡魔波旬不能壞其善根。其心堅固,發大莊嚴,不惜身命,以深心欲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當度一切衆生無量生死苦。’

釋提桓因讚薩陁波崙菩薩言:‘善哉!善哉!善男子!汝精進力大,堅固難動,不可思議!汝愛法、求法,最爲無上!善男子!過去諸佛亦如是,以深心愛法、惜法、重法,集諸功德,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 때에 석제환인이 생각하기를 ‘전에 없었던 미증유(未曾有)로다. 살타파륜보살이 법을 좋아함이 이러하구나! 

칼을 쥐고 스스로의 몸을 찔러서 피를 내어서 땅에 뿌리면서도 살타파륜이나 여러 여인들의 마음이 동요되지 않으므로, 악마 파순(波旬)도 그들의 선근을 파괴하지 못하고 있구나!

 마음이 견고하여서 장엄을 일으키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깊은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여서 일체 중생들을 무량한 생사의 고통에서 제도하고자 하는구나!’라고 하면서,

석제환인이 살타파륜보살을 찬탄하며 말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선남자여, 당신의 정진하는 힘이야말로 크고도 견고하여 움직이기 어렵고 불가사의니다. 

당신은 법을 좋아하여 법을 구하는 이로서는 으뜸이시니 그 보다 더할 이가 없겠습니다.

선남자여,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또한 이와 같아서, 깊은 심심(深心)으로 법을 좋아하고 아끼며 법을 소중히 여겼으며, 모든 공덕을 쌓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습니다.’


薩陁波崙菩薩作是念:‘我爲曇無竭菩薩摩訶薩敷法座,掃灑淸淨已訖,當於何處得好名華莊嚴此地?

若曇無竭菩薩摩訶薩法座上坐說法時,亦當散華供養。’釋提桓因知薩陁波崙菩薩心所念,卽以三千石天曼陁羅華與薩陁波崙。薩陁波崙受華,以半散地,留半待曇無竭菩薩摩訶薩坐法座上說法時當供養。

살타파륜보살이 생각하기를 ‘나는 담무갈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법좌(法座)를 펴고는 비로 쓸고 물을 뿌린 뒤에 깨끗하게 하였으나, 이제 어디에서 이름난 좋은 꽃을 얻어서  땅을 장엄할 수 있을까? 

담무갈보살께서 법좌 위에 앉아서 법을 설하실 때에는 꽃을 뿌려서 공양해야 하리라.’고 하자,

석제환인이 살타파륜보살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는 즉시천석(三千石)이나 되는 하늘의 만다라꽃을 살타파륜에게 주었으므로, 살타파륜은 꽃을 받은 뒤에 반은 땅에 뿌리고 반은 담무갈 보살마하살이 법좌 위에 앉아 법을 설하실 때를 기다려 공양하고자 남겨 두었다.

 

섬 또는 석(䄷, 石)은 부피의 단위이다. 한 섬은 용량 180리터이며, 곡식의 종류나 상태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벼는 200 kg, 쌀은 144 kg, 보리쌀은 138 kg이다. 한 섬은 열 말이며, 신라시대 부피의 단위인 점(苫)에서 유래했으며, 신라시대의 점은 15말이었다. 최치원의 〈연복사비문〉(演福寺碑文) 주석에 ‘유제일두위점(斞除一斗爲苫) 십육두위유(十六斗爲斞)’라고 적혀 있는데, 당시에는 유(斞 : 16말)에서 1말을 뺀 15말을 점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위키

 

爾時,曇無竭菩薩摩訶薩過七歲已,從諸三昧起,爲說般若波羅蜜故,與無量百千萬衆恭敬圍遶,往法座上坐。薩陁波崙菩薩摩訶薩見曇無竭菩薩摩訶薩時,心淨悅樂,譬如比丘入第三禪。”

그 때에 담무갈 보살마하살은 7년이 지난 뒤에 모든 삼매로부터 일어나 반야바라밀을 설하기 위하여 무량한 백천만 대중들에게 공경히 둘러싸여 법좌 위로 가서 앉으셨으니,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은 담무갈 보살마하살을 보자 마음이 즐거운 것이 마치 비구가 제3선(禪)에 들어있는 것과 같았다.”


▶釋曰:薩陁波崙菩薩雖知諸法空無來去相,未能深入,亦不能解種種法門;於諸佛身恭敬深重故,不能觀空。

如大海水波,其力雖大,到須彌山邊則退而無用;薩陁波崙亦如是,雖有大空智力,到佛所則亦無用。

是故曇無竭菩薩今爲說:“諸佛無所從來、去亦無所至。”此中曇無竭自說因緣,所謂:“諸法如不動相,諸法如卽是佛。”

▷논. 해석한다. 살타파륜보살은 비록법이 공하여 오고 가는 없는 무래무거(無來無去)의 상(相)이라는 것을 알았을지라도, 아직 깊이 들지 못하였고 또한 갖가지 법문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모든 부처님의 불신(佛身) 대하여 공경하고 존중함이 너무도 깊어서 그것이 공(空)하다고 관찰할  없었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대해(大海)의 파도가 비록  힘이 셀지라도 수미산 곁에 이르면, 물러나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이, 살타파륜보살도 이와 같아서 비록  공(空)의 지력(智力)이 있었으나, 부처님께 이르기만 하면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담무갈보살이 여기에서 그에게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은 오는 곳도 없고 간다고 해도 또한 이르는 데가 없느니라”고 하였으니, 담무갈 보살은 스스로의 인연을 말한 것으로, 

이른바 “제법의 여(如)는 동요하지 않는 부동상(不動相)이며,법의 여(如)가  부처님이다”라고  것이다.


問曰:何等是諸法如?

묻나니, 어떠한 것이 제법의 여(如)입니까?


答曰:諸法實相,所謂性空、無所得、空等諸法門。

답하나니, 제법의 실상(實相)으로, 이른바 성공(性空)과 무소득공(無所得空) 등의 모든 법문이다.

 

問曰:摩訶般若波羅蜜於佛法大乘六波羅蜜中第一法,若無佛,則無說般若者。

三十二相、八十隨形好、十力、四無所畏等色無色法等淨妙五衆和合,是故名爲佛。

如五指和合名爲拳,不得言無拳;名字旣異,形亦異,力用亦異,不得言無拳,是故知有佛。

묻나니, 마하반야바라밀은 대승(大乘) 불법의 6바라밀 가운데에서 으뜸가는 법으로, 만약 부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반야를 설한 이도 없었을 것입니다.

32상호와 80수형호(隨形好)와력과무소외(四無所畏) 등은 형색이 있는 색(色)과 형색이 없는 무색(無色) 등의 깨끗하고 묘한중(五衆)과 화합한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으로,

마치 다섯 손가락이 화합한 것을 주먹이라 하지만, 주먹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으니,

벌써 이름이 다르고 형상 또한 다르며, 힘과 작용도 다르다 하여 주먹이 없다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부처님도 있는 유불(有佛)이라는 것   있는 것입니다.


答曰:不然!佛法中有二諦:世諦、第一義諦。世諦故言“佛說般若波羅蜜”,第一義故說“諸佛空,無來無去”。如汝說:“淸淨五衆和合故名爲佛。”若和合故有,是卽爲無。

如經中佛自說因緣:“五衆非佛,離五衆亦無佛,五衆不在佛中,佛不在五衆中,佛非五衆有。”

답하나니, 그렇지 않다. 부처님의 불법 가운데에는  가지의 진리가 있으니,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가 그것이다.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고, 

제일의제(第一義諦)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공하여 오는 곳도 없고 가는 데도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깨끗한 오중(五衆) 화합한 까닭 부처님이다'라고 한다면, 

만약 화합한 까닭에 있는 유(有)라 한다면, 그것은  없는 무(無)인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오중(五衆)은 부처님이 아니요,중을 여의어도 또한 부처님는 없는 것이니, 오중은 부처님 가운데에 있지 않고, 부처님도 가운데 있지 않으며, 중이 있음으로 부처님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何以故?五衆是五、佛是一,一不作五、五不作一。又五衆無自性故,虛誑不實;

佛自說:“一切無誑法中,我最第一。”是故五衆不卽是佛。復次,若五衆卽是佛,諸有五衆者皆應是佛。

왜냐 하면 오중(五衆) 다섯이요 부처님은 하나이기 때문이니,  

하나는 다섯이 되지 못하고 다섯 또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오중(五衆)에는  성품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거짓이요 진실하지 못한 것이니,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거짓이 없는 무광법(無誑法) 가운데에서(我)가 제일인 아최제일(我最第一)이므므로 오중(五衆)  부처님이 아닌 것이다”고 하셨으며, 

또한 만약 오중(五衆)이 부처님이라면, 오중(五衆)을 지닌 모든 것이  부처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깊은 참선과 사색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問曰:以是難故,我先說:“第一淸淨五衆、三十二相等名爲佛。”

묻나니, 그러한 힐난 때문에 제가 앞에서 “제일이면서도 가장 깨끗한중으로  32상호 등을 부처님이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答曰:三十二相等,菩薩時亦有,何以不名爲佛?

답하나니, 32상호 등은 보살일 때에도 있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지 않는 것인가?


問曰:爾時雖有相好莊嚴身,而無一切種智;若一切種智在第一妙色身中,是卽名爲佛。

묻나니, 그 때에는 비록 상호(相好)가 있어서 몸을 장엄하였을지라도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없었으며,

만약 일체종지가 제일 오묘한 색신(色身)에 있게 되면,  분을  부처님이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答曰:“一切種智”,般若中說是寂滅相、無戲論;若得是法,則名無所得,無所得故名爲佛,佛卽是空。

如是等因緣故,五衆不得卽是佛。離是五衆亦無佛。所以者何?離是五衆,更無餘法可說;如離五指更無拳法可說。

답하나니, 일체종지는 반야 가운데에서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거나 ‘희론이 없는 무희논(無戱論)’이라 하였으니,

만약  법을 얻는다면, 그것을 곧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 하며,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니, 부처님은  공(空)인 불즉시공(佛卽是空)인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오중(五衆)  부처님이 되지 못하며, 

오중(五衆) 여의고도 또한 부처님은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오중(五衆) 여의고서는 나머지 다른 법으로 말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다섯 손가락을 여의면 다시는 주먹이란 법을 말할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何以故無拳法?形亦異,力用亦異;若但是指者,不應異。因五指合故拳法生,是拳法雖無常生滅,不得言無。

묻나니, 무엇 때문에 주먹이라는 법이 없겠습니까? 

형상도 다르고 힘과 작용도 다르지만 그것이 손가락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합친 때문에 주먹이라는 법이 생기는 것이니,  주먹이란 법이 비록 덧없고 생멸하는 것이기는 할지라도 없다고는 말할  없는 것입니다.


答曰:是拳法若定有,除五指應更有拳可見,亦不須因五指。如是等因緣,離五指更無有拳;佛亦如是,離五衆則無有佛。佛不在五衆中,五衆不在佛中。何以故?異不可得故。

若五衆異佛者,佛應在五衆中,但是事不然。佛亦不在五衆。所以者何?離五衆無佛,離佛亦無五衆。

답하나니, 이 주먹이라는 법이 만약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다섯 손가락을 제외하고 다시 주먹으로   있는 것이 있어야 하고, 또한 다섯 개의 손가락에 의지할 필요조차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등의 인연으로, 다섯 개의 손가락을 여의고는 다시는 주먹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니, 

부처님도 이와 같아서 오중(五衆) 여의고는 부처님은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부처님이 오중(五衆) 가운데에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5중도 부처님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니, 왜냐 하면,  차이를 얻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오중(五衆) 부처님과 다르다면, 부처님이 오중(五衆) 가운데에 있어야 하나, 다만 이는 그렇지 못한 것이니, 부처님 또한 오중(五衆) 있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오중(五衆)중을 여의고는 부처님도 없는 이오중무불(離五衆無佛)이고,

부처님을 여의고도 또한 오중(五衆)이 없는 이불역무오중(離佛亦無五衆)인 것이기때문이다.


譬如比丘有三衣鉢故,可得言有;但佛與五衆不得別異,是故不得言佛有五衆。

如是五種求佛不可得故,當知無佛;佛無故無來無去。

비유하자면, 마치 비구에게는 세 벌의 옷인 삼의(三衣)와 발우가 있기 때문에 ‘있다(有)’고 말할 수 있지만

다만 부처님과 오중(五衆)은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에게는 오중(五衆)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중(五衆)으로 부처님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없는 무불(無佛)이라고 알아야 하며,

부처님은 없는 무불(無佛)이기 때문에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는 무래무거(無來無去)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