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8권 6

Skunky 2024. 12. 10. 09:02

大智度論 論釋薩波崙品 第八十八之餘卷 第九十八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8. 살타파륜품을 풀이함 ③ 6

 

問曰:長者貴而有力,云何先不識薩波崙?聞其功德故,便能令女及其眷屬、寶物,與之俱去?

묻나니, 장자는 존귀하면서도 세력이 있거늘, 어찌하여 먼저 살타파륜도 알지 못하면서 그의 공덕만을 듣고는 바로 그의 딸과 그의 권속들과 그리고 보물들을 주어서 함께 가게 한 것입니까?

 

答曰:長者亦植德本,以少因緣故生無佛國;聞佛德,發其宿識,心卽開悟,故能發遣。

譬如蓮花,生長具足,見日開敷。

답하나니, 그 장자 또한 덕의 근본을 심은 이였으나, 인연이 적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없는 나라에 태어난 것으로, 잠깐 동안이라도 부처님의 덕을 듣고는 그의 전생 의식인 숙식(宿識)이 발동하여서 마음으로 깨쳤으므로 보낼 수 있었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연꽃이 완전히 다 자라면 해를 보면서 피는 것과 같은 것이다.

 

父母知女心淳熟,無不淨行,持操不妄,不樂世樂,但求法利;知其心至,不可制止,若違其意,恐其自害。

思惟籌量已,旣全其意,自得功德,歡喜令去。世閒因緣,深著難解,愛之至故,不能違,何況爲佛道故其心淸淨無所染著而不聽之!女以父母爲法見聽,不惜寶物,亦以隨喜心,爲之歡喜。

그의 부모는 딸의 마음이 순숙(純熟)하여서 부정한 행도 없고 지조를 지키되 허술하지 않았으며, 세간의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고 다만 법의 이익만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마음이 지극하였으므로 제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만약 그 딸의 뜻을 어긴다면 그 스스로가 잘못될까도 두려웠으므로, 사유하고 헤아려 본 뒤에 이미 그 뜻이 온전하고 스스로 공덕을 얻고 있었기에 기뻐하면서 가게 한 것이다.

세간의 인연은 깊이 탐착하고 있어서 풀기 어렵지만, 애(愛)는 지극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길 수 없거늘,

하물며 부처님의 불도를 위하여 그의 마음이 깨끗하면서 염착(染著)하지도 않거늘, 어찌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딸은 부모님이 법을 위하여 허락하면서 보물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따라 기뻐하는 수희심(隨喜心)으로 그것을 기쁘게 여겼다.

 

爾時,衆心旣定,莊嚴七寶之車,與大衆圍遶,稍稍東行。是時,五百女親屬及城中衆人,見是希有難及之事,皆亦隨去。人衆旣集,歡悅共行,渴仰衆香城,如渴者思飮。漸漸進路,遙見衆香城,乃至與長者女及五百女人,恭敬圍遶,欲往曇無竭所。

그 때에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결정되자, 칠보로 된 수레를 장엄하여 가득히 싣고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에워싸고 점차 동쪽을 향해 나아갔으니,

이 때에 5백 여인의 친족과 성 안의 사람들은 이 희유하고 이르기 어려운 일을 보고 모두가 같이 따라 나섰으며,

사람들이 모두 모인 뒤에 기뻐하면서 다 함께 중향성을 향해 나아가며 간절히 우러르는 것이 마치 목마른 이가 물을 생각하듯 하였으며,

점차로 길을 가다가 멀리서 중향성을 보게 되었으며, 나아가 장자의 딸과 5백의 여인들은 다 함께 공경히 둘러싸고 담무갈에게 가고 싶어 하였다.

 

問曰:曇無竭是大菩薩,得聞持等諸羅尼;般若波羅蜜義,已自通利、憶持,何用七寶臺,書般若經卷,著中供養?

묻나니, 담무갈은 바로 큰 보살이어서 문지(聞持) 등의 모든 다라니를 얻었으며, 반야바라밀의 이치를 이미 스스로 환히 통달하여 기억하고 있거늘, 어찌하여 칠보의 대(臺)에 반야의 경권(經卷)을 써서 그 가운데에 모시고 공양하고 있는 것입니까?

 

答曰:雖有種種因緣,略說有二義:一者、衆生心行不同,或樂見經卷,或樂聞演說。

二者、曇無竭身爲白衣,現有家屬。鈍根衆生或作是念:“此有居家,必有染著,何能以畢竟淸淨無著般若波羅蜜利益衆生?自未無著,何能以無著法化?”

답하나니, 비록 갖가지 인연이 있기는 하나 요약하여 설명한다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중생들의 마음의 작용이 같지 않기 때문에 혹은 경권을 보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고, 혹은 설하는 바를 듣기 좋아하는 이도 있으며, 

둘째는 담무갈의 몸은 속인이라서 현재의 가족도 있으니, 근기가 둔한 중생들은 혹 생각하기를 ‘이 분은 집에서 살고 있는 이이므로 반드시 염착(染著)이 있을 것이거늘, 어떻게 필경청정하고 집착이 없는 반야바라밀로써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아직 스스로가 집착이 없는 무착(無著)에 이르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집착이 없는 무착법(無著法)으로써 교화할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할 것이다.

 

是故書其經文,著七寶牒上,衆寶供養;諸天、龍、鬼神皆亦共來恭敬,供養花香、幡蓋,雨於七寶。衆生見者,增益信根,則以此法示傳佛語,案文演勸發。一切寶臺莊嚴之具及薩波崙問釋提桓因,如經中說。

七寶印印者,是曇無竭眞實印,常自手執以印於經。

이 때문에 그 경문을 써서 칠보첩(七寶牒) 위에 모셔 두고, 많은 보배를 공양할 때는 모든 하늘과 용과 귀신들도 모두가 함께 와서 공경하면서 꽃과 향과 번기ㆍ일산을 공양하며 7보를 비 내리듯 하여서, 중생으로서 보게 되는 이는 신근(信根)이 더욱 늘어나게 하며, 이 법으로써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경문을 상고하고 가르침을 펴서 그들을 권고하고 발심하게 하는 것이다.

일체의 보대(寶臺)와 장엄하는 기구며 그리고 살타파륜이 석제환인에게 물은 것은 경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7보의 칠보인(七寶印)’에서, 인(印)이란 담무갈의 진실한 도장으로서 항상 손수 지니고 있으면서 경에 찍는 것이다.

 

有人言:七寶印者,有求佛道七大神,是執金剛杵,常給曇無竭菩薩使守護經文,不令魔及魔民改更錯亂,爲貴敬般若故。

有人但聞演說而發心者,有人見其莊嚴文字而歡喜發心者;是故莊嚴寶臺,用金牒書,七寶印印。

어떤 분은 말하기를 “칠보의 칠보인(七寶印)은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고 있는 일곱의 큰 신인 칠대신(七大神)이니, 그들은 금강저(金剛杵)를 잡고 있으면서 언제나 경문을 수호하게 하여 주어서, 담무갈에게 악마나 악마의 백성들이 다시 고치거나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나니, 반야를 귀중히 여기고 공경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다만 연설만을 듣고 발심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장엄한 문자를 보고 기뻐하면서 발심하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보대를 장엄하고 황금으로 된 판에 써서는 칠보인(七寶印)을 찍는 것이다.

 

問曰:臺上書寫般若,曇無竭菩薩口所演說般若,雖二處俱有,而書寫處不能益人,何以先至臺所?

묻나니, 보대 위에 베껴 쓴, 서사반야(書寫般若)와 담무갈보살이 입으로 연설하는 구연설반야(口演說般若), 이 두 가지가 비록 함께 할지라도, 서사반야(書寫般若)가 있는 곳 자체로는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없거늘, 무엇 때문에 먼저 보대 위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까?

 

答曰:所書般若,入法寶中。佛寶次第有法寶故,應先供養;曇無竭一人故,僧寶所不攝,是故先供養法寶。

又曇無竭菩薩所說者雖是法,而衆生取人相故,多生著心;若見所書般若,不生人相,雖取餘相,著心少於著人生患,是故先供養經。

답하나니, 쓰여 있는 서사반야(書寫般若)는 법보(法寶)에 들어가는 것이며,

불보(佛寶)는 그 다음의 법보이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공양하는 것이며,

담무갈은 한 사람뿐이기에 승보(僧寶)에는 속하지 않으니, 이러한 때문에 먼저 법보에 공양하는 것이다.

또 담무갈보살이 말한 것이 곧 법이라 할지라도 중생은 사람의 상을 취하는 까닭에 집착하는 마음을 많이 내지만,

만약 서사된 반야를 보면 사람이란 인상(人相)을 내지 않나니, 비록 그 밖의 다른 상(相)을 취하여서 마음으로 집착할지라도 사람에 집착하여 우환을 내는 것보다는 적기 때문에 먼저 경에 공양하는 것이다.

 

經法諸佛供養,何況曇無竭及薩波崙!

曇無竭因般若波羅蜜故得供養,所因之本,何得不先供養?是故分所供養具爲二分。

경법(經法)은 모든 부처님들도 오히려 공양하시는 것이거늘, 하물며 담무갈이나 살타파륜이겠는가!

또 담무갈은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공양을 얻고 있거늘, 그 원인이 되는 책인, 서사반야(書寫般若)를 어찌 먼저 공양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공양거리를 나누어 두 몫으로 하는 것이다.

 

問曰:曇無竭有六萬女、五欲、宮殿,云何能以所散花物化爲花臺?

묻나니, 담무갈에게는 6만명의 채녀(婇女)가 있고 5욕(欲)의 궁전도 있거늘, 어떻게 하여 뿌려진 꽃 등의 물건들을 변화시켜 화대(花臺)를 만드는 것입니까?

 

答曰:有人言:諸佛神力,因薩波崙所供養物作此變化。

有人言:曇無竭是大菩薩法性生身,爲度衆生故受五欲。如曇無竭菩薩名字義中說。

답하나니, 어떤 분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이니, 살타파륜이 공양하는 공양물(供養物)들로 인하여 이러한 변화를 지으시는 것이다”라고 하며,

어떤 분은 말하기를 “담무갈은 큰 보살로서 곧 법성생신(法性生身)이니,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부러 5욕의 몸을 받고 있는 것이다”고도 하나니,

마치 담무갈보살(Dharmogata, 법을 일으키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이름을 풀이하여 설명한 곳의 설명과 같다.

 

問曰:菩薩法,先於衆生中起悲心,欲度衆生苦故,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今但見曇無竭神力威德,云何發心?

묻나니, 보살로서의 법은 우선 중생들에 대하여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고통에서 제도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거늘, 지금은 다만 담무갈의 신력과 위덕(威德)만을 보고 어떻게 발심한다 하겠습니까?

 

答曰:發心有種種:有聞說法而發心者,有於衆生起慈悲而發心者,有見神通力、大威德而發心者,然後漸漸而生悲心,

如『智印經』中說。依愛而斷愛,依慢而斷慢。如人聞道法,愛著是法故,捨五欲出家。

又有聞某甲得阿羅漢道,而生高心:“此人無勝我事,彼能爾,我何不能?”而生大精進,得阿羅漢道。佛道中亦如是。

답하나니,발심하는 것에는 갖가지가 있으니,

설법을 들으면서도 발심하는 이가 있고, 중생들에 대하여 자비를 일으켜서 발심하는 이가 있으며, 신통력이나 대위덕을 보고 발심하는 이도 있나니, 그러한 뒤에 점차로 비심(悲心)을 내게 되는 것이다.

마치 '지인경(智印經)'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애착에 의지해서 애착을 끊고, 교만에 의지해서 교만을 끊는 것은 마치 사람이 도법(道法)을 듣고 이 법에 애착하기 때문에 오욕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아무개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높은 체하는 고심(高心)을 내면서 “이 사람은 나보다 훌륭하지 못하나, 오히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거늘, 어찌 내가 할 수 없겠는가?”라고 하면서, 크게 정진하다가 아라한의 도를 얻은 이도 있으니, 부처님의 불도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長者女等及五百女人常深貪勢力自在樂,聞往古有人神力變化,寶物具足,人中受天樂;後見曇無竭、臺觀、宮殿,在大法座上坐,天人供養;又見所供養物於虛空中化成大臺,心卽大喜,發難遭想,知皆從福德因緣可辦是事,是故皆發作佛心。所聞發心者,行皆次第行。

장자의 딸과 오백의 여인들은 항상 세력과 자재한 쾌락만을 깊이 탐내고 있으면서 “옛날에 어떤 사람은 신력과 변화로 보물을 구족하여서 인간 세계에 있으면서도 하늘의 쾌락을 누렸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러던 차에 담무갈의 대관(臺觀)과 궁전이며 큰 법좌(法座) 위에 앉아 하늘과 사람들이 공양하는 것을 보았으며,

또 공양한 물건들이 허공에서 변화하여 큰 화대가 되는 것을 보았으므로, 곧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만나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킨 것이니,

이러한 모두가 복덕의 인연으로부터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부처님이 되겠다는 마음을 낸 것이며, 발심한 이들의 행을 듣고, 모두가 차례로 발심자의 행을 행한 것이다.

 

如『毘摩羅經』中說:“愛、慢等諸煩惱,皆是佛道根本。”是故女人見是事已,生愛樂心,知以福德因緣可得是事,故皆發心。因是愛、慢,後得淸淨好心,故言佛道根本,譬如蓮花生泥。

마치 '비마라힐경(毗摩羅詰經, 유마경)'에서 “애착과 교만 등의 모든 번뇌 모두는 곧 부처님 불도의 근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여인들이 이러한 일을 보자마자 좋아하는 애락심(愛樂心)을 내었으며, 복덕의 인연으로 이런 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두가 발심한 것이다.

애착과 교만으로 인하여 나중에는 깨끗하고 좋은 마음을 얻게 되기 때문에 “부처님 불도의 근본이다”고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연꽃이 진창에서 피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發心已作願:“如曇無竭所爲,我等亦當得是!”時,薩波崙等頭面禮曇無竭菩薩。花、香等供養不貴故,先以供養;身貴重,故後禮拜。

禮拜已,說本求般若因緣,如經中說:“我本求般若時,聞空中聲,乃至我今問大師:‘諸佛從何所來?去至何處?’”

발심한 뒤에는 원을 세우기를, ‘마치 담무갈이 하는 것과 같이 저희들 또한 그렇게 되게 하여주옵소서’라고 하자,

그 때에 살타파륜 등이 머리를 대어 담무갈보살에게 두면예(頭面禮)를 하였으니,

꽃과 향 등의 공양은 귀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하고, 몸에 공양하는 것은 귀중하기 때문에 그 뒤에 예배한 것이다.

예배하고 나서는 본래 반야를 구한 그 인연을 말하였으니, 마치 경에서 말하기를 “제가 본래 반야를 구하고 있을 때, 공중에서 공중성(空中聲)이 들렸습니다”라고 한 것과, 나아가 “저는 큰 스승께 묻겠으니, 모든 부처님은 어디서 오셨다가 어느 곳으로 가시는 것입니까?”라고 한 것과 같다.

 

問曰:薩波崙得諸大三昧,所謂破無明、觀諸法性等,云何不知空而取佛相、深生愛著?

묻나니, 살타파륜은 이른바 파무명(破無明)과 관제법성(觀諸法性) 등의 모든 큰 삼매를 얻었거늘, 어찌하여 공(空)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불상(佛相)을 취하며 깊이 애착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관제법성(觀諸法性)삼매= 제법성관(諸法性觀)삼매, 일체법의 진실한 성품인 실성(實性)을 관찰하는 삼매

파무명(破無明)삼매= 파제법무명(破諸法無明)삼매, 제법은 범부인의 마음속에서는 무명(無明)의 인연 때문에 삿되고 굽고 바르지 않아서. 이른바 항상 있다는 상(常)ㆍ즐겁다는 낙(樂)ㆍ'나'라는 아(我)ㆍ깨끗하다는 정(淨)이라고 하지만, 이 삼매를 얻었기 때문에 항상하다는 등의 뒤바뀜에 상응하는 무명(無明)이 파괴되어서, 다만 ‘일체법은 무상(無常)ㆍ공(空)ㆍ무아(無我)이다 ’고 관찰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7권 3

 

答曰:若新發意菩薩雖能摠相知諸法空、無相,於諸佛所深愛著故,不能解佛相畢竟空,雖知空而不能與空合。

何以故?諸佛有無量無邊實功德,是菩薩利根故,深入、深著。若佛不爲是菩薩說空者,是菩薩爲愛佛故,能自滅親族,何況餘人!但以解空故無是事。

답하나니, 새로 발심한 신발의 보살은 비록 전체의 총상(總相)으로는 제법이 공(空)하고 무상(無常)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깊이 애착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불상(佛相)도 필경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비록 공이라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공과는 합치되지 못하나니,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께는 무량하고 무변한 진실한 실공덕(實功德)이 있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근기가 영리하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고 깊이 애착하는 것이니, 만약 부처님께서 이 보살에게 공(空)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이 보살은 부처님에 애착한 까닭에 스스로의 친족도 없앨 수 있었을 것이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사람이겠는가? 다만 공(空)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없는 것이다.

 

波崙深著諸佛故不能知,而問大師:“今爲我說諸佛來去相,我見佛身無厭足故,常不離見諸佛。”

살타파륜은 모든 부처님에 깊이 애착한 까닭에 알지 못하여서 큰 스승에게 묻기를 “지금 저에게 모든 부처님의 오고 가는 내거상(來去相)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는 부처님 불신(佛身)을 아무리 뵈어도 만족하여지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부처님 뵙고자 하는 마음을 여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八 終 대지도론 98권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