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6권 2

Skunky 2024. 12. 4. 09:01

大智度論  釋涅槃如化品 第八十七卷 第九十六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7. 열반여화품(涅槃如化品) 풀이함  2

 

問曰:若爾者,此中何以說“離一切法相”?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에서 “일체법의 상(相)을 여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一切法不可盡壞,但離其邪憶想,一切法自離。如神通人壞色相故,則石壁無礙。

如佛說:“汝等當於五衆中修正憶念,斷貪欲,得正解脫。”是故說離相。

답하나니, 일체법 전부를 다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니, 다만 그 삿된 기억과  삿된 생각을 여의기만 한다면, 일체법은 저절로 여의게 되는 것으로, 마치 신통이 있는 사람은 물질의 색상(色相)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석벽(石壁, 돌벽)도 장애가 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대들은 5중(衆, 오온) 가운데에서 바른 기억의 정억념(正憶念)을 닦고, 탐욕을 끊으면서 바른 해탈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여읨의 이상(離相)을 말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須菩提聞是已,心驚:“云何一切法若大若小都無本實?凡夫人虛妄,可無實事;聖人應有少許實!”

須菩提雖是阿羅漢,深貴佛法,亦爲新發意菩薩故問。

佛知須菩提意,欲明了是事,故說譬喩,反問須菩提:“於汝意云何?如化人復作化,是化有本實不空不?”

수보리 존자는 이러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놀라면서 ‘어떻게 하여 일체법은 크건 작건 간에 도무지 근본과 실체가 없다고 하시는 것일까?

범부인은 허망하므로 진실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성인에게는 조그마한 진실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수보리 존자는 아라한이라서 부처님의 불법을 몹시 귀히 여기고 있기는 하나, 역시 새로이 뜻을 낸 초발의 보살들을 위하여 일부러 여쭌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의 뜻을 아시면서 이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비유를 말하면서 수보리 존자의 질문을 되받아서 묻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화로 된 화인(化人)이 다시 변화를 짓는 것과 같아서, 이 변화(化)로 된 것은 근본과 실체가 있는 것이며 공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신 것이다.


答言:“不也!是化無有實事而不空者,空及化人二事,不合不散,皆空故,用空空故空。”

수보리 존자가 “아닙니다”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는 “이 변화(化)하는 것에는 진실한 실사(實事)나 공하지 않음이 없으니,

공(空)과 변화한 화인(化人)의 두 가지는 합하지도 않는 불합(不合)이고 흩어지지도 않는 불산(不散)이니,

모두가 공(空)한 때문이요, 그 공한 것도 공한 공공(空空)이라서 공(空)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問曰:何以名爲“空空故空”?

묻나니, 어찌하여 공한 것도 공한 공공(空空)이라서 공(空)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爲破十八事實故有十八空,破衆生心中變化空法故用空空。世閒人皆知幻化法不久住、無所能作,故名空;是故言:“空空故空,不應分別是空、是化”。

凡夫人知變化是空、不實,謂餘法爲實,是故以化爲喩,當知餘法與化無異。

如聖人所解,不得以化爲喩,以無所分別故。一切法名爲五衆;佛言:“色、受、想、行、識無不是化,以空故。”

답하나니, 열여덟 가지의 실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십팔공(十八空)이 있으며,

중생의 마음속에서 변화하는 그 공법(空法)까지 타파하기 위하여 공공(空空)을 쓰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은 환화(幻化)의 법은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지을 수 없는 무소능작(無所能作)이기에 공이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설하시기를 “공한 것도 공한 공공(空空)이기에 공이라 하나니, ‘이것은 공하다’거나 ‘이것은 변화(化)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범부인은 변화(化)는 공하여서 진실하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그 밖의 다른 법은 진실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변화(化)로써 비유하신 것이며,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법과 변화(化)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다면 변화로써 비유를 삼을 수가 없으니,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법을 5중(衆, 오온)이라 하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질의 색(色)ㆍ 느낌의 수(受)ㆍ생각의 상(想)ㆍ 지어감의 행(行)ㆍ인식의 식(識)의 오중(五衆, 오온)은 곧 변화(化)가 아닌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이는 공하기 때문이다.


須菩提白佛言:“世尊!凡夫法虛妄應如化,出世閒法亦如變化耶?所謂四念處乃至十八不共法。若四念處法等從因緣邊生故如化,是法果 所謂涅槃,亦復如化耶?若能起是行者 所謂須陁洹乃至佛,亦復如化耶?”

佛答:“若有爲、若無爲及諸賢聖皆是化,畢竟空故。”是義從初品已來,處處廣說,是故言:“一切法空,皆如化。”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범부의 법은 허망하므로 변화(化)와 같아야 하겠지만, 출세간의 법 또한 변화(化)와 같은 것입니까?

이른바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이니, 4념처의 법 등은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변화(化)와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법의 결과는 이른바 열반이거늘 어찌 변화(化)와 같으며, 그리고 이 행(行)을 일으키는 자(者)로서, 소위 수다원이나 나아가 부처님까지도 역시 변화(化)와 같은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유위와 무위와 그리고 모든 성현은 모두가 변화(化)이니, 그것은 필경공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러한 이치는 초품(初品)을 비롯한 곳곳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법은 모두가 변화(化)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問曰:若一切法皆空、如化,何以故有種種諸法別異?

묻나니, 만약 일체법 모두가 공하여 마치 변화(化)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갖가지 법에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答曰:如佛所化及餘人所化,雖不實而有種種形像別異。夢中所見種種亦如是,人見夢中好、惡事,有生喜者、有生怖者。如鏡中像,雖無實事,而隨本形,像有好醜。諸法亦如是,雖空而各各有因緣。

如佛此中說:“是化法中,有聲聞變化、有辟支佛變化、有菩薩變化、有佛變化、有煩惱變化、有業變化。是故一切法皆是變化。”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변화(化)로 만든 것이나, 그 밖의 사람이 변화(化)로 만든 것이 비록 진실하지는 않을지라도 갖가지 형상으로 다름이 있으며,

꿈속에서 보는 갖가지 형상도 이와 같으니, 사람이 꿈속에서 좋고 나쁜 일을 보면서 기뻐하는 이도 있고 두려워하는 이도 있으니, 마치 거울 속의 형상에도 비록 진실함이 없을지언정 본래의 형상을 따라 곱고 추함이 있는 것과 같이,

제법도 이와 같아서 비록 공(空)할지라도 저마다의 인연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가운데서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이 변화하는 화법(化法)에는 성문(聲聞)의 변화가 있고 벽지불(辟支佛)의 변화가 있으며, 보살의 변화가 있고 부처님의 변화가 있으며, 번뇌(煩惱)의 변화가 있고, 업(業)의 변화가 있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일체법은 모두가 변화(化)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聲聞變化者,三十七品、四聖諦,乃至三解脫門。何以故?聲聞人住持戒中,禪定攝心求涅槃,觀內外身不淨,是名身念處。如是等法,爲涅槃故勤精進生起。是法本無而今有、已有還無,是爲聲聞變化。

‘성문의 변화’라 함이란, 37 조도품과 4성제(聖諦) 내지는 3해탈문(解脫門)이니,

왜냐 하면, 성문인은 지계(持戒)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선정(禪定)으로 마음을 가다듬어서 열반을 구하며, 안팎으로 몸의 부정(不淨)을 닦기 때문이니, 이를 신념처(身念處)라 하며, 

이와 같은 등의 법은 열반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법을 일으키면, 본래 없었던 것이 비로소 있게 되고 이미 있었던 것은 다시 없게 되므로, 이것이 곧 성문변화(聲聞變化)인 것이다.


辟支佛變化者,所謂觀十二因緣等諸法。所以者何?辟支佛智慧深於聲聞人故。菩薩變化者,所謂六波羅蜜,及二種神通:報得及修得。佛法變化者,三十二相、八十隨形好、十力、一切種智等無量佛法。煩惱變化者,煩惱起種種業:善、不善、無記業、畢定業、不畢定業,善、不善、無動業等無量諸業。

‘벽지불의 변화’라 함이란, 이른바 12인연(因緣) 등의 제법을 관(觀)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벽지불의 지혜는 성문인보다 깊기 때문이며, 

‘보살의 변화’라 함이란, 이른바 6바라밀과 두 가지의 신통 즉, 과보로 얻는 보득(報得)과 수행으로 얻는 수득(修得)이 있으며, 

‘부처님 불법의 변화’라 함이란, 32상호와 80수형호(隨形好)와 10력(力)과 일체종지(一切種智) 등의 무량한 부처님의 불법이며, 

‘번뇌의 변화’라 함이란, 번뇌는 갖가지 업을 일으키나니,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업(無記業)과 필정업(畢定業)ㆍ불필정업(不畢定業)과 선(善)ㆍ불선(不善)ㆍ무동(無動)의 업 등의 무량한 업들이 있는 것이다.


問曰:諸煩惱是惡法,云何能生善業、無動業?

묻나니, 모든 번뇌 그것은 거친 악업(惡業)이거늘, 어찌하여 선업과 무동업을 낼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有二種因:一者、近因,二者、遠因。人有我心,爲後身當常樂故修布施,是近因;爲離欲界衰惱不淨身故修禪定,是爲遠因。

復有人言:一切凡夫皆以我心和合故起業。有人言:無有離我心起第六識,住我心故起第六識,我心卽是諸煩惱根本。

답하나니, 이에 두 가지 원인이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원인인 근인(近因)이요, 둘째는 먼 원인의 원인(遠因)이다.

사람에게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있으면서 후생에 받는 몸이 언제나 쾌락하기 위하여 보시를 닦는 것은 바로 가까운 원인인 근인(近因)이며,

욕계(欲界)의 괴로움인 쇠뇌(衰惱)와 깨끗하지 못한 몸을 여의기 위하여 선정을 닦는 것은 바로 먼 원인의 원인(遠因)이다.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일체 범부는 모두가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화합하기 때문에 업을 일으킨다”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을 여의면 제6식(識)이 일어나지 않지만,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에 머무르기 때문에 제6식이 일어나는 것이니,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이 곧 모든 번뇌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問曰:煩惱是垢心,善心是淨心,垢、淨不得和合,何以言“住我心中能起善業”?

묻나니, 번뇌는 더러운 마음의 구심(垢心)이요, 착한 마음은 깨끗한 마음의 정심(淨心)입니다.

더러운 구(垢)와 깨끗한 정(淨)은 화합하지 못하거늘, 무엇 때문에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에 머무르면서 착한 선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不爾!一切心皆與慧俱生,無明心中亦應有慧;慧與無明相違法而一心中起。淨、垢亦如是。

凡夫未得聖道,云何能得離我心而行善?

瞋等煩惱中,則不得行善;我心無記柔軟故,是故煩惱心中生善業、無動業,無咎。

답하나니,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일체의 마음은 모두가 지혜와 함께 생기는 것으로, 무명심(無明心)에도 지혜는 역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혜와 무명은 서로 반대되는 법이면서도 한 마음의 일심(一心)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깨끗한 정(淨)과 더러운 구(垢) 또한 이와 같은 것으로,

범부는 아직 성인의 성도(聖道)를 얻지 못한 이거늘, 어떻게 나의 아심(我心)을 여읠 수 있으며, 착한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성을 내는 등의 번뇌 가운데에서는 선(善)을 행할 수 없지만,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은 무기(無記)라서 유연(柔軟)하기 때문에 번뇌심(煩惱心) 중에서 선업(善業)과 무동업(無動業, 부동행)과 무구업(無咎業)이 생기는 것이다.


業變化者,生一切果報法,所謂六道:惡業果報是三惡道,善業果報是三善道。惡業有上、中、下:上者地獄,中者畜生,下者餓鬼。善業亦有上、中、下:上者天,中者人,下者阿修羅等。上善業有種種輕重等分別,上惡業亦有輕重差別。次第輕重,如地獄中說;餘道亦如「分別業品」中說。

업의 변화의 업변화(業變化)라는 것은, 일체 과보의 법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른바 6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나쁜 악업의 과보는 삼악도이고, 착한 업의 과보는 삼선도이다.

나쁜 악업에는 상(上)ㆍ중(中)ㆍ하(下)가 있어서 상(上)은 지옥이요, 중(中)은 축생이며, 하(下)는 아귀이며,

착한 선업에도 상ㆍ중ㆍ하가 있어서, 상(上)은 하늘이요, 중(中)은 사람이며, 하(下)는 아수라 등이다.

상(上)의 착한 선업에도 갖가지의 무겁고 가벼운 경중(輕重)의 분별이 있고,

상(上)의 나쁜 악업에도 무겁고 가벼운, 경중의 차별이 있으니, 그 차례와 경중에 대해서는 지옥(地獄)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그 밖의 세계(道)에 대해서도 역시 '분별업품(分別業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問曰:若從業有,何以言變化?

묻나니, 만약 업을 따라 있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변화(化)를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凡夫人見諸法不如化;聖人知畢竟空相故,以天眼觀衆生皆無有終、始、中閒。如化主遠處作變化;業亦如是,在過去世中作今身變化。如變化事能種種令人生憂、喜、怖畏;智者觀之,皆無有實,而人橫生憂喜,是人可笑!業亦如是,是故說業變化。

답하나니, 범부인은 제법을 변화와 같지 않다고 보지만, 성인은 필경공한 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천안(天眼)으로 중생을 볼 때, 그 모두가 처음도 나중도 중간도 없는 것이 마치 변화를 짓는 화주(化主)가 먼 곳에서 그 변화를 짓는 것과 같음을 보는 것이니, 업 또한 이와 같아서 과거 세상 동안에 지금의 몸을 위한 변화(化)를 짓는 것이다.

변화(化)로 된 일들의 화사(化事)의 갖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과 기쁨과 두려움을 내게 하나니,

지혜 있는 이는 그 모두에 실체가 없다고 보지만, 사람들은 제멋대로 근심이나 기쁨을 내고 있으니,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가히 우스운 것이며, 업 또한 이와 같은 까닭에 “업변화(業變化)”라고 하는 것이다.


問曰:是諸變化皆業所作,何以不但說業變化?

묻나니, 이 모든 변화는 모두가 업으로 되는 업소작(業所作)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업의 변화’라고만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業有二種:淨業,垢業。淨業者,聲聞變化乃至佛變化;垢業是煩惱變化。

復次,有二種業:凡夫業,聖人業。凡夫業是煩惱變化;聖人業,須陁洹乃至佛。

是故雖皆是業變化而廣分別,無咎。“是故,須菩提!當知一切法空皆如化。”

답하나니, 업에 두 가지가 있으니, 깨끗한 정업(淨業)과 더러운 구업(垢業)이다.

깨끗한 정업(淨業)이란 성문의 변화 내지는 부처님의 변화이며,

더러운 구업(垢業)업이란 곧 번뇌의 변화이다.

또한 두 가지 업(業)이 있으니, 범부의 업과 성인의 업이며, 

범부의 업이란 곧 번뇌의 변화요, 성인의 업이란 수다원에서부터 부처님까지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모두가 업의 변화라 할지라도 자세히 분별하여도 허물이 되지 않기 때문에 “수보리야, 일체법은 공하여서 모두가 변화와 같은 여화(如化)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