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5권 7

Skunky 2024. 12. 3. 09:01

大智度論  論釋平等品 第八十六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6. 평등품(平等品) 풀이함 5

 

問曰:先處處說“諸法卽是平等相,平等卽是諸法實,名異而義同。色如,非色、非離色”,今何以說“平等出過一切法”?

묻나니, 앞의 곳곳에서 ‘제법은 곧 평등상(平等相)이고, 평등은 곧 제법의 실상(實相)이라서, 이름은 달라도 뜻은 동일한 것이니, 물질의 색여(色如)는 물질이 아닌 비색(非色)이나, 물질을 여의는 것이 아닌 비이색(非離色)이다’라고 말씀하셨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평등이 일체법을 벗어난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一切法有二種:一者、色等諸法體;二者、色等法中行 凡夫邪行,賢聖正行。此中說平等,於凡夫行中出,不言色等中出。復次,平等無能行、無能到。

於是須菩提驚問:“佛亦不能行、不能到?”須菩提謂:是法雖甚深微妙難行,是事佛應當得!

답하나니, 일체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질(色) 등 제법의 체성의 체(體)요,

둘째는 물질(色) 등의 법 가운데서의 행(行)이니, 범부는 삿된 행의 사행(邪行)이요, 성현은 바른 행의 정행(正行)인 것이다.

이 가운데서 말하는 ‘평등’은 범부의 행을 초월하는 것으로, 물질(色) 등을 초월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평등은 행할 수도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니,

여기에서 수보리 존자가 놀라면서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도 또한 행할 수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이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입니까?”라고 하였다.

수보리 존자는 ‘이 법은 매우 깊고 미묘한 것이라서 행하기 어려울지라도, 부처님만은 마땅히 하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佛答:“從須陁洹乃至佛皆無能行、無能到。”佛意:三世十方佛不能行、不能到,何況一佛!平等性自爾故。

須菩提復問:“佛於一切法中行力自在,佛無㝵智慧,無處不到,云何言不能行、不能到?”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수다원에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가 모두를 행할 수도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니라”고 하셨으니,

부처님의 뜻은 ‘삼세(三世)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행할 수가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거늘, 하물며 한 부처님이겠는가!

평등한 성품의 평등성(平等性)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고 하신 것이며,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또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서 행하는 행력(行力)이 자재하시며, 부처님의 걸림 없는 무애지혜(無礙智慧)는 모든 곳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거늘, 어찌하여 행할 수도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라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佛答:“若佛與平等異,應有是難:‘何以不能行、不能到?’今凡夫平等、須陁洹平等、佛平等,皆一平等,無二無分別。”是凡夫乃至佛,自性不能自性中行、不能自性中到;自性應他性中行。

是故佛說:“若佛與平等異,佛應行平等。但佛卽是平等故,不行、不到,非以智慧少故。”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만약 부처님과 평등이 다른 것이라 한다면 마땅히 ‘무엇 때문에 행할 수도 없는 불능행(不能行)이고, 다다를 수 없는 불능도(不能到)이라 하는가’라고 따져야 하겠지만,

지금 범부의 평등과 수다원의 평등과 부처님의 평등은 모두가 같은 하나의 일평등(一平等)이라서 둘도 없는 무이(無二)이고 분별도 없는 무분(無分)이니라”고 하셨으니,

이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의 자성(自性)은 자성(自性)에서 행할 수 없고, 자성(自性)에 이를 수도 없으며, 자성(自性)은 마땅히 다른 성품의 타성(他性)에서 행하여져야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부처님과 평등이 다르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마땅히 평등을 행해야 되는 것이지만, 다만 부처님이 곧 평등일 뿐이기 때문에 행하지도 않고 이르지도 않는 것이니, 지혜가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라”고 하셨다.


須菩提白佛言:“若平等,凡夫乃至佛不可得異,今凡夫、聖人不應有差別!”

佛可須菩提問:“平等中無差別,世諦故凡夫法中有差別。”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만약 평등하여서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다름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범부와 성인에 차별이 있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질문을 인가하시면서 “평등한 가운데에는 차별이 없지만,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범부의 법에서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고 하셨다.


復問:“若凡夫乃至佛無有差別,云何三寶大現於世閒,大利益衆生?”

佛答:平等卽是法寶,法寶卽是佛寶、僧寶。何以故?未得法時,不名爲佛;得平等法故名爲佛;得是平等法故,分別有須陁洹等差別。

또한 여쭈기를 “만약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삼보(三寶)가 세간에 나타나서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평등이 곧 법보(法寶)요, 법보가 불보(佛寶)이며, 승보(僧寶)이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아직 법을 얻지 못한 때에는 부처님이라 하지 않지만, 평등한 법을 얻으면, 그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나니, 이 평등한 법을 얻은 까닭에 분별하면서 수다원 등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須菩提受佛教:“是法皆無合、無散,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唯佛有是力,於空、無相中,分別是凡夫、是聖人。”佛告須菩提:“如是!如是!若諸佛不分別是法,云何當知有地獄乃至十八不共法?”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서 “이 법은 모두가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며, 무색(無色),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의 일상(一相)인, 이른바 무상(無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부처님만은 이러한 힘이 있으시므로 공(空)ㆍ무상(無相)인 가운데에서 ‘이는 범부이고, 이는 성인이다’라고 분별하십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이러한 법을 분별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지옥 내지는 18불공법이 있음을 알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問曰:諸佛如日出,不能令高者下、下者高,但能照明萬物,令有眼者別識;諸佛亦如是,亦不轉諸法相,但以一切智照,爲人演說令知。汝何以故言:“若佛不分別諸法,云何知有地獄乃至十八不共法?”如今畜生等現目所見,人皆識知,何須佛說!

묻나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마치 해가 돋을 때와 같아서, 높은 곳을 낮게 하거나, 낮은 곳을 높게 할 수는 없으나, 다만 만물을 밝게 비추어서 눈이 있는 이로 하여금 구별하여고 알게 할 뿐인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아서 제법의 상을 바꾸지 않고, 다만 일체지(一切智)로써 비추어 주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연설하여 알게 하실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만약 부처님이 제법을 분별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옥에서부터 18불공법 내지는 18불공법까지가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치 지금 축생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사람들 모두가 분별하여 아는 것과 같은 것이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한 것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佛雖不作好醜諸事,而演說示人。知有二種:一者、凡夫虛妄知,二者、如實知。

知畜生等相,是凡人虛妄知;佛爲知實相,故言:“佛不分別諸法,云何知有地獄等。”

復次,諸佛法寂滅相、無戲論;此中若分別有地獄等相,不名爲“寂滅”、“不二”、“無戲論法”。

佛雖知寂滅、不二相,亦能於寂滅相中分別諸法,而不墮戲論。

답하나니, 부처님께서 비록 좋거나 추한 모든 것들을 짓지 않으셨으나, 연설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보이셨으며,

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범부들이 허망하게 아는 허망지(虛妄知)요,

둘째는 여실하게 아는 여실지(如實知)이다.

축생 등의 상을 아는 것은 곧 범부인들이 허망하게 아는 허망지(虛妄知)이니, 부처님께서는 그 진실한 실상(實相)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부처님이 제법을 분별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옥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 모든 부처님의 불법은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라서 희론이 없는 것이니,

이 가운데에서 만약 지옥 등의 상(相)이 있다고 분별한다면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고,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며, 희론이 없는 무희론법(無戲論法)’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적멸상(寂滅相)이고, 불이상(不二相)이라는 것을 아셔서, 적멸상(寂滅相)이고, 불이상(不二相) 가운데에서 제법을 분별하시면서도 희론에 떨어지지 않으시는 것이다.


離諸法實相者,雖眼見畜生等,亦不能如實知其相。如牛,角、足、尾等諸分邊和合,更有牛法生,是爲一。諸分多、牛法一,一不作多、多不作一。

제법의 실상(實相)을 여읜 이는 비록 눈으로 축생 등을 볼지라도 ,역시 그 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나니, 마치 소(牛)의 뿔과 발과 꼬리 등의 여러 부분이 화합하여서 다시 소(牛)라는 법이 생겨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모든 부분은 여럿이지만, 소(牛)라는 법은 하나인 것이니,

하나는 여럿이 되지 않는 일불작다(一不作多)이고 여럿은 하나가 되지 않는 다불작일(多不作一)인 것이다.


有人言:此說非也!除此諸分,應更有牛法力用可見。牛法衆分和合生,而牛法不異衆分。何以故?見此衆分合故名爲見牛,更不見餘物爲牛。

異者破一,一者破異,不一不異破一異;若無一異,云何有不一不異?若入是諸法平等中,爾時,始如實得牛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러한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 여러 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소'라는 법이 있어야 하고, 힘의 작용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소'라는 법은 여러 부분이 화합하여서 생긴 것이나, '소'라는 법은 여러 부분과 다르지도 않나니, 왜냐 하면 이 여러 부분이 합친 것을 보기 때문에 '소'를 본다고 하는 것이요, 그 밖의 다른 물건을 보면서 '소'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이(異)란, 하나인 일(一)을 깨뜨리고, 하나인 일(一)은 다른 이(異)를 깨뜨리며,

하나가 아닌 불일(不一), 다른 것도 아닌 불이(不異)로는 하나이면서 다른 일이(一異)를 깨뜨리며,

만약 하나인 것과 다른 것이 없는 무일이(無一異)라면, 어찌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것이 있겠는가?

만약 이 모든 제법의 평등함 가운데에 들어가면 그 때에서야 비로소 여실하게 소의 상(相)을 얻게 되는 것이다.


是故言:“若佛不分別諸法相、不說二諦,云何善說畜生等?

所謂於平等不動而分別諸法。”不動者,分別諸法時,不著一異相。

그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부처님이 제법의 법상(法相)을 분별하지 않고, 두 가지의 진리인 이제(二諦)를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축생 등을 잘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이른바 평등에서 부동(不動)하면서 제법을 분별하는 것이라.

‘동요하지 않는, 부동(不動)’이라 함이란, 제법을 분별할 때, 하나인 일(一)이다ㆍ다른 이(異)라는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須菩提白佛:“如佛於諸法等中不動,辟支佛乃至凡夫於諸法等中亦不動。何以故?諸佛平等相,乃至凡夫亦平等相。

世尊!若爾者,佛云何分別諸法是色異,色性異、受性異,乃至有爲、無爲性異?

若不分別諸法,菩薩行般若波羅蜜時,不得從一地至一地,乃至淨佛國土。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마치 부처님께서 제법 등에서 동요하지 않으시는 것과 같이, 벽지불 내지는 범부도 제법 등에서 역시 동요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은 평등한 평등상(平等相)이요, 나아가 범부 또한 평등상(平等相)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러하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제법을 분별하시면서, 이 물질이 다른 색이(色異)이고, 물질의 성품도 다른 색성이(色性異)이며, 느낌의 성품이 다른 수성이(受性異)이고, 나아가 유위와 무위의 성품에 이르기까지 다르다고 말씀하시는지요?

만약 제법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한 지위의 일지(一地)로부터 다른 일지(一地)에 이르며, 나아가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佛答:“於汝意云何?推尋色等相,爲是空不?”“世尊!實空!”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色) 등의 상(相)으로 미루어 생각하여서 찾아보는 추심(推尋)하여 보면, 그것이 곧 공(空)한 것이던가?”라고 하시자,

“세존이시여, 실로 공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空中有異相法不?”答言:“不!”何以故?是畢竟空,以無相智慧可解,是中云何有異相?

佛語須菩提:若空中無異相,空便是實,是故汝云何於空中分別諸法作是難?畢竟空中,空亦不可得,各各相亦不可得,汝云何以空、各各相爲難?

“공한 가운데에서는 다른 모양의 이상법(異相法)이 있는가?”라고 하시자,

“아닙니다”고 대답하였으니, 왜냐 하면, 이 필경공은 무상지혜(無相智慧)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 가운데서 어떻게 다른 이상(異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곧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만약 공한 가운데에 다른 이상(異相)이 없다면 공한 것이 바로 진실된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어찌하여 공한 가운데에서 제법을 분별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인가?

필경공 가운데에서는 공함 또한 얻을 수 없고, 저마다의 각각의 상(相) 또한 얻을 수 없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그 공한 것과 저마다의 각각의 상(相)을 따지는 것인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以是因緣故,當知諸法平等中,無分別故無凡夫人;但凡夫人,非實相、不離實相,凡夫實相卽是聖人相。
是故言:“不但凡夫、不離凡夫,乃至佛亦如是。”

須菩提以平等相大利益,欲知平等定相,是故問:“爲是有爲?爲是無爲?”佛答:“非有爲、非無爲。”

何以故?若有爲,皆是虛誑作法;若無爲,無爲法無生住滅故無法,無法故不得名無爲。因有爲故有無爲,如經中說:“離有爲,無爲不可得。”如離長無短,是相待義。

이러한 인연으로 제법이 평등한 가운데에서는 분별이 없으니, 범부인도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다만 범부는 진실한 모양이 아닌 비실상(非實相)이면서도 진실한 실상(實相)을 여의지도 않는 것이니, 범부의 진실한 실상(實相)이 곧 성인의 상(相)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범부도 아니고 범부를 여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이 평등상(平等相)은 크게 이익이 있으므로, 평등에 대한 정해진 정상(定相)을 알고자 한 까닭에 여쭈기를 “이것은 유위(有爲)입니까? 무위(無爲)입니까?”라고 한 것이며,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만약 유위라면 그 모두는 거짓이어서 조작된 작법(作法)이요,

만일 무위라면 무위법은 나는 생(生)ㆍ머무르는 주(住)ㆍ없어지는 멸(滅)이 없으므로 법이 없는 무법(無法)이기 때문이다.

무법(無法)이기에 무위라는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지만, 유위로 인하여 무위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는 경에서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마치 긴 것을 여의고는 짧은 것도 없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곧 상대(相待)되는 이치의 상대의(相待義)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問曰:有爲法是無常,無爲法是常,云何言“離有爲,無爲不可得”?

묻나니, 유위법은 무상한 것이요, 무위법은 항상한 것이거늘, 어떻게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無爲法無分別故無相;若說常相,不得言無相。破有爲法故名無爲,更無異法。如人閉在牢獄,穿牆得出;破壁是空,更無異空,空亦不從因緣生。無爲法亦如是,有爲法中先有無爲性,破有爲卽是無爲。是故說“離有爲,無爲不可得”。是有爲、無爲性皆不合不散,一相,所謂“無相”。

답하나니, 무위법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무상(無相)이지만, 만약 항상 있는 상이라 한다면 ‘무상(無相)이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며, 유위법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위라 하는 것이요, 다시 다른 법은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담장을 뚫고 나오게 되는 것과 같아서, 그 벽을 파괴하면 그것이 곧 허공이요 다시는 다른 허공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허공은 또한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기지 않는 것이니, 무위법도 이와 같아서, 유위법 가운데에 먼저 무위의 성품(性)이 있어서 유위가 파괴되면, 곧 그것이 무위인 것이다.

때문에 말하기를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이 유위와 무위의 성품(性)은 모두가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며, 일상(一相)인, 이른바 무상(無相)인 것이다.


佛以世諦故說是事,非第一義。何以故?佛自說因緣:“第一義中無身、口、意行;有爲、無爲法平等,卽是第一義。”觀是有爲、無爲法平等,亦不著一相。菩薩於第一義中不動而利益衆生;方便力故,種種因緣爲衆生說法也。

부처님께서는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이러함을 말씀하시는 것이요, 제일의(第一義)에서가 아니니,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는 몸(身)과 입(口)과 뜻(意)의 행(行)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며, 유위ㆍ무위법의 평등함이 바로 제일의(第一義)인 것이다.

이 유위와 무위의 법이 평등하다고 관찰하면서도, 또한 그 하나의 일상(一相)에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니, 이 보살은 이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방편력의 갖가지 인연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五 終 대지도론 95권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