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5권 2

Skunky 2024. 12. 1. 09:00

大智度論  釋七喩品 第八十五卷 第九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5. 칠유품(七喩品) 풀이함  2

 

“於汝意云何?揵闥婆城,如日出時見揵闥婆城,無智人無城有城想、無廬觀有廬觀想、無園有園想;是揵闥婆城頗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不?”

“不也!世尊!是揵闥婆城畢竟不可得,但誑愚夫眼,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건달바성(乾闥婆城), 곧 해가 돋을 때에  건달바성을 보면, 지혜 없는 사람은 성(城)이 없음에도 성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관(廬觀, 망루)가 없음에도 망루가 있다고 생각하며, 동산이 없음에도 동산이 있다고 생각하나니, 

 건달바성에 행여 업인연이 있어서  업인연으로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기도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건달바성은 끝내 얻을  없으며, 다만 어리석은 범부의 눈을 속일 뿐이거늘, 어떻게 업인연이 있으며, 그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건달바성(乾達婆城), gandharva의 음역인 건달바와 나가라의 뜻인 성(城)을 딴 복합어이며,

①건달바가 교묘한 솜씨로 공중에 지어 낸 성. 어떤 사물이 거짓된 환영으로 생겨났을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 쓰이는 비유적인 말. 심향성(尋香城), 신기루(蜃氣樓). 건달성(乾達城). → 건달바(乾達婆)


“於汝意云何?是揵闥婆城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是揵闥婆城無有實事,不可說垢、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건달바성이 도를 닦음이 있으며, 그 닦은 도로써 더러운 구(垢) 집착하거나, 깨끗한 정(淨)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건달바성에는 진실함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없습니다.”


“須菩提!於汝意云何?幻師幻作種種物,若象、若馬、若牛、若羊、若男、若女,於汝意云何?是幻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不?”

“不也!世尊!是幻法空無實事,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환술사가 환술로 만든 여러 가지로써, 코끼리나 말이나 소나 양이나 또는 남자나 여자가 있을 때, 그대가 생각하기를  환(幻)에는 업인연이 있으며,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기도 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환법(幻法)은 공하고 진실함이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업인연이 있고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겠습니까!”


“於汝意云何?用是幻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是法無有實事,不可說垢、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환(幻)에 도를 닦음이 있고,  닦은 도로써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거나, 깨끗한 정(淨)을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환법에는 진실함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없습니다.”


“須菩提!於汝意云何?如佛所化人,是化人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不?”

“不也!世尊!是化人無有實事,云何當有業因緣,用是業因緣墮地獄乃至生非有想非無想處?”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이 있어서,  변화한 화인(化人)에게 업인연이 있고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태어나는 일이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변화한 화인(化人)에게는 진실함이 없으니, 어떻게 업인연이 있고,  업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於汝意云何?是化人有修道,用是修道,若著垢、若得淨不?”

“不也!世尊!是事無有實,不可說垢、淨。”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화한 화인(化人)에게도 도를 닦음이 있으며,  닦은 도로써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거나, 깨끗한 정(淨)을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화인에게 진실함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없습니다.”

 

“佛告須菩提:“於意云何?於是空相中,有垢者、有淨者不?”

“不也!世尊!是中無所有,無有著垢者、無有淨者。”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한 공상(相中) 가운데에 더러운 구자(垢者) 있고 깨끗한 정자(淨者) 있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라서 더러운 구(垢) 집착하는 이도 없고, 깨끗한 정(淨)에 집착하는 이도 없습니다.”


“須菩提!如無有著垢者,無有淨者,以是因緣故亦無垢、淨。

何以故?住我、我所衆生有垢、有淨,實見者不垢、不淨。如實見者不垢、不淨,如是亦無有垢、淨。”

“수보리야, 마치 더러운 구(垢)에 집착하는 이도 없고, 깨끗한 정(淨)에 집착하는 이도 없는 것과 같이, 이러한 인연 때문에 또한 더러운 구(垢) 깨끗한 정(淨) 없느니라. 

왜냐 하면, 나(我)와  것의 아소(我所)에 머무르는 중생은 더러운 구(垢)가 있고 깨끗한 정(淨) 있지만, 

진실하게 보는 이에게는 더러운 구(垢)도 없고 깨끗한 정(淨)도 없으며 

여실하게 보는 이에게도 더러운 구(垢)도 없고 깨끗한 정(淨)도 없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더러운 구(垢)도 없고 깨끗한 정(淨) 역시 없는 것이니라.”


▶論.
問曰:佛已處處答是事,今須菩提何以復問?

▷논. 묻나니, 부처님께서 이미 곳곳에서 이러함에 대한 대답을 하셨거늘, 지금 수보리존자는 무엇 때문에 다시 여쭌 것입니까?


答曰:義雖一,所因事異,所謂一切法,若有佛、若無佛,諸法性常住,空無所有,非賢聖所作。般若波羅蜜甚深微妙,難解難量,不可以有量能知;諸佛賢聖憐愍衆生故,以種種語言名字、譬喩爲說。

利根者解聖人意,鈍根者處處生著,著於語言名字,若聞說“空”,則著空;聞說“空亦空”,亦復生著;若聞“一切法寂滅相,語言道斷”,而亦復著。

답하나니, 이치는 비록 같을지라도 원인이 되는 소인(所因)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른바 일체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법의 성품은 언제나 머물러 있는 제법성상주(諸法性常住)이며, 공하여 있는  없는 공무소유(空無所有)이니, 성현이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우며 유량(有量)으로써  수도 없으나,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까닭에 갖가지의 언어와 이름과 비유로써 그들을 위하여 해설하신 것이니, 

근기가 영리한 이근자(利根者) 성인의 뜻을 이해하지만 근기가 둔한 둔근자(鈍根者) 곳곳에 집착하여서, 그 언어와 이름에 집착하나니, 

만약 ‘공하다’는 말을 들으면  공에 집착하고, ‘공도 또한 공하다는 공역공(空亦空)’이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 집착을 내나니, 만약 일체법은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이라서 ‘말이 끊어진 어언도단(語言道斷)이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다시 그것에 또한 집착하느니라.


自心不淸淨故,聞聖人法爲不淸淨;如人目瞖,視淸淨珠,見其目影,便謂珠不淨。

佛種種因緣說。見有過罪而生於疑,作是言:“若一切法空,空亦空,云何分別有六道?”

常生如是等疑難故,須菩提以經將訖,爲衆生處處問是事,是故重問。佛可須菩提意。

스스로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의 법을 들어도 깨끗하지 않게 여기는 것이, 마치 눈병  사람이 깨끗한 구슬을 보면서도  눈병 때문에 가려져서 보는 것이라서 그 구슬이 깨끗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말씀하심에도 허물이 있다고 보면서 의심하며 말하기를

“만약 일체법이 공하며, 공한 것도 또한 공하다면 어찌하여 분별 하여서 6도(道)가 있고, 항상 태어나는 것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이와 같은 등의 의심과 힐난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경을 마치려  즈음 중생들을 위하여 곳곳에서 이러한 것들 묻고 있는 것이니, 때문에 거듭하여 다시 여쭌 것이며,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뜻을 인가하신 것이다.


問曰:須菩提以“有”難“空”,佛云何可其意?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존재의 유(有)로써 공을 따지거늘,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의 뜻을 인가하신 것입니까?


答曰:佛可其說“諸法空常住,有佛、無佛不異”,不可其難“云何分別有六道等”。何以故?以其難欲破空故。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제법은 공하여 항상 머물러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을 인가한 것이지, 

“어찌하여 분별하여 6도(道) 등이 있겠는가?”고 하는 힐난을 인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힐난으로써 공을 부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是中佛解其所難,所謂凡夫人不入聖法,未得聖道,不知無所有性,不善修習空三昧故。顚倒者,四顚倒;愚癡者,三界繫無明。雖不說餘煩惱,而此二法虛誑不實。顚倒卽是妄語虛誑;若從顚倒所生業及果報,以根本不實故,衆生雖深著,亦無定實。以是故五道皆空,但有假名。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힐난하는 바를 해설하셨으니, “이른바 범부인은 성인의 법에 들지 못하고, 아직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였으며, 지닌  성품이 없는 무소유성(無所有性)을 알지 못하여서 공삼매(空三昧)를  닦아 익히지 못한 까닭이다”고 하신 것이며, 

뒤바뀜이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가지 뒤바뀜의 사전도(四顚倒)요 

어리석다는 것은 삼계에 매인, 계계(界繫)인 무명(無明)이다. 

비록  밖의 다른 번뇌는 말하지 않았을라도   가지의 이법(二法)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며,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니, 그것은 곧 거짓말이요 속임수인 것이다.

만약 뒤바뀜의 전도를 따른다면 업과 과보가 근본부터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이 비록 깊이 탐착하여도 정해져 있거나 진실함이 없으므로 5도(道)는 모두가 공하여서 다만 임시로 붙인 가명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又汝難諸賢聖;是諸賢聖以斷顚倒差別故有異名,以顚倒不實故無所斷。又復滅失、無所有故名爲“斷”。若實有法,可斷;尚無斷法,何況顚倒!是故一切賢聖果皆是無所有。

斷顚倒卽是聖人果,果卽是斷。爲果所修道亦同無所有,是故修道時,必當用空、無相、無作。道、果分別故,賢聖有差別;今實無所有法不能得,無所有云何有差別?是故不應難。

 그대는 모든 성현에 대하여 따지면서  모든 성현은 뒤바뀜의 전도와 차별을 끊었기 때문에 다른 이름의 이명(異名)이 있다고 하지만,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라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끊을 것도 없는 것이며, 

 없어지고 잃게 되어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끊는 단(斷)이라 하지만, 

실로 끊을  있는 어떠한 법도 없거늘 하물며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 겠는가?

때문에 일체 성현의 과(果, 과위) 모두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인 것이다.

뒤바뀌어 전도된 것을 끊은 것이  성인의 과위인 성인과(聖人果)요, 과(果)  끊는 단(斷)이니, 

이 과(果)를 위하여 닦는 도(道) 또한 동일하게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므로 도를 닦을 때에는 반드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법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도(道)와 과(果) 분별하기 때문에 성현이라는 차별이 있지만, 

지금 실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법(無所有法)에서는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를 얻을  없거늘, 어떻게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須菩提意:若但顚倒故有世閒,若有顚倒亦應有實,虛實相待故。

是故問:“世尊!凡夫所著,頗有實生著起業;業因緣故,六道生死,不得解脫?”佛答言:“不!”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만약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세간이 있는 것이라면,  뒤바뀜의 전도가 있다는  또한 진실한 것이어야 하리니, 거짓의 허(虛)와 진실의 실(實)은 상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때문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범부들이 집착하는 것에 자못 진실함이 있어서 집착하여서 업을 일으킨다면,  업의 인연 때문에 6도의 생사에서 해탈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니니라”고 하셨다.


何以故?此中佛自說因緣:“但顚倒故生著,若無顚倒,云何有相待實法?乃至無毫釐許實事,畢竟無故”

왜냐 하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다만 뒤바뀜의 전도 때문에 집착을  뿐이니, 만약 뒤바뀜의 전도가 없다면 어떻게 상대되는 진실한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털끝만큼의 진실함도 없으며, 필경에도 없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問曰:諸佛所行實義,所謂畢竟空,此非實耶?

묻나니,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는 이른바 필경공인데, 이것은 진실이 아닌 것입니까?


答曰:是第一義空亦因分別凡夫顚倒故說;若無顚倒,亦無第一義。若凡夫顚倒少多有實,第一義亦應有實

답하나니, 이 제일의공(第一義空) 또한 분별로 인한 것이니, 범부들이 뒤바뀌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만약 뒤바뀌어 전되됨이 없다면 역시 으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도 없을 것이며,

만약 범부들의 뒤바뀜의 전도됨이 많건 적건 간에 그 중에 진실이 있다면, 제일의에도 마땅히 진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問曰:若二俱不實,云何得解脫?如人手垢還以垢洗,云何得淨?

묻나니, 만약 두 가지가 다 같이 진실하지 않다면 어떠게 해탈을 얻는 것입니까?

마치 사람의 손이 더러울 때에는 도리어 더러운 물에 씻는 것과 같거늘,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答曰:諸法實相畢竟空,第一義實淸淨。以有凡夫顚倒不淸淨法,故有此淸淨法 不可破壞,不變異故。以人於諸法實相起著,欲生煩惱,是故說:“是法性空無所有,無所有故無實。”

답하나니, 제법의 실상(實相)은 필경공이고 제일의(第一義)이라서 진실로 청정하나, 범부가 뒤바뀌어 전도되어서 깨끗하지 못한 불청정법(不淸淨法)이 있기 때문에 이 깨끗한 청정법(淸淨法)이 있는 것이니, 파괴할 수도 없고 변하여 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제법의 실상에 대하여 탐착과 욕탐을 일으켜서 번뇌를 내기 때문에 “이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무소유이기 때문에 진실함이 없는 무실(無實)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