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4권 6

Skunky 2024. 11. 30. 09:00

大智度論  釋四諦品 第八十四 第九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4. 사제품(四諦品) 풀이함  3

 

問曰:佛無量阿僧祇劫來習微妙法,所謂十八不共法,乃至無㝵解脫,諸甚深業,何以但說苦、集、滅、道?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아승기겁으로부터 미묘한 묘법(妙法)  18불공법 내지는 무애해탈(無礙解脫) 등에 이르기까지의 매우 깊은 모든 업을 익히셨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괴로움의 고(苦)ㆍ쌓임의 집(集)ㆍ사라짐의 멸(滅)ㆍ도(道)만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衆生所畏急者,無過於苦;爲除苦已,然後示以佛道。如人重病,先以除病爲急;然後以寶物、衣服莊嚴其身。

답하나니, 중생들에게 두렵고도 급한  가운데에서 괴로움의 고(苦)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괴로움의 고(苦)를 제거시킨 연후에 부처님의도를 보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중한 병이 들었으면 우선 병을 없애 주는 것이 급한 일이며,  뒤에 보배나 의복으로 그의 몸을 장엄시켜주는 것과 같으며, 

 

苦者,受五受衆身是一切苦本,性卽是苦;是苦略而言之,是生、老、病等,如經中處處廣說。

苦集者,愛等諸煩惱;愛是心中舊法,以是故,佛說“愛能生後身,故是苦因”,苦因卽是集。

‘괴로움의 고(苦)’라 하는 것은,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의 오수중(五受衆)의 몸을 받으면 그것이 바로 일체 괴로움(苦)의 근본이니, 성품이  괴로움인 것이며,  

 괴로움(苦)을 요약하여 말한다면,  나고(生)ㆍ늙고(老)ㆍ병(病)들고 하는  등이니, 경의 곳곳에서 괴로움(苦)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괴로움의 쌓임인 고집(苦集)’이란, 애욕(愛) 등의 모든 번뇌이니, 애욕(愛)은  마음속에 있는 오래된 법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애욕(愛)은 후세의 몸을 내게 하기 때문에 바로 괴로움의 원인인 고인(苦因)이다”고 하셨는데,  괴로움의 원인인 고인(苦因)이  쌓임의 집(集)인 것이다.


若人欲捨苦,先當斷愛,愛斷苦則滅,斷愛卽是苦滅。苦滅卽是道,觀是五衆種種因緣,苦及苦集過罪,所謂無常、苦、空、無我,如病、如瘡、如怨、如賊等,於八聖道分中爲正見,餘七事助成發起,能斷一切法中愛;如以酒發藥。此人於一切世閒無所復貪,得離苦火,然後示以妙法。

만약 사람이 괴로움(苦)을 버리고자 한다면 우선 애욕(愛)을 끊어야 하며, 애욕(愛)이 끊어지면 괴로움(苦)이  사라지나니, 애욕(愛)을 끊는 것이  괴로움이 사라지는 고멸(苦滅)이요, 괴로움이 사라지면  그것이 도(道)이며, 

중(五衆, 오온)의 갖가지 인연인 괴로움(苦)과 그리고 괴로움이 쌓인 고집(苦集)의 죄과(罪過)는 이른바 ‘무상하고ㆍ괴롭고(苦)ㆍ공하고ㆍ무아(無我)이며,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원수와 같고 도적과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8성도분(聖道分)에서의 바른 소견의 정견(正見)이 그것이다. 

 나머지 일곱 가지는 이 정견을 도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으키면서 일체 가운데에서의 애욕(愛)을 끊게 하나니, 마치 술로써 약을 발동시키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사람은 일체의 세간에서 다시는 탐하는 것이 없어서 괴로움(苦)의 불을 여의게 되나니, 그러한 뒤에 미묘한법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復次,此中佛自說因緣,所謂:“於四聖諦中攝一切善法。”有人言:“佛何以但說苦等四法?”以是故,佛說:“一切助道善法皆攝在四諦中。”助道善法因緣故,分別有三寶。衆生不信三寶故,不得離六道生死。

또한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사성제 가운데에의 모든 착한법을 포섭한다”고 하시자,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괴로움 등의  가지 법만을 말씀하실까?”라고 한 까닭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도를 돕는 착한법은 모두가제(四諦, 사성제) 가운데에 포섭되어 있나니, 도를 돕는 착한법의 인연으로 분별하여 3보(寶)가 있게 되지만, 중생들은 3보를 믿지 않기 때문에도의 생사를 여읠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須菩提何以作是麤問,言:“爲以苦滅、以苦智滅?以集滅、集智滅?”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괴로움의 사라짐인 고멸(苦滅)인가? 고지멸(苦智滅)인가? 집멸(集滅)인가?, 집지멸(集智滅)인가?’라는 거친 질문의 추문(麤問)을 한 것입니까?


答曰:此非麤問!今問:“見苦等四諦體故滅?爲用智故滅?”愛等諸煩惱滅故,名有餘涅槃。

若以苦諦得道,一切衆生牛羊等亦應得道!若用苦智得道,離苦則無智;離苦智不名爲“苦諦”,但名爲“苦”。

苦諦、苦智和合故生,不得言“但以苦滅”、“但以智滅“。乃至道諦亦如是。

답하나니, 이것은 거친 질문의 추문(麤問)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괴로움 등의 사제(四諦)의 체(體, 체성)를 보기 때문에 사라지는 멸(滅)인가? 지혜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인가?’를 여쭌 것이며,

애욕(愛) 등의 모든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하는 것이며, 

만약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로써 도를 얻는다면, 일체 중생인 소나  따위도 역시 도를 얻어야 하며,

만약 괴로움의 지혜인 고지(苦智)로써 도를 얻는다면 괴로움(苦)을 여의면 지혜가 없는 것이니, 고(苦)와 지(智)를 여의고서는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라고 하지 못하고 다만 괴로움(苦)이라고  뿐일 것이며,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는 괴로움(苦)과 지혜(智)가 화합한 까닭에 생기는 것이라서 ‘괴로움(苦)만으로써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지혜(苦)만으로써 사라진다’고도 말할  없나니,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佛答:”不以苦諦滅,亦不以苦智滅,乃至道諦、道智亦如是。我說:‘是四諦平等卽是滅。’不用苦諦滅,不用乃至道諦滅。’”何以故?是苦等四法皆從緣生,虛妄不實,無有自性故不名爲實,不實故云何能滅?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로써 사라지지도 않고, 또한 고지(苦智)로써 사라지지도 않나니, 나아가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와 도지(道智)도 또한 이와 같다. 

나는 ‘이  가지 진리인 사제(四諦)는 평등하며, 그것이 곧 사라짐의 멸(滅)이다’고 하나니,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로써도 사라지지 않고 나아가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로써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왜냐 하면,  괴로움 등의  가지의 사법(四法)은 모두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스스로의 자성(自性) 없으므로 진실한 실(實)이라고 말 할 수 없으며,  

진실하지 않은 불실(不實)이거늘 어떻게 능히 사라질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二諦有漏,凡夫所行法故,可是虛誑不實;道諦是無漏法,無所著,雖從因緣和合生而不虛誑;又滅諦是無爲法,不從因緣有。云何言“四法皆是虛誑”?

묻나니, 두 가지 진리인 이제(二諦)는 유루(有漏)라서 범부가 행하여야  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으나,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는  무루(無漏)의 법이며 집착도 없고 비록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겼을지라도 거짓된 것이 아니며,

또한 사라짐의 진리인 멸제(滅諦)는 바로 무위(無爲)의 법이라서 인연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네 가지의 사법(四法) 모두가 거짓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初得道,知二諦是虛誑。將入無餘涅槃,亦知道諦虛誑,以空空三昧等捨離道諦,如說栰喩。

滅諦亦無定法。如經中說:“離有爲,無無爲,因有爲故說無爲。”苦滅如燈滅,不應戲論求其處所。是故佛說:“不以用苦乃至用道得滅。”

답하나니, 처음에 도를 얻으면  가지 진리인 이제(二諦)가 거짓인 것을 알게 되며, 장차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고자 할에는 역시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도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 공공삼매(空空三昧) 등으로써 도제(道諦) 버리고 여의나니, 마치 뗏목의 비유인 벌유(筏喩, 벌유경)를 말씀하신 것과 같다.

사라짐의 진리인 멸제(滅諦)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법이 없으니, 마치 경에서 설명하기를 “유위(有爲)를 여의고는 무위(無爲)가 없는 것이니, 유위로 인하여 무위를 말하게 된다”고  것과 같이, 

괴로움의 사라짐인 고멸(苦滅)은 마치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나니, 희론으로써  처소를 구하지 말아야 하며,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괴로움으로써도 사라지게 되지 않고, 나아가 도로써도 사라지게 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問佛:“何者是四諦平等?”佛答:若無八法處 所謂四諦、四諦智,是則平等。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떠한 것이제(四諦)의 평등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여덟 가지 법의 처소인 팔법처(八法處), 제(四諦)와 4제의 지혜인 사제지(四諦智)가 없으면 이것이  평등이다”라고 하셨으며, 


復次,須菩提!四諦如實、不誑、不異,如、法性、法相、法住、實際,若有佛、無佛,法相常住,不用心、心數法及諸觀,但爲不誑衆生故住。一切餘法皆顚倒,妄著 顚倒果報生故,雖能與人天喜樂,久久皆虛妄變異;但有一法,所謂諸法實相,以不誑故,常住不滅。如是菩薩行般若波羅蜜,通達諸法實諦

또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사제는 여실하여 속이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은 것이며, 여(如)와 법성(法性)과 법상(法相)과 법주(法住)와 실제(實際)이니라.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간에 법상(法相)은 항상 머물러서 상주(常住)하며,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이나 모든 관(觀)이 필요하지도 않으며, 중생을 속이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제법은 모두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허망한 탐착의 망착(妄著)이요, 전도된 과보로 생기는 까닭에 비록 사람과 하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있을지라도 오래되면 허망하게 변하는 것이나, 오직 하나의 일법(一法)만이 있을 뿐이니, 이른바법의 실상(實相)이 그것이다. 

그것은 속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 머무르면서 소멸하지 않나니, 

보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제법의 진실한 이치인 실제(實諦)를 통달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復問:“云何菩薩通達得實諦,過聲聞、辟支佛地,入菩薩位?”

佛答:若菩薩思惟籌量求諸法,無有一法可得定相,見一切法皆空若在四諦、若不在四諦。非四諦者,虛空、非數緣盡;餘在四諦。若觀如是法空,爾時,入菩薩位。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떻게 보살은 진실한 이치인 실제(實諦)를 통달하여 얻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을 넘어서 보살위에 들어가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사유하고 헤아리면서법을 구한다면, 얻을 수 있는 어떠한 일법도 없나니, 일체법은 모두가 공하여서 혹은제에 있기도 하고 혹은제에 있지 않기도  것을 보게 되나니,

사제가 아닌 것은 허공(虛空)과 비수연진(非數緣盡, apratisaṁkhyā-nirodha. 비택멸非擇滅, 무위)이나,  밖의 것은제에 있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법공(法空)을 관찰한다면, 그 때에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고 하셨다.


問曰:何以不說“空亦空觀,入菩薩位”?

묻나니, 무엇 때문에 ‘공한  또한 공하다고 관(觀)하면 보살의 지위에 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答曰:不須是說。何以故?若說諸法空,卽是空,空亦空;若是空不空,不名爲一切空。是故行是空,得入菩薩位。

菩薩住是性地中,不墮頂。性地者,所謂菩薩法位。如聲聞法中,煖法、頂法、忍法、世閒第一法,名爲性地。是法隨順無漏道,故名爲性,是中住必望得道;菩薩亦如是,安住是性地中,必望作佛。能生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

답하나니, 그 말씀은  필요가 없으니, 왜냐 하면, 만약 제법의 공한 것을 말하면 그것이 바로 공이요,  공한  또한 공한 것이기 때문이며, 

만약  공한 것이 공하지 않다면 일체공(一切空)이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을 행하여 보살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보살은  성지(性地)에 머물러 정위(頂位)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지(性地, gotra-bhūmi. 종지種地 혹은 종성지種性地)란 보살의 법위(法位)를 말하는 것이니, 마치 성문법 중의 난법(煖法)과 정법(頂法)과 인법(忍法)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과 같은 것을 일컬어 성지라 하는 것과 같으며,

 법은 무루도(無漏道)를 따르기 때문에 성(性)이라 하며,  가운데에 머무르면 반드시 도를 얻고자 희망하나니, 

보살 또한 이와 같아서  성지 가운데에 편히 머물러 반드시 부처님이 되기를 바라면서 능히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을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3보(三寶)를 믿고 난법(煖法)이 더욱 나아가서 죄와 복이 그치고 평등해지기 때문에 정법(頂法)이라 하나니, 
마치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서 꼭대기에 닿으면 양쪽의 거리인 이수(里數)가 같아지는 것과 같다.
정(頂)으로부터 인(忍)에 이르고, 이어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는 한쪽의 길인 일변도(一邊道)이고, 
난(煖)으로부터 정(頂)에 이르기까지가 일변도(一邊道)이니,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8권 4


是菩薩住在禪地中攝心,分別思惟籌量諸法,通達四諦 所謂知見苦,亦非緣苦生心。知苦是凡夫受身著苦因緣故,受諸憂惱;是人身皆如賊、如怨,無常、空等。得是已,卽時捨,不取苦相,亦不緣苦諦,菩薩法位力故。乃至道諦亦如是。但一心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知是四諦藥病相對,亦不著是四諦,但觀諸法如實相,不作四種分別觀。

 보살은 선지(禪地)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가다듬어법을 분별하여 사유하고 헤아리면서 4제(諦)를 통달하나니, 이른바 괴로움(苦)을 지견(知見)하나 또한 괴로움을 반연하지 않으면서 마음으로 괴로움(苦)을 알며, 

 범부는 몸을 받아서 괴로움(苦)의 인연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근심과 고뇌를 받으며, 

 사람의 몸은 모두가 마치 도둑과 같고 원수와 같으며 무상하고 공하다는 것 등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얻은 뒤에는 즉시 버리고서 괴로움(苦)의 취하지 않으며 또한 괴로움의 진리를 반연하지도 않나니, 이것은 보살의 법위력(法位力) 때문이며, 나아가 도제(道諦)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

다만 일심(一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만 회향하고  4제(諦)를 약(藥)과 병(病)이 서로 마주하는 것과 같이 알면서도 또한  4제에 집착하지 않으며, 다만법의 여실상(如實相)만을 관찰하면서  가지의 분별관(分別觀)을 짓지 않을 뿐인 것이다.


須菩提問:“云何如實觀諸法?”

佛言:“觀空。須菩提!若菩薩能觀一切法若大若小皆空,是名如實觀。”

復問:“用何等空?”佛答:“用自相空。”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떻게법을 여실하게 관찰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을 관하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일체법은 크건 작건 간에 모두가 공(空)이라는 것을 관찰한다면, 이를 여실관(如實觀)이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다시 여쭈기를 “어떠한 공(空)을 이용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자상공(自相空)을 이용하느니라”고 하셨다.


問曰:十八空中佛何以但說自相空?

묻나니, 18공(空)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자상공(自相空)만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是中道空。內、外空等是小空,畢竟空、無所得空等是甚深空,自相空是中空。自相有理破故而心不沒,而能入甚深空中。

답하나니, 이 중도공(中道空) 내외공(內外空) 등은  조그마한공(小空)이요, 

필경공(畢竟空)과 무소득공(無所得空) 등은  매우 깊은 심심공(甚深空)이지만, 

자상공(自相空)은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상(相)을 공하게 하고 존재한다는 유(有)의 이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니, 

그러함에 마음이 위축되지도 않고 매우 깊은 심심공(甚深空) 안에 들어가는 것이니, 


是菩薩得如是法,觀一切法皆空,乃至不見一法有性可住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觀諸法如阿耨多羅三藐三菩提,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自性空;非佛所作,非大菩薩所作,非阿羅漢、辟支佛所作,常寂滅相,無戲論語言。衆生不能知見如實相,是故菩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爲衆生說法。

보살은 이와 같은 법을 얻어서 일체법은 모두가 공하다고 관찰하면서, 나아가 성품이 있어서 머무를  있는 어떠한 일법도 보지 않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법을 관찰하는 것이 마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자성(自性)이 공한 것이라서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요,  보살이 만든 것도 아니요,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언제나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며, 언어(言語)의 희론이 없고 중생으로서는  여실한 여실상(如實相) 알거나  수도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력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다.


方便力者,菩薩得無生忍法,入菩薩位,通達菩薩第一義諦。觀是道相甚深微妙,無得無捨;用妙智慧不可得,何況可得口說!

‘방편력(方便力)’이란 보살이 무생인(無生忍)의 법을 얻고 보살위에 들어가 보살의 제일의제관(第一義諦觀)을 통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 도의 도상(道相)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서 얻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으며, 묘한 지혜로써도 얻을  없거늘 하물며 입으로 말할  있음이겠는가!


大悲心深念:“衆生以空事故,墮三惡道,受大劇苦;若我直說是法,則不信不受,則破壞法,墮於地獄!我今當成就一切善法、莊嚴身三十二相,引導衆生,起無量無邊諸佛神通力,得成佛道,一切衆中主,於諸法得自在。若讚惡法,衆生猶尚當受,何況實法!”是菩薩如所願思惟行,爲衆生說,使皆度脫。

큰 대비심(大悲心)으로 중생들을 깊이 생각하나, 중생은 공연한 일을 하여서 삼악도에 떨어져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보살이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이 법을 곧장 말해 주어도 믿지 않고 받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법을 파괴하여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나는 이제 마땅히 일체의 착한 선법을 성취하고, 몸을 32상호로 장엄하여서 중생들을 인도하되, 무량하고 무변한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을 일으켜 부처님의 불도를 이루어서 일체 중생 가운데에서 주인이 될 것이며, 제법에서 자재를 얻으리라.

나쁜 악법을 찬탄하여도 중생들은 받아들이거늘 하물며 진실한 실법(實法)이겠는가!’라고 하나니,

이 보살은 그의 소원대로 사유하고 행하면서 중생들에게 설법하여 모두를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四 終 대지도론 94권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