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2권 4

Skunky 2024. 11. 24. 09:01

大智度論  釋淨佛國土品 第八十二 卷第九十二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2. 정불국토품(淨佛國土品) 풀이함   4


菩薩雖知道及菩提不異,未具足諸功德故,不名爲佛。又佛諸事畢竟,願、行滿足故,不名爲菩薩。

得者是佛,法是菩提,求菩提者是菩薩。

須菩提從佛聞菩提相、道相,成就衆生已,今問淨佛國土事。諸阿羅漢、辟支佛無有力知淨佛國事,是故問。

보살은 비록 도(道)와 보리(菩提)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라도 아직 모든 공덕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까닭에 부처님이라 하지 못하며, 

 부처님은 모든 일을  마쳐서 원(願)과 행(行)이 만족한 까닭에 보살이라 하지 않나니, 

얻은 득자(得者)는 바로 부처님이요, 법이 바로 보리이며, 보리를 구하는 이가  보살인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으로부터 보리의 상(相) 도의 도상(道相) 듣고 중생을 성취시키고 나서 이제는 부처님의 불토(佛土)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묻는 것이니, 

그것은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부처님의 불토(佛土) 깨끗하게 하는 대하여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여쭌 것이다.


問曰:何等是淨佛土?

묻나니,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불토(佛土)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까?


答曰:佛土者,百億日月、百億須彌山、百億四天王等諸天,是名三千大千世界。如是等無量無邊三千大千世界,名爲一佛土。

佛於此中施作佛事,佛常晝三時、夜三時以佛眼遍觀衆生:

“誰可種善根?誰善根成就應增長?誰善根成就應得度?”見是已,以神通力隨所見教化。

답하나니, 부처님의 불토(佛土) 함은, 백억의 일월(日月)과 백억의 수미산(須彌山)과 백억의 4천왕(天王) 등의 모든 하늘이 있는 것을 바로 3천대천세계라 하며, 

이와 같은 등의 무량하고 끝이 없는 3천대천세계를 하나의 일국토(一國土)라 하며, 부처님께서는  가운데에서 불사(佛事)를 지으시는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낮의  때인 주삼시(晝三時)와 밤의  때인 야삼시(夜三時)에 항상 불안(佛眼)으로써 중생을 두루 관찰하면서 ‘그 누가 선근(善根)을 심어야 하는가? 

 누가  성취되어서 더욱 자라야만 하는가?

 누가 선근이 성취되어서 제도되어야 하는가?’를 자세히 살피시나니, 이를 보신 뒤에는 신통력으로써  보신 바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다.


衆生心隨逐外緣,得隨意事,則不生瞋惱;得不淨、無常等因緣,則不生貪欲等煩惱;

若得無所有、空因緣,則不生癡等諸煩惱。

是故諸菩薩莊嚴佛土,爲令衆生易度故。國土中無所乏少,無我心故,則不生慳貪、瞋恚等煩惱。

마음이 바깥 인연인 외연(外緣)을 따르면서 뜻대로 되는 일을 만나도 화내는 번뇌를 내지 않고, 깨끗하지 못하거나 무상한  등의 인연을 만나도 탐욕 등의 번뇌를 내지 않으며,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공한인연(空因緣)을 만나도 어리석음 등의 모든 번뇌를 내지 않게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모든 보살은 부처님의 불토(佛土) 장엄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제도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국토 안에는 모자라는 것이 없게 하며, '나'라는 아심(我心)이 없기 때문에 간탐과 성냄 등의 번뇌를 내지 않는 것이며, 


有佛國土,一切樹木常出諸法實相音聲,所謂無生無滅、無起無作等;

衆生但聞是妙音,不聞異聲,衆生利根故,便得諸法實相。如是等佛土莊嚴,名爲淨佛土。

如『阿彌陁』等諸經中說。

佛答:“菩薩從初發意來,自淨麤身、口、意業,亦教他人淨麤身、口、意業。”

어떤 부처님의 불토(佛土)에는 일체의 온갖 나무에서 언제나법의 실상에 대한 음성이 나오나니, 

이른바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일어나는 것도 짓는 것도 없는 무기무작(無起無作)이다’는 등이니,

중생들은  묘한 음성만을 듣고 다른 소리는 듣지 않으며, 중생들의 근기가 영리한 까닭에 법의 실상을 얻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부처님의 불토(佛土)를 장엄하는 것을 부처님의 불토(佛土)를 깨끗하게 한다고 하나니, 

마치 '아미타경(阿彌陀經)'과 같은 여러 경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스스로 거친 몸의 추신(麤身), 거친 입의 추구(麤口), 뜻의 추업(麤業)을 깨끗하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여 거친 몸의 추신(麤身), 거친 입의 추구(麤口), 뜻의 추업(麤業) 깨끗하게 한다”고 하셨다.


問曰:若菩薩淨佛土,是菩薩得無生法忍,住神通波羅蜜,然後能淨佛土;

今何以言“從初發意來,淨麤身、口、意業”?

묻나니, 만약 보살이 부처님의 불토(佛土) 깨끗하게 하고자 한다면,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신통의 바라밀에 머무른 연후에야 부처님의 불토를 깨끗하게   있겠거늘,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초발의에서부터 스스로 거친 몸의 추신(麤身), 거친 입의 추구(麤口), 뜻의 추업(麤業)으로 깨끗하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三業淸淨,非但爲淨佛土,一切菩薩道皆淨。此三業初淨身、口、意業,後爲淨佛土。自身淨,亦淨他人。

何以故?非但一人,生國土中者皆共作因緣。內法與外法作因緣,若善、若不善:
多惡口業故,地生荊棘;諂誑曲心故,地則高下不平;慳貪多故,則水旱不調、地生沙礫。

不作上諸惡故,地則平正,多出珍寶;如彌勒佛出時,人皆行十善故,地多珍寶。

답하나니, 신 구 의의 세 가지업(三業)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비단 부처님의 불토(佛土) 깨끗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체 보살의 도에서도 모두   가지업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 몸의 신업(身業), 입의 구업(口業), 뜻의 의업(意業)을 깨끗하게 하고 

 뒤에 부처님의 불토(佛土)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몸을 깨끗하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깨끗하게 하나니,

왜냐 하면,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인연을 지어서 그 국토에 태어나는 것이 때문이다.

안의 내법(內法)과 바깥의 외법(外法)으로 착하거나 혹은 착하지 못한 인연을 짓게 되는 것이니, 

나쁜 말의 악구(惡口)를 하는 업이 많기 때문에 땅에 가시나무가 생기고, 

아첨과 속임수와 굽은 곡심(曲心) 때문에 땅에 높고 낮음이 있어서 평탄하지 않으며, 

간탐이 많기 때문에 가뭄이 들고,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땅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으며, 

위의 모든 악을 짓지 않은 때문에 땅은 평탄하고 바르면서 진기한 보물이 많이 나오는 것이니, 

마치 미륵부처님께서 출현하실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10선(善)을 행하고 있은 까닭에 땅에 진기한 보물들이 많았던 것과 같다.


問曰:若布施等諸善法得淨佛土果報,何以但說淨三業?

묻나니, 보시 등의 모든 착한법으로도 부처님의 불토(佛土) 깨끗하게 하는 과보를 얻게 되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가지의 삼업으로 깨끗하게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雖知善惡諸法是苦樂因緣,如一切心、心數法中,得道時智慧爲大;

攝心中定爲大;作業時思爲大;得是思業已,起身、口、意業。

布施、禪定等,以思爲首;譬如縫衣,以鍼爲導。受後世果報時,業力爲大。是故說三業,則攝一切善法:

意業中盡攝一切心、心數法,身、口則攝一切色法。人身行三種,福德具足,則國土淸淨。內法淨故,外法亦淨;譬如面淨故,鏡中像亦淨。如『毘摩羅詰經』中說。不殺生故人皆長壽,如是等。

답하나니, 비록 선악의 모든법은 바로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일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에는  얻을 때에 지혜를 큰 것으로 삼고, 마음을 가다듬는 섭심(攝心)에서는 정(定)을  것으로 삼으며, 업을 짓는 작업시(作業時)에는 사(思)를  것으로 삼는 것과 같다.

 사업(思業)을 얻은 뒤에는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일으키며, 보시와 선정 등은  사(思)를 첫머리로 삼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옷을 기울 때에는 바늘에 이끌려가게 되는 것과 같이, 후세의 과보를 받을 때에는 업력(業力)을  것으로 삼기 때문에 신 구 의 업을 말하여 일체 착한법을 포섭하는 것이다.

의업(意業) 가운데에서는 일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모두  포섭하고,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에서는 일체의 형상 있는법(色法)을 포섭하나니, 

사람의 몸으로   가지의 삼업을 행하여 복덕을 두루 갖추게 되면  국토가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안의 내법(內法) 깨끗하기 때문에 바깥의 외법(外法)도 깨끗하게 되나니, 

마치 얼굴이 깨끗하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형상도 깨끗한 것과 같으며,

마치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 유마경)'에서 “살생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오래 산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身、口、意麤業,是事易知。須菩提何以故問?

묻나니,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추업(麤業)과 같은들은 알기가 쉽거늘,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여쭌 것입니까?


答曰:麤、細不定故。如求道人中布施是麤善,於白衣爲細。如小乘中不善業爲麤,善業爲細;

摩訶衍中取善法相,乃至涅槃皆名爲麤。以麤、細不定故問。

佛次第爲說麤業相,所謂奪命,乃至邪見。是三種身業、四種口業、三種意業,皆名爲麤。

復次,破菩薩六波羅蜜法 慳貪等,皆名爲麤。

답하나니, 거친 추(麤)와 미세한 세(細)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를 구하는 구도인(求道人) 가운데에서 보시는 거친 추선(麤善)이지만, 속인에 있어서는 미세한선(細善)인 것과 같고, 

소승 가운데에서 착하지 못한 불선업 거친 추선(麤善) 되고, 착한업은 미세한 세선(細善) 되지만,

마하연(摩訶衍)에서는 착한 선(善) 취하는 법상(法相)이나 나아가 열반까지도 모두 거친 추(麤)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거친 추(麤)와 미세한 세(細)가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은 때문에 여쭌 것이다.

부처님께서 차례로 거친 추업(麤業)의 상(相)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살아있는 목숨을 빼앗는  내지는 삿된견이니,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의  가지의 몸에 대한 신업(身業)과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의 네 가지 입에 대한 구업(口業)과 

무탐욕(無貪慾), 무진에(無瞋恚), 정견(正見)의 세 가지 뜻에 대한업(意業) 모두를 거친 추(麤) 한다”고 하셨으며,

또한 보살의 6바라밀의 법을 파괴하는 간탐 등을 모두 거친 추(麤) 하는 것이다.


問曰:先說十不善道,已攝慳貪等,何以復別說?

묻나니, 앞에서 10선도(善道)를 말씀할 때, 이미 간탐 등이 포함되었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따로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是六法不入十不善道,十不善道皆是惱衆生法;是六法不但爲惱衆生。如慳心,但自惜財,不惱衆生。

貪心有二種:一者、但貪他財,未惱衆生;二者、貪心轉盛,求而不得,則欲毀害,是名業道,以能起業故。

瞋心亦如是,小者不名業道,以其能趣惡處故爲道。是故別說六法無咎。

답하나니, 간탐심(慳貪心), 파계심(破戒心), 진심(瞋心), 해태심(懈怠心), 난심(亂心), 우치심(愚癡心)의 여섯 가지의 육법(六法)은 10불선도(不善道)에 들어가지 않으니, 10불선도는 모두가 중생을 괴롭히는 법이다. 

 여섯 가지의 육법은 중생을 괴롭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마치 간탐하는 마음의 간심(慳心)과 같이 자신의 재물만 아낄 뿐이요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탐내는 마음의 탐심(貪心)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른 이의 재물만을 탐할 뿐, 중생은 괴롭히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탐내는 탐심(貪心) 더욱 왕성하여져서 구하여 얻지 못하게 되면 헐뜯고 해치고자 하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업도(業道)라고 하는 것으로, 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성을 내는 진심(瞋心) 이와 같으며,

작은 것은 업도(業道)라 하지 않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나쁜 곳의 악처(惡處)에 나아가게 되기 때문에 도(道)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따로 여섯 가지의법을 말하여도 허물이 없는 것이다.

 

佛告須菩提:“不善業,若殺生乃至邪見,是名菩薩摩訶薩身、口、意麤業。復次,須菩提!慳貪心、破戒心、瞋心、懈怠心、亂心、愚癡心,是名菩薩意麤業。復次,戒不淨,是名菩薩身、口麤業。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살생(殺生) 내지는 삿된 사견(邪見)의 착하지 못한 불선업(不善業)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또한 수보리야, 간탐하는 간탐심(慳貪心)과 계율을 깨뜨리는 파계심(破戒心)과 성을 내는 진심(瞋心)과 게으른 해태심(懈怠心)과 산란한 난심(亂心)과 어리석은 우치심(愚癡心)을 바로 보살의 뜻의 거친 업인 의추업(意麤業)이라 하며, 

또 계율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바로 보살의 몸과 입의 거친 업인 추업(麤業)이라 하느니라.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92권 2


問曰:六波羅蜜中已說戒,今何以復說戒不淨?

묻나니, 6바라밀 가운데에서 이미 계율에 대하여 설명하셨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계율이 깨끗하지 않은 계불정(戒不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破戒法是殺生等麤罪。戒不淨是微細罪,不惱衆生;如飮酒等,不入十不善道。

復次,破五衆戒,名爲破戒。不破所受戒,常爲三毒覆心,不憶念戒,迴向天福,邪見持戒 如是等,名爲戒不淨。

답하나니, 파계(破戒)의 법이란 바로 살생 등의 거친 추죄(麤罪)를 말하는 것이며,

계율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미세한 미죄(細罪)라서 중생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술을 마시는 음주(飮酒) 등은 10불선도에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살생, 도적질, 음행, 거짓말, 음주의 5중계(衆戒)를 깨뜨리는 것을 파계라 하며,

수계(受戒)한 계율을 깨뜨리지는 않았으나, 항상 3독(毒)으로 덮혀 있어서  마음이 계율을 기억하지 못하며, 천상의 복에 회향하며, 삿된견으로 계율을 지니는, 이와 같은  등을 계율이 깨끗하지 못하다면, 계불정(戒不淨)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若菩薩心遠離四念處等三十七品、三解脫門,是名麤業。所以者何?此中心皆觀實法,隨涅槃、不隨世閒;若出四念處等法,心則散亂。譬如蛇行本性好曲,若入竹筒則直,出筒還曲。

또한 만약 보살이 마음에 4념처 등의 37품(品)과 3해탈문(解脫門)을 멀리 여읜다면, 이를 거친업(麤業)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가운데에서의 마음은 모두가 진실한법을 관찰하여 열반을 따르고 세간은 따르지 않지만, 만약 사념처 등의 법을 벗어나면 마음이  산란해지기 때문이니, 

마치 뱀이 다닐 때에는 본래 성품이 구불구불하게 가기를 좋아하나, 만약 대나무의 죽통(竹筒) 안에 넣어 두면 곧게 되다가도 대나무 통에서 나오면 다시 구불구불하게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若菩薩貪須陁洹果證,是爲麤。如人聞佛說“須陁洹果,不墮三惡道,盡無量苦,如五十由旬池水;
餘在者,如一渧、二渧”,則生貪心。

以其心不牢固,本求作佛、爲衆生,今爲自身而欲取證,是爲欺佛,亦負衆生,是故名麤。

또한 만약 보살이 수다원과(須陀洹果)의 증득을 탐낸다면 이 또한 거친 추(麤)가 되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수다원의 과위를 얻으면 3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무량한 고통을 다하게 되는 것이 50유순(由旬)이나 되는 연못의 물과 같지만,  밖의 다른 데에 있으면  방울  방울의 물방울과 같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탐내는 탐심(貪心) 내는 것과 같으니,

 마음이 견고하지 못한 까닭에, 부처님이 되기를 구하는 구작불(求作佛)의 본래의 뜻은 중생들을 위한 것이나, 지금은 자기 스스로만을 위하여 증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바로 부처님을 기만하고 또한 중생들까지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거친 추(麤)라 하는 것이다.


譬如人請客,欲設飮食而竟不與,是則妄語負客。

菩薩亦如是,初發心時作願“我當作佛,度一切衆生”,而貪須陁洹,是則負一切衆生。

如貪須陁洹果,乃至貪辟支佛道亦如是。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손님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려 하다가 끝내 음식을 주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거짓말을 하고 손님을 배반한 것이 되나니,

보살 또한 이와 같아서 처음 초발심할 때에 ‘나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서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리라.’는 서원을 세웠으면서도 수다원을 탐낸다면 곧 일체 중생들을 배반하는 것이며,

마치 수다원을 탐내는 것과 같이 나아가 벽지불의 도를 탐내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二 終 대지도론 92권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