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초발심 공덕품(初發心功德品) 7
(16) 衆生歡喜
十方世界不可說에 一念周行無不盡하야 利益衆生供養佛하고 於諸佛所問深義로다
於諸如來作父想하야 爲利衆生修覺行하며
十方世界不可說(시방세계불가설)에, 말로 할 수 없는 시방의 세계를
一念周行에 無不盡(일념주행무불진)하야, 한 순간에 못 가는 곳이 없어서
利益衆生供養佛(이익중생공양불)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고 부처님을 공양하며
[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이나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다 같은 내용입니다.]
於諸佛所에 問深義(어제불소문심의)로다. 부처님 처소에서 깊은 뜻 여쭙느니라.
於諸如來作父想(어제여래작부상)하야, 모든 여래를 아버지로 모시고 [모든 여래에게 아버지라고 하는 생각을 지으며]
爲利衆生修覺行(위리중생수각행)하며, 중생의 이익을 위해 보리행을 닦아서
17. 法界普入(법계보입)
智慧善巧通法藏하야 入深智處無所着이로다
隨順思惟說法界를 經無量劫不可盡하며 智雖善入無處所나 無有疲厭無所着이로다
智慧善巧通法藏(지혜선교통법장)하야, 지혜가 선교=익숙하고 법장에 통달하여
入深智處無所着(입심지처무소착)이로다. 깊은 지혜에 들어되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는 바가 없도다.
[이 시대에서 화엄경을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지혜의 善巧가 法藏= 법의 창고, 진리의 창고에 통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옛날 도인들하고 우리가 거리가 상당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한히 소통하고 있습니다. 불보살의 연기로써 돌아가는 것이 이 세상이고, 또 불보살의 연기로 돌아가고 있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화엄경입니다. 우리가 전부 부처로써 보살로써 엮여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隨順思惟說法界(수순사유설법계)를, 깊이 수순하여 사유해서 법계를 설하며[상황 따라서 사유해 법계에 설하며]
經無量劫不可盡(경무량겁불가진)하며, 한량없는 겁을 지내지만 다 할 수 없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說法界= 진리의 세계, 법계를 설명하는 것이 끝이 없더라.]
智雖善入無處所(지수선입무처소)나, 지혜로 善入= 잘 들어가나 들어간 곳 없으며
無有疲厭無所着(무유피렴무소착)이로다. 피로나 싫증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집착하는 바도 없더라.]
[한 사람이 3600조 세포(인간, 나)과 같이 더불어서 같이 돌아가고 있고, 우주도 마찬가지로 인체하고 똑 같은 겁니다.
드넓은 우주나, 미세한 세포나 가장 중심은 “나” 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계가 펼쳐지고, 밖으로 나가도 똑 같아요. “나”. 나에서부터 넓은 데로, 나에서부터 좁은 데로 펼쳐집니다.
우주도 인체하고 똑 같고 모든 존재가 똑 같습니다.]
(18) 入佛種性
三世諸佛家中生하야 證得如來妙法身하고
三世諸佛家中生(삼세제불가중생)하야, 삼세의 부처님들 집에 태어나
[三世諸佛집에서 우리가 태어나는 것= 法化生 법의 교화로부터 태어났다. 법화경에 從佛口生이라. 부처님의 설법 소리를 듣고 발심한 제자, 부처님의 설법 소리를 부처님 입으로부터 태어난 제자로 표현을 했습니다]
證得如來妙法身(증득여래묘법신)하고, 여래의 미묘한 법신 증득하고
(19) 成佛現示
普爲群生現衆色이 譬如幻師無不作이라
或現始修殊勝行하고 或現初生及出家하며 或現樹下成菩提하고 或爲衆生示涅槃이로다
普爲群生現衆色(보위군생현중색)이, 중생 위해 여러 몸을 두루 나타내니
譬如幻師無不作(비여환사무불작)이라. 마술사가 못 만듬이 없는 것 같으며,
或現 始修殊勝行(혹현시수수승행)하고, 수승한 행을 처음 닦아 보이기도 하고
或現 初生及出家(혹현초생급출가)하며, 태어나고 출가해 보이기도 하며
或現 樹下成菩提(혹현수하성보리)하고, 보리수 아래서 보리를 이루어 보이기도 하고
或爲衆生示涅槃(혹위중생시열반)이로다. 중생들을 위해 열반을 보이기도 하느니라.
[부처님의 법신은 法身常住=법신은 항상 있습니다. 부처님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 육신이 열반한 것은 우리안목으로 열반한다고 보는 것이라서 중생을 위해서 열반을 보인다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법신은 우리와 동등한, 항상 그 자리입니다. ]
(20) 佛境界平等
菩薩所住希有法은 唯佛境界非二乘이라 身語意想皆已除하고 種種隨宜悉能現이로다
菩薩所得諸佛法은 衆生思惟發狂亂이라 智入實際心無礙하야 普現如來自在力이로다
此於世間無與等이어든 何况復增殊勝行가 雖未具足一切智나 已獲如來自在力하며
已住究竟一乘道하야 深入微妙最上法이로다
菩薩所住希有法(보살소주희유법)은, 보살이 머무는 희유한 법은
唯佛境界非二乘(유불경계비이승)이라. 오직 부처님의 경계요 이승(성문, 연각)의 경계가 아니며
身語意想을 皆已除(신어의상개이제)하고, 몸과 말과 뜻과 생각 다 이미 없앴지만 [신 구 의를 다 떠난 것]
種種隨宜悉能現(종종수의실능현)이로다. 갖가지로 마땅하게 능히 다 나타내는 도다. [편리에 따라서 다 능히 나타내다.]
菩薩所得諸佛法(보살소득제불법)은, 보살이 얻은 부처님 법은
衆生이 思惟하면 發狂亂(중생사유발광란)이라. 중생이 생각하면 혼란을 일으키지만 [보살이 얻은바 모든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중생들이 생각해 보면 바로 발광하게 돼있다. → 그만큼 차원이 다르다는 뜻을 표현한 것입니다.]
智入實際心無碍(지입실제심무애)하야, 지혜로 실제에 들어가기에 걸림이 없어서
[지혜가 實際= 진리에 들어가서 마음이 걸리는 바가 없어서]
普現如來自在力(보현여래자재력)이로다. 여래의 자재하신 힘을 두루 나타내며,
此於世間無與等(차어세간무여등)이어든, 이런 일 세간에는 같이 할 이 없는데
[此於= 초발심. 보살이 초발심한 것은 세간에 있어서 더불어 같을 이가 없어요. 初發心이라고하는 그 격은 세간에 있어서 더불어 같을 이가 없습니다.]
何况復增殊勝行(하황부증수승행)가? 하물며 수승한 행이야 어찌 더 할 수 있으리오
[초발심만 해도 세간에 같을 이가 없는데 하물며 10행ㆍ10회향ㆍ10지ㆍ등각ㆍ묘각이겠는가?]
雖未具足一切智(수미구족일체지)나, 비록 일체지혜를 구족하지 못했지만
[雖未具足一切智나→ 비록 일체지를 구족하지는 못했으나, 비록 초발심보살이 아직 부처님은 되지는 못했으나.]
已獲如來自在力(이획여래자재력)하며, 여래의 자재한 힘 이미 얻었으며,
已住究竟一乘道(이주구경일승도)하야, 구경의 일승도에 머물렀고
[究竟一乘道= 최후의 一乘道→ 일불승도지.→ 사람이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경지에 이미 머물러서]
深入微妙最上法(심입미묘최상법)이로다. 미묘한 최상법에 깊이 들어갔으며
[초발심보살의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21) 功德의 平等
善知衆生時非時하야 爲利益故現神通호대 分身徧滿一切刹하야 放淨光明除世暗이로다
譬如龍王起大雲하야 普雨妙雨悉充給이라 觀察衆生如幻夢하야 以業力故常流轉이로다
大悲哀愍咸救拔하야 爲說無爲淨法性하니 佛力無量此亦然이라 譬如虛空無有邊이로다
爲令衆生得解脫하야 億劫勤修而不倦하며 種種思惟妙功德하야 善修無上第一業하며
於諸勝行恒不捨하야 專念生成一切智로다
善知衆生時非時(선지중생시비시)하야, 중생들의 때와 때 아님을 잘 알아서
[‘지금 이 이야기가, 지금 저 사람의 상황에 맞는가? 안 맞는가?’]
[有를 알면 空도 알아야 되고, 空을 알면 또 有를 알아야 됩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아닙니까?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입니다.
無我가 眞我고, 眞我가 無我입니다. 眞我卽是 無我고 無我卽是 眞我입니다.
時非時. 그 말을 할 때인가 아닌가를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10력 가운데 處非處= 도리와 도리가 아닌 것, 이치와 이치가 아닌 것을 아는 것, 보살은 時와 非時를 아는 것이 보살이 자랑할 힘=능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爲利益故現神通(위리익고현신통)호대, 그들을 이익되게 하고자 신통을 나타내
分身遍滿一切刹(분신편만일체찰)하야, 분신을 온 세계에 두루 가득히 하고
放 淨光明 除世闇(방정광명제세암)이로다. 청정한 광명을 놓아 어두움을 없애니
[청정한 광명= 진리의 설법을 해서 除世闇= 세상의 어둠을 전부 제거한다.
세상의 어둠= 축소해서 인과의 도리를 모르는 것. 인과의 도리를 몰라서 그렇게 캄캄한 겁니다.]
譬如龍王起大雲(비여룡왕기대운)하야, 마치 용왕이 큰 구름을 일으켜
普雨妙雨 悉充洽(보우묘우실충흡)이라. 좋은 비 흡족 적시듯 하느니라.
觀察衆生 如幻夢(관찰중생여환몽)하야, 중생들이 환영이나 꿈 같아서
以業力故로 常流轉(이업력고상류전)이로다. 업력 때문에 항상 흘러 도는 것을 보고
[업력을 쓴 고로 항상 流轉하도다. 流轉함을 잘 살펴야한다는 뜻입니다.]
大悲哀愍으로 咸救拔(대비애민함구발)하야, 대자비로 불쌍히 여겨 모두 구하고자
[중생을 哀愍히 여기는 것으로써 다 구제하고]
爲說無爲淨法性(위설무위정법성)하니, 무위법의 청정한 성품을 설하며, [조작이 없는 청정한 법의 성품을 설하는 도다.]
[無爲淨法性= 연기의 이치를 이야기하여
연기의 이치는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요, 부처님이 오시기 전이나, 부처님이 가신 이후나, 항상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인과의 이치이고, 연기의 법칙이니까 無爲이고 無爲法이고, 無爲淨法= 無爲의 청정한법입니다.
본래 있는 이치지 누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든 것은 변하는 것이고, 변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계율등은 그 시대ㆍ그 상황ㆍ그 민족에게, 또 그 사람들에게 맞는 것으로, 다른 데 가면 틀리는 것은 한 순간 하나의 방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無爲淨法性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佛力無量此亦然(불력무량차역연)이라. 부처님 힘 한량없 듯이 그 역시 그러하여
譬如虛空無有邊(비여허공무유변)이로다. 마치 허공이 끝 없는 것과 같은데
爲令衆生得解脫(위령중생득해탈)하야, 중생들을 해탈시키기 위해
億劫勤修而不倦(억겁근수이불권)하며, 억 겁 동안을 마다 않고 힘써 닦으며,
種種思惟妙功德(종종사유묘공덕)하야, 갖가지로 아름다운 공덕 생각하고[가지가지 미묘한 공덕을 냉정하게 사유해서]
善修無上第一業(선수무상제일업)하며, 더 없이 높고 제일 가는 업을 닦으며
[부처의 부처행도 佛業이요, 보살의 보살행도 보살業입니다. 業이라고 하면, 우리는 좋지 않은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無上第一業= 가장 높은= 위가 없는= 제일가는 업을 잘 닦아라.
業力難思議라. 우리는 업 안 짓고 못삽니다.
부처님도 업 짓고 삽니다. 무슨 업을 짓느냐? 佛業=부처의 業을 짓는 것이지요.
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업을 짓는 그것이 無上第一業입니다.]
於諸勝行을 恒不捨(어제승행항불사)하야, 모든 수승한 행을 버리지 않고[모든 수승한 행= 아주 뛰어난 보살행]
專念生成一切智(전념생성일체지)로다. 오롯한 마음으로 일체지혜를 일으키느니라.
[오로지 一切智를 생성하는 것을 생각한다. 一切智= 부처님이 가지신 지혜= 평등지ㆍ차별지를 환히 아는,
空의 입장은 평등이요. 색의 입장, 현상은 차별입니다.
一切智智. 지혜 智자를 두 번 써서, 평등 지ㆍ차별지. 空의 지혜ㆍ有의 지혜. 이 모든 것을 전부 이룬다.]
(22) 一身과 無量身
一身示現無量身하야 一切世界悉周徧호대 其心淸淨無分別하니 一念難思力如是로다
一身示現無量身(일신시현무량신)하야, 한 몸으로 한량없는 몸을 나타내
一切世界悉周遍(일체세계실주변)호대 일체 세계를 두루 가득 채우거니와
其心淸淨無分別(기심청정무분별)하니 그 마음 청정하고 분별이 없어서
一念難思力如是(일념난사력여시)로다. 한 생각의 부사의한 힘도 그렇게 가득하며,
[앞의 一毛端에 現衆刹. 한 터럭 끝에 온갖 무수한 세계를 나타낸다.
“우리 일신상에 60조 세포가 있고, 60조 세포마다 각각 또 60조의 세포가 있어서, 우리는 3600조의 세포를 대중으로 동시에 모시고 다니는 거대한 세계며, 거대한 법당이다. 그러므로 나 개인만이 아니라, 3600조의 세포가 함께 화엄경 공부를 하고, 환희를 하든 슬퍼하든 화를 내든 우리는 거대한 3600조의 대중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한다.”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 여기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전체를 꿰뚫어보신 의상스님께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두 구절로 화엄경의 의미를 간단하게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도 一身示現無量身 한 몸에서 한량없는 몸을 나타낸다.
난초 잎 하나에서 수 백ㆍ수 천포기의 난초를 배양해내고, 인간의 세포하나에서 그 사람을 복제하는 것이 一身에서 示現無量身 이어서 一切世界悉周遍입니다. 낱낱 세포마다 전부 한량없는 모든 내용, 인체의 모든 구조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其心淸淨無分別하나, 그 마음이 텅 비어서 아무런 분별은 없어요.
그래야 모든 것을 제대로 분별해 내는 것이지요. 어떤 고정관념에 딱 사로잡혀 있으면 더 이상 思考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가 원활하게 千變萬化를 할 수 있으려면, 고정되면 안 됩니다. → 應無所主而生其心이니까요. 머무는 바 없게 되어있고, 머무는 바 없게 돼있으니까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천변만화로 엮어내는 겁니다.
내가 오늘 하루 동안에 마음 쓴, 그 양이 얼마나 됩니까? 그야말로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잖아요. 천백억 화신이 하나ㆍ하나 千變萬化하는 겁니다. 한 몸ㆍ한 몸이 千變萬化. 끊임없이ㆍ끊임없이 반복이 하는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정관념 갖지 말고 텅 비워서 其心淸淨無分別이 되는 길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화엄경을 공부할 때도 선입관 없이 그대로,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겁니다. 그것 참~ 어렵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어도 불교식으로 해석하려 들고, 유교 책을 읽어도 불교식으로 해석하려 들고, 노자나 장자를 읽어도 역시 불교식으로 해석하려 들고, 심지어 周易禪解라고 하는, 주역도 불교인이 보면 불교식으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주역은 주역대로 해석해야 되고 장자는 장자대로 해석해야 되고, 불교는 불교대로 해석해야 되는데 그쪽 사람들이 불교를 보면 또 그들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유명한 목사가 화엄경강의 책 낸 것이 있어서 읽어 보니까 ㅎㅎㅎ 기독교 식으로 해석해내는 겁니다. 그것이 其心淸淨無分別이 안 된 것입니다.
그 전에 탄허스님도 “아 이것, 마음이 가난한자 복이 있나니 하는 소리를 중국에서는 어떻게 번역했는지 아냐?”고 저보고 물어요. 제가 안 봤다고,
중국 성경은 못 봤다고 그러니까 虛心者受福= 마음이 텅 빈 사람은 복을 받는다. 그러면 바로 불교 아니냐? 虛心者受福. 마음이 텅 비었다면 당연히 복을 받는 것이지, 복 받아도 받는 것도 아니고, 복 받음이 없이 받는 것이고, 이것이 虛心者受福의 도리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其心淸淨無分別하니 一念의 難思力이 이와 같더라.
우리 한 생각의 불가사의한 힘은 참 대단합니다. 一念의 힘은 대단한 겁니다. 순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천리만리 달려오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냅니다.]
(23) 眞實한 智慧
於諸世間不分別하며 於一切法無妄想하야 雖觀諸法而不取라 恒救衆生無所度로다
一切世間唯是想이라 於中種種各差別하니 知想境界險且深하야 爲現神通而救脫이로다
譬如幻師自在力하야 菩薩神變亦如是라 身徧法界及虛空하야 隨衆生心靡不見이로다
能所分別二俱離하며 雜染淸淨無所取하며 若縛若解智悉忘하고 但願普與衆生樂이로다
一切世間唯想力이라 以智而入心無畏하며 思惟諸法亦復然하야 三世推求不可得이로다
能入過去畢前際하고 能入未來畢後際하며 能入現在一切處하야 常勤觀察無所有로다
隨順涅槃寂滅法하야 住於無諍無所依하며 心如實際無與等하야 專向菩提永不退로다
修諸勝行無退怯하고 安住菩提不動搖하야 佛及菩薩與世間과 盡於法界皆明了로다
欲得最勝第一道하야 爲一切智解脫王인댄 應當速發菩提心하야 永盡諸漏利群生이어다
於諸世間不分別(어제세간불분별)하며, 모든 세간을 분별하지 않고
於一切法에 無妄想(어일체법무망상)하야, 일체법에도 망상이 없어서 [망상 없이 그대로 본다. 자기 선입관으로 이러고저러고 분별하고 망상부리는 것이 아니고 있는 편견없이 그대로 보는 것이지요.]
雖觀諸法이나 而不取(수관제법이불취)라. 비록 모든 법을 보되 취하지 않고
[비록 온갖 사실들을 다 보지만 그대로 취하지 않는다.=취사선택 않는 것입니다. 그대로 두고 보고, 평정심을 갖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至道無難 維嫌揀擇(지도무난유혐간택) 지극한 도는, 완벽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維嫌揀擇 간택을 싫어할 뿐입니다.]
恒救衆生無所度(항구중생무소도)로다. 항상 중생을 구하되 제도한 것도 없으며,
[항상 중생을 구제하지만 제도하는 바가 없더라. 지장보살은 지옥에 까지 가서 중생을 제도해도 제도하는 바가 없어야 됩니다. 제도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三觀으로 설명이 되는데, 假觀은 우리들 관점입니다. 우리들 관점으로 “하~ 중생은 죄 많고 때 많은 중생ㆍ몹쓸 중생ㆍ얼른 떨쳐버려야 할 중생.”이 우리들의 세속적인 관점입니다.
空觀은 ‘일체 중생은 다 공하다.’고 보는 것은 소승, 성문ㆍ연각들의 관점입니다. ‘텅 비어서 없는데ㆍ모두가 無我인데, 뭘 중생이라고 굳이 그렇게 할 거냐? 중생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처도 무아다. 부처도 공한 것이고, 부처도 근본이 텅 빈 것이다.’이것은 소승적인 일종의 편견입니다.
보통 가관, 공관, 중도관으로 순서를 정합니다. 가관이나 공관이나 같은 뜻으로, 有를 싫어하고 無를 취하나, 無를 싫어하고 有를 취하나 그 허물은 똑 같습니다. 그래서 空觀, 假觀, 中道觀. 순서를 그렇게 막 흩트려서 보는 것이지요.
中道觀이 중요한 겁니다. ‘본래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부처다.’ 라는 사실. 본래부처로 보고 제도하니까 恒救衆生이 無所度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항상 중생을 구제하지만 제도하는 바가 없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온갖 중생들을 많이 제도했지만, 하나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하는 禪家의 말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제도한 바가 없다. 왜? 본래부처인 것을 뭘 제도합니까? 다만 부처라는 사실을 일깨워 줬을 뿐이지요. 부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부처인 사실을 가르쳐 줬을 뿐입니다.
그것을 수긍하는 사람은 그 소리 “교화다ㆍ제도다.”하는 것이고,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은 제도 못 받은 것이지, 사람을 바꿔서, 변화시켜서 제도했다거나 교화를 했다거나 하는 사실은 없다는 이것이 無所度= 제도한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一切世間唯是想(일체세간유시상)이라. 일체의 세간이 오로지 생각이요
[일체세간 모두가 상상이고, 전부 우리생각 놀음입니다]
於中種種各差別(어중종종각차별)하니, 그 안에서 갖가지로 차별한데
[唯是想이라 생각놀음이니까, 그저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이니까’ 다른 것 수긍해주고 인정해야 됩니다]
知想境界險且深(지상경계험차심)하야, 생각(想)의 경계가 험하고 깊은 줄 알아서
[몸은 구속할 수 있지만 생각은 구속이 안 되니까 생각으로 서로 주장하기로 하면 너무나도 험하고 험하게 됩니다]
爲現神通而救脫(위현신통이구탈)이로다. 신통을 나타내 구호하고 해탈시키나니
[救脫= 구제해서 해탈하게 한다. 벗어나게 한다. 이것도 수용하고 저것도 수용하고 다 용납해서, 집착하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기어이 자기 것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 상태가 救脫. 구제할 구ㆍ벗을 탈입니다.]
譬如幻師自在力(비여환사자재력)하야, 마치 마술사의 자재한 힘 처럼
菩薩神變亦如是(보살신변역여시)라. 보살의 신통변화도 그와 같아서
身遍法界及虛空(신변법계급허공)하야, 몸을 법계와 허공계에 두루하여
隨衆生心靡不見(수중생심미불견)이로다. 중생의 마음따라 보지 못함이 없으며,
[이 몸은 智身=지혜의 몸이니까 법계와 허공계에 두루 해서, 중생심을 따라서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다. 보지 못함이 없더라. 즉 자기 깜냥대로 보살의 신통변화를 본다. 부처님에 대한 이해가 그 나름대로, 들은 대로, 자기 아는 상식만큼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법성게 구절, 雨寶益生滿虛空(우보익생만허공) 衆生隨器得利益(중생수기득이익) 아주 근사하잖아요. 우리 인생은 사실은 알고 보면, 하늘에서 끝없이 황금보화가 막 쏟아지는 것과 같은 겁니다. 우리 인생자체가 그대로 더 이상 보탤 것도 없고, 다만 어떻게 이해하고, 느끼고, 누리느냐에 따라서 衆生隨器得利益이라. 중생이 그릇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
천하에 명문들이 많지만 의상스님 같이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의 법성게. 270자가 천하에 명문으로써 이 많고 많은 80권 화엄경을 그 속에 다 담았잖아요.
임제스님은 欠少什麽(흠소심마)오? 부족한 것이 도대체 뭐냐? 네가 볼 줄 알고ㆍ들을 줄 알고ㆍ느끼고ㆍ말할 줄 알고ㆍ침묵할 줄 알고ㆍ화낼 줄 알고ㆍ기뻐할 줄 알고ㆍ목 놓아 울음을 터트릴 줄도 아는 그런 신통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그대가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가?
사실 완전무결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느끼고 얼마나 누리느냐에 따라 衆生隨器得利益이라. 그릇 따라서 이익을 얻는 것이다. ‘그런 이론에 대해서 나는 전혀 관심 없다. 아이고 속상하고 그냥 울화통 터지는 것이 인생인데 무슨 그런 소리가 있냐?’ 하는 사람은 소나기가 쏟아져도 그릇을 엎어놓는 것과 같아서 물 한 방울도 고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혹시, ‘저 중이 뭔 소리를 하는가? 불교에서 뭔 소리를 하는가?’ 하고,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래도 가랑비에 물 한 두 방울이 자기 그릇에 고이는, 그와 같은 이치인겁니다.]
能所分別二俱離(능소분별이구리)하며 주체[能]다 객체[所]다 하는 분별을 둘 다 떠나고
雜染淸淨을 無所取(잡염청정무소취)하며, 물들고 깨끗함도 취하지 않으며 [無所取=不二性]
[유마경의 절정은 불이법문입니다. 문수보살과 여러 보살들하고 유마거사가 不二에 대해서 우리 토론한번 합시다. 각자 아는 대로 不二에 대해서 소견을 개진해 보시오해서 많은 보살들이 쭉~ 하고 마지막에 문수보살이 우리는 다 했습니다. 이제 유마거사께서 不二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십시오. 하니까 아무 말이 없었잖아요. 杜口. 막을 두ㆍ입 구. 입을 딱 막았다. 아무 말 없이 묵묵부답입니다.
그러니까 문수보살이 야~ 참, 不二法門, 둘이 아닌 도리를, 우리 모든 존재는 不二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이 아닌 어떤 성질을 우리 모든 생명ㆍ진여생명은 누구나 不二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부처님이 不二고ㆍ보살이 不二가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닌 어떤 성품을 본래 지니고 있는 그 도리입니다. 유마거사의 杜口입비야. 입을 막은 그 멋진 법문에 황칠을 하자면 굳이 뭘 달리 이야기할 것이 있어?
본래 다 不二인데 뭘 달리 不二를 설명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괜히 황칠하지 말라. 그것을 改칠이라, 다시 개자.
붓글씨에 제일 금기 사항이 뭔지 알아요? 한번 그은 데 다시 덮어 긋는 것을 改칠이라고, 그것을 옛날 선비들은 제일 싫어했습니다. 그래 이런 설명은 전부 改칠입니다. 사실은 잘 그려놓은 그림에 황칠하는 겁니다. 그러나 강사는 어쩔수 없지요. 그러라고 임무를 부여 받았으니까요. 하하하 보십시오.
能所分別을 二俱離하고, 能과 所 = 주관과 객관입니다. 나와 너. 있다ㆍ없다. 남자ㆍ여자. 이 모든 것을 불교는 能ㆍ所로 표현합니다. 그런 분별, 그 둘을 다 떠나고, 雜染과 淸淨을 함께 떠나고, 뭐가 물들고 뭐가 청정하다고 그것 따질 거린가? 아주 엄격하게 우리가 분석해 들어가면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습니다.
똥은 철저히 냄새가 나야 되고 철저히 잘 썩어야 그것이 진짜 좋은 똥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똥이 덜 썩었으면 그것은 온전한 똥이 못 되는 겁니다. 雜染과 淸淨. 이것 나눌 일이 아니라고요. 취할 바가 없다. 둘이 아닌 도리를, 不二性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둘이 아닌 도리입니다. 남녀도 사실은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닌 것을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자유자재하게 활용할 수 있으면 그 가정 화목하고 아주 평화롭습니다. “아이고 남자가ㆍ여자가 어떻게 그것을 하냐?”고, 이러고 있으면 그 가정 깨지지가 멀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不二라서 남자보다 더 잘하는 여자도 있고, 여자보다 더 잘하는 남자도 있는,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모든 진여생명에는 不二性이 있습니다.]
若縛若解智悉忘(약박약해지실망)하고, 속박이다 해탈이다 하는 것도 지혜로 다 잊고서
但願普與衆生樂(단원보여중생락)이로다. 다만 널리 중생에게 안락 주기를 원하느니라.
[옳다ㆍ그르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옳다ㆍ그르다는 것 때문에 친구들 사이가 벌어지고, 가족의 사이가 벌어지고,
옳고 그른 것이 무슨 상관있습니까? 친한 것이 제일 우선, 친화가 제일입니다. 그래서 先情後敎(선정후교)라는 말이 있잖아요. 선비가 제자를 가르치는데 먼저 정을 담뿍 담고 그리고 나서 가르치는 겁니다. 先情後敎= 정을 먼저하고 가르치는 것을 뒤로한다. 어떤 학자는 “나는 오직 재주 있는 사람을 어여삐 여길 뿐이다.” 양주동씨 같이 워낙 머리 좋은 사람은 둔한 사람을 가르치기 골치 아프니까 “나는 재주 있는 제자들을 어여삐 여긴다.” 그런 말을 공개적으로 한 사람도 있긴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先情後敎입니다]
一切世間唯想力(일체세간유상력)이라. 일체의 세간이 오직 생각의 힘인데
以智而入心無畏(이지이입심무외)하며, 지혜로 두려움 없이 들어가고
[지혜로써 들어가서 마음에 두려운 바가 없어야 한다. 생각과 지혜의 차이가 거기에 있습니다. 세속의 어떤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 불교에서 서양철학 같은 것을 크게 높이 사지 않는 이유는 아주 총명한 사람들이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이거든요. 그런데 불교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직관에 의해서 본 것을 그대로 피력해 놓은 것이니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철학이론 같은 것은 머리 좋은 사람들은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다 읽어서 이해할 수 있지만 깨달은 사람의 직관에 의해서 툭 툭 던져놓은 말은 아무리 총명한 머리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겁니다.
세상사는 오직 생각의 힘이라. 이것이 세속의 길과 열반의 길이 나눠지는 한계 線입니다.
세속의 길은 생각의 길, 열반의 길은 지혜의 길. 이렇게 나눠집니다. 그래서 以智而入하야, 지혜로써 들어가요. 그래서 마음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思惟諸法亦復然(사유제법역부연)하야, 모든 법을 생각함에도 지혜로 들어가
三世推求不可得(삼세추구불가득)이로다. 삼세를 추구하지만 얻을 것이 없으며,
[생각으로 아무리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파헤쳐봐야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겨우 한쪽을 연구해서 다음으로 옮기면 그 앞에 연구해 놨던 것이 벌써 어디엔가 변해있고, 그 다음 것 연구하면 앞의 것이 또 변해있고요. 생각으로 한 것은 끝이 없는 겁니다.]
能入過去畢前際(능입과거필전제)하고, 능히 과거에 들어가 前際= 전생을 다 보고
能入未來가 畢後際(능입미래필후제)하며, 미래에 들어가 후생을 다 보며
[능히 과거가 끝내는 앞에, 미래에 들어가고, 능히 미래가 끝내 後際에 들어간다. →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九世十世互相卽 = 과거에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고, 현재에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고, 미래에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습니다. 거기에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現前一念이 있어서 十世입니다.
그것이 九世와 十世가 서로서로 즉해있다= 연결돼있다= 하나로 통일돼있다= 불이성이다= 둘이 아니다= 互相卽.
시간을 아무리 쪼개고 쪼개서 과거에 과거ㆍ현재ㆍ미래, 현재에 과거ㆍ현재ㆍ미래, 미래에 과거ㆍ현재ㆍ미래, 그리고 現前一念까지 10세라 하더라도 전부 불이성으로 돌아간다. 互相卽입니다.
즉 과거가 끝내는 前際= 미래에 들어가고, 미래는 또한 끝에 가서 끝내 後際에 들어가는 互相卽= 시간의 호용성입니다.
조주스님은, 그 때 보통 중국 사람의 평균 수명이 40세 50세인데 120을 사셨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영가스님 같은 이들도, 그 위대한 도인도 48세까지밖에 못 살았고 우리나라 고려 보조국사 같은 위대한 성인도 60을 못 채웠습니다 58센가 그렇게 사셨던 시대에 120을 사셨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스님, 어찌하여 그리 오래사십니까?” 하니까 “너희들은 시간의 부림을 당하지만, 나는 내가 시간을 부린다.” 시간의 호용성을 마음껏 활용한 도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能入現在一切處(능입현재일체처)하야, 현재의 모든 곳에 들어가
常勤觀察無所有(상근관찰무소유)로다. 늘 힘써 살피지만 있을 것이 없도다.
[항상 열심히 정진하지만, 그 무엇인가 꼬투리를 남기고, 조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隨順涅槃寂滅法(수순열반적멸법)하야, 열반의 적멸법에 수순하여
住於無諍無所依(주어무쟁무소의)하며, 無諍= 다툼 없는 데 머물되 의지함이 없고
[無諍= 갈등이 없고 다툼이 없는 데 머물러서 의지 하는 바가 없다.]
心如實際無與等(심여실제무여등)하야, 마음은 대등할 바 없이 실제와 같아서
專向菩提永不退(전향보리영불퇴)로다. 오롯한 마음으로 보리를 향해 퇴전치 않으며,
修諸勝行無退怯(수제승행무퇴겁)하고, 수승한 행을 겁내 물러남 없이 닦고
[수승한 행= 보살행입니다. 열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증엄스님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은 그 분이 이 시대의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니까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실재하는지 안하는지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실지로 살아있는 관세음보살님은 그 스님입니다. 스님이 교회를 지어주다니요. 우리한국 한국은 거의 8ㆍ90프로가 소승불교니까 상상도 못해요. 그런 스님들은 비파사나니, 힐링이니, 마음 다스림이니, 관찰하는 그것 할 시간이 없습니다. 보살은 그런 것 할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편안해야지ㆍ내가 열반해야지ㆍ내가 행복을 찾아야지...’ 하는 것은 저~~ 어린애들이나 하는 일이지, 진정 보살은 봉사 활동하느라고ㆍ보살행 하느라고 그런 것 할 겨를이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정상적인불교입니다. 勝行. 모든 勝行을 닦아서 퇴거함이 없다. 물러서거나 겁내지 않는다. 이것 참, 겁나는 일입니다.
춘성스님 이야기를 우리 禪家에서는 자주하는데요. 추운 겨울 날, 그 때는 길도 아주 험햇는데, 기차를 망월 역에서 내리면, 기차역에 노숙 인이 추위에 벌벌 떨고 있으면, 옷 훌훌 다 벗어주고 내복 바람으로 그 높은 망월사까지 올라가는... 그런 선사의 기개! 하~~ 제대로 된 선사는 겁이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할까? 올라가다 내가 얼어 죽을 텐데...’ 하는 생각이 없는 겁니다. 49재를 지낸다고 돈을 주니까 거지들에게 다 나눠줘 버리고, “아이고 49재 잘 지냈다.” 신도들이 와서 따지면 어떻게 하고 그 체면을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 소인들은 겁내서 도저히 못하는데 그 스님은 그것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49재는 아무 것도 차린 것이 없이 그저 냉수 하나 떠놓고 지내는 겁니다. “엊그저께 49재 잘 지냈어요.”
49재 지낼 재물 장만하러 나가다가 거지들을 보고 齋費(재비)를 그냥 전부 나눠줘 버린 것 아닙니까? 그리고는 그냥 바로 올라온 겁니다. ‘아이구 오늘 49재 잘 지냈다. 그 동안 제일 잘 지냈다.’ 그래서 그런 미담이 지금까지 이야기되는 이유가 그런 데 있습니다. 보살 勝行은 참 겁나는 일입니다.]
安住菩提不動搖(안주보리불동요)하야, 보리(깨달음의 이치)에 안주하여 동요치 않으며
佛及菩薩與世間(불급보살여세간)과, 부처님과 보살과 모든 세간과
盡於法界를 皆明了(진어법계개명료)로다. 온 법계를 분명히 아느니라.
欲得 最勝第一道(욕득최승제일도)하야, 가장 수승하고 제일가는 도를 얻어
爲一切智解脫王(위일체지해탈왕)인댄, 일체지혜의 해탈왕이 되고자 한다면
[一切智해탈왕= 부처의 삶. 부처의 삶을 살고자한다면= 最勝第一道ㆍ一切智解脫王. 부처님의 경지를 표현했습니다.]
應當速發菩提心(응당속발보리심)하야, 마땅히 빨리 보리심을 내어서
永盡諸漏 利群生(영진제루이군생)이어다. 모든 번뇌 길이 끊고 중생 이롭게 할지어다
[하루에 열 시간씩 좌선하고 무릎 닿도록 절해서 번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살행으로 직행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번뇌 없습니다. 보살행하기 바쁜데, 언제 마음 다스리고 예의주시하고, 호흡 관찰하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불타고 있고, 고통 받는 중생이 그렇게 많으니까 應當速發菩提心하라 = 응당 빨리 보리심을 발해서 永盡諸漏 利群生아라 = 번뇌 그것 다 무시해버리고 群生을 이롭게 하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할지어다. 이것이 眞實한 智慧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