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90권 4
大智度論 論釋實際品 第八十 卷九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0. 실제품(實際品)을 풀이함 4
世諦法故,菩薩摩訶薩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非第一實義。何以故?第一實義中,無有色乃至無有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無行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是一切法,皆以世諦故說,非第一義。
세속 이치인 세제법(世諦法)이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일 뿐, 제일실의(第一實義)에 의한 것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제일실의(第一實義) 가운데에는 물질(色)도 없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하는 이도 없기 때문이니,
이 일체법은 모두다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이기 때문, 제일실의(第一實義)에 의한 것이 아니니라.
須菩提!菩薩摩訶薩從初發意已來,行阿耨多羅三藐三菩提,菩提亦不增、衆生亦不減,菩薩亦無增減。
須菩提!於意云何:若人初得道時,住無閒三昧,得無漏根,若成就須陁洹果、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汝爾時有所得若夢、若心、若道、若道果不?”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초발의(初發意)한 이후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할 때, 보리는 늘어나지 않는 불증(不增)이고 중생도 또한 줄어들지 않는 불감(不減)이며, 보살 또한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사람이 처음에 도를 얻은 초득도(初得道)를 하였을 때, 평등주심(平等住心)으로 일부러 애써서 행함이 없는무간삼매(無間三昧)에 머물러서 무루근(無漏根)을 얻어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를 성취한다면,
너는 그 때에 꿈(夢)이나 마음(心)이나 도(道)나 도과(道果)에 대하여 얻을 것이 있는 것인가?”
須菩提言:“世尊!不得也!”
佛告須菩提:“云何當知得阿羅漢道者?”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얻을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아라한의 도를 얻은 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인가?”
“世尊!世諦法故分別名阿羅漢道。”
“세존이시여, 세속 이치인 세제법(世諦法) 때문에 분별하여 아라한의 도라 하는 것입니다.”
佛語須菩提:“世諦故說名菩薩,說名色、受、想、行、識乃至一切種智。是菩提中無法可得若增、若減,以諸法性空故。諸法性空尚不可得,何況得初地心乃至十地心、六波羅蜜、三十七助道法、空三昧、無相、無作三昧乃至一切佛法當有所得,無有是處!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阿耨多羅三藐三菩提,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利益衆生。”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 때문에 보살이라 이름하고 색(色)ㆍ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인식(識) 내지는 일체종지라고 이름 하는 것이니라.
보리 가운데에서는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없나니, 제법은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이니라.
제법의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 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초지(初地)의 마음 내지는 10지의 마음과 6바라밀과 37조도법과 공삼매ㆍ무상삼매ㆍ무작삼매 내지는 온갖 부처님의 불법이겠는가?
얻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論. 釋曰:上品中須菩提種種因緣難:“若諸法空,云何有五道生死、善不善法?”
今難衆生,作是言:“世尊!若衆生畢竟不可得,菩薩爲誰故行般若?”先難法爲衆生,今難衆生爲法故。
▷논. 해석한다. 앞의 품(品)에서 수보리 존자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따지면서 “만약 제법이 공하다면 어떻게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아수라의 오도(五道)에서 나고 죽는 것과 착하거나 착하지 못한 법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중생에 대하여 따지면서 “세존이시여, 만약 중생을 끝내 얻을 수 없다면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니,
앞에서는 법(法)에 대하여 따져서 중생을 위하는 것이고, 여기에서는 중생에 대하여 따져서 법을 위하는 까닭이다.
佛答:“爲實際故,菩薩行般若波羅蜜。”須菩提意謂:菩薩爲度衆生故行般若波羅蜜。
佛意:衆生假名虛誑、畢竟不可得;菩薩爲一切實法故,行般若波羅蜜。實法卽是實際。
부처님께서 이에 대하여 대답하시기를, “실제(實際)를 위하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고 하셨으니,
수보리 존자의 생각은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여기는 것이요,
부처님의 생각은 ‘중생은 임시로 이름한 가명이라 거짓이므로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보살은 일체의 진실한 실법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 진실한 실법(實法)이 곧 실제(實際)이다’라고 여기신 것이다.
問曰:一切菩薩見衆生苦惱,爲度衆生故發大悲心,今何以言爲實際?
묻나니, 일체의 모든 보살은 중생들의 괴로워함을 보고, 그러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대비심(大悲心)을 내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실제(實際)를 위해서이다’라고 하신 것입니까?
答曰:初發意菩薩但爲滅衆生苦故發大悲心。苦者,所謂老、病、死等,及身心衰惱。云何滅是苦?尋苦因緣,由生故,如佛十二因緣中說:“何因緣故有老、病、死?以有生故。”
답하나니, 처음 뜻을 낸 초발의 보살은 다만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 주기 위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킬 뿐이니, 괴로움이라 함은 이른바 늙고ㆍ병들고ㆍ죽는 것 등과 몸과 마음의 쇠퇴와 번뇌를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괴로움을 없애는가? 괴로움의 고인연(苦因緣)을 찾아보면 그것은 태어남의 생(生)으로 말미암은 때문이니, 마치 부처님께서 12인연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어떠한 인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음의 노병사(老病死)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태어남의 생(生)이 있기 때문이다”고 하신 것과 같다.
問曰:一切衆生皆知生因緣是苦,菩薩有何奇特?
묻나니, 일체 중생들도 모두 태어남의 생인연(生因緣)이 곧 괴로운 것임을 알고 있거늘, 보살로 인하여 어떠한 특별한 것이 있는 것입니까?
答曰:衆生不知由生有苦,若遭苦時,但怨恨人,自不將適,初不怨生;以是故增長結使、重增生法,不知眞實苦因。有人無鞭杖、刀兵、諸愁惱苦,而有死苦;此死從何所來?從生而有。
답하나니, 중생들은 이 태어남 때문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가령 괴로움을 만났을 때에는 다른 사람만을 원망할 뿐, 스스로에게서 찾지를 못하나니, 애초부터 태어남에 대하여서는 원망하지 못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번뇌에 얽힌 결(結)과 부림을 당하는 사(使)의 결사(結使)가 더욱 자라고, 거듭 태어나는 생법(生法)만을 늘릴 뿐, 진실한 괴로움의 원인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매를 맞는다거나 전쟁의 도병(刀兵) 등의 모든 근심이나 고통이 없을지라도 죽음의 고통만은 항상 있는 것이니, 이러한 죽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면 바로 태어남의 생(生)에서부터 있게 된 것이다.
復次,鞭杖、刀兵、愁惱,皆由生故有。餘法或有苦、或無苦,是生法必定有苦。正使大智及諸天,有生必有死,有死必有苦。是故知“生定是苦本”。如草木有生故,必可焚燒;若當不生,雖有猛火、大風,無所燒害。
또한 매를 맞는다거나 전쟁 등의 근심과 고뇌는 모두가 태어남의 생(生) 때문에 있게 되지만, 그 밖에 다른 법은 혹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혹은 괴로움이 없기도 하나, 이 태어남의 생법(生法)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가령 큰 지혜를 지닌 이나 모든 하늘들이라 할지라도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태어남은 반드시 괴로움의 근본임인 생시고본(生是苦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풀과 나무는 생겨난 까닭에 불을 만나면 반드시 타게 되지만, 만약 생겨나지 않았다면 비록 사나운 불이나 큰 바람이 있을지라도 불에 타서 해를 입는 일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菩薩旣得苦因緣,復推生因緣。生因緣者,有。“有”有三種:欲有、色有、無色有。著是三有,起善惡業,是生因。
有因者,四種取。取因緣者,愛等諸煩惱。小者未能起業,故名爲愛;增長能起業,故名爲取:欲取、見取、戒取、我語取,取著是四事故,能起種種業。
보살은 괴로움의 고인연(苦因緣)을 이미 얻어서 알고 있기에 그 태어남의 생인연(生因緣)을 다시 추구(推求)하는 것이니,
태어남의 생인연(生因緣)은 존재의 유(有)이며,
이 존재의 유(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이다.
이 세 가지의 존재인 삼유(三有)에 집착하여 착하거나 나쁜 업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이 곧 태어남의 생인연(生因緣)인 것이다.
존재의 원인인 유인(有因)은 네 가지의 취함인 사취(四取)이니, 취함의 인연인 취인연(取因緣)은 갈애(愛) 등의 모든 번뇌이다.
작아서 아직 업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갈애(愛)라 하며,
더욱 자라서 업을 일으키게 된 까닭에 취함의 취(取)라 하나니,
탐진치의 욕취(欲取)와
유루법을 청정하다고 보는 견취(見取)와
유루행을 생천의 인이 된다고 보고 계착하는 계견(戒見, 계금취)와
나에 집착하는 아어취(我語取)의 이 네 가지를 취하여 집착하는 취착(取著)하기 때문에 갖가지 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취(取)의 한자어 그대로의 뜻은 가짐 또는 취함인데, 모니어 모니어윌리엄스(Monier Monier-Williams)의 《산스크리트어-영어 사전》에 따르면 산스크리트어 원어 우파다나(upādāna)의 일반적인 의미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는 행위(the act of taking for one's self),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전용(轉用: 쓸 곳에 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돌려서 씀)하는 행위(appropriating to one's self), 받아들임(accepting), 허용함(allowing), 취함(taking), 획득함(acquiring) 등이 있고, 불교 용어로서는 '갈애 즉 탐욕이 원인이 되어 존재를 꽉 붙잡는 것 또는 집착하는 것으로 유, 즉 새로운 태어남들의 원인이 되는 것(grasping at or clinging to existence caused by tṛṣṇā, desire, and causing bhava, new births)'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후자의 불교 용어로서의 정의는 애연취(愛緣取)와 취연유(取緣有)의 의미를 합쳐서 취(取, upādāna)를 정의한 것이다.-위키
愛因緣,三種受。受因緣者,眼等六種觸。觸名受等諸心數法。情、塵、識三事和合故,心中生受等心數法;根本雖三事,和合故生觸,爲六情依止住處故,但說六入。
갈애의 인연인 애인연(愛因緣)은 고수(苦受) · 낙수(樂受) · 사수(捨受), 세 가지의 느낌의 삼수(三受)요,
느낌의 인연인 수인연(受因緣)은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ㆍ 뜻(意)의 육정(六情)의 접촉(觸)이며,
접촉(觸)은 느낌(受) 등의 모든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을 일컨는 것이니, 정(情, 육정)ㆍ진(塵, 육진)ㆍ식(識, 육식)의 세 가지가 화합하기 (18계) 때문에 마음속에서 느낌 등 마음에 속한 심수법을 내는 것이다.
근본은 비록 세 가지의 화합 때문에 접촉(觸)을 생겨나게 할지라도 6정(情)이 의지하고 머무르는 곳이므로,
안입(眼入)ㆍ이입(耳入)ㆍ비입(鼻入)ㆍ설입(舌入)ㆍ신입(身入) 의입(意入)의 육입(六入)이라고 말할 뿐이다.
촉연수(觸緣受) 또는 연촉수(緣觸受), 즉 촉(觸)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다는 것은 촉(觸)의 그릇된 상태가 있기 때문에 수(受)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있기 때문에 그릇된 상태의 고수 · 낙수 · 불고불락수의 3수(三受)가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릇된 상태의 3수는 전도된 상태의 3수를 말하는 것으로 고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낙 또는 불고불락의 대상이라 여기고, 낙이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고 또는 불고불락의 대상이라 느끼고, 불고불락이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고 또는 낙의 대상이라 느끼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미 발생한 수(受)의 그릇된 상태 즉 전도된 3수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촉(觸)의 그릇된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3사화합',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안촉 · 이촉 · 비촉 · 설촉 · 신촉 · 의촉의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 위키
六入因緣,名色。六入雖卽是名色分,成就名六入,未成就名名色;色成就名五入,名成就名一入。是胎中時因緣次第。名色因緣,是識。若識不入胎,胎初則爛壞。識名中陰中五衆。是五衆細故,但名爲識。若識不入而胎成者,如一切和合時,皆應成胎!
육입인연(六入因緣)은 이름의 명(名)과 물질의 색(色)의 명색(名色)이다.
육입은 비록 그것이 이름과 물질의 영역(分)일지라도 다 이루어진 것을 육입이라 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면 명색(名色)이라 하며,
색(色)이 다 이루어지면 다섯 개의 오입(五入)이라 하고, 이름이 다 이루어지면 한 개의 일입(一入)이라 하나니,
이것은 태(胎) 속에 있을 때의 인연의 차례인 인연차제(因緣次第)이다.
명색인연(名色因緣)은 바로 의식의 식(識)이니, 만약 식(識)이 태(胎)에 들지 않으면 그 태(胎)는 처음부터 흩어져 파괴된 것이다.
식(識)을 중음(中陰)이라 하며, 그 가운데에 5중(衆)이 있으니, 이 오중은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다만 식(識)이라고 할 뿐이며, 만약 식(識)이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태(胎)가 성립되어 있다면, 일체의 화합이 있을 때에도 태는 모두 이루어져 있는 것일 것이다.
중음(中陰), 티벳어의 바르도(Bardo)는 불교에서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로 이어지는 중간적 존재인 중유(中有, antarabhāva)를 말한다. 중음(中陰), 중간계(中間界)라고도 번역한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 따르면, 명색(名色)은 명(名)과 색(色) 즉 정신과 물질 또는 마음[心]과 육체[身]를 통칭한다. 명(名) 즉 정신 또는 마음[心]은 5음(五陰) 가운데 수음 · 상음 · 행음 · 식음의 4무색음(四無色陰)을 말한다. 색(色) 즉 물질 또는 육체[身]는 5음(五陰) 가운데 색음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색을 말한다. 여기서, 색음 · 수음 · 상음 · 행음 · 식음의 5음(五陰)은 색온 ·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5온(五蘊)의 구역(舊譯)이다. 그리고, 대상을 제외하고 유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만 볼 때, 여기서의 마음[心] 또는 정신[名] 즉 4무색음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심소법)을 합한 개념이다. 육체[身] 또는 물질[色]은 안 · 이 · 비 · 설 · 신의 5근을 말한다.
식연명색(識緣名色) 또는 연식명색(緣識名色), 즉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다는 것은 그릇된 식, 즉 그릇된 마음, 즉 그릇된 6식, 즉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들이 있기 때문에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정신[名]과 육체[色]'의 그릇된 상태, 즉 '마음 · 마음작용 · 육체'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미 발생한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그릇된 식 즉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들 가운데 그릇된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위키
問曰:識何因緣故入胎?
묻나니, 어떤한 인연으로 식(識)이 태(胎)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答曰:行因緣。行卽是過去三種業,業將識入胎。如風吹絕焰,空中而去,焰則依止於風;先世作人身時然六識故,命終時,業將識入胎。
답하나니, 행(行)의 인연 때문이다. 행(行)은 곧 과거 세상의 세 가지의 삼업이니, 업(業)이 식(識)을 가지고 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바람이 불어서 아지랑이를 날리면 공중으로 아지랑이는 올라가서 바람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전생에 사람 몸이었을 때, 그러한 육식(六識)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마칠 때의 업이 식(識)을 가지고 태(胎)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問曰:上業何以名有?今業何以名行?
묻나니, 무엇 때문에 앞에서는 업(業)을 존재의 유(有)라 하고, 여기에서는 업(業)을 행(行)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上是“今世業,爲未來有,故名爲有”;今“業過去世已滅盡,但有名,名爲行”天竺語“刪迦羅”,秦言“行”。是行因緣名無明。一切煩惱雖是過去業因緣,無明是根本故,但名無明。今世現在著愛、取多故,愛、取愛名;過去世中是疑、邪見處故,但名無明。今得一切苦惱根本,是無明。
답하나니, 앞의 것은 바로 이 세상의 금세(今世)의 업이다. 미래 세상에서 있게 되는 유(有)가 되기 때문에 존재의 유(有)라 하였고,
지금의 업은 과거 세상이 이미 사라져 다하여서 이름의 명(名)만 있을 뿐이므로 행(行)이라 하는 것이다.
- 천축(天竺, 인도)의 말로는 산가라(刪迦羅, uttara-āsaṅga, 3의(衣) 가운데 하나. 울다라승鬱多羅僧)라 하고, 진나라에서는 행(行)이라 하는 것이다.-
이 행(行)의 인연이 무명(無明)이니, 일체의 번뇌는 비록 그것이 과거의 업인연일지라라도 무명이 근본이 되기 때문에 다만 무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금 현재세에서는 갈애(愛)와 취함(取)에 대한 집착이 많기 때문에 갈애(愛)와 취(取)함이라는 이름하지만,
과거 세상에서는 그것은 의심의 의(疑)와 삿된 사견(邪見)이 있었던 곳이므로 무명이라고만 이름하는 것이며, 일체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무명(無明)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