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89권 8
大智度論 釋善達品 第七十九 卷八十九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9. 선달품(善達品)을 풀이함 5
佛意:一切法中無決定實者,但凡夫虛誑故著。如人闇中見似人物,謂是實人,而生畏怖;
又如惡狗臨井,自吠其影,水中無狗,但有其相,而生惡心,投井而死。衆生亦如是,四大和合故名爲身,因緣生識,和合故動作、言語;凡夫人於中起人相,生愛、生恚,起罪業,墮三惡道。
부처님께서 뜻하신 바는, ‘일체법 가운데에는 결코 진실한 것이 없으나, 다만 범부가 속아서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캄캄한 가운데에서 사람과 비슷한 물건을 보고서 진짜 사람이라 여기면서 두려운 생각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사나운 개가 우물에 비친 스스로의 형상을 보고 짖으나, 그 물속에는 개도 없고 자신의 형상만이 있을 뿐인데도 격한 마음을 내며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것과 같이,
중생 역시 이와 같아서 4대(大)가 화합한 까닭에 몸이라 하고, 인연으로 생긴 의식(識)이 화합한 까닭에 동작하고 말을 하는 것이나, 범부는 그러한 가운데에서 사람이라는 상을 일으키어 애욕을 내고 성을 내면서 죄업을 일으켜서 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菩薩行般若波羅蜜時,憐愍衆生,種種因緣教化,令知空法而拔出之;作是言:“是法皆畢竟空、無所有,衆生顚倒虛妄故,見似如有,如化、如幻、如乾闥婆城,無有實事,但誑惑人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서 갖가지의 인연으로 교화하여 공한 공법(空法)을 알게 하여서 그들을 구출하며,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 법은 모두 필경공이라서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다. 중생은 허망하게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있는 것이라고 보지만, 그것은 마치 변화한 화(化)와 같고, 허깨비의 환(幻)과 같으며,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아서 진실한 실사(實事)란 없는 것으로, 오직 사람의 눈을 속여서 헷갈리게 할 뿐이다’고 하며,
復次,一切法但從名字和合,更有餘名。如頭、足、腹、脊和合故,假名爲身;如髮、眼、耳、鼻、口、皮、骨和合故,假名爲頭;諸毛和合故,名爲髮;分分和合故,假名爲毛;諸微塵和合故,名爲毛分;亦和合諸分故,名爲微塵。
또한 일체법은 다만 이름의 명자(名字)의 화합을 따라 다시 그 밖의 이름이 있을 뿐이니,
마치 머리와 발과 배와 등이 화합한 까닭에 임시로 몸의 신(身)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같고,
또 머리칼ㆍ눈ㆍ귀ㆍ코ㆍ입ㆍ살갗 및 뼈가 화합한 까닭에 임시로 머리의 두(頭)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며,
많은 털이 화합한 까닭에 머리카락의 발(髮)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따로따로 갈라진 까닭에 털의 모(毛)라는 이름을 붙이며,
여러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이 화합한 까닭에 아주 작은 부분의 모분(毛分)이라 하고,
또한 모든 작은 부분의 모분(毛分)들이 화합한 까닭에 작은 티끌의 미진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微塵第一微細故不得作分,無分故無和合,此則定法,是故不得言“一切空,無有定法”!
묻나니,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은 제일 미세한 것이므로 나누어진 분(分)이 될 수 없으며,
나누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화합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은 곧 정해진 정법(定法)입니다.
때문에 ‘일체의 것은 공하여서 정해진 정법(定法)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答曰:若微塵是色,則應有分。何以故?一切色皆在虛空中,皆有十方。
若微塵是色,則有十分;若有十分,云何是極微?若如汝說微塵無分者,則非色。
何以故?出色相故。又復色名五情可得,若微塵非五情所得者,云何得知是色?
是故微塵但有虛名。眼見麤色,尚可破令空,何況不可見、不可觸!
답하나니, 만약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이 곧 물질(色)이라면 마땅히 나누어진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니,
왜냐 하면, 일체의 물질(色)은 모두가 허공 가운데에 있으며, 모두 시방(十方)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이 곧 물질(色)이라면 시방으로 나누어진 것이 있을 것이고,
만약 시방으로 나누어진 것이 있다면 어찌하여 그것이 아주 미세한 극미(極微)이겠는가?
만약 그대의 말과 같이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은 나누어진 것이 없다’ 고 한다면 물질(色)이 아닌 것이니,
왜냐 하면, 물질(色)의 상(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또 물질(色)은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의 5정(情)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만약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이 5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물질(色)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은 다만 헛된 이름만이 있을 뿐이니, 눈으로 볼 수 있는 큰 물질(色)조차도 오히려 파괴하여 공하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볼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는 것이겠는가?
問:曰:微塵細故,五情所不能得,聖人得天眼則見。
묻나니,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은 미세하기 때문에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의 오정(五情)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성인이 얻은 천안(天眼)으로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答曰:天眼見雖細,是色相故,應當有分;若無分則非色,非色則天眼不見。
以是故,天眼亦虛誑妄見;是故聖人以慧眼觀世閒,則得道。
답하나니, 비록 천안으로 미세하 것을 볼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물질(色)의 색상(色相)이기 때문에 마땅히 나누어진 부분이 있어야 하며,
만약 나누어진 부분이 없다면 그것은 물질(色)이 아니며, 물질(色)이 아니라면 곧 천안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므로 천안도 거짓되고 허망하게 보는 눈인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혜안(慧眼)으로써 세간을 관찰하여 도(道)를 얻는 것이다.
微塵,如先說,但有名無實。微塵無故,一切法名字和合故便有假名,無有實定,而衆生妄生貪著;貪欲、瞋恚因緣故,起惡業,無量阿僧祇劫在三惡道受苦。
若諸法實定,尚不應作貪欲、瞋恚罪因緣,何況虛誑無實!若能捨虛誑名相、不著空法者,則受涅槃常樂。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다만 이름의 명(名)만이 있을 뿐이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은 없는 것이므로 일체법은 이름의 명자(名字)가 화합한 까닭에 다시 임시로 붙인 이름의 가명(假名)이 있을 뿐, 진실하거나 일정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중생들은 부질없이 탐착하여서 탐욕(貪欲)과 성냄의 진에(瞋恚)의 인연으로 나쁜 악업을 일으켜 무량한 아승기 동안 3악도에 있으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만약 제법이 진실하고 일정할지라도 오히려 탐내고 성을 내는 죄의 인연을 짓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거짓되고 진실이 없는 것이겠는가?
만약 이 거짓된 이름의 명(名)과 상(相)을 버리고서 공한 공법(空法)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곧 열반의 상(常)ㆍ낙(樂)을 받으리라.
問曰:名、相有何差別?
묻나니, 이름의 명(名)과 상(相)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名者,是衆物字,如熱物字爲火。相者,如見煙知是火相,熱是火體。
復次,如五衆和合中男、女,是爲名;身貌可別男、女,是爲相。見是相故,作名字,名爲男女。
답하나니, 이름의 명(名)은 바로 여러 가지 물건에 붙인 이름의 자(字)로써, 마치 뜨거운 물건의 이름의 명(名)을 불 화(火)라 하는 것과 같으며,
상(相)이란 마치 연기의 연(烟)를 보고 불이라는 상(相)을 아는 것과 같이, 뜨거운 열(熱)은 곧 불의 체성인 화체(火體)인 것이다.
또 5중(衆, 오온)이 화합한 가운데에서 남자ㆍ여자라 하는 것은 곧 이름의 명(名)이요, 그 몸의 모습의 모(貌)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을 상(相)이라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상(相)을 보고서 남자 또는 여자라는 이름의 명(名)을 지은 것이다.
問曰:若爾者,名、相無異!所以者何?見相故得名,知名故得相。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이름의 명(名)과 상(相)에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相)을 본 까닭에 이름의 명(名)을 얻고, 이름의 명(名)을 아는 까닭에 상(相)을 얻기 때문입니다.
答曰:汝不解我所說耶?先見男女貌,然後名爲男、女。相爲本,名爲末。又復如人眼見色,偏取所好相而生著,於餘人則不然;以其能生染著心,是名爲相。復次,此中佛自說名、相分別:“名者假名,以名取諸法。”如經中廣說。
답하나니, 그대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먼저 남자나 여인의 모습의 모(貌)를 보고, 그 뒤에 남자 또는 여인이란 이름의 명(名)을 붙인 것이니,
상(相)은 근본(本)이 되고 이름의 명(名)은 말단(末)이 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눈으로 물질(色)을 보고 치우치게 좋아하는 상(相)을 취하면서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만,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그 물들고 집착하는 마음을 낼 수 있는 그것을 곧 상(相)이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이름의 명(名)과 상(相)을 분별하여 말씀하셨으니,
“이름의 명(名)이란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이며, 이름의 명(名)으로써 제법을 취하게 된다”고 하셨으니,
경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바와 같다.
須菩提問:“若一切法但有名相,菩薩云何自利、利人?”
佛答:“若諸法根本定有,菩薩行般若波羅蜜時,不能自利利人。”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일체법이 다만 이름의 명(名)과 상(相)만으로 있는 것이라면, 보살이 어떻게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다른 이도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제법의 근본이 결정코 있는 근본정유(根本定有)라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何以故?若諸法性定實有,卽是無生。何以故?以性先定有故,若是法從因緣和合生,卽是無定性。若性定有,則不須因緣和合;若爾者,則無生,無生故無滅,無滅故無罪福。
왜냐하면, 만약 제법의 성품(性)이 일정하고 실제로 있는 정실유(定實有)라면, 그것은 곧 생함이 없는 무생(無生)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성품(性)은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만약 이 법이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생긴다면, 그것은 곧 일정한 성품이 없는 무정성(無定性)이나,
만약 일정한 성품이 있는 성정유(性定有)라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인연이 화합할 필요가 없다면 곧 생김이 없는 무생(無生)이니, 무생이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도 없는 무멸(無滅)이고, 소멸하는 것이 없는 무멸(無滅)이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게 되는 것이다.
以知無常故,則捨罪修福;若常,則無縛解、無世閒、無涅槃等。
是故佛告須菩提:“若法定有、非但名相者,菩薩不行般若波羅蜜自利、利人,不行禪波羅蜜等自利、利人,無相故,是菩薩自具足是善法,亦以善法利益衆生,以無相故。”
무상(無常)함을 알기 때문에 죄를 버리고 복을 닦는 것이지만,
만약 항상 있는 상(常)이라면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며, 세간도 없고, 열반 등도 없게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법이 일정하게 존재하는 정유(定有)이나, 단지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일 뿐이 아닌 것이라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선(禪)바라밀 등을 행하면서 자기도 이롭게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리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다.
이 보살 스스로가 착한 선법을 두루 갖추고 또한 착한 선법으로써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다”고 하신 것이다.
佛告須菩提:“若諸法當實有如毫釐許,菩薩坐道場時,不能觀一切法空、無相、無所有,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不能以此法利益衆生。”
何以故?是菩薩坐道場時,觀一切法第一眞實;若小錯,不應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不能爲衆生說是空無相法。
所以者何?法若定有,佛云何誑衆生“一切法無漏、無相、無憶念”?
부처님께서는 이어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제법이 털끝만큼이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살이 도량(道場)에 앉을 때에 ‘일체법은 공하고, 무상(無相)이며 있지 않은 무소유(無所有)이다’고 관찰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도 없을 것이요, 또한 이 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고 하셨다.
왜냐 하면, 이 보살이 도량에 앉았을 때, 일체법의 으뜸가는 진실인 제일진실(第一眞實)을 관찰하되, 만약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응당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지 못하고, 또한 중생들을 위하여 공하여 무상(無相)의 법을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이 만약 일정하게 존재하는 정유(定有)라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속이면서 “일체법은 무루(無漏)이요, 무상(無相)이며 기억도 없는 무억념(無憶念)이다”고 하셨겠는가?
問曰:四諦中,三諦皆有相 苦諦則有苦相,集諦則有集相,道諦則有道相;唯滅諦無相,亦有憶念,是無相涅槃,汝何以言“一切無漏法無相、無憶念”?
묻나니, 4제(諦, 사성제) 가운데에서의 세 가지 진리는 모두가 상이 있는 유상(有相)입니다.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에는 곧 괴로움의 상인 고상(苦相)이 있고,
쌓임의 진리인 집제(集諦)에는 곧 쌓임의 상인 집상(集相)이 있으며,
벗어남의 진리인 도제(道諦)에는 도상(道相)이 있으나,
오직 멸의 진리인 멸제(滅諦)만이 모양이 없는 무상(無相)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무상(無相)의 열반이다’라고 기억하는 것이 있거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일체의 무루법(無漏法)은 무상(無相)이고 기억도 없는 무억념(無憶念)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摩訶衍法與聲聞法異。摩訶衍法中說:“一切無漏法,無相、無憶念。”
復次,有相、有憶念,皆是虛誑不實;若虛誑不實,卽是諸煩惱漏,云何是無漏?”
답하나니,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법은 성문법과 다르나니, 마하연의 법 가운데에서는 ‘일체의 무루법은 무상(無相)이고 기억도 없는 무억념(無憶念)이다’고 하는 것이며,
또 모양이 있는 유상(有相)이고 기억이 있는 유억념(有憶念)의 모두는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나니,
만약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곧 모든 번뇌가 있는 번뇌루(煩惱漏)이거늘, 그것이 어떻게 무루가 될 수 있겠는가?
復次,是三諦皆隨滅諦 見苦卽捨,見集卽斷,不言實定;見道爲趣滅故,亦不住是道中;滅盡是主。
是滅盡法,無相、無緣,云何有憶念?憶念皆是緣相著法。是故無漏法皆無相、無憶念。
또한 고제(苦諦), 집제(集諦), 도제(道諦), 이 세 가지 진리인 삼제(三諦) 모두는 사라짐의 진리인 멸제(滅諦)를 따르나니,
괴로움을 보면 곧 버리고, 쌓임을 보면 곧 끊으므로 진실하거나 일정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며,
도(道)를 보면 사라짐의 멸(滅)에 나아가기 위하여 이 도(道)에도 머무르지 않고, 이 머무름을 없애고 다하나니,
이렇게 없애고 다하는 멸진법(滅盡法)은 무상(無相)이고 반연의 연(緣)도 없거늘 어떻게 기억이 있겠는가?
기억한다는 것 모두가 이 상을 반연하는 연상(緣相)으로 법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무루법은 모두가 무상(無相)이고 기억도 없는 무억념(無憶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