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89권 5

Skunky 2024. 11. 17. 09:00

大智度論  釋善達品 第七十九 卷八十九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9. 선달품(善達品) 풀이함 2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如夢、如響、如影、如焰、如幻、如化,衆生在何處住,菩薩行六波羅蜜而拔出之?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만약 일체법이 마치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 같으며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다면 중생들이 어느 곳에 머물르는 것이기에 보살이 육바라밀을 행하면서 그들을 구출할 수 있는지요?”

 

“須菩提!衆生但住名相虛妄憶想分別中,是故菩薩行般若波羅蜜,於名相虛妄中拔出衆生。”

“수보리야, 중생은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과 허망한 기억과 분별 가운데에 머물러 있을 뿐이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과 허망한 가운데에서 중생들을 구출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何等是名?何等是相?”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이름의 명(名)이며? 어떤 것이 모양의 상(相)인지요?”


佛言:“此名强作假施設,所謂此色、此受想行識,此男、此女,此大、此小,此地獄、此畜生、此餓鬼,此人、此天,此有爲、此無爲,此須陁洹果、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辟支佛道,此佛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이름의 명(名)은 억지로 만들어 붙인 것이니, 이른바 ‘이것은 물질(色)이다, 이것은 수상행식(受想行識)이다’, ‘이것은 남자이다, 이것은 여자이다’, ‘이것은 큰 것이다, 이것은 작은 것이다’,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이것은 수다원의 과위이다, 사다함의 과위이다, 아나함의 과위이다, 아라한의 과위이다, 벽지불의 도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도이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須菩提!一切和合法皆是假名,以名取諸法,是故爲名。一切有爲法但有名相,凡夫愚人於中生著。

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故,於名字中教令遠離,作是言:‘諸衆生!是名但有空名,虛妄憶想分別中生,汝等莫著虛妄憶想!此事本末皆無,自性空故,智者所不著。’

수보리야, 일체의 화합하는 화합법(和合法) 모두는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이며, 이러한 가명으로써 제법을 취하기 때문에 이름의 명(名)이라 하느니라.

일체의 유위법은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이 있을 뿐이지만,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그 가운데에서 집착하고 있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력으로 이름의 명(名)에서 멀리 여의도록 교화하며 말하기를 ‘중생들이여, 이 이름의 명(名)은 다만 껍데기 이름의 명(名)만 있을 뿐이요, 허망한 기억과 분별 가운데서 생긴 것일 뿐이니, 그대들은 허망한 기억과 생각에 집착하지 마시오!

이것은 본래부터 모두 스스로의 성품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요 자성공(自性空)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집착하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느니라.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故,爲衆生說法。須菩提!是爲名。

何等爲相?須菩提!有二種相,凡夫人所著處。何等爲二?一者、色相,二者、無色相。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력으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나니, 수보리야, 이를 바로 이름의 명(名)이라 하느니라.
어떠한 것을 모양의 상(相)이라 하는가? 수보리야, 두 가지의 상(相)이 있어서 범부인들이 집착하나니,

어떠한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빛깔이 있는 색상(色相)이요,

둘째는 빛깔이 없는 무색상(無色相)이니라.

須菩提!何等名色相?諸所有色,若麤若細、若好若醜,皆是空;是空法中憶想分別著心,是名爲色相。

何等是無色相?諸無色法,憶想分別,著心取相故生煩惱,是名無色相。

수보리야, 어떠한 것을 빛깔이 있는 색상(色相)이라 하는가?

모든 있는 바의 유색(有色)은 굵거나 가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하는 물질(色)이니, 모두 공(空)한 것이니라.

이러한 공한 공법(空法) 가운데에서 생각하고 분별하며 마음으로 집착하나니, 이를 이름하여 빛깔이 있는 색상(色相)이라 하느니라.
어떠한 것을 빛깔 이 없는 무색상(無色相)이라 하는가?

모든 빛깔이 없는 무색법(無色法)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으로 집착하여 상을 취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기나니, 이를 이름하여 빛깔이 없는 무색상(無色相)이라 하느니라.

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以方便力故,教衆生遠離是相,著無相法中,令不墮二法,所謂是相、是無相。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教化衆生遠離相,令住無相性中。”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력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이 상(相)과 집착에서 멀리 여의게 하며, 모양이 없는 무상법(無相法) 가운데에서 ‘이것은 상(相)이다, 이것은 무상(無相)이다’라고 하는 두 가지의 이법에 떨어지지 않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을 교화하여 상(相)을 멀리 여의면서 무상성(無相性)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但有名相,云何菩薩行般若波羅蜜能自饒益,亦教他人令得善利?

云何菩薩具足諸地,從一地至一地,教化衆生令得三乘?”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만 있다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이익을 얻게 하며?

어떻게 보살이 모든 지(地)를 두루 갖추어 한 지로부터 다른 한 지에 이르러며?

어떻게 중생을 교화하여서 삼승을 얻게 하는지요?”

佛告須菩提:“若諸法根本定有、非但名相者,菩薩行般若波羅蜜時,不能自益,亦不能利益他人。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제법의 근본이 반드시 있는 것이라서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스스로를 이롭게 할 수도 없고 또한 남을 이롭게 할 수도 없느니라.

須菩提!諸法無有根本實事、但有名相,是故菩薩行般若波羅蜜時,能具足禪波羅蜜,無相故;毘梨耶波羅蜜、羼提波羅蜜、尸羅波羅蜜、檀波羅蜜,無相故;具足四禪波羅蜜、四無量心波羅蜜、四無色定波羅蜜,無相故;具足四念處波羅蜜,無相故;乃至具足八聖道分波羅蜜,無相故。

수보리야, 제법에는 근본과 진실한 실사(實事)가 없고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만이 있을 뿐이니라.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선(禪)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며,

비리야(毘梨耶, 정진)바라밀과 찬제(羼提, 인욕)바라밀과 시라(尸羅, 지계)바라밀과 단(檀, 보시)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니라.
4선(禪)의 바라밀과 4무량심의 바라밀과 4무색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요,

4념처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요,

나아가 8성도분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니라.

具足內空波羅蜜,無相故;乃至具足無法有法空波羅蜜,無相故;足具八背捨波羅蜜,無相故;具足九次第定波羅蜜,無相故;具足佛十力波羅蜜,無相故;乃至具足十八不共法波羅蜜,無相故。是菩薩,無相故,自具足是善法,亦教他人令具足善法,無相故。

내공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요,

나아가 무법유법공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며,

8배사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요,

9차제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10력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요,

나아가 18불공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은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착한 선법을 두루 갖추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여 착한 선법을 두루 갖추게 하나니,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니라.

須菩提!若諸法相當實有如毫釐許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能知諸法無相、無憶念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教衆生令得無漏法。何以故?一切無漏法無相、無憶念故。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以無漏法利益衆生。”

수보리야, 만약 제법의 상(相)이 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있는 것이라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제법은 무상이고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거나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무루(無漏)의 법을 얻게 할 수가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무루법은 무상(無相)이고, 기억도 없는 무억념(無憶念)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무루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無相、無憶念,云何數是聲聞法、是辟支佛法、是菩薩法、是佛法?”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무상(無相)이고, 기억도 없는 무억념(無憶念)이라면,

어떻게 ‘이것은 곧 성문법이다, 이것은 곧 벽지불법이다, 이것은 곧 보살법이다, 이것은 곧 부처님의 불법이다’라고 등급을 매기는 것인지요?”

佛告須菩提:“於汝意云何?無相法與聲聞法異不?” “不也!世尊!”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상법(無相法)이 성문의 법과 다른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無相法與辟支佛法、菩薩法、佛法異不?” “不也!世尊!”

“무상법(無相法)이 벽지불의 법과 보살의 법과 부처님의 법과 다른 것인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佛告須菩提:“無相法卽是須陁洹果、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辟支佛法、菩薩法、佛法?”

須菩提言:“如是!世尊!”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무상법(無相法)이 곧 수다원의 과위요 사다함의 과위이며, 아나함의 과위요 아라한의 과위이며, 벽지불의 법이요 보살의 법이며 부처님의 불법인가?”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以是因緣故,當知一切法皆是無相。

須菩提!菩薩摩訶薩學是一切法無相,得增益善法,所謂六波羅蜜,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四念處乃至十八不共法。

何以故?菩薩不以餘法爲要,如三解脫門,所謂空、無相、無作。所以者何?一切善法皆入三解脫門。

何以故?一切法自相空,是名空解脫門;一切法無相,是名無相解脫門;一切法無作無起相,是名無作解脫門。

“수보리야, 이러한 인연으로 일체법은 모두가 무상(無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일체법의 무상(無相)을 배워서 착한 선법을 더욱 늘리나니,
이른바 6바라밀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이니라.

왜냐 하면, 보살은 그 밖의 법의 긴요한 것으로는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3해탈문(解脫門)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일체의 착한 선법은 모두가 공 무상 무작의 삼해탈문에 들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일체법 스스로가 공상 자상공(自相空)을 곧 공(空)해탈문이라 하고,

일체법이 무상인 것을 곧 무상(無相)해탈문이라 하며,

일체법이 조작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는 상을 곧 무작(無作)해탈문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若菩薩摩訶薩學三解脫門,是時能學五陰相,能學十二入相,能學十八界相,能學四聖諦、十二分因緣法,能學內空、外空乃至無法有法空,能學六波羅蜜、四念處乃至八聖道分,能學佛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十八不共法。”

만약 보살마하살이 삼해탈문을 배우면, 그 때에는 5음(陰)의 상을 능히 배우는 것이 되고, 육근과 육경의 12입(入, 12처)의 상을 능히 배우는 것이며,

6근(六根)과 인식대상인 6경(六境)과 인식작용인 육식(六識)의 18계(界)의 상을 능히 배우는 것이며, 4성제(聖諦)와 12인연(因緣)의 법을 능히 배우는 것이며,  내공ㆍ외공 내지는 무법유법공을 능히 배우는 것이며, 6바라밀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능히 배우는 것이며,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을 능히 배우는 것이 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云何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能學五受陰相?”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오음(오온)의 상을 배울 수 있는지요?”

佛告須菩提:“菩薩行般若波羅蜜,知色相,知色生滅,知色如。

云何知色相?知色畢竟空,內分異、虛無實;譬如水沫無堅固,是爲知色相。

云何知色生滅?色生時無所從來、去無所至,若不來不去,是爲知色生滅相。

云何知色如?是色如不生不滅、不來不去、不增不減、不垢不淨,是爲知色如。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色)의 색상(色相)을 알고, 물질의 생멸(生滅)을 알며, 물질의 여(如)를 아느니라.
어떻게 물질의 색상(色相)을 아는가?

물질(色)은 필경공이라서 안의 부분인 내분(內分,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육근)이 달라지고 거짓이며 실체가 없어서 마치 물거품이 견고하지 않은 것과 같음을 아나니, 이것이 곧 물질의 색상(色相)을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물질(色)의 생멸을 아는 것인가?

물질(色)은 생길 때도 어디에서 오는 곳이 없고, 떠날 때도 가서 이르는 곳이 없으니, 만약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곧 물질(色)의 색생멸(色生滅)을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물질(色)의 색여(色如)를 아는 것인가?

이 물질의 색여(色如)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물질의 색여(色如)를 아는 것이니라.

須菩提!如名如實不虛,如前,後、中亦爾,常不異,是爲知色如。

云何知受相?云何知受生滅?云何知受如?菩薩知諸受相如水中泡,一起一滅,是爲知受相。知受生滅者,是受無所從來、去無所至,是爲知受生滅。知受如者,是如不生不滅、不來不去、不增不減、不垢不淨,是爲知受如。

수보리야, 여(如)의 이름과 여의 실체는 거짓이 아니며, 여(如)의 앞ㆍ뒤ㆍ중간도 또한 그러하여 언제나 달라지지 않나니, 이것이 곧 물질의 색여(色如)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느낌(受)의 상(相)을 알고, 어떻게 느낌(受)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느낌(受)의 여(如)를 아는 것인가?

보살은 모든 느낌(受)의 상은 마치 물에서 거품 하나가 생기면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음을 아나니, 이것이 곧 느낌(受)의 상(相)을 아는 것이니라.
느낌(受)의 생멸을 안다는 것이란, 이 느낌(受)은 어디서 오는 곳도 없고 어디로 가서 이르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곧 느낌(受)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느낌(受)의 여(如)를 안다는 것이란, 이 여(如)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느낌(受)의 여(如)를 아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