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88권 3
大智度論 釋六喩品第 七十七 卷八十八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7. 육유품(六喩品)을 풀이함 3
是菩薩行般若波羅蜜,亦不得般若波羅蜜;若行般若波羅蜜時不得般若波羅蜜,是時見一切法皆入般若波羅蜜中,亦不得是法。何以故?是諸法與般若波羅蜜無二無別。何以故?諸法入如、法性、實際故無分別。”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또한 반야바라밀을 얻지 않느니라.
만약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반야바라밀을 얻지 않을 때에는 일체법이 모두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나, 또한 이 법을 얻지도 않나니,
왜냐 하면, 제법과 반야바라밀은 둘이 없는 무이(無二)이고 다르니 않은 무별(無別)이기 때문이며,
제법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에 들어가기에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諸法無相、無分別,云何說是善是不善、是有漏是無漏、是世閒是出世閒、是有爲是無爲?”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이 무상(無相)이고 분별도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라면, 어떻게 ‘이것은 착한 선(善)이다, 이것은 착하지 못한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유루(有漏)이다, 이것은 무루(無漏)이다, 이것은 세간(世間)이다, 이것은 출세간(出世間)이다, 이것은 유위(有爲)이다, 이것은 무위(無爲)이다’라고 말씀하시는지요?”
“須菩提!於汝意云何?諸法實相中,有法可說是善、是不善,乃至是有爲、是無爲,是須陁洹果乃至是阿羅漢、是辟支佛、是菩薩、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世尊!不可說也!”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법의 실상(實相)에 어떠한 법이 있어서 ‘이것은 착한 선(善)이다, 이것은 착하지 못한 불선(不善)이다, 나아가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이것은 수다원의 과위이다, 나아가 이것은 아라한이다, 이것은 벽지불이다. 이것은 보살이다, 이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세존이시여, 말할 수 없습니다.”
“須菩提!以是因緣故,當知一切法無相、無分別、無生、無定、不可示。
須菩提!我本行菩薩道時,亦無有法可得性,若色、若受想行識乃至若有爲、若無爲,須陁洹果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이러한 인연으로 일체법은 무상(無相)이고 분별도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며, 무생(無生)이고, 일정하지 않은 무정(無定)이라서 보일 수 없는 불가시(不可示)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할 때에도 색(色)ㆍ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의 오중(五衆, 오온)에서부터 유위ㆍ무위까지와 수다원의 과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법성(法性)도 없었느니라.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從初發意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應善學諸法性;善學諸法性故,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道。行是道,能具足六波羅蜜,成就衆生、淨佛國土;住是法中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以三乘法度脫衆生,亦不著三乘。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以無相法應學般若波羅蜜。”
수보리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의 제법의 법성(法性)을 잘 배워야 하나니,
제법의 법성(法性)을 잘 배우면, 그로 인하여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도(道)라 하느니라.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도(道)를 행하면서 6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며,
이 법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삼승의 법으로써 중생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지만, 또한 3승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무상(無相)의 법으로써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問曰:須菩提問佛:“若諸法無相無分別,云何差別說六波羅蜜?”
佛還答:“菩薩住是如夢五衆中,能具足六波羅蜜。”須菩提以空問,佛還以空答,此問答云何得別異?
▷논. 묻나니,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제법이 무상(無相)이고 분별도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라면, 어떻게 차별을 두어서 6바라밀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이 꿈과 같은 5중(衆, 오온)에 머무르면서 6바라밀을 두루 갖추느니라”고 하셨다.
수보리 존자는 공(空)으로써 여쭌 것이고 부처님께서도 도리어 공으로써 대답하셨는데,
이 문답에 어떠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答曰:須菩提問:“若諸法空,今眼見菩薩行六波羅蜜作佛!”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제법이 공하다면, 지금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여 부처님이 되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佛答:“凡夫遠實智慧,取相,見菩薩行六波羅蜜作佛,著是空法故難。
菩薩雖住五衆,住五衆如幻、如夢空法中,亦以空心行布施,是故雖行諸法,具足六波羅蜜,不妨於空。
譬如雲霧,遠視則見,近之則無所見。凡夫亦如是,遠實相故,見諸佛。
菩薩近實相故,見皆空,是故不妨;不妨故,能於檀波羅蜜一念中具足行諸善法。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범부는 진실한 실지혜(實智慧)를 멀리 하면서 상(相)을 취하므로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여 부처님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니,
곧 이 공한 공법(空法)에 집착하기 때문에 힐난하신 것이다.
보살은 비록 5중(衆, 오온)에 머무를지라도 마치 꿈과 같은 공법(空法)법에 머무르면서 또한 공한 마음의 공심(空心)으로 보시를 행하기 때문에 비록 제법을 행하고 6바라밀을 두루 갖추었을지라도 공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구름과 안개를 멀리서 보면 볼 수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곧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범부도 이와 같아서 실상(實相)을 멀리 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을 보는 것이지만,
보살은 실상을 가까이 하므로 모두를 공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방해되지 않으며,
방해되지 않기 때문에 단(檀, 보시)바라밀의 한 생각의 일념사이에 모든 착한 선법을 두루 갖추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是人常修無漏淸淨波羅蜜故,轉身還報得無漏波羅蜜。報得名更不修行,自然而得;
譬如報得眼根,自然能見色。得是報得無漏波羅蜜已,能變一身作無量阿僧祇身,於十方佛所具足聞諸佛甚深法,度脫十方衆生,漸漸淨佛世界,隨願作佛。
이 사람은 항상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깨끗한 바라밀을 닦기 때문에 몸을 바꿀 때에도 도리어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 바라밀의 과보를 얻는 보득(報得)하게 되나니,
과보로 얻는다는 보득(報得)은 다시 수행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과보로 얻는 보득(報得)의 눈(眼)은 저절로 빛깔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과보로 얻는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 바라밀을 얻은 뒤에는 일신(一身)을 변화하여 무량한 아승기의 몸이 되어 시방의 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심심법을 듣는 것을 구족하고는,
시방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면서 점차로 부처님의 불세계를 깨끗하게 하고 원을 따라 부처님이 되는 작불(作佛)하는 것이다.
問曰:若諸法空無相,云何分別?云何得知行檀波羅蜜等,各各具足餘波羅蜜?
묻나니, 만약 제법이 공하여서 무상(無相)이라면 어떻게 분별하며?
어떻게 단바라밀 등을 행하여 각각 그 밖의 바라밀을 두루 갖춘 것을 아는 것입니까?
答曰:行者雖不自分別,而諸佛、菩薩說其行檀、行尸,具足諸行。如聲聞人入見諦,無漏、無相、無分別法中,餘聖人亦數其所入法:
知諸法實相,所謂無相相,是名正見;正見得力已,名爲正行;是時不惱衆生,不作諸惡,是名正語、正業、正命。
답하나니, 수행하는 행자는 비록 스스로가 분별하지 않을지라도,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그 단(檀, 보시)을 행하고 시라(尸羅, 지계)를 행하면서 모든 행을 두루 갖춘다는 것을 말씀하셨으니,
마치 성문인이 견제(見諦)로써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이고 무상(無相)이며,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의 법에 들어가면, 그 밖에 다른 성인이 그가 들어간 법에 등급을 매겨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법의 실상, 즉 무상(無相)의 상(相)을 아는 것을 이름하여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라 하며,
이 바른 정견(正見)의 힘을 얻은 후에는 바른 행의 정행(正行)이라 하나니,
이 때에는 중생을 괴롭히지 않고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바른 말을 하는 정어(正語)요, 바르게 삶을 유지하는 정업(正業), 바르게 살아가는 정명(正命)이라 하는 것이다.
是時雖無所說、亦無所造,而名爲正語、正業。所以者何?是名深妙正語、正業,所謂畢竟不惱衆生故。
是中發心有所造作,是名精進;繫念緣中,是名正念;攝心一處,是名正定。見身、受、心、法實相,是名“四念處”。乃至七覺意,亦如是。
이 때에는 비록 말하는 바가 없고 또한 지음이 없을지라도 그것을 정어(正語)요, 정업(正業)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이을 이름하여 깊고 묘한 정묘정어(深妙正語)요 정묘정업(深妙正業)이라 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결국에는 중생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에서 마음을 내어 짓는 일이 있는 것을 이름하여 정진(精進)이라 하고,
생각을 대상 가운데에 매어두는 것을 이름하여 바른 기억의 정념(正念)이라 하며,
마음을 한 곳으로 거두는 것을 이름하여 바른 선정의 정정(正定)이라 하고,
몸(身)ㆍ느낌(受)ㆍ마음(心)ㆍ법(法)의 실상을 보는 것을 사념처(四念處)라 하며, 나아가 7각의(覺意, 칠각) 또한 이와 같다.
7각분(覺分) · 7각의(覺意);
① 염각지(念覺支) : 알아차리기라는 깨달음의 요소.
② 택법각지(擇法覺支) : 안팎의 현상들을 선별하는 깨달음의 요소.
③ 정진각지(精進覺支) :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④ 희각지(喜覺支) : 기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⑤ 경안각지(輕安覺支) : 편안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⑥ 정각지(定覺支) : 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⑦ 사각지(捨覺支) : 평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 다움
於四念處中,亦如八直聖道中,諸聖人爲數。菩薩亦如是,行是無相檀波羅蜜,能具足尸波羅蜜等諸善法。如檀波羅蜜,尸波羅蜜等攝諸善法亦如是。
사념처 중에서도 또한 8직성도(直聖道, 8성도 八聖道, āryāṣṭāńgikamārga) 안의 모든 성인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과 같이,
보살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무상(無相)의 단(보시)바라밀을 행하면서 능히 시라(지계)바라밀 등의 모든 착한 선법을 두루 갖추게 되나니, 마치 단바라밀에서와 같이 시라바라밀 등의 여러 선법을 아우르는 것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問曰:上品中以一波羅蜜具諸波羅蜜,此無相攝一切法,有何差別?
묻나니, 앞의 상품(上品) 가운데에서 “하나의 바라밀로써 모든 바라밀을 갖춘다”는 것과
여기에서 “무상(無相)인 가운데에서 일체법을 포섭하다”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上以一念中能具諸波羅蜜,此以諸法雖空無相而能具諸波羅蜜爲異。
답하나니, 앞에서는 “한 생각의 일념(一念) 동안에 모든 바라밀을 갖춘다”는 것이고,
여기서에는 “비록 제법은 공하여 무상(無相)일지라도 능히 모든 바라밀을 갖춘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大智度論 釋四攝品 第七十八 卷八十八
78. 사섭품(四攝品)을 풀이함 ① 1
▶經. 須菩提白佛言:“世尊!若諸法如夢、如響、如影、如焰、如幻、如化,無有實事、無所有性、自相空者,云何分別是善法、是不善法,是世閒法、是出世閒法,是有漏法、是無漏法,是有爲法、是無爲法,
是法能得須陁洹果,能得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能得辟支佛道,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경.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이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 같으며,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아서 진실함이 없으며, 성품이 없는 무소유성(無所有性)이며, 자상공(自相空)이라면,
어떻게 ‘이것은 착한 선법이다, 이것은 착하지 못한 불선법이다, 이것은 세간법이다, 이것은 출세간법이다, 이것은 유루법이다, 이것은 무루법이다. 이것은 유위법이다, 이것은 무위법이다’라고 분별하며,
어떻게 이 법으로 수다원의 과위를 얻고, 사다함의 과위ㆍ아나함의 과위ㆍ아라한의 과위를 능히 얻으며, 벽지불의 도를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지요?”
佛告須菩提:“凡夫愚人得夢、得見夢者,乃至得化、得見化者,起身口意善業、不善業、無記業,起福業、若起罪業、作不動業。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꿈을 얻고 꿈을 보는 이를 얻으며, 나아가 변화한 것을 얻고 변화한 것을 보는 이를 얻으면서, 몸과 입과 뜻의 착한 신구의(身口意)의 선업(善業)과 착하지 못한 불선업(不善業)과 선도 불선도 아닌 무기업(無記業)을 일으키며,
복업(福業, 십선업)과 죄업(罪業, 십악업)을 일으키며, 색계나 무색계에서 태어날 인(因)이 되는 부동업(不動業)을 짓느니라.
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住二空中 畢竟空、無始空,爲衆生說法,作是言:‘諸衆生!是色空無所有,受、想、行、識空無所有;十二入、十八界空無所有。色是夢,受、想、行、識是夢;十二入、十八界是夢。色是響、是影、是焰、是幻、是化,受、想、行、識亦如是。十二入、十八界是夢、是響、是影、是焰、是幻、是化。
是中無陰、入、界,無夢亦無見夢者,無響亦無聞響者,無影亦無見影者,無焰亦無見焰者,無幻亦無見幻者,無化亦無見化者。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두 가지 공(空), 즉 필경공(畢竟空)과 무시공(無始空)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기를,
‘여러 중생들이여, 이 물질(色)은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도 공(空)한 무소유(無所有)이며, 12입(入)과 18계(界)도 공(空)한 무소유(無所有)이니,
물질(色)은 바로 꿈이요, 수상행식(受想行識)도 꿈이며, 12입과 18계도 꿈이요,
물질(色)은 바로 메아리요 그림자요 아지랑이요 환이요 변화한 것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 또한 그와 같으며,
12입과 18계도 바로 꿈이요 메아리요 그림자요 아지랑이요 환이요 변화한 것이니,
이 가운데에는 음(陰, 오음)도 입(入, 12입)도 계(界, 18계)도 없으며, 꿈도 없고 또한 꿈을 보는 이도 없으며, 메아리도 없고 메아리를 듣는 이도 없으며, 그림자도 없고 그림자를 보는 이도 없으며, 아지랑이도 없고 아지랑이를 보는 이도 없으며, 환도 없고 환을 보는 이도 없으며, 변화한 것도 없고 변화한 것을 보는 이도 없느니라.
一切法無根本實性無所有,汝等於無陰中見有陰、無入見有入、無界見有界。是一切法皆從因緣和合生,以顚倒心起,屬業果報,汝等何以故於諸法空無根本中而取根本相?’
일체법은 근본과 진실한 성품의 실성(實性)이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라.
그대들은 음(陰, 오온)이 없는 가운데서 음이 있다고 보고, 입(入, 12입)이 없는 가운데서 입이 있다고 보며, 계(界, 18계)가 없는 가운데서 계가 있다고 보지만,
이 일체법 모두는 인연(因緣)으로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고, 뒤바뀐 전도심(顚倒心)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서 업의 과보에 속하거늘,
그대들은 어찌하여 제법은 공하여 근본이 없는 가운데에서 근본이 되는 상(相)을 취하는 것인가?’라고 말하여 주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