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87권 3

Skunky 2024. 11. 10. 09:01

大智度論 釋次第學品 第七十五之餘卷八十七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5. 차제학품을 풀이함    3

 

一切有爲作法從因緣和合生起故有,無有實定性乃至如毫末許所有。

有爲有二種:一者、色,二者、無色。色法破壞,分別乃至微塵,無有定實;無色法中,乃至無有一念定實。

破義,如上說。是菩薩從諸佛聖人聞是法,餘人多以著心說,諸聖人以無著心說,是故但從聖人聞。

일체 유위의 조작된법(作法)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있는 유(有)일 뿐이니, 실로 정해진 성품이 없으며 나아가 털끝만큼도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유위(有爲)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질(色)이요, 둘째는 물질이 없는 무색(無色)이다. 

물질의 색법(色法)은 파괴하고 분별할지라도 아주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거나 진실한 것이 없고, 

무색법(無色法)에는   생각까지도 일정하거나 진실한 것이 없으며,

파괴하는 이치의 파의(破義) 대해서는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로부터 이러한 법을 듣는 것이니,  밖의 다른 사람들 거의 모두는 집착하는 착심(著心)으로 설명하지만, 성인들은 집착하는 착심(著心)없이 설명하기 때문에 다만 성인들부터 들을 뿐인 것이다.


爾時,次第學菩薩聞是法,以比智籌量決定,知諸法究竟必空,皆入佛所得實相中,所謂寂滅、無戲論相。

我若得作佛、若不作佛,一等無異。何以故?諸法實相不增不減,更無新法可得故,法亦不失。

若度衆生,衆生畢竟空,本末不可得;我所願、所作功德及成佛時神通力皆如夢、如幻故,無一定實相,畢竟空。

得、不得雖同,我何以不發心作佛?

그 때에 차례대로 배우고 있는 차제학(次第學) 보살은 이러한 법을 듣고 상계(上界)의 번뇌에 작용하는 지혜인 비지(比智, anvaya-jñāna)로써 헤아리고 결정하여 ‘제법은 구경에는 반드시 공하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가 부처님께서 얻으신 실상(實相) 가운데에 들게 되나니, 이른바 고요히 사라지진 적멸(寂滅)이고 희론이 없는 무희론상(無戱論相)이 그것이다.

내가 만약 부처를 이루는 작불(作佛)하거나 부처를 이루지 않는 불작불(不作佛)하거나 간에 같아서 다름이 없는 것이니, 

왜냐 하면법의 실상은 늘어나지도 않는 부증(不增)이고 줄어들지도 않는 불감(不減)이라서 다시 새로이 얻을  있는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이요, 또한 상실하지도 않는 불실(不失)인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을 제도할 때, 중생도 필경공이라서  본말을 얻을  없는 것이니, 소원으로 짓는 공덕과 성불할 때의 신통력 모두도 꿈과 같고 환과 같은 것으로, 어떠한 하나의 정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필경공인 것이다.

 

무엇을 비지(比智)라 하는가? 안(眼, 눈, 안촉수眼觸受)은 무상하며 나아가 이촉수(耳觸受), 비촉수(鼻觸受), 설촉수(舌觸受), 신촉수(身觸受), 의촉수(意觸受)의 인연에 이르기까지 생기는 느낌의 인연수생(因緣生受)까도 무상하다는 이치를 아는 것을 비지라 하느니라.-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8권 6

 

得、不得雖同,我何以不發心作佛?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간에 같다고 (작불 作佛, 불작불不作佛하거나 간에 같아서 다름이 없는) 한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발심하여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함에 대하여 문답하겠다.


問曰:若知諸法畢竟空、無所有者,云何復言“我何以不發心作佛?”

묻나니, 만약 제법은 필경공이라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임을 안다면, 어찌하여 다시 말하기를 ‘나는 무엇 때문에 발심하여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畢竟空,無所有,無所障㝵,何妨發心作佛?

復次,若說畢竟空,滅諸戲論,云何障發心?若障,卽是有性,云何言無所有性?

답하나니, 필경공이라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장애가 없는 것이라면, 발심하여 부처가 된다 한들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또한 만약 필경공이라서 모든 희론이 사라졌다면, 어떻게 발심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만약 막는다면 그것은  성품이 있는 유성(有性)이거늘 어떻게 있는 바의 성품이 없는 무소유성(無所有性)이 되겠는가?


問曰:若不障發心,亦應不障不發心,菩薩何不安住而發心受諸勤苦?

묻나니, 만약 발심에 장애되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발심하지 않아도 장애되지 않아야 할것이거늘, 

보살은  편안히 머물러 있지 않고 발심하여 갖은 고통을 받는 것입니까?


答曰:有人言:是菩薩有種種因緣應發心:或以多諸親屬知識皆不聞、不知、不得是諸法實相,是故今世、後世受諸苦惱;我幸有力,能使是人得離衆苦。譬如人得好良藥,親里知識受諸病苦,云何不與?

是故菩薩雖知諸法性無所有,因親里故而發心,利益衆生。

답하나니, 어떤 분이 말하기를 “이 보살은 갖가지의 인연이 있으므로 마땅히 발심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여러 친족과 아는 지인(知人) 모두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여 법의 실상을 얻지 못한 까닭에 금세에서나 후세에서 여러 가지 고뇌를 나니, 나는 다행이 힘이 있어서 이러한 이들을  많은 고통에서 여의게   있으리라.

비유하자면, 사람이 좋은 음식과 약을 얻었는데, 고향의 친척이나 아는 이가 갖가지의 병에 들어 고생하고 있다면 어떻게 주지 않을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발심하기도 한다”고 하였으니, 

때문에 보살은 비록법의 성품은 무소유(無所有)라 할지라도 고향의 친척 때문이라도 발심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菩薩復作是念:“我雖聞諸法實相,心未深入,未有禪定,智慧未熟,受諸苦惱。”是故發心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集諸功德,以無所有法作證,自爲,亦爲他人。

보살이  생각하기를 ‘나는 비록법의 실상을 듣을지라도 아직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아직 선정에 있지 못하며, 지혜가 성숙하지 못하여서 모든 고뇌를 받고 있다’라고 하는 까닭에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면서 모든 공덕을 쌓고, 있는  없음의 무소유법(無所有法)을 증득하여 스스로를 위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위하는 것이다.


是菩薩復聞大乘深義,住衆生等、法等中,無別異心,可得佛。
雖復中人及怨,都無異心。

所以者何?是菩薩以畢竟空心,煩惱微薄、怨親平等,作是念:“怨親無定,以因緣故,親或爲怨,怨或爲親。”

 보살은  대승(大乘)의 깊은 이치인 심의(深義)를 듣고 중생이 평등한 중생등(衆生等)과 법이 평등한 법등(法等)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다른 마음이 없으므로 부처를 얻는 득불(得佛)할 수 있으며,

비록  중간 사람이나 원수일지라도 전혀 다른 마음이 없으니, 왜냐하면,  보살은 필경공심(畢竟空心)으로 번뇌가 미미하여지고 얇아져서 원수나 친한 이의 원친(怨親)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하기를 ‘원수나 친한 이의 원친(怨親)은 정해진 것이 없는 것으로 인연 때문에 친한 이가 혹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혹은 친한 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고 하며, 


以此大因緣,具足忍波羅蜜故,得作佛。由何而得?由忍怨故。是以菩薩視怨如親。譬如欲過嶮道,應當敬重頂戴導師;又如良醫雖賤,爲貴者所重。如是思惟、籌量、分別:“中人、怨家,雖於我
無用,而是佛道因緣。”是故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是名一種次第行、次第學、次第道。是故以過去菩薩所行爲證。

이러한 큰 인연으로써 인욕(忍辱)바라밀을 완전히 갖춘 때문에 부처를 얻을 수 있으니,

어찌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원한을 참아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은 원수 보기를 마치 친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험한 길을 지나가고자 할 때, 길잡이를 공경하여 정중히 모시는 것과 같으며,  용한 의사의 신분이 비록 천할지라도 존귀한 이와 같이 정중하게 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하고 헤아리며 분별하기를 ‘중간의 사람이나 원수가 비록 나에게는 소용됨이 없을지라도 그는  불도(佛道)의 인연이다’고 하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일종의 차제행(次第行)이요 차제학(次第學)이며 차제도(次第道) 하나니, 과거세의 보살이 행한 바로써 증명을 삼은 것이다.


問曰:次第行、次第學、次第道有何差別?

묻나니, 차제행(次第行)이요 차제학(次第學)이며 차제도(次第道)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答曰:有人言:無差別;若行、若學、若道,義一而語異。有人言:初名行,中名學,後名道。行名布施,學名持戒,道名智慧。復次,行名持戒,學名禪定,道名智慧。復次,行名正語、正業、正命,學名正精進、正念、正定,道名正見、正思惟。

답하나니, 어떤 분은 말하기를 “차별이 없으니, 행(行)과 배움(學)과 도(道)는  뜻이 하나인, 일의(義一)이나 말만 다른 이어(語異)일 뿐이다”고 하며, 

어떤 말하기를 “처음에는 행(行)이라 하고 중간에는 배움(學)이라 하며 나중에는 도(道)라 하나니, 행을 보시(布施)라 하고, 배움(學)을 지계(持戒)라 하며 도(道)를 지혜(智慧)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행(行)을 지계라 하고 배움(學)을 선정이라 하며 도(道)를 지혜라 하기도 하며,

 행(行)은 바른 말의 정어(正語)ㆍ바른 행위의 정업(正業)ㆍ바른 생활유지의 정명(正命)이라 하고, 

배움(學)은 바른 노력의 정정진(正精進)ㆍ바른 기억의 정념(正念)ㆍ바른 선정의 정정(正定)이라 하며, 

도(道)는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ㆍ바른 생각의 정사유(正思惟)라 하나니, 


此八事雖名爲道,然分別有三分:正見是道體;發起是道,名正思惟
正語、正業、正命,助益正見,故名爲行。正精進、正念、正定,能成就正見,使令牢固,是名學。

이러한 여덟 가지의 팔사(八事, 팔정도)를 비록 도(道)라 할지라도 분별하면  가지로 나뉘게 되나니,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은  도의 본체인 도체(道體)라서 도를 일으키고, 

바른 생각의 정사유(正思惟)ㆍ바른 말의 정어(正語)ㆍ바른 생활유지의 정명(正命)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을 돕기 때문에 행(行)이라 하며,

바른 노력의 정정진(正精進)ㆍ바른 기억의 정념(正念)ㆍ바른 선정의 정정(正定)은 정견(正見)을 성취시켜 견고하게 하므로 이것을 배움(學)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有人言:檀波羅蜜、毘梨耶波羅蜜名爲行,初入道故。尸羅波羅蜜名爲學,人心常隨五欲難禁難制,無須臾停息,漸以尸羅波羅蜜、禪波羅蜜制伏其心,是故名學。羼提波羅蜜、般若波羅蜜名爲道。何以故?忍爲善,般若爲智慧,善、智具足故名道。譬如人有眼有足,隨意所至。如是等,名爲三事差別。

 어떤 말하기를 “단(보시)바라밀과 비리야(정진)바라밀을 행(行)이라 하였으니,

처음에 도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시라(지계)바라밀을 배움(學)이라 하며,

사람의 마음은 항상욕을 따르는 것이라서 금지하기도 어렵고 제어하기도 어려우며, 잠시도 쉬는 일이 없으니, 시라바라밀과 선바라밀로써 점차로  마음을 억제하고 조복하기 때문에 배움(學)이라 하며,

찬제(인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도(道)라 하나니, 왜냐 하면 인욕을 선(善)으로 삼고 반야를 지혜로 삼기 때문이다. 

선(善)과 지혜를 두루 갖추는 까닭에 도(道)라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눈이 있고 발이 있으면 뜻한 바의 곳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이 행(行)과 배움(學)과 도(道), 세 가지에 대한 차별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何以名次第?

묻나니, 무엇 때문에 차례대로의 차제(次第)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以須菩提意:若一切法無所有,初發心菩薩於是空法中云何能漸次第學?以是故說次第。

諸法雖空難解,次第行得力故,能得成就;譬如緣梯,從一初桄漸上,上處雖高雖難,亦能得至。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만약 일체법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면 처음발심한 보살은  공한법(空法) 가운데에서 어떠한 순서를 따라 점점 배워야 되는 것입니까?’라고때문에 ‘차례대로의 차제(次第)’라고 한 것이다.

제법은 비록 공하여 알기 어려운 난해(難解)한 것일지라도 차례대로 행하여 힘을 얻기 때문에 능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다리에 의지하여 맨  칸부터 점차로 올라가면,  위가 비록 높고 어려울지라도 그곳에 닿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次第行者,四種行六波羅蜜,如經中說。“自行檀,教人行檀,讚檀功德,歡喜讚行檀”者,善拔慳貪根,深愛檀波羅蜜,慈悲於衆生,通達諸法實相;以此因緣故,能四種行檀波羅蜜。

‘차례대로의 행인 차제행(次第行)’이라 함은,  가지로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경에서의 설명과 같이, “스스로가 단(檀, 보시)을 행하는 자행단(自行檀)하고, 남들에게도 단(보시)을 행하게 가르치는 교인행단(教人行檀)하며, 단(보시)의 공덕을 찬탄하는 찬단공덕(讚檀功德)하고, 단(보시)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며 찬탄하는 환희찬행단(歡喜讚行檀)한다”는 것이니, 간탐의 뿌리를  뽑아내고, 단(보시)바라밀을 깊이 사랑하며, 중생에게 자비로써 대하고,법의 실상을 통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능히 자행단(自行檀)  교인행단(教人行檀), 찬단공덕(讚檀功德), 환희찬행단(歡喜讚行檀)의  가지로 단바라밀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或有人自行布施,不能教人布施:或畏他瞋,或畏爲己教布施以之爲恩。如是等因緣故,不能教人。

或有人教人布施,自不能施;或有人種種讚歎布施之德,勸人令施而不能自行。

有人自行布施,亦教人布施、稱讚布施之德,而見人布施不能歡喜。

所以者何?或有破戒惡人行施而不喜見。有人喜見施主而不讚歎,以其邪見不識施果故。

 어떤 사람 스스로는 보시를 행하면서도 남들에게 보시하도록 가르치지 못하는 이도 있나니, 

그는  다른 이가 성을 낼까 두려워서 그렇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보시하는 것이 부담이 될까 해서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못하며,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는 보시하게 하면서 자기 스스로는 보시하지 못하는 이도 있고, 

 어떤 사람은 갖가지로 보시의 덕을 찬탄하면서 남에게는 권고하여 보시하게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보시를 행하면서 남에게도 보시하도록 하고, 또한 보시의 덕을 찬탄하면서도, 남이 보시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못하는 이가 있으니, 왜냐하면,  계율을 깨뜨린 어떤 악인이 보시를 한다면, 그것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시주(施主)를 보고 기뻐하면서도 찬탄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그가 삿된 사견을 지니어 보시의 과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如是,各各不能具足。菩薩大悲心、深愛善法故,能行四事,如上說。

菩薩若但自布施、不教他人,但能今世少許利益。是衆生隨業因緣墮貧窮處,是故菩薩教衆生言:“我不惜財物,我雖多施汝,汝亦不得持至後世;汝今當自作,後當自得。”以布施實功德,種種因緣教衆生行施。見行施者雖是破戒惡人,但念其好心布施之德,不念其惡,是故歡喜讚歎。

이와 같이 저마다 각각 두루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보살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대비심(大悲心)으로 착한 선법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네 가지의 사사(四事)를 잘 행하나니,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보살이 만약 스스로는 보시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금세에서는 조금이나마 그 중생들을 이롭게 하였으나, 그들은 업의 인연에 따라 빈궁한 곳에 떨어지고 말것이기 때문에 보살은 중생들에게 가르치기를, “나는 재물을 아끼지 않아서 비록 그대에게 많은 보시를 하지만, 그대 또한 후세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니, 그대도 지금 당장 스스로 보시를 행하여서 뒷날에 스스로 얻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보시의 진실한 공덕과 갖가지 인연으로써 중생에게 보시를 하도록 가르쳐 주며,

보시를 행하는 이를 보면 비록 그가 계율을 깨뜨린 악인일지라도 다만 그가 좋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덕만을 생각할 뿐, 그 악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기뻐하며 찬탄하는 것이다.

 

復次,見三寶無盡福田中施,故施福不盡,必至佛道;觀其未來無盡功德故,歡喜行是四種布施,世世財富。

是菩薩雖不爲財富布施,未具足阿耨多羅三藐三菩提、六波羅蜜等法,中閒而財富自至;譬如人爲穀故種禾,而稿草自至。菩薩得財物報時,離慳貪心,隨衆生意布施,須食與食等。

 보(寶)의 그지없는 복전(福田) 가운데에 보시하기 때문에  보시하는 복은 다함이 없으며, 

반드시 부처님의 불도에 이르는 것을 보게 되며,

그리고 그는 미래세의 무진한 공덕을 관찰하기 때문에 기뻐하면서   가지로 보시를 하나니, 세세에서마다 재물이 풍부한 때문이다.

 보살이 비록 재물이 많은 부자가 되기 위하여 보시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6바라밀 등의 법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중간에도 저절로 재물이 풍부하여지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쌀을 거두기 위하여 벼를 심으면 볏짚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살은 재물의 과보를 얻을 때에는 간탐하는 간탐심(慳貪心) 여의고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 보시하되 밥을 구하면 밥을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