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85권 5

Skunky 2024. 11. 6. 09:00

大智度論 釋菩薩行品 第七十二 卷八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2. 보살행품(菩薩行品) 풀이함 2

 

▶論. 釋曰:上品中須菩提問佛:“經常說般若波羅蜜,何以故名般若波羅蜜?”佛種種因緣答。因此事故

,此品中復問世尊:“經常說菩薩行,何等是菩薩行?”是故須菩提問菩薩行。

▷논. 해석한다. 앞의 품에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경 가운데에서는 항상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부르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갖가지의 인연으로 대답하셨다.

이러함으로 인하여 이 품(品)에서도 다시 여쭈기를 “세존께서는 경에서 항상 보살행(菩薩行)을 말씀하시는데, 어떠한 것이 보살행입니까?”라고 한 것으로, 수보리 존자는 보살행을 묻고 있는 것이다.

 

問曰:若般若波羅蜜中攝一切法,又般若卽是菩薩行,何以故更問?

묻나니, 만약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일체법을 포섭하고  반야가  보살행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여쭌 것입니까?


答曰:一切菩薩道名菩薩行,悉遍知諸法實相智慧名般若波羅蜜,是爲異。若般若經、菩薩行等共相攝,無異。復次,有人言:菩薩行者,菩薩身、口、意業諸有所作,皆名菩薩行。以是事故,須菩提但欲分別“菩薩正行”故問。

답하나니, 일체의 보살도를 보살행(菩薩行)이라 하고, 제법의 실상(實相)을 두루 아는 지혜의 실변지(悉遍知)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면, 이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반야경(般若經)'에서 보살행은 평등하여  함께 포섭한다고 하였으니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어떤 말하기를 “보살행은 보살이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으로 하는 모든 일들을 보살행이라 한다”고도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 존자는 다만 보살의 바른행(正行)만을 분별하고자 여쭌 것이다.


是故佛答:“菩薩行者,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諸善行,是名菩薩正行。”

菩薩不善、無記及著心行善法,非菩薩行;但以悲心故及空智慧,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行,是名菩薩行。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행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는 모든 착한 선행(善行)이니, 이를  보살의 바른 정행(正行)이라 한다”고 하셨으니, 

보살의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와 집착하는 착심(著心)으로 행하는 착한법은 보살행이 아닌 것이며,

다만 가엾이 여기는 비심(悲心)과 공지혜(空智慧)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행을 삼으니, 이를 보살행이라 하는 것이다.


何等是淸淨行?所謂色空行,受想行識空行,乃至有爲性、無爲性空行。於是諸法不分別是空、是實,乃至是有爲、是無爲,如阿耨多羅三藐三菩提滅戲論不二相,是名菩薩行。無能壞者,亦無過失。

須菩提聞是菩薩行已,歡喜問:“菩薩行果報得作佛;經常言佛,何等是佛義?”佛答:“知諸法實義故名爲佛。”

어떠한 것이 청정행(淸淨行)인가? 이른바 물질(色)의 공행(空行)과 수상행식(受想行識) 공행(空行) 내지는 유위성ㆍ무위성의 공행(空行)이요, 

법에서 ‘이것이 공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나아가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라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은 것은 희론이 소멸한 둘이 아닌 불이상(不二相)이니, 

이를 이름하여 보살행(菩薩行)이라 하나니, 무너뜨릴  있는 이가 없고 또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보살행에 관해서 들은 뒤에 기뻐하며 여쭈기를 “보살행의 과보는 부처님이 되는 득작불(得作佛)하는 것이며, 경에서 항상 부처님을 말씀하시는데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불(佛)의 뜻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길 “제법의 진실한 이치인 실의(實義)를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한다”라고 하셨다.


問曰:若爾者,阿羅漢、辟支佛及大菩薩,是人亦知諸法實義,何故不名爲佛?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과 같은 사람들도 역시법의 진실한 이치를 알거늘, 무엇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上已說“然燈喩”。於凡夫爲實,於佛不爲實。以煩惱習所覆故,不名爲實。不能得一切種智、斷一切法中疑悔故,不名正智實義。如上分別。

답하나니, 위에서 이미 등불을 켜는 비유로써 설명하였다. 

범부에 있어서는 진실이 되지만 부처님에 있어서는 진실이 되지 않나니, 번뇌와 습기에 가려졌기 때문에 진실이라 하지 못하며, 일체종지를 얻어서 일체 가운데에서의 의심과 후회를 끊지 못한 때문에 바른 지혜의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라 하지 않는 것이니, 위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問曰:知諸法實義、得諸法實相、通達實義、一切法如實知,是四有何異?

묻나니, 제법의 진실한 이치를 아는 진실의(知實義)와 법의 실상을 얻는 득실상(得實相)과

진실한 이치를 통달하는 통달실의(通達實義)와 일체법을 여실하게 아는 여실지(如實智)의  가지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答曰:有人言:義無異,名字異。有人言:有差別。

義名諸法實相,不生不滅,法相常住,如涅槃。知是義故,名爲佛。是義中常覺悟,無錯謬;於是義,以種種名相法令衆生解第一實義。是故四無㝵中,別說義無㝵、法無㝵。

답하나니, 어떤 말하기를 “이치에는 차이가 없으나,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며, 

어떤 분은 “차별이 있다”고 하기도 하나니, 

이치의 의(義)란 제법의 실상(實相)이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법상(法相)으로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므로 마치 열반과 같으니, 이러한 이치를 알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이치 가운데에는 항상 깨달아 알아서 착오가 없는 무착류(無錯謬)이고, 이러한 이치에 대하여 갖가지의 이름과 모양의 명상법(名相法)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제일실의(第一實義) 알게 하는 것이니,

특히 사무애(사무애지) 가운데에서 의무애(義無礙)와 법무애(法無礙)를 말하는 것이다.


有人雖得諸法實義,不能通達,有二因緣故:一者、煩惱未盡,二者、未得一切智故。

如須陁洹、斯陁含、阿那含,未斷煩惱故,不能通達;阿羅漢、辟支佛、大菩薩煩惱雖盡,未得一切種智故,不能通達。是故說“通達實義故名爲佛”。

어떤 분은 비록법의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 얻었을지라도 통달할  없는 이가 있나니, 그것은  가지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한 번뇌미진(煩惱未盡)이요, 둘째는 아직 일체지를 얻지 못한 미득일체지(未得一切智)이기 때문이다. 

이는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 같은 이는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통달할  없는 이들이며, 

아라한과 벽지불과보살은 미록 번뇌를 다하였을지라도 아직 일체종지를 얻지 못한 때문에 통달할  없는 이들이니,

그러므로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를 통달하지 못한 까닭에 부처님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如實知一切法者,摠上三事亦義、亦法,一切法若有、若無,種種了了知故,如一切種智義中說:亦知寂滅相,亦知有爲相。復次,菩提名智,佛名智者。得是智故,名爲智者。

須菩提問:“世尊!何等是菩提?”佛答:“空、如、法性、實際,名爲菩提。”

‘일체법을 여실하게 안다’고 함이란, 위의  가지를 통틀어서 이치의 의(義)와 법(法)은 물론이요, 일체법의 있다ㆍ없다 하는 갖가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일체종지의 이치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도 알고 또한 유위상(有爲相)도 아는 것이며,

 보리를 지혜라 하고 부처님을 지자(智者)라 하나니, 이러한 지혜를 얻으신 때문에 지자(智者)라 하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여쭈기를 “어떠한 것이 보리(菩提)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공(空)ㆍ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보리(菩提)라 한다”고 하셨으니, 


空三昧相應實相智慧緣如、法性、實際菩提名實智慧。三學道未斷煩惱,雖有智慧,不名爲菩提。三無學人,無明永盡無餘故,智慧名菩提。二無學人不得一切智正遍知諸法故,不得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唯佛一人智慧,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復次,名相語言文字故名菩提。菩提實義,不可分別破壞。

곧, 공삼매(空三昧)와 상응하는 실상지(實相智)로써 여ㆍ법성ㆍ실제를 반연하는 보리를 실지혜(實知慧)라 하는 것이며, 

삼학도(三學道)에서는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으므로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보리라 하지 못하고,

삼무학인(三無學人)은 무명(無明)이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기 때문에  지혜를 보리라 하며,

이무학인(二無學人)은 일체지로써법을 바르고 두루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하지 못하나,

오직 부처님  지혜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으며, 

 명상(名相)과 언어와 문자 때문에 보리(菩提)라 하지만, 보리(菩提)의 진실한 실의(實義) 분별하거나 파괴할 수가 없는 것이다.


復次,菩提是如、不異,常不虛誑。何以故?一切衆生智慧轉轉有勝,至佛更無勝者;諸法亦轉轉有勝,先者虛妄,後者眞實,至菩提更無實者。

是故菩提名爲實。復次,如得菩提故名爲佛,今以佛得故名菩提。

 보리(菩提)는 여(如)와 다르지 않으며, 언제나 거짓됨이 없나니, 왜냐 하면, 일체 중생의 지혜는 차츰차츰  나아감이 있지만, 부처님에 이르면 다시는  나아질 것이 없으며, 

제법도 차츰차츰  나아지는 것이 있어서 앞에서 거짓의 허망(虛妄)한 것이다가,에는 진실이 되지만, 

보리에 이르면 다시는  진실하여질 것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리(菩提)를 진실한 실(實)이라 하며, 

 보리를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이 되었기 때문에 보리(菩提)라 하는 것이다.


復次,有人言:盡智知生永盡,是名菩提。
有人言:盡智、無生智,名菩提。

有人言:無㝵解脫名菩提。何以故?得是解脫,於一切法皆通達。

또한 어떤 말하기를 “진지(盡智, kṣaya-jñāna. 4성제의 완성을 아는 지혜)는 생(生)이 영원히 다한 것을 알기 때문에 이름하여 보리(菩提)라 한다”고 하며,

어떤 말하기를 “진지(盡智, kṣaya-jñāna)와 진지 다음에 생하는 부동아라한의 지혜인 무생지(無生智, anutpāda-jñāna, 10지智, daśa-jñānāni 가운데 하나)를 보리(菩提)라 한다”고 하기도 하며,

어떤 말하기를 “무애해탈(無礙解脫)을 보리(菩提)라 하나니, 왜냐 하면  해탈을 얻으면 일체법을 두루  통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有人言:四無㝵智是菩提。何以故?佛知諸法實相,是“義無㝵”;知諸法名相分別,是名“法無㝵”;分別種種語言,使衆生得解,是名“辭無㝵”;有所說法教化無窮無盡,是名“樂說無㝵”。以四無㝵具足利益衆生故名菩提。

어떤 말하기를 “사무애지(四無礙智)가 보리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제법의 실상(實相)을 아는 것을  의무애(義無礙)라 하고,

법의 명상(名相)을 알아서 분별하는 것을  법무애(法無礙)라 하며, 

갖가지의 언어를 분별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이해할  있게 하는 것을  사무애(辭無礙)라 하고, 

설법하여 교화함에 있어서 다함이 없고 그지없는 것을 요설무애(樂說無礙)라 하기 때문이니,

사무애를 완전히 갖추어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보리(菩提)라 한다”고도 하며, 


有人言:佛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十八不共法、大慈大悲、一切種智,如是無量佛法,盡名菩提。何以故?以智慧大故,諸法皆名菩提。

有人言:眞菩提名佛無漏十智,是十智相應受想行識,身、口業及心不相應諸行,皆名菩提。共緣、共生、共相佐助故,皆名菩提。

어떤 말하기를 “부처님의력과무소외와무애지와 18불공법과 대자대비와 일체종지와 같이 무량한 부처님의 불법을 모두 보리(菩提)라 한다. 왜냐 하면, 지혜가  것이므로 모두를 보리(菩提)라 하기 때문이다”고 하며, 

어떤 말하기를 “참된 보리의 진보리(眞菩提)를 부처님이라 하나니, 무루(無漏)의 10지(智)와 지에 상응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 신업(身業)ㆍ구업(口業)과,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심불상응(心不相應)의 모든 행을  보리(菩提)라 하나니, 함께 같이 반연하는 공연(共緣)이고, 함께 나는 공생(共生)이고, 함께 서로 돕는 공상좌조(共相佐助)이기 때문에 모두 보리(菩提)라 부른다”고도 하며, 


復有人言:菩提義無量無邊,唯佛能遍知,餘人知其少分;譬如轉輪聖王寶藏中諸寶,無能分別知其價者,聖王出寶賜人,正可知其所得者。

此中,須菩提問佛菩提相已,更問世尊:“若菩提畢竟空不壞相,菩薩行六波羅蜜諸法,增益何等善根?”

佛答:“若菩薩行是菩提實相,於一切法無所增益,何況善根!

何以故?般若波羅蜜不爲得失乃至垢淨故出,畢竟淸淨故。”佛可其意。

 어떤 말하기를 “보리의(菩提義)는 무량하고 무변하여 오직 부처님만이 두루  아시지만,  밖의 사람들은  적은 부분만을 알 뿐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전륜성왕의 보배 창고인 보장(寶藏)에 있는 모든 보배는  값어치를 분별하여   있는 이가 없지만, 전륜성왕이 보배를 내어다가 다른 사람에게때, 그것을 얻게  이가 비로소 알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나니, 

여기에서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 보리상(菩提相)을 묻고 나서, 다시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보리가 필경공이라서 파괴되지 않는 불괴상(不壞相)이라면, 보살은 6바라밀의법을 행하여 어떠한 선근을 늘어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보리의 실상(實相)을 행하면 일체법에 대하여 늘어나는 것도 없거늘 하물며 선근이겠는가!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얻고 잃는 득실(得失) 내지는 더럽고 깨끗한 구정(垢淨)이 아닌 까닭에 벗어나는 출(出)이며, 필경에 청정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하시면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뜻을 인가하셨다.


復更問:“若無增減,云何菩薩行般若取檀波羅蜜等諸菩薩行?”

佛答:“菩薩雖行是法,不以二法故行。”畢竟空和合共行,是故不應難。

 여쭈기를 “만약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다면 보살이 어떻게 반야를 행하며 단바라밀 등의 모든 보살행을 취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비록  법을 행할지라도 두 가지의 이법(二法)으로써 행하지 않고, 필경공(畢竟空)과 화합하면서 행하나니,  때문에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