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84권 5

Skunky 2024. 11. 3. 09:02

大智度論 釋三慧品 第七十之餘 卷八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0. 삼혜품(三慧品) 풀이함  5

 

須菩提問:“若一切法但有名相,菩薩爲何等故發心?”如經中說。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일체법에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만 있을 뿐이라면, 보살은 어떠한 것을 위하여 발심하여야 합니까?”라고 하였으니, 마치 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佛答:若一切法但有名相者,名相中名相亦空,是法皆畢竟空,入如、法性、實際中;

是故菩薩能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乃至能以三乘度衆生。若諸法有定實、非名相者,卽是無生滅;

無生滅故,無苦、無集、無盡、無道,云何以三乘度衆生?

이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으니, 

“만약 일체법에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만 있다면,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 가운데에서의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 또한 공(空)한 것이라. 

 법은 모두가 필경공이라서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 가운데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보살은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고 이에승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야 하느니라.

만약 제법이 일정하고 진실이 있고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며, 생멸이 없기 때문에 괴로움의 고(苦)도 없고, 쌓임의 집(集)도 없으며, 다함의 멸(滅)도 없고, 도(道) 역시도 없거늘, 어떻게승으로써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는가?


若諸法但是空名相、無實者,亦無生滅;無生滅故,無苦、集、盡、道,亦云何可度?

今菩薩知一切法名相等空,則離世閒顚倒;亦知名相空,亦離名相空。如是離有離無、處中道,能度衆生。

佛意:菩薩行是中道般若,得一切種智。

만약 제법이 다만 공한 이름과 모양의 공명상(空名相)이라서 진실이 없다면, 역시 생멸이 없을 것이요, 생멸이 없기 때문에 괴로움의 고(苦)도 없고 쌓임의 집(集)도 없으며, 다함의 멸(滅)도 없고 도(道) 없거늘 어떻게 제도할  있겠는가?

이제 보살이 일체법의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 등이 공함을 안다면, 세간의 뒤바뀜을 여의게 되고, 또한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이 공하다는 것을 앎으로써 또한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이 공한 것을 여의게 되나니, 

이와 같이 있음을 여의는 이유(離有)하고, 없음도 여의는 이무(離無)하여서 중도(中道)에서 중생을 능히 제도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뜻하신 바는, 보살은  중도(中道)의 반야를 행하면서 일체종지(一切種智, sarva-ākārajñtā. 일체법을 아는  부처님만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爾時,須菩提欲難故,先定佛語,乃問:“世尊說一切種智耶?”

佛言:“我說一切種智。”

그 때에 수보리 존자가 질문하려 하다가 일부러 먼저 부처님의 말씀이 결정된 뒤에야 여쭈기를 “세존께서는 일체종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일체종지를 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復問“佛常說三種智,三種智有何差別?”

佛答:“薩婆若是聲聞、辟支佛智。”何以故?一切名內外十二入,是法,聲聞、辟支佛摠相知,皆是無常、苦、空、無我等。

또한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는 항상 살바야(薩婆若), 도종지(道種智),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삼종지(三種智)를 말씀하시는데,  가지 지혜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살바야(薩婆若)는  성문과 벽지불의 지혜이니, 왜냐 하면, 일체를 안팎의 12입(入)이라 하며,  법은 성문과 벽지불이 전체의 총상(總相),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는 등으로 아는 것이 때문이다.


“道種智,是諸菩薩摩訶薩智。”道有四種:一者、人天中受福樂道,所謂種福德;幷三乘道爲四。

菩薩法,應引導衆生著大道中;若不任入大道者,著二乘中;若不任入涅槃者,著人天福樂中,作涅槃因緣。

世閒福樂道,是十善、布施諸福德;三十七品是二乘道;三十七品及六波羅蜜是菩薩道。

菩薩應了了知是諸道。菩薩以佛道自爲、爲人,以餘三道但爲衆生是菩薩道種智。

도종지(道種智, mārgākārajñatā. 무량한 도문道門을 두루 아는 것)는  모든 보살마하살의 지혜이며,

도(道)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간과 천상에서 복락(福樂)을 누리는 도(道)이니, 이른바 복덕을 심는 것이며, 아울러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三乘)의 도와 함께  가지가 되는 것이다.

보살의 법은 마땅히 중생을 인도하여 대도(大道) 가운데에 놓아두어야 하나니, 만약 대도에 들어갈  없는 이라면승(二乘) 가운데에 놓아두고, 만약 열반에 들어갈  없는 이라면 인간과 천상의 복락 가운데에 놓아두어 열반의 인연을 짓게 하며, 

세간의 복락의 길(道)은 바로 10선(善)과 보시와 모든 복덕이며,

37 조도품은  2승의 도(道)이며, 37 조도품과 6바라밀은 바로 보살의 도(道)이다. 

보살은 마땅히 이러한 모든 도(道)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나니, 보살은 부처님의도로써 스스로를 위하고 남을 위하며, 나머지 다른  가지 도인 삼도(三道, 삼승의 도)로는 다만 중생들만을 위할 뿐이니, 이것이  보살의 도종지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問:“何以道種智爲菩薩事?”

佛答:“菩薩應具足一切道,以是道化衆生。雖出入是道,未教化衆生、淨佛國土而不取證;具足是事已,然後坐道場乃取證。是故,須菩提!道種智是菩薩事。”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무엇 때문에 도종지를 보살의 일인 보살사(菩薩事)로 여기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일체의 도(道)를 완전히 갖추어야 하며,  도(道)로써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 비록  도(道)에 출입(出入)할지라 아직 중생을 교화하지 못하고 부처님의 불국토(佛國土)를 청정하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증득을 취하지 않으니, 이러한 일들을 완전히 갖추고  뒤에야 도량(道場)에 앉아 증득을 취하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도종지는  보살의 일인 보살사(菩薩事)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復問:“是菩薩住何處實際作證?”須菩提意:若住道中作證,是事不然,有二過故:

一者、有結使人不應有畢竟淸淨正智;若有,則與佛無異;若異者,有煩惱習氣故應有錯謬。

二者、一切有爲法皆是虛誑,和合故有,假名,無有定實。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이 보살은 어떠한 곳에 머무르면서 실제를 증득합니까?”라고 하였는데,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만약 도(道)에 머무르면서 증득한다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니, 그것에는 두 가지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번뇌의 결사(結使)가 있는 사람은 필경에 청정한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가 없으니, 만약 정지(正智)가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과 다름이 없을 것이요, 만약 다르다면 번뇌와 습기(習氣)가 있기 때문이니, 착각으로 인한 착류(錯謬)가 있는 것이며,  

둘째는 일체의 유의법은 모두가 거짓으로 화합한 까닭에 임시로 붙인 가명 뿐이므로 일정하거나 진실이 없다’라고 하였다.


是故佛言:“不也!”若住“道”中尚不得,何況“非道”!“道非道”,亦有二過故。“非道非不道”,以著心取相故,亦言“不也!”

 때문에 부처님 께서는 “아니니라”고 하신 것이니,

설령 도(道)에 머무른다 하여도 오히려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도가 아닌 비도(非道)에 머무름 이겠는가? 

도(道)라거나 도가 아닌 비도(非道)라거나 하는 것에도  가지 허물이 있기 때문에 도가 아닌 비도(非道), 도가 아닌 것도 아닌 비불도(非不道)이니, 마음에 집착하면서 상(相) 취하므로 역시 ‘아니니라’고 하신 것이다.


爾時,須菩提意或作是念:“佛所得道甚深,不可得底。”

是故復問:“菩薩住何處實際作證?” 佛反問須菩提。

그때 수보리 존자의 뜻으로는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얻으신 도(道)는 매우 깊어서  바닥 얻을  없으리라’고 하였고, 

이러한 까닭에 다시 묻기를 “보살은 어느 곳에 머무르면서 실제를 증득합니까?”라고 하자, 

이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되받아서 물으신 것이다.


問曰:佛何以故不直答而反問須菩提?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수보리에게 반문하신 것입니까?

 

答曰:須菩提自於所得道中了了無或,貴尚佛所證故,四句戲論,如有著心不了故問;是故佛以須菩提所得證反問:“汝得道時住四句中得證耶?”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는 자신이 얻은 도(道)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미혹이 없었으나,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것을 귀히 여기고 숭상하기 때문에구(四句)의 희론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으로 분명히 알지 못하는  같았기에 물으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가 증득한 것으로써 반문(反問)하여 “네가 도를 얻었을 때에구(四句)에 머물러 증득한 것인가?”라고 하신 것이다.

 

사구(四句)= 절대에 대한 ① 최초 인식인 유(有), ② 이에 대한 부정 인 무(無), ③ 긍정과 부정을 합한 역유역무(亦有亦無) ④ 다시 긍정과 부정의 합에 대한 부정인 비유비무(非有非無)

하나의 개념(A), 또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개념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현상을 판별하는 네 가지 형식.
곧, 제1구 'A이다' 제2구 '비(非)A, 즉 A는 A가 아니다', 제3구 'A이면서 또한 비(非)A, A이면서 또한 A가 아니다', 제4구 'A도 아니고 비(非)A도 아니다, 즉 A도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유(有)와 무(無)를 기준으로 하면 유-무-역유역무-비유비무가 성립되고
일(-)과 이(異) 상(常)과 무상(無常), 자(自)와 타(他) 등의 경우에도 사구가 성립되나, 불교의 진리는 모든 분별이 끊어진 상태이므로 사구백비(四句百非)라고 하는데, 유와 무 등의 모든 개념 하나하나에 비를 붙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곧 불교의 진리는 사구의 분별도 떠나고 백비의 부정도 끊어진 상태라는 뜻.- 솜다리문학


答言:“不也!我無所住而得漏盡。”“汝以無所住而心得解脫,當知菩薩摩訶薩亦如是,不住四句而證實際。”是故佛反問。復有人言:四種答中,是名反問答。

그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저는 머무르느 곳 없이 번뇌를 다하는 누진(漏盡)하였습니다”라고 하자, 

“너는 머무른 데가 없이 마음에 해탈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구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를 증득하였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까닭에 반문하신 것이다.

 어떤 말하기를 “네 가지의 대답인 사종답(四種答) 중에서 이것을 이름하여 반문하여 대답한 반분답(反問答)이라 한다”고 하였다.

 

사종답(四種答)= ① 정답(正答), ② 내용을 분별하여 설명하면서 답하는, 분별의답(分別義答), ③ 되물어서 답을 알게하는, 반문답(反問答), ④ 14 무기와 같이 답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치답(置答)


問曰:須菩提住金剛三昧,心得解脫,云何言“不住道中”?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머무르면서 마음의 해탈을 얻었거늘 어찌하여 ‘도(道)에 머무르지 않는, 불주도(不住道)입니다’라고 하신 것입니까?


答曰:住名取相,定有是法;是人更求無爲勝法故,不名爲住有爲法,爲不用故,不於中住。

復有人言:住是名相凡夫法中,便有分別是金剛,是解脫。得無相法,則無所分別。佛爲無相法故,反問須菩提:“汝不應以名相故問,汝不應以名相爲難。”

一切種智是佛智, 一切種智名一切三世法中通達無㝵,知大小、精麤,無事不知。

답하나니, ‘머무르는 주(住)’라고 함이란, ‘상(相)을 취하여 결정코 이러한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다시 무위의법(勝法)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위법(有爲法)에 머무른다 하지 않으며, 그것을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운데에 머무르지도 않는 것이다.

 어떤 말하기를 “머무르는 주(住)라고 하는 그것이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이니, 범부의 법에서는 ‘이것이 금강(金剛)이다, 이것이 해탈(解脫)이다’라고 분별함이 있지만, 모양이 없는 무상법(無相法)을 얻으면 분별함이 없으니, 부처님께서는 모양이 없는 무상법(無相法) 위하여 수보리 존자에게 반문하신 것이니, “너는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으로써 묻지 말아야 하며, 너는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으로써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 것이라 하였다.

일체종지(一切種智)는  부처님의 지혜이니, 일체종지는 일체 삼세(三世)의  가운데에서 환희 통달하여 장애없이 아는 것이니, 크고 작은 대소(大小), 세밀한 정(精), 거칠 추(麤)이거나 간에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佛自說“一切種智“義,有二種相:一者、通達諸法實相故寂滅相。如大海水中風不能動,以其深故波浪不起;一切種智亦如是,戲論風所不能動。

二者、一切諸法可以名相文字言說,了了通達無㝵。攝有、無二事故名“一切種智”。

부처님 께서는 일체종지의 뜻을 말씀하시면서  가지의 이종상(二種相) 있다고 하셨으니,

 하나는,법의 실상(實相)을 통달하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으로, 마치  바닷물 속은 바람으로도 움직일  없고, 깊기 때문에 물결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일체종지도 이와 같아서 희론의 바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일체의 제법을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과 문자와 언설로써 환히 통달하여 장애가 없는 것이니, 있다(有)ㆍ없다(無)는  가지를 포섭하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하는 것이다.


有人言:十力、四無所畏、四無㝵法、十八不共法,盡是智慧相、和合名爲一切種智。

復有人言:金剛三昧次第得無㝵解脫故,若大小、近遠、深淺、難易,無事不知。

如是等種種無量因緣,名一切種智。

어떤 말하기를 “십력과무소외(四無所畏)와무애법(四無礙法)과 18불공법(不共法)은 모두가 지혜의 상(相)이니, 이를 모두 합쳐서 일체종지라 한다”고 하며,

 어떤 말하기를 “금강삼매에서 차례로 무애해탈(無礙解脫)을 얻기 때문에 크고 작은 것과 멀고 가까운 것과 깊고 얕은 것과 어렵고 쉬운   일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무량한 인연으로 일체종지라 하는 것이다.


須菩提聞是已,問佛:“智慧故有上、中、下分別,煩惱斷復有差別不?”

佛言:“無差別。”斷時有差別,斷已無差別;譬如刀有利鈍,斷時有遲速,斷已無差別。

如來煩惱及習都盡;聲聞、辟支佛但煩惱盡,而習氣有餘。

수보리 존자가 이러함을 듣고 나서 부처님께 여쭈기를 “지혜에 상ㆍ중ㆍ하의 분별이 있다면 번뇌가 끊어지는 것에 차별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차별이 없느니라. 끊을 때에는 차별이 있지만, 끊어지고 나면 차별이 없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칼에 날카로움과 무딤이 있으면, 끊을 때에는 더디고 빠름이 있겠지만, 끊은 뒤에는 차별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여래는 번뇌와 습기가 모두 다하였지만 성문이나 벽지불은 다만 번뇌만 다하였을 뿐, 습기는 남아 있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問佛:“世尊!三種斷,是有爲、是無爲?” 佛答:“皆是無爲。”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가지에서 끊어지는 것이 유위입니까? 무위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것은 모두 무위이니라”고 하셨다.


復問:“世尊!無爲法中可得差別不?”佛答:“是法無相、無量,云何可得差別?”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무위법 가운데에서도 차별을 얻을  있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이 법은 무상(無相)이고 무량하거늘 어떻게 차별을 얻을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


復問:“世尊!若無差別,云何說是斷中有餘、是斷中無餘?”

“須菩提!是習,不名眞煩惱。”有人雖斷一切煩惱,身、口中亦有煩惱相出;凡人見聞是相已,則起不淸淨心。

譬如蜜婆私詫阿羅漢,五百世在獼猴中,今雖得阿羅漢,猶騰跳樹木,愚人見之卽生輕慢:“是比丘似如獼猴!”是阿羅漢無煩惱心而猶有本習。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이 끊어진 가운데에는 남은 것이 있다, 이 끊어진 가운데에는 남은 것이 없다’고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이 습기(習氣)를 참다운 번뇌라고 하지는 않으니, 어떤 사람이 비록 일체의 번뇌가 끊어졌다 할지라도 몸과 입에서는 역시 번뇌의 상(相)이 나오므로 범부들은 이러한 상(相)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깨끗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게 되느니라”고 하셨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밀바사타(蜜婆私詫) 아라한은 5백 세상 동안 원숭이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지금은 비록 아라한이 되었기는 하나 여전히 나무에 올라가 뛰어 놀고 있었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어 “이 비구는 마치 원숭이와 같구나”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 아라한에게는 번뇌의 마음은 없으나 아직도 본래의 습기인 본습(本習)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