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84권 4
大智度論 釋三慧品 第七十之餘 卷八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0. 삼혜품(三慧品)을 풀이함 ② 4
須菩提問:“若無法、無衆生,云何說有三聚衆生?”
佛答:“我觀衆生一聚不可得,云何有三?但爲欲破顚倒故,分別有三:能破顚倒者名正定;必不能破顚倒者是邪定;得因緣能破,不得則不能破,是名不定。皆以世俗法故說,非最第一義。”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법이 없는 무법(無法)이고 중생도 없는 무중생(無衆生)이라면 어떻게 정정(正定, 정정취, 필정취)과 사정(邪定, 사정취, 필사취)과 부정(不定, 부정취)의 삼취(三聚)의 중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중생을 자세히 보니 하나의 일취(一聚)조차도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삼취가 있겠는가? 다만 뒤바뀜의 전도(顚倒)를 깨뜨리기 위하여 삼취가 있음을 분별하였을 뿐이니라.
뒤바뀜의 전도(顚倒)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을 정취(正定, 정정취)라 하고,
결코 뒤바뀜의 전도(顚倒)를 깨뜨릴 수 없는 것을 바로 사취(邪定, 사정취)라 하며,
인연을 얻으면 깨뜨릴 수 있고 얻지 못하면 깨뜨릴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부정(不定, 부정취)라 하나니,
모두가 세속법으로써 말하는 것이요, 제일의(第一義)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問曰:佛實住第一義中得道,何以答須菩提言“不”?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진실로 제일의 가운데에 머무르시어 도(道)를 얻으셨거늘, 무엇 때문에 수보리 존자에게 “아니니라”고 대답하신 것입니까?
答曰:須菩提爲新發意著者故問,是故佛言“不”。
何以故?顚倒有法中尚不可住,何況第一義無所有中住!是故須菩提疑:“若二處不住,將無世尊不得正覺耶?”
佛答:“實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道,但無所住。有爲性虛誑不實,無爲性空無所有,故不可住”
此中佛欲明了是事故,說化佛譬喩:“如化佛不住有爲性、不住無爲性,而能來去說法。”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는 새로 뜻을 낸 신발의(新發意)들을 위하여 일부러 물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니니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 하면, 뒤바뀜의 전도(顚倒)가 존재하는 유법(有法)에서조차도 오히려 머무를 수 없거늘, 하물며 제일의의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 가운데에 머무름이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 존자가 의심하기를 “만약 두 곳에 다 머무르지 않는다면, 세존께서도 정각(正覺)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길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도(道)를 얻었지만 다만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소주(無所住)일 뿐이니, 유위성(有爲性)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며, 무위성(無爲性)은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공무소유(空無所有)이기 때문에 다 머무를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함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화현한 부처님의 화불(化佛)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으니, 마치 화불(化佛)은 유위성(有爲性)에 머무르지도 않고, 무위성(無爲性)에 머무르지도 않지만, 오고 가며 설법할 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問曰:化人來去說法可爾,云何能行檀波羅蜜等?.
묻나니, 변화로 된 화인(化人)이 오고 가며 설법하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어떻게 단바라밀 등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不言化人能實行,衆生眼見似有所行。是化事,如經中說,乃至“須扇多”。
須菩提意已信伏,種種因緣,化佛、眞佛等無異,今猶少疑,問佛:“若無分別者,供養眞佛,乃至無餘涅槃,福故不盡,供養化佛亦爾不?”
佛答:“供養化佛、眞佛,其福不異。何以故?佛得諸法實相故,供養,福無盡;化佛亦不離實相故,若供養者心能不異,其福亦等。”
답하나니, 변화로 된 화인(化人)이 실제로 행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중생들의 눈에는 하는 일이 있는 것과 같이 보일 뿐이지만 그것도 변화로 하는 화사(化事)이니, 마치 경에서의 말씀과 같고, 나아가 수선다(須扇多, Suśānta)부처님의 일과도 같은 것이다.
수보리 존자의 생각에는 이미 갖가지의 인연으로 화현한 화불(化佛)과 실제의 부처님이신 진불(眞佛)이 평등하여서 다름이 없다고 신복(信伏)하면서도, 아직까지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어서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분별이 없다면 실제의 부처님이신 진불(眞佛)께 공양한 인연으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르기까지 복이 다하지 않지만, 변화한 화불(化佛)께 공양하여도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화현한 화불(化佛)이건 실제의 진불(眞佛)이건 공양드림에 있어서 그 복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제법의 실상(實相)을 얻은 까닭에 공양하여도 그 복이 다하지 않으며, 화현한 화불(化佛)도 실상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 만약 공양하는 이의 마음에 차이가 없다면 그 복도 똑같다”고 하신 것이다.
수선다(須扇多, Suśānta)부처님 같은 분은 성불하신 뒤에 교화를 받을 만한 이가 없었으므로 변화한 화불(化佛)이 되시어 1겁 동안 머무르면서 설법하시어 사람들을 제도하고 자신은 멸도(滅度)하셨으며,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4권 4
問曰:化佛無十力等諸功德,云何與眞佛等?
묻나니, 화현한 화불(化佛)에게는 십력(十力) 등의 모든 공덕이 없거늘, 어떻게 실제 부처님이신 진불(眞佛)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十力等諸功德皆入諸法實相;若十力等離諸法實相,則非佛法,墮顚倒邪見。
답하나니, 십력 등 모든 공덕은 다 제법의 실상에 들어가는 것이니, 만약 십력 등 모든 제법의 실상을 여읜다면, 부처님의 불법이 아닌 것으로, 뒤바뀜의 전도(顚倒)와 삿된 사견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問曰:若爾,眞、化中定有諸法實相者,何以言“惡心出佛身血得逆罪”,不說化佛?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진불(眞佛)과 화불(化佛) 사이에 반드시 제법의 실상이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악한 마음의 악심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면 역죄(逆罪)가 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화현한 화불(化佛)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까?
答曰:經中但說“惡心出佛身血”,不辯眞、化。若供養化佛得具足福者,惡心毀謗亦應得逆罪。惡人定謂化佛是眞而惡心出血,血則爲出,便得逆罪。
답하나니, 경에서는 다만 악한 악심으로 부처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것만을 말씀하셨을 뿐, 진불(眞佛)과 화불(化佛)에 대한 구별을 하시지 않았으니, 만약 화현한 화불(化佛)께 공양하여 복을 두루 갖추게 된다면, 악한 마음의 악심으로 훼방하는 것 역시도 역죄를 얻게 될 것이니, 악한 사람이 화현한 화불(化佛)을 결정코 실제의 부처님이라 여기면서 피를 내고자 악심을 품거나, 실제로 피를 흘리게 한다면 곧 역죄를 얻는 것이다.
問曰:若爾者,毘尼中何以言“殺化人不犯殺戒”?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비니(毘尼, 율장) 가운데에서는 무엇 때문에 화현한 화인(化人)을 죽일지라도 살생계(殺生戒)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까?
答曰:毘尼中皆爲世閒事、攝衆僧故結戒,不論實相。何以故?毘尼中有人、有衆生,逐假名而結戒,爲護佛法故,不觀後世罪多少。
有後世罪重、戒中便輕,如道人鞭打殺牛羊等,罪重而戒輕。讚歎女人,戒中重、後世罪輕。
殺化牛羊,則衆人不嫌、不譏、不論,但自得心罪;若殺眞、化牛羊,心不異者,得罪等。
然制戒意,爲衆人譏嫌故爲重。是故經中說:“意業最大,非身、口業。”
답하나니, 비니(율장) 가운데에서는 모두가 세간사(世閒事)에 대하여 뭇 승가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율을 제정한 것이니, 실상(實相)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비니 가운데에서는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중생으로 하여금 이름을 임시로 제정한 계율을 따르게 하여 불법(佛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후세에 있어서 죄의 많고 적음은 살피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후세에서는 죄가 무거운 중죄(重罪)인데도 계율 가운데서는 가볍기도 하나니, 마치 도인(道人)이 채찍으로 소나 양 등을 때려서 죽이면 그 죄는 무거운 것이나, 계율에서는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으며,
여인을 찬탄하는 것은 계율 가운데서는 무거운 것이나, 후세에서는 죄가 가벼운 것과 같다.
변화로 된 소의 화우(化牛)나 화양(化羊)을 죽이면 여러 사람들이 혐오하지도 않고 비방하지도 않고 논죄하지도 않지만, 단지 스스로 자신이 마음으로 죄책감을 느낄 뿐이며,
만약 실제의 소나 양과 변화한 화우(化牛)나 화양(化羊)을 죽일 때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면 그가 얻는 죄는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계율을 제정한 취지는 여러 사람이 비방과 혐오하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경에서 말씀 하시기를 “의업(意業)이 가장 크며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如人大行布施不及行慈三昧;行慈三昧,衆生無所得,而自得無量福。邪見斷善根人,不惱衆生而入阿鼻地獄。是故供養化佛、眞佛,以心等故,其福不異。復次,此中佛說:“置是化佛光相具足,有人見石泥像等,慈心念佛,是人乃至畢苦其福不盡。”
마치 사람이 크게 대보시를 한다 하여도, 자삼매(慈三昧)를 행하는 것보다 못한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자삼매(慈三昧)를 행하면 중생은 얻는 것이 없지만, 자기 스스로는은 무량한 복을 얻으며,
삿된 소견으로 선근을 끊어버린 사람은 중생을 괴롭히지 않았음에도 아비지옥(阿鼻地獄, avici-naraka. 무간지옥無間地獄, 무택지옥無擇大地獄)에 들어가나니, 이 때문에 화현한 화불(化佛)과 실제의 진불(眞佛)께 공양할 때의 그 마음이 평등하다면, 그러한 까닭에 그의 복은 다르지 않은 것이며,
또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화현한 화불(化佛)의 빛나는 상호를 구족한 것은 그만두고라도, 어떤 사람이 돌이나 진흙으로 조성한 부처님의 니상불(泥像佛)을 보고 인자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염(念)하면, 이 사람은 이내 괴로움이 다 끝나고 그 복이 다함이 없다”고 하셨다.
佛言:“復置泥像,若有恭敬心,雖不見佛像,念佛故,以華散空中,其福亦得畢苦。
復置散華,但一稱南無佛,是人亦得畢苦其福不盡。”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진흙으로 된 니상불(泥像佛)은 그만 두고라도 만약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비록 불상을 뵙지 못할지라도 부처님을 염한 까닭으로 꽃을 공중에 뿌린다면, 그 복으로 괴로움이 다 끝나게 되며, 다시 꽃을 뿌리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오직 한 번만이라도 ‘나무불’ 이라 부르면 이 사람의 괴로움도 모두 그치면서 그 복이 다함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問曰:云何但空稱佛名字,便得畢苦其福不盡?
묻나니, 어떻게 다만 그저 부처님의 이름만을 불렀는데도, 곧바로 괴로움이 다 끝나고 그 복이 다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까?
答曰:是人曾聞佛功德,能度人老病死。若多若少供養及稱名字,得無量福,亦至畢苦不盡。是故福田無量故,雖濡心布施,其福亦無盡。
如是種種因緣譬喩故,眞佛、化佛無異;於佛福田供飬者,其福無量,以一切法實相無別無異故。濡 젖을 유
답하나니, 이 사람은 일찍이 부처님의 공덕으로써 능히 사람들의 노병사(老病死)를 제도한다는 말씀을 들었으며, 혹은 많게 혹은 적게 부처님께 공양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무량한 복을 얻었으므로 역시 괴로움이 다 끝나고 복이 다함이 없는 것이니, 또한 이러한 까닭에 복전(福田)이 무량하며, 비록 주저하는 마음의 유심(濡心)으로 보시할지라도 그 복덕 또한 다함이 없으니,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실제의 부처님이신 진불(眞佛)나 화현한 화불(化佛)의 복전은 다르지 않으며, 공양하는 이 또한 그 복이 무량하나니, 일체법의 실상(實相)은 구별도 없는 무별(無別)이고 다름도 없는 무이(無異)이기 때문이다.
爾時,須菩提問佛:“世尊!若諸法實相無壞故二佛無異,今佛分別說諸法是色,是受想行識,乃至是有爲、是無爲法,將無壞諸法相耶?”
佛答:“須菩提!佛雖種種分別說諸法,但以言說欲令衆生得解,心無所著。”
이 때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의 실상이 파괴됨이 없는 무괴(無壞)이기 때문에 진불과 화불의 두 부처님에 차이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제법을 분별하여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물질(色)이고 이것은 수상행식(受想行識)이며, 나아가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이고 이것은 무위법(無爲法)이다’고 하신 것은 제법의 상(相)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대답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비록 갖가지로 분별하여 제법을 설할지라도 다만 언설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그 이치를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 그 마음에는 집착함이 없느니라.
若二佛共語,不應說諸法名字。以衆生無及佛者,欲牽引令解故,說“是善、是惡”。
如『法華經』說火宅,以三乘引出諸子。但以名相說諸法,不壞第一義。
須菩提問:“雖以名相爲衆生說,無有實事,將無虛妄耶?”
佛答:“聖人隨世俗言說,於中無有名相著處。”
만약 진불과 화불 두 부처님을 함께 말한다 할지라도 제법의 이름까지는 말하지는 않아야 하나니, 중생으로서는 부처님에 미칠 이가 없으므로 알게 하고자 일부러 예를 끌어내어서 ‘이것은 착한 선(善)이다. 이것은 악한 악(惡)이다’라고 설명할 뿐이다”고 하셨다.
마치 '법화경(法華經)'에서 집에 불이 났을 때, 세 개의 수레인 삼승(三乘)으로써 여러 아들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것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으로써 제법을 말할 뿐, 제일의(第一義)를 파괴하지는 않으신 것이다.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비록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말씀하실지라도 실제의 실사(實事)가 없다면 허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성인은 세속의 말을 따라 설명하기는 하나, 그 가운데에서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佛此中自說因緣:如凡夫說苦,著名、取相;諸佛及弟子口說苦而心不著;若著,不名苦聖諦。
苦諦卽是名相等,無有定實;凡夫著者亦是名相,無有定實,云何空名相中著空名相?
부처님께서 이 가운데에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마치 범부는 괴로움의 고(苦)를 말하면 그 이름에 집착하는 착명(著名)하고 모양을 취하는 취상(取相)하지만,
모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입으로는 괴로움의 고(苦)를 말하면서도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나니, 만약 집착한다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라 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는 곧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 등이라서 정해지거나 진실함이 없으니,
범부로서 집착하는 이 역시도 그것은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이라서 정해지거나 진실한 것이 없거늘,
어떻게 공한 이름과 모양의 공명상(空名相) 가운데에서 공한 이름과 모양의 공명상(空名相)에 집착하겠는가?
若空名相中著名相者,空亦應著空,無相亦應著無相,無作亦應著無作,乃至無爲性亦應著無爲性。
是法皆如凡 夫苦諦相,但有名相;名相亦不住名相中。
菩薩入是名相等諸法門中,住是名相般若中,應觀一切法無有實。
만약 공한 이름과 모양의 공명상(空名相) 가운데에서 공한 이름과 모양의 공명상(空名相)에 집착한다면, 공(空) 또한 공(空)한 것에 집착해야하고, 모양이 없는 무상(無相)도 모양이 없는 무상(無相)에 집착해야하고, 조작이 없는 무작(無作)도 조작이 없는 무작(無作)에 집착해야하며, 나아가 무위성(無爲性)도 무위성(無爲性)에 집착해야 하는 것이다.
이 법은 모두 한결같이 여여한 여(如)이라서 범부도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에 대한 상(相)에 대하여 다만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이 있을 뿐이므로, 명상(名相) 또한 명상(名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보살은 이 이름과 모양의 명상(名相) 등의 모든 법문(法門) 가운데에 들어가 이 이름과 모양의 명상반야(名相般若) 가운데에 머무르나니, 마땅히 일체법은 진실이 없는 무유실(無有實)임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