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84권 3
大智度論 釋三慧品 第七十之餘 卷八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0. 삼혜품(三慧品)을 풀이함 ② 3
須菩提白佛言:“世尊!若道無法,涅槃亦無法,何以故分別說是須陁洹、是斯陁含、是阿那含、是阿羅漢、是辟支佛、是菩薩、是佛?”
佛告須菩提:“是皆以無爲法而有分別是須陁洹、是斯陁含、是阿那含、是阿羅漢、是辟支佛、是菩薩、是佛。”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도(道)에 법이 없다면, 열반에도 법이 없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분별하시어 ‘이것은 수다원이다, 이것은 사다함이다, 이것은 아나함이다, 이것은 아라한이다, 이것은 벽지불이다, 이것은 보살이다, 이것은 부처님이다’라고 말씀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두는 무위법(無爲法)으로서 ‘이것은 수다원이다, 이것은 사다함이다, 이것은 아나함이다, 이것은 아라한이다, 이것은 벽지불이다, 이것은 보살이다, 이것은 부처님이다’라고 분별함이 있는 것이니라.”
“世尊!實以無爲法故分別有須陁洹乃至佛?”
佛告須菩提:“世閒言說故有差別,非第一義,第一義中無有分別說。
何以故?第一義中無言說道,斷結故說後際。”
“세존이시여, 진실로 무위법(無爲法)이기 때문에 ‘수다원에서 부처님까지가 있다’고 분별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의 언설(言說)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일 뿐, 제일의(第一義)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제일의 가운데에서는 분별하여 말하는 것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제일의 가운데에서는 언어의 길인 언설도(言說道)가 없으며, 번뇌의 결(結)이 끊어져서 후제(後際, aparānta, 미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須菩提言:“世尊!諸法自相空中,前際不可得,何況說有後際!”
佛告須菩提:“如是!如是!諸法自相空中,無有前際,何況有後際!無有是處!須菩提!以衆生不知諸法自相空故,爲說是前際、是後際;諸法自相空中,前際、後際不可得。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應以自相空法行般若波羅蜜。
須菩提!若菩薩行自相空法,則無所著:若內法、若外法、若有爲法、若無爲法,若聲聞法、若辟支佛法、若佛法。”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법 스스로의 자상(自相)이 공(空)한 가운데에는 전제(前際, pūrvānta, 과거)조차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후제(미래)가 있다고 말하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제법의 자상공(自相空)인 가운데에서는 전제(과거)조차도 없거늘 하물며 후제(미래)가 있겠는가? 이러한 일은 있을 수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중생들은 제법이 자상공(自相空)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이것은 전제(과거)이다’ 이것은 후제(미래)이다‘라고 말하는 것일 뿐, 제법 스스로의 자상(自相)이 공(空)한 가운데에서는 전제(과거)나 후제(미래)를 얻을 수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응당 자상공법(自相空法)으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자상공법(自相空法)을 행한다면 안의 내법(內法,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과 바깥의 외법(外法,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과 유위법과 무위법과 성문법과 벽지불법과 부처님의 불법에 집착함이 없어지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常說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以何義故名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언제나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는데, 반야바라밀이란 어떠한 의(義, 이치)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부르는지요?”
佛言:“得第一度,一切法到彼岸,以是義故名般若波羅蜜。
復次,須菩提!諸佛、菩薩、辟支佛、阿羅漢用是般若波羅蜜得度彼岸,以是義故名般若波羅蜜。
復次,須菩提!分別、籌量破壞一切法,乃至微塵,是中不得堅實,以是義故名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으뜸가는 제일도(第一度, 바라밀)로써 일체법을 얻어서 저 언덕의 피안(彼岸)에 도달하나니, 이러한 의(義, 이치)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부르느니라.
또한 수보리야,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벽지불과 아라한도 이 반야바라밀로써 저 언덕에 건너갈 수 있나니, 이러한 의(義, 이치)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하느니라.
또한 수보리야, 분별하고 헤아려서 일체법을 파괴하고, 나아가 아주 작은 미진(微塵)까지도 파괴하되, 이 가운데서 견실함을 얻지 않나니, 이러한 의(義, 이치)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부르느니라.
復次,須菩提!諸法如、法性、實際皆入般若波羅蜜中,以是義故名般若波羅蜜。
復次,須菩提!是般若波羅蜜無有法若合若散、若有色若無色、若可見若不可見、若有對若無對、若有漏若無漏、若有爲若無爲。何以故?是般若波羅蜜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
또한 수보리야, 제법의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는 모두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들어가나니, 이러한 의(義, 이치)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부르느니라.
또한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은 합(合)한다거나, 흩어지는 산(散)이라거나, 유색(有色)이라거나, 무색(無色)이라거나, 볼 수 있는 가견(可見)이라거나, 볼 수 없는 불가견(不可見)이라거나, 대할 수 있는 유대(有對)라거나, 대할 수 없는 무대(無對)라거나,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라거나, 번뇌가 다한 무루(無漏)라다거나, 함이 있는 유위(有爲)라거나, 함이 없는 무위(無爲)라거나 간에, 어떠한 법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무색(無色)이고, 무형(無形)이고, 무대(無對)의 일상(一相)이니, 이른바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니라.
復次,須菩提!是般若波羅蜜能生一切法、一切樂說辯、一切照明。
須菩提!是般若波羅蜜,魔若魔天、求聲聞、辟支佛人及餘異道梵志、怨讎惡人不能斷壞菩薩行般若波羅蜜。何以故?是人輩,般若波羅蜜中皆不可得故。
須菩提!菩薩摩訶薩應如是行般若波羅蜜義。
또한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은 일체법과 일체의 요설변(樂說辯)과 일체의 조명(照明)을 생겨나게 할 수 있느니라.
또한 수보리야, 이 반야바라밀에서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을 악마나 악마의 마천(魔天)이나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사람이나 그 밖에 외도 범지(梵志)나 원수나 악인(惡人)이 파괴하지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러한 무리를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모두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의 이치(義)를 행하여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欲行深般若波羅蜜義,應行無常義、苦義、空義、無我義,亦應行苦智義、集智義、滅智義、道智義、法智義、比智義、世智義、他心智義、盡智義、無生智義、如實智義。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爲般若波羅蜜義故,應行般若波羅蜜。”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의 의(義, 이치)를 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무상하다는 이치의 무상의(無常義)와 괴로운 이치의 고의(苦義)와 공하다는 이치의 공의(空義)와 내가 없다는 이치의 무아의(無我義)를 행하여야 하며,
또한 고지(苦智, 사성제의 고제)의 고지의(苦智義)와 집지의(集智義, 집제)와 멸지의(滅智義, 멸제)와 도지의(道智義, 도제)와
최초로 법의 진상을 아는 지혜의 법지의(法智義)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의 무루의 지혜인 비지의(比智義)와
세속의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유루의 지혜인 세지의(世智義, 세속지)와
다른 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 및 무루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을 아는 타심지(他心智義)와
사성제의 완성을 아는 지혜로써, 괴로움은 이미 알려졌으며, 그 원인은 끊어졌고, 적멸의 경지는 체득되었고, 그 길로 가는 것이 이미 수습되었다고 아는 지혜의 진지의(盡智義)와
십지(十智, daśa-jñānāni) 가운데 하나로써 진지(盡智) 다음에 생하는 부동아라한의 지혜인 ‘더 이상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이 필요 없다고 아는 지혜의 무생지의(無生智義)와
일체법의 총상(總相) 별상(別相)을 실답게 바르게 알아 걸림이 없는 지혜인 여실지의(如實智義)를 행하여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의(義, 이치)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是深般若波羅蜜中,義與非義皆不可得,云何菩薩爲深般若波羅蜜義故應行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 속의 의(義, 이치)와 이치가 아닌 비의(非義)를 모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의 의(義, 이치)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는지요?”
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爲深般若波羅蜜義故,應如是念:‘貪欲非義,如是義不應行;瞋恚、愚癡非義,如是義不應行;一切邪見無義,如是義不應行。’
何以故?三毒如相,無有義、無有非義;一切邪見如相,無有義、無有非義。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깊은 반야바라밀의 의(義, 이치)를 위하여 생각하기를 ‘탐욕은 이치가 아닌 비의(非義)이므로 이와 같은 이치라면 행하지 않아야 하고, 성을 내거나 어리석은 일은 비의(非義)이므로, 이와 같은 이치라면 행하지 않아야 하며,
일체의 삿된 사견에는 이치가 없는 무의(無義)이므로, 이와 같은 이치라면 행하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삼독(三毒)의 여상(如相)에는 이치도 없는 무유의(無有義)이고, 이치 아닌 것도 없는 무유비의(無有非義)이며,
일체의 삿된 산견의 여상(如相)에도 이치도 없는 무유의(無有義)이고, 이치 아닌 것도 없는 무유비의(無有非義)이기 때문이다’고 해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菩薩摩訶薩應作是念:‘色非義,非非義、乃至識非義、非非義,檀波羅蜜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非義、非非義。’
何以故?須菩提!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時,無有法可得 若義、若非義。
須菩提!有佛、無佛,諸法法相常住,無有是義、無有非義。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應離義、非義。”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물질(色)은 이치가 아닌 비의(非義)요 이치 아닌 것도 아닌 비비의(非非義)이며,
나아가 분별의 식(識)은 이치가 아닌 비의(非義)요 이치 아닌 것도 아닌 비비의(非非義)이며,
단바라밀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이치가 아닌 비의(非義)요 이치 아닌 것도 아닌 비비의(非非義)이다’고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수보리야, 부처님이 아뇩다라사먁삼보리를 얻을 때에는 이치나 이치 아닌 의비의(義非義)로써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제법의 법상(法相)은 항상 머무르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라서 이러한 이치의 의(義)도 없고 비의(非義)도 없나니,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마땅히 의(義)와 비의(非義)를 여의어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何以故般若波羅蜜非義、非非義?”
佛告須菩提:“一切有爲法無作相,以是故,般若波羅蜜非義、非非義。”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이치도 아닌 비의(非義)이고, 이치 아닌 것도 아닌 비비의(非非義)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지음이 없는 무작상(無作相)이므로 반야바라밀은 이치도 아닌 비의(非義)이고, 이치 아닌 것도 아닌 비비의(非非義)이니라.”
“世尊!一切賢聖,若佛、若佛弟子,皆以無爲爲義,云何佛言般若波羅蜜無有義、非義?”
佛言:“雖一切賢聖,若佛、若佛弟子,皆以無爲爲義,亦不以增、亦不以損。
須菩提!譬如虛空如,不能益衆生、不能損衆生;如是,
須菩提!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無有增、無有損。”
“세존이시여, 일체 성현들과 부처님 또는 부처님의 불제자들은 모두가 무위(無爲)로써 이치(義)를 삼거늘,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에는 이치(義)와 비의(非義)가 없다’고 말씀하시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록 일체 성현과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불제자들이 모두 무위로써 이치(義)를 삼을지라도, 역시 늘어나게 하지도 않고 줄어들게 하지도 않는 부증불손(不增不損)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허공의 여(如)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도 못하고 손해되게 하지도 못하는 것과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에는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는 부증불손(不增不損)이니라.”
“世尊!菩薩摩訶薩不學無爲般若波羅蜜得一切種智耶?”
佛言:“如是!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學是無爲般若波羅蜜,當得一切種智,不以二法故。”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무위의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일체종지를 얻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 무위의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일체종지를 얻나니, 두 가지의 이법(二法)으로써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世尊!不二法能得不二法耶?” 佛言:“不也。”
“세존이시여, 두 법으로써 하지 않으면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을 얻을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須菩提言:“二法能得不二法耶?” 佛言:“不也!”
須菩提言:“世尊!菩薩摩訶薩若不以二法、亦不以不二法,云何當得一切種智?”
“須菩提!無所得卽是得,以是得無所得。”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두 가지의 이법(二法)으로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을 얻을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만약 두 가지의 이법(二法)으로써 하지 않고, 또한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으로써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체종지를 얻는지요?”
“수보리야,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곧 얻는 득(得)이니, 이 얻는 득(得)에는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니라.”
▶論.釋曰:須菩提復問世尊:“若一切法無作、無起相,云何分別有三乘?”
佛可其意,更說因緣:凡夫人未得道,著五衆故,亦著是空、無作、無起法故生疑:“云何分別有三乘?”汝已得道,不著五衆,亦不著空、無作、無起,云何生疑?佛此中自說因緣:“我以五眼尚不得色等諸法,狂人無眼而欲得!”
▷논. 해석한다. 수보리 존자가 다시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짓는 것도 없는 무작상(無作相)이고 일으킴도 없는 무기상(無起相)이라면, 어째서 3승(乘)이 있다고 분별하십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의 뜻이 옳다고 인정하면서 다시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범부는 아직 도를 얻지 못하여 오중(五衆, 오온)에 집착하고, 그 때문에 곧 이러한 공(空)하고, 무작(無相), 무기(無起)도 없는 법(法)에 집착하여 ‘어째서 삼승(三乘)이 있다고 분별하실까’고 의심하느니라.
그대는 이미 도를 얻었으므로 오중(오온)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공(空)하고, 무작(無相), 무기(無起)에도 집착하지도 않으리니, 무슨 의심이 일어나겠는가?”라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나는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불안(佛眼) 법안(法眼)의 오안(五眼)을 가지고서도 오히려 물질(色) 등의 제법을 얻지 못하거늘, 미친 광인(狂人)이 눈도 없으면서 얻고자 하는구나”라고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