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84권 1
大智度論 釋三慧品 第七十之餘 卷八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0. 삼혜품(三慧品)을 풀이함 ② 1
▶經. 須菩提白佛言:“世尊!若諸法無所爲、無所作,不應分別有三乘:聲聞、辟支佛、佛乘?”
▷경.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에 하는 것도 없는 무소위(無所爲)이고, 짓는 것도 없는 무소작(無所作)이라면, ‘성문승(聲聞乘)과 벽지불승(辟支佛乘)과 불승(佛乘)의 삼승이 있다’고 분별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佛告須菩提:“諸法無所爲、無所作,無有分別;有所爲、有所作中有分別。
何以故?凡夫愚人不聞聖法,著五受衆,所謂色、受、想、行、識,著檀波羅蜜,乃至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人念有是色、得是色,乃至念有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得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菩薩作是念:‘我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我當度衆生生死。’
須菩提!我以五眼觀,尚不得色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狂愚人無目,而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度脫衆生生死!”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제법에 하는 것도 없는 무소위(無所爲), 짓는 것도 없는 무소작(無所作) 가운데에서는 분별이 없으며,
하는 것도 있는 유소위(有所爲)이고 짓는 것도 있는 유소작(有所作) 가운데에세는 분별이 있느니라.
왜냐하면, 범부나 어리석은 사람은 성인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색(色)ㆍ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의 오수중(五受衆, 오중, 오온)에 집착하고 단(보시)바라밀에 집착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사람은 ‘이 물질(色)은 있는 것이며, 이 물질(色)을 얻는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는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생각하나니,
이러한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한다. 나는 중생들을 생사(生死)에서 제도해야 한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나는 오안(五眼)으로써 관찰하여도 오히려 물질(色)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를 얻지 못하거늘, 이렇게 미치고 어리석은 광우인(狂愚人)은 눈도 없으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고, 중생들을 생사로부터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고자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佛以五眼觀不見衆生生死中可度者,今世尊云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分別衆生有三聚:正定、邪定、不定?”
“須菩提!我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初不得衆生三聚:若正定、若邪定、若不定。
須菩提!以衆生無法有法想,我以除其妄著,世俗法故說有得,非第一義。”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부처님께서 오안으로 자세히 보셔도 중생으로서 생사하는 가운데서 제도할 수 있는 이를 보지 못하신다면, 지금 세존께서는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셔서 중생에게는 미혹과 견혹을 끊어 반드시 열반에 이르게 결정된 정정(正定, 정정취, 필정취)과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사정(邪定, 사정취, 필사취)과 열반에 이를지 지옥에 떨어질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부정(不定, 부정취)의 삼취(三聚)가 있다고 분별하시는지요?”
“수보리야,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었지만, 처음부터 중생의 삼취(三聚)인 정정과 사정과 부정은 얻지 않았느니라.
수보리야, 중생에게는 법이 없다ㆍ법이 있다는 생각이 있기에 나는 그 허망한 집착을 없애주고자 세속법으로써 얻는 것이 있다고 짐짓 말한 것일 뿐, 이는 제일의(第一義)가 아니니라.”
“世尊!非住第一義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佛言:“不也!”
“세존이시여, 제일의(第一義)에 머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이 아닌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世尊!住顚倒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佛言:“不也!”
“세존이시여, 뒤바뀜의 전도(顚倒)에 머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世尊!若不住第一義中得,亦不住顚倒中得,將無世尊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세존이시여, 만약 으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 안에 머물러서 얻지도 않았고, 또한 뒤바뀜의 전도(顚倒)에 머물러서 얻지도 않았다면, 세존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佛言:“不也!我實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所住若有爲相、若無爲相。
須菩提!譬如佛所化人不住有爲相、不住無爲相,化人亦有來有去、亦坐亦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나는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지만, 유위상(有爲相)에든 무위상(無爲相)에든 머무는 바가 없는 무소주(無所住)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이 유위상(有爲相)에 머무르지 않고 무위상(無爲相)에 머무르지 않고서도, 저 변화한 화인(化人)은 역시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또한 앉고 서기도 하는 것과 같으니라.
須菩提!是化人若行檀波羅蜜,行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般若波羅蜜,行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五神通,行四念處乃至行八聖道分,入空三昧、無相三昧,無作三昧,行內空乃至無法有法空,行八背捨、九次第定,佛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大慈大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轉法輪。是化人化作無量衆生,有三聚。
須菩提!於汝意云何?是化人有行檀波羅蜜,乃至有三聚衆生不?”
須菩提言:“不也!”
수보리야, 저 변화한 화인(化人)은 단(檀, 보시)바라밀을 행하고 시라(尸羅, 지계)바라밀과 찬제(羼提, 인욕)바라밀과 비리야(毘梨耶, 정진)바라밀과 선(禪)바라밀과 반야(般若)바라밀을 행하며, 사선(四禪)과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무색정(四無色定)과 오신통(五神通)을 행하고 사념처(四念處)를 행하며, 나아가 팔성도분(八聖道分)을 행하고 공삼매(空三昧)와 무상삼매(無相三昧)와 무작삼매(無作三昧)에 들어가며,
내공(內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행하고 팔배사(八背捨)와 구차제정(九次第定)과 부처님의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와 삼무애지(四無礙智)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행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법륜(法輪)을 굴리며, 저 변화한 화인(化人)은 무량한 중생에게 삼취(三聚)가 있는 것을 변화로 만들어 내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 변화한 화인(化人)은 단바라밀을 행함이 있고 나아가 삼취의 중생까지도 있는 것인가?”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須菩提!佛亦如是,知諸法如化,如化人度化衆生,無有實衆生可度。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如佛所化人行。”
“수보리야, 부처님 또한 이와 같아서 제법은 변화한 화(化)와 같고, 변화한 화인(化人)이 변화한 화중생(化衆生)을 제도하는 것과 같아서, 실로 제도할 수 있는 중생이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한 화인(化人)과 같이 행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如化,佛與化人有何等差別?”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변화한 화(化)와 같다면 부처님께서는 변화한 화인(化人)과 어떠한 차별이 있는지요?”
佛告須菩提:“佛與化人無有差別。何以故?佛能有所作,化人亦能有所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변화한 화인(化人)과 차별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부처님이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면, 변화한 화인(化人)도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니라.”
“世尊!若無佛,化獨能有所作不?”
佛言:“能有所作。”
“세존이시여, 만약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아도 변화한 화인(化人) 혼자서 하는 일이 있는 유소작(有所作)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능히 하는 일이 있는 유소작(有所作)이니라.”
須菩提言:“世尊!云何無佛,化能有所作?”
수보리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는 데도 변화한 화인(化人)이 능히 하는 일이 있는 유소작(有所作) 인지요?”
“須菩提!譬如過去有佛名須扇多,爲欲度菩薩故,化作佛已,而自滅度;是化佛住半劫作佛事,授應菩薩行者記已,滅度;一切世閒衆生知佛實滅度。
須菩提!化人實無生無滅。如是,須菩提!菩薩行般若波羅蜜,當信知諸法如化。”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과거 세상에 수선다(須扇多)부처님께서 계셨는데 보살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변화로 화불(化佛)을 만들어 놓으시고 자신은 멸도하셨으니, 그 변화한 부처님인 화불(化佛)은 반겁(半劫) 동안 머무르며 불사(佛事)를 하시고, 보살의 행과 상응하는 이들에게 수기를 주고 나서 멸도하시자,
일체 세간의 중생들은 부처님께서 진실로 멸도하신 것으로 안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변화한 화인(化人)은 진실로 나는 것도 없는 무생(無生)이고 없어지지도 얺는 무멸(無滅)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제법은 마치 변화하는 화(化)와 같은 것으로 믿고 알아야 하느니라.”
“世尊!若佛、佛所化人無差別者,云何令布施淸淨?如人供養佛,是衆生乃至無餘涅槃,福德不盡;若供養化佛,是人乃至無餘涅槃,福德亦應不盡耶?”
佛告須菩提:“佛以諸法實相故,與一切衆生天及人作福田;化佛亦以諸法實相故,與一切衆生天及人作福田。”
“세존이시여, 만약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만든 변화한 화인(化人)이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보시를 청정히 할 수 있는지요?
마치 사람이 부처님께 공양하면 이 중생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기까지 그 복덕이 다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변화한 화불(化佛)께 공양한 사람도 무여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복덕이 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제법의 실상(實相)으로써 일체 중생과 하늘과 사람들에게 복전(福田)이 되어 주며, 변화한 화불(化佛) 역시 제법의 실상으로써 일체 중생과 하늘과 사람들에게 복전이 되어 주느니라.”
佛告須菩提:“置是化佛及於化佛所種福德,若有善男子、善女人但以敬心念佛,是善根因緣,乃至畢苦,其福不盡。
須菩提!置是敬心念佛、若有善男子、善女人但以一華散虛空中念佛,乃至畢苦,其福不盡。
須菩提!置是敬心念佛、散華念佛,若有人一稱南無佛,乃至畢苦,其福不盡。
如是,須菩提!佛福田中種其福無量。
이어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변화한 화불(化佛)과 그 부처님께서 심은 복덕은 그만 두고라도,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다만 공경하는 경심(敬心)으로 부처님을 염(念)한다면, 이 선근의 인연으로 필경에 그에게 괴로움의 고(苦)는 다 없어지고 그 복이 다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 공경하는 경심(敬心)으로 부처님을 염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다만 한 송이의 꽃을 허공 가운데 뿌리면서 부처님을 염하기만 하여도, 필경에 그에게 괴로움의 고(苦)는 다 사라지고 그 복은 다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 공경하는 경심(敬心)으로 부처님을 염하고 또 꽃을 뿌리면서 부처님을 염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한 번 ‘나무불(南無佛)’하고 부르면, 필경에 괴로움의 고(苦)는 다 사라지고 그 복이 다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부처님의 복전 가운데에 심은 복은 무량하느니라.
以是故,須菩提!當知佛與化佛無有差別,諸法法相無異故。
須菩提!菩薩摩訶薩應如是行般若波羅蜜,入諸法實相中。是諸法實相不應壞,所謂般若波羅蜜相,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
그러므로 수보리야, 부처님은 변화한 화불(化佛)과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제법의 법상(法相)에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제법의 실상에 들어가야 하며, 이 제법의 실상을 파괴하지 않아야 하나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의 상(相)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相)에 이르기까지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諸法實相不應壞,佛何以故壞諸法相,言是色,是受、想、行、識,是內法、是外法,是善法、是不善法,是有漏、是無漏,是世閒、是出世閒,是有諍法、是無諍法,是有爲法、是無爲法等?世尊!將無壞諸法相?”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의 실상이 파괴되지 않아야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제법의 법상(法相)에서 ‘이것은 물질(色)이다, 이것은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다, 이것은 안의 내법(內法)이다, 이것은 바깥의 외법(外法)이다, 이것은 착한 선법(善法)이다, 이것은 착하지 못한 불선법(不善法)이다, 이것은 유류(有漏)이다, 이것은 무루(無漏)이다, 이것은 세간(世間)이다, 이것은 출세간(出世間)이다, 이것은 다툼이 있는 유쟁법(有諍法)이다, 이것은 다툼이 없는 무쟁법(無諍法)이다,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이다, 이것은 무위법(無爲法)이다’라고 말씀하시어 파괴하시는지요?
세존이시여, 장차 모든 제법의 법상(法相)이 파괴되지 않겠는지요?”
佛告須菩提:“不也!以名字相故示諸法,欲令衆生解;佛不壞諸法法相。”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이름의 명자상(名字相)으로써 제법을 보여서 중생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할 뿐, 부처님은 제법에 대한 법상(法相)을 파괴하지 않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