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83권 2
大智度論 釋大方便品 第六十九之餘卷八十三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9. 대방편품을 풀이함 ② 2
▶論. 釋曰:須菩提意:以四種門雖安隱,以甚深故,利根者乃得入。佛答:“無不入者。”
▷논. 해석한다.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네 가지의 사문(四門)으로써 비록 안온하기는 하나 매우 깊기 때문에 근기가 영리한 이근자(利根者)라야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부처님께서는 “들어가지 못할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다.
須菩提明智慧利根者能入,佛意:但一心精進欲學者可入。
譬如熱時,淸涼池,有目有足皆可入;雖近,不欲入者則不入。四門、般若波羅蜜池亦如是,四方衆生無有遮者。
수보리 존자는 지혜가 있고 근기가 영리한 이근자(利根者)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밝혔고,
부처님의 생각으로는 다만 한 마음의 일심(一心)으로 정진하여 배우고자 하는 이라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더울 때에는 맑고 서늘한 연못에 눈과 발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비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들어가지 않고자 하는 이라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사문(四門)의 반야바라밀의 연못도 이와 같아서 사방(四方)의 중생을 막지 않는 것이다.
不懈怠者是正精進,不妄念者是正念,不亂心者是正定,如等四門是正見,正見等安住是戒行 此八聖道能得般若波羅蜜。
須菩提小乘智短故,但說“利根者能入”;佛大乘大智故,說“雖中根、鈍根,八法和合故,能入是四門”。
佛此中以大悲氣故說“中根、鈍根皆可得入”。
'게을리 하지 않는 불해태(不懈怠)’라고 함은 곧 바른 정진의 정정진(正精進)이요,
‘허망한 기억을 하지 않는 불망념(不妄念)’이란, 바른 기억의 정념(正念)이며,
‘산란하지 않은 마음의 불난심(不亂心)’이라는 것은 바른 선정의 정정(正定)이니,
이러한 등의 사문은 곧 바른 소견의 정견(正見)을 말하는 것이다.
바른 소견의 정견(正見)에 편히 머무르는 것이 바로 계행(戒行)이니,
이 여덟 가지 거룩한 팔성도(八聖道)가 반야바라밀을 얻게 하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소승으로서 지혜가 짧기 때문에 다만 근기가 영리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대승으로서 지혜가 크신 대지(大智)이시기 때문에 비록 중간 근기의 중근(中根)이요, 둔한 근기의 둔근(鈍根)이라 할지라도 여덟 가지 법이 화합하여서 이 사문(四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으니,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대비 기운의 대비기(大悲氣) 때문에 중근이나 둔근이라도 모두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若菩薩能如般若所說六波羅蜜學,不久當得薩婆若。如聲聞法中,不但以正見得道,以八分合行故;大乘法亦如是,不但學般若故得薩婆若,與五波羅蜜合故得。是故說:“菩薩如所說般若波羅蜜,當學得一切智。”
만약 보살이 반야에서 말씀하신 바대로 6바라밀을 배운다면 오래지 않아서 살바야를 얻게 되지만,
성문법에서는 바른 소견의 정견(正見)만으로는 도를 얻지 못하고, 여덟 가지를 한데 합쳐서 행하여야만 얻으며,
대승법도 이와 같아서, 다만 반야만을 배워서는 얻지 못하고 살바야와 다섯 가지 바라밀이 화합하므로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하기를 “보살이 설한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일체지를 얻는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上說“但般若能至一切種智”,今何以言“與五波羅蜜合故得至”?
묻나니, 위에서는 “다만 반야만이 일체종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무엇 때문에 “다섯 가지 오바라밀과 화합하기 때문에 이르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常說與六波羅蜜合故得至。或時有淸淨佛國,但聞實相得至薩婆若,不用次第行諸波羅蜜。
此中說菩薩得薩婆若,則般若功報已足。今但讚行般若人力勢,如經中說:“是菩薩行般若,所有魔事起卽滅”
從上“諸佛所念”來至此,皆是讚菩薩行般若功德,乃至“分別善知三乘”。
답하나니, 언제나 “6바라밀이 화합하기 때문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간혹 청정한 부처님 불국토에서는 다만 실상(實相)만을 듣기 때문에 살바야에 이르기도 하나니, 거기에서는 차례로 모든 바라밀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는 보살이 살바야를 얻으면 곧 반야 공덕의 과보가 이미 충족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다만 반야를 행하는 사람의 세력을 찬탄할 뿐이니,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보살이 반야를 행할 때에는 모든 악마의 마사(魔事)가 일어나고자 하다가도 곧 소멸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으며,
위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신다’는 것에서부터 여기까지의 모두는 보살이 반야를 행하는 공덕을 찬탄한 것이며, 분별하여 3승(乘)을 잘 알게 하신 것이다.
善知字門者,如文字陁羅尼中說。非字名如、法性、實際,此中無文字。
略說義,是菩薩無量福德力故,善知二法:世閒及涅槃。若厭世苦,則念涅槃;若欲沒涅槃,還念世閒。
集諸福德道故,善知字;破福德中顚倒故,善知無字。
‘자문을 잘 안다는 선지자문(善知字門)’이라 함이란, 문자다라니(文字陀羅尼)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글자가 아닌 비자(非字)’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말하는 것이니, 이 중에는 문자가 없는 것이다.
요약하여 그 뜻을 말하자면, 이 보살이 무량한 복덕력(福德力) 때문에 세간과 열반의 두 가지 이법(二法)을 잘 아는 것이니, 만약 세간의 괴로움을 싫어하면 곧 열반을 생각하게 되고, 만약 열반에 빠지려 한다면 다시 세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복덕도(福德道)를 모으기 때문에 글자를 잘 알며, 복덕 속에 있는 뒤바뀌어 전도된 것을 깨뜨리기 때문에 글자 없는 무자(無字)인 것을 잘 아는 것이다.
語、不語亦如是。一語者,以是一語能分別多少淨語、不淨語。一語、二語、多語,男語、女語等,音聲各異。菩薩善知是事故能伏諸邪道及諸豪勝。善知色乃至識二種相,若常、若無常,如先說。
말의 어(語)와 말이 아닌 불어(不語)도 역시 이와 같으며,
‘한 마디 말의 일어(一語)’란, 이 한 마디의 일어(一語)로써 많고 적은 말과 깨끗한 말과 깨끗하지 않은 말과 한 번의 일어(一語),두 번의 이어(二語), 여러 번의 다어(多語), 남자의 말인 남어(男語), 여인의 말인 여어(女語) 등의 그 음성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니,
보살이 이러함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삿된 사도(邪道)와 모든 뛰어난 호승(豪勝)한 것들을 굴복시키는 것이며,
색(色)ㆍ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에 이르기까지 항상하거나 무상하다고 하는 등의 두 가지 상(相)을 잘 아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善知捨道者,菩薩從一地至一地,捨下地不憂,得上地不貪。不捨道者,住是地中。
邪見;次世閒正見;一切見:學、無學等諸見。行者,十六行。
善知須陁洹者,人也;須陁洹道者,見諦道也;須陁洹果,第十六心、心數法及無漏戒等諸法。
乃至佛亦如是。善知諸根者,善分別二十二根。
‘도를 버리는 사도(捨道)를 잘 안다’고 함이란, 보살이 한 지(地)로부터 다른 지(地)에 이러렀을 때, 아래의 지를 버리고도 근심하지 않고, 위의 지를 얻고서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며,
‘도를 버리지 않는 불사도(不捨道)’라 함은, 이 지(地)에서 삿된 사견에 머무르다가도, 다음에는 세간의 바른 소견과 다른 일체의 소견이나 유학(有學)ㆍ무학(無學) 등 모든 소견에 머무르는 것이다.
‘행(行)’이란,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사성제를 관찰하는 16행(行, 16행상行相, ṣodaṡa-ākāra)을 말하는 것이며,
‘수다원을 잘 안다’고 함은 사람(人)이요,
‘수다원도(須陁洹道)’라고 함은 진리를 보아 견혹에서 벗어나는 견도의 견제도(見諦道, 초과)이며,
‘수다원과(須陁洹果)’라고 함은 제16심(十六心, 예류과)이며,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과 무루계(無漏戒)등의 모든 법으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으며,
‘모든 근(根)을 잘 안다’고 함은 22근(根)을 잘 분별하는 것이다.
22근(根)=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의근(意根)ㆍ남근(男根)ㆍ여근(女根)ㆍ명근(命根)ㆍ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호근(護根)ㆍ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미지근(未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무지근(無知根)
有人言:觀可度衆生根有利鈍,具足者可度,不具足者未可度。又菩薩亦自知善根具足、不具足;如鳥子自知毛羽具足,爾乃可飛。
慧者,一切智慧摠相。疾慧者,速知諸法。有人雖疾而智力不强,如馬雖疾而力弱;有人雖有强智力而不利,譬如鈍斧雖有大力,不能破物。
어떤 분이 말하기를 “제도해야 할 중생을 관찰함에 있어서 영리한 이(利) 이와 무딘 둔(鈍)의 사람이 있으니, 두루 갖춘 이는 제도할 수 있지만 두루 갖추지 못한 이는 제도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보살도 자기 스스로가 두루 갖추었는가 갖추지 못하였는지를 아는 것은, 마치 어린 새가 자신의 깃털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날아야 하는 것과 같으며,
‘지혜의 혜(慧)’라고 함은 일체 지혜의 전체적인 총상(總相)이며,
‘빠른 지혜의 질혜(疾慧)’라고 함은 제법을 빠르게 아는 것이니, 어떤 사람은 비록 빠를지라도 지력(智力)이 강하지 못하니, 마치 말이 비록 빠르기는 하나 힘이 약한 것과 같으며,
어떤 사람은 비록 강한 지력(智力)이 있기는 하나 예리하지 못하나니, 마치 도끼가 무뎌서 비록 큰 힘이 있기는 하나 물건을 쪼갤 수 없는 것과 같다.
出慧者,於種種難中能自拔出,亦能於諸煩惱中自拔出三界入涅槃。達慧者,究盡通達,於佛法中乃至漏盡、得涅槃,破壞諸法到法性中。廣慧者,道俗種種經書論議,於佛法中有無,無不悉知。
深慧者,觀一切法無量、無相、不可思議。世閒深智慧者,能知久遠事,利中有衰、衰中有利。
‘벗어나는 지혜의 출혜(出慧)’라고 함은, 갖가지의 어려움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또한 모든 번뇌 속에서 스스로 삼계(三界)를 벗어나 열반에 드는 것이며,
‘통달한 지혜의 달혜(達慧)’라고 함은, 부처님의 불법을 두루 궁구하여 통달하여, 번뇌를 다 끊고 열반을 얻기까지 제법을 파괴하여 법성(法性)에 드는 지혜이며,
‘넓은 지혜의 광혜(廣慧)’라고 함은, 도속(道俗)의 갖가지 경서(經書)와 논의(論議)가 불법 가운데에도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모두 아는 지혜이며,
‘깊은 지혜의 심혜(深慧)’라고 함은 일체법에 대하여 무량하고 무상(無相)이며, 불가사의한 세간임을 관찰하는 지혜이며,
‘깊은 지혜의 심지혜(深智慧)’라고 함은 멀고 오래된 일을 알며, 이로운 가운데 쇠함이 있는 이중유쇠(利中有衰)이고, 쇠하는 가운데 이로움이 있는 쇠중유리(衰中有利)를 아는 지혜이다.
大慧者,摠具上諸慧名爲大,又復一切衆生中佛爲大,諸法中般若爲大;知佛、信法,與大法和合,故名爲大。
無等慧者,於般若中不著般若,能如是深入,更無異法可喩。
復次,菩薩漸漸行道,到不可思議性中,無有與等者,故名無等。
‘큰 지혜의 대혜(大慧)’라고 함은, 위의 모든 지혜를 통틀어 갖춘 것을 큰 대(大)라고 한 것이며,
또 일체 중생들 가운데에 부처님이 제일 크며, 제법 가운데 반야가 제일 큰 것이므로, 부처님을 알고 법을 믿어서 대법(大法)과 화합하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며,
‘견줄 데 없는 무등혜(無等慧)’라고 함은, 반야 가운데에서 반야에 집착하지 않고 이와 같이 깊이 들어가되 다시 그와 비교할 만한 다른 법이 없다는 것이며,
또한 보살이 점차 도를 행하여 불가사의한 성품에 이르면 그와 비교할 만한 이가 없게 되기 때문에 비교할 것이 없는 무등(無等)이라 한 것이다.
寶慧者,如如意寶,自無定色,隨前物而變;般若亦如是,自無定相,隨諸法行。又如如意珠,隨願皆得;般若亦如是,有人行者能得佛願,何況餘者!
過去已滅、未來未起,不得言有、不得言無,於是中能行實相,是名善知。
現在法念念生滅故不可知,而能通達,是名善知現在世。
‘보배의 지혜인 보혜(寶慧)’라고 함은, 마치 여의보(如意寶)는 스스로 정해진 빛깔없어서 앞에 있는 물건에 따라 변하는 것과 같이, 반야 역시 이와 같아서 스스로 일정하게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어서 제법의 행(行)에 따른다는 것이며,
또한 여의주는 소원을 따라 모두 얻게 하여 주는 것과 같이, 반야 또한 그와 같아서 어떤 사람이 수행하면 부처님이 되는 소원을 얻게 되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것이겠는가?
과거는 이미 소멸하였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므로 ‘있다는 유(有)’라고 말할 수 없고 ‘없다는 무(無)'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이 가운데서 그 실상(實相)을 행할 수 있는 것을 이름하여 ‘잘 안아는 선지(善知)’라 하며,
현재의 법은 생각 생각의 염염(念念)마다 생멸(生滅)하는 것이므로 알 수는 없으나, 능히 통달하여 아는 까닭에 이를 이름하여 ‘현재의 세상을 잘 하는 선지현재세(善知現在世)’라고 한 것이다.
方便名欲成辦其事,能具足因緣多少得所,於中不令有失。如菩薩雖行空,不證實際;雖行福德,亦復不著。
待衆生者,如估客、大將雖乘駃馬能疾到所止,故待衆人;菩薩亦如是,乘智慧駃馬,雖能疾入涅槃,亦待衆生故不入。
‘방편(方便)’이란, 그 일을 이루어 마치고자 하여 인연의 많고 적음을 두루 갖추어 그 가운데에서 과실이 있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마치 보살이 비록 공을 행할지라도 실제(實際)를 증득하지 못하고, 비록 복덕을 행할지라도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중생을 기다린다는 대중생(待衆生)’이란, 마치 장사꾼의 대장이 비록 날랜 말을 타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지라도 짐짓 그 일행들을 기다려야 하는 것과 같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지혜의 날랜 말을 타고 열반에 빨리 들어갈지라도 역시 중생들을 기다리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이다.
善知衆生種種善惡心。深心者,現在雖惡,其本則好;如父母撾子,外惡內善;如佛度鴦崛魔羅,知其淺心雖惡,深心實善。菩薩觀衆生信等五善根,從深心中來,是時可度。
‘마음을 잘 안다는 선지심(善知心)’이란, 중생들의 갖가지 선악심(善惡心)을 잘 안다는 것이며,
‘깊은 마음의 심심(深心)’이란, 현재는 비록 악할지라도 그 근본만은 좋은 것이니, 마치 부모가 자식을 회초리로 때릴 때에 겉으로는 미워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랑하는 것과 같으며,
마치 부처님께서 앙굴마라(鴦堀魔羅)를 제도하실 때, 그의 겉마음은 비록 악할지라도 그 속마음은 진실로 선함을 아신 것과 같은 것으로,
보살이 중생의 신근(信根) · 정진근(精進根) · 염근(念根) · 정근(定根) · 혜근(慧根) 등의 다섯 가지 오선근(五善根)이 그 심심(深心)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관찰한 때에 제도할 수 있는 것이다.
義者有二,亦法、亦名。語者語言,以名字名物。得義無㝵、法無㝵故,名善知義。辭無㝵、樂說無㝵故,名善知語。
菩薩住是二善知中,能以三乘度衆生,是名善知分別三乘。如是難解故解說,易解者不說。
‘뜻의 의(義)’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법(法)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의 명(名)이다.
‘말의 어(語)’라는 것은 언어(言語)이니, 명자(名字)로 사물을 표현한 것이며,
제법의 이치를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의무애(義無礙)와
제법을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법무애(法無礙)를 얻은 까닭에 ‘뜻을 잘 아는 선지의(善知義)’라고 한 것이며,
말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사무애(辭無礙)와
중생의 원에 따라 상응하는 설법을 함에 막힘이 없는 요설무애(樂說無礙)을 얻은 까닭에 ‘말을 잘 아는 선지의(善知義)’라고 한 것이다.
보살은 이 두 가지의 잘 아는 선지의(善知義) 가운데 머무르면서 3승(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나니,
이를 이름하여 ‘3승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선지분별삼승(善知分別三乘)’이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경문에서 알기 어려운 것들만 해설하고 알기 쉬운 것은 해설하지 않는다.
問曰:何以故先說“善知色乃至識”,後說“知衆、界、入”?何以先說“善知緣”,後說“因、次第、緣、增上”?
묻나니, 무엇 때문에 앞에서는 “색(色)ㆍ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을 잘 안다”고 말씀하시고 나중에는 “중(衆)ㆍ계(界)ㆍ입(入)을 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앞에서는 “연(緣)을 잘 안다”고 말씀하시고 뒤에서는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先廣說,後略說。復有人言:“先五衆有三種:善、不善、無記。戒衆等五,亦名爲五衆。”緣,先略說,後廣說。
답하나니, 앞에서는 자세히 말씀하신 것이고 뒤에서는 간략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앞의 오중(五衆)에는 선(善)ㆍ불선(不善)ㆍ선(善)이나 악(惡)이 발현하지 않은 무기(無記)의 세 가지가 있으니, 계중(戒衆) 정중(定衆) 혜중(慧衆) 해탈중(解脫衆) 해탈지견중(解脫知見衆) 등의 다섯 가지를 오중(五衆)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며,
두 번째 질문인 연(緣)에 관한 것은, 앞의 것은 간략한 말씀이요, 나중은 것은 자세한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