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82권 5
大智度論 釋大方便品 第六十九 卷八十二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9. 대방편품(大方便品)을 풀이함 ① 5
問曰:五波羅蜜如諸川流,般若波羅密應如大海;今何以言“五波羅蜜爲般若波羅蜜所守護故,得入薩婆若”?
묻나니, 다섯 바라밀은 마치 모든 냇물의 흐름과 같고, 반야바라밀은 마치 큰 바다와 같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의 수호를 받기 때문에 살바야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汝不聞先說般若有種種名字耶? 薩婆若卽是般若異名 五波羅蜜福德,入般若波羅蜜中,卽得淸淨般若;般若淸淨故,得佛道,變名薩婆若。是故言“入薩婆若”,卽是“入般若”。
답하나니, 그대는 앞에서 반야에는 갖가지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가?
살바야는 바로 반야의 다른 명칭이니,
다섯 바라밀의 복덕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들어가서 곧 청정한 반야를 얻게 되는 것이며,
반야가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불도를 얻으며,
이름을 바꾸어 살바야라 하기 때문에 “살바야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곧 반야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有人疑:諸波羅蜜各各有力,何以獨言“般若波羅蜜功用爲大”?
是故言:譬如人之右手,自然穩便;五波羅蜜如左手,不得般若波羅蜜,則所作不便。
어떤 사람은 의심하기를 ‘모든 바라밀은 저마다 각각 가진 힘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유독 반야바라밀의 작용하는 공능(功能) 즉 공용(功用, sāmarthya)만을 크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오른손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리한 것과 같으니, 다섯 바라밀은 마치 왼손과 같아서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면 하는 일이 불편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며,
如人開目造事,所作皆成;如導師在前,餘伴隨逐,進止取捨,皆隨導師,不得自在。
般若波羅蜜亦如是,導五波羅蜜,所可修集成辦,皆仰般若。
此中佛自說譬喩:如轉輪聖王輪寶在四兵前導,輪住餘寶則住。輪是般若波羅蜜,常在五波羅蜜前導,五波羅蜜隨逐。
사람이 눈을 뜨고 짓는 일 모두는 잘 성사되는 것과 같이, 마치 길잡이의 도사(導師)가 앞에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따라가면서, 가고 멈추고 취하고 버리는 것 모두를 도사(導師)가 하는 대로 따라 하여서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 역시 그와 같아서 다섯 바라밀을 인도하여 닦고 쌓는 것을 이루어 성취하므로, 모두가 반야를 우러르게 되는 것이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으니, “전륜성왕의 윤보(輪寶)가 사병(四兵)을 앞에서 인도할 때, 윤보가 서면 그 밖의 다른 보배들도 곧 서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윤보는 곧 반야바라밀이어서 항상 다섯 바라밀 앞에 있으면서 인도하면, 다섯 바라밀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다.
如『般若』初品中說:“菩薩欲具足檀波羅蜜,不見施者、受者及財物。”先籌量分別斷一切著,然後布施,是則般若在前導。
如輪寶伏四天下已,常在王宮,住虛空中。聖王是菩薩;輪是般若,破諸魔民煩惱已,入薩婆若宮中住。
是輪無所分別:“我常在前,餘寶在後;無憎愛心:是可來、是不可來。”般若無分別亦如是:“檀波羅蜜隨我來,尸羅波羅蜜勿來。”如經中廣說。
마치 '반야경'의 초품(初品) 가운데에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단(檀, 보시)바라밀을 두루 갖추고자 한다면 보시하는 시자(施者)와 받는 수자(受者)와 재물(財物)을 보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이,
먼저 헤아리고 분별하여 일체의 집착을 끊은 연후에야 보시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반야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이다.
윤보는 사천하(四天下)를 항복시키고 나서 항상 왕궁에 있으면서 허공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이, 전륜성왕은 보살이고 윤보는 곧 반야이니, 모든 악마의 백성들의 번뇌를 파괴하고 나서 살바야의 궁중으로 들어가 머무르는 것이다.
이 윤보는 ‘나는 항상 앞에 있고 다른 보배들은 뒤에 있다’는 분별이 없으며,
‘그것은 올 수 있다. 그것은 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도 없으니,
반야도 이와 같아서 ‘단바라밀은 나를 따라오라. 시라바라밀은 오지 말라’고 하는 분별이 없으니,
마치 경에서 자세히 광설(廣說)한 것과 같다.
此中佛自說因緣:“一切法性無所能作。”須菩提聞是已,白佛言:“若一切法性空、無所有,云何菩薩行六波羅蜜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答:“菩薩行般若,作是念:‘諸法雖畢竟空,衆生狂顚倒故,深著不解;我若不以方便力,則不可得度。’”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일체법의 성품에는 능히 짓는 능작자(能作者, kartṛ. 행위나 일의 주체)가 없다”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일체법의 성품이 공(空)하여 아무것는 무소유(無所有)라면, 어떻게 보살이 육바라밀을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지요?”라고 하자,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반야를 행하면서 ‘제법이 비록 필경공일지라도 중생들이 미치고 뒤바뀐 광전도(狂顚倒)되었으므로 깊이 집착하여 이해하지 못하나니, 만약 내가 방편력(方便力)을 쓰지 않으면 그들을 제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며,
方便者,所謂金色身、三十二相,八十隨形好,無量光明,神通變化,能以一指動十方三千大千國土,梵音說法無厭,色身,十力、四無所畏、十八不共法、無㝵解脫、一切種智、大慈大悲等。具足無量諸佛法,然後能教化衆生,衆生必能信受。
得如是力,假令妄語,人猶當信,何況實語!如經說“我雖知諸法實相,能入涅槃,但爲衆生故行檀波羅蜜”等,如經中廣說,乃至“不可以異事度衆生”。
'방편(方便)'이란, 금빛으로 된 몸의 금색신(金色身)과 32상호(相好)과 80수형호(隨形好)와 무량한 광명과 신통 변화로써 한 손가락으로도 시방의 3천대천국토를 움직이고, 범음(梵音)으로 설법하면서 싫증이 없게 하는 것 등이다.
색신(色身)과 십력(十力)과 사무소외와 18불공법(不共法)과 무애해탈(無礙解脫)과 일체종지(一切種智)와 대자대비(大慈大悲) 등 무량한 모든 부처님의 불법을 완전하게 갖춘 연후에야 중생들을 교화할 수 있고, 중생들도 반드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힘을 얻으면 가령 거짓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오히려 믿게 되거늘, 하물며 진실한 말이겠는가?
마치 경에서 “나는 비록 제법의 실상을 알기에 열반에 들 수 있지만, 다만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단바라밀 등을 행할 뿐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경전에서의 자세한 설명과 같으며, 다른 일로써는 중생들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須菩提白佛言:“世尊!若諸波羅蜜畢竟空故無差別,云何般若波羅蜜於諸波羅蜜中最尊?”
佛可須菩提,畢竟空中諸波羅蜜實無差別。若無般若波羅蜜,諸波羅蜜畢竟空、無差別,誰能知者?若無般若,五法云何得波羅蜜名字?五波羅蜜未入般若時,有差別;旣入般若,則無差別。
如諸異色物,到須彌山邊,皆同一色,不得言:“餘物色皆同,何以獨稱須彌爲大?”
檀波羅蜜等亦如是,雖無差別,皆是般若力故,不得言:“何以獨稱般若爲大?”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바라밀이 필경공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모든 바라밀 가운데서 가장 높은 최존(最尊)이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필경공 가운데에서는 모든 바라밀이 실로 차별이 없나니,
만약 반야바라밀이 없다면, 모든 바라밀은 필경공이라서 차별이 없거늘 그 누구로서 아는 지자(知者)가 있겠으며, 만약 반야가 없다면 다섯 가지 법이 어떻게 바라밀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니,
다섯 바라밀이 아직 반야에 들기 전에는 차별이 있지만 이미 반야에 들고난 뒤에는 아무 차별이 없는 것이다.
마치 여러 가지 다른 빛깔의 물건들이 수미산 곁에 이르면 모두가 동일한 빛깔이 되지만, 다른 물체의 빛 모두가 같다고 말할 수는 없거늘, 무엇 때문에 유독 수미산만 크다고 일컫겠는가?
단바라밀 등도 이와 같아서 비록 차별이 없다 할지라도 이 모두는 반야의 힘이므로 ‘무엇 때문에 유독 반야만을 크다고 하겠는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須菩提雖蒙開釋,猶未善解,復以異塗而問世尊:“若實義中無差別,云何般若於五波羅蜜爲上?”
先說未得聖道空,今說得聖道空,是故說第一實義。第一實義聖道,是最可信,是中亦無差別。
수보리 존자는 아무리 잘 알도록 풀어 설명하시어도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다른 방법으로 세존께 여쭈기를 “만약 진실한 이치의 실의(實義) 가운데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반야는 다섯 바라밀의 상위가 되는 것입니까?”라고 한 것이니,
앞에서의 것은 아직 거룩한 성도공(聖道空)을 얻지 못한 것을 설명한 것이요, 여기에서는 거룩한 성도공(聖道空)을 얻은 것을 설명한 것으로, 으뜸가는 진실한 이치인 제일실의(第一實義)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으뜸가는 진실한 이치의 제일실의(第一實義)가 거룩한 성도(聖道)요, 그것은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니, 여기에서도 역시 차별이 없는 것이다.
佛可言:“如是!如是!我說六波羅蜜分別,皆爲世俗故。何以故?世人不可但爲說諸法實相,聞則迷悶,生於疑悔。是故以第一義爲心,用世俗語言爲說;
是故說分別有諸波羅蜜教化衆生。衆生實無有法,皆是空、不生不死、不退不起;
色等法亦如是。是故般若波羅蜜雖空,能示如是事故,而最上、最妙;
譬如玉女寶,於衆女中最爲第一而最上、最妙。”
부처님께서 수보지 존자의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내가 6바라밀을 설하고 분별함은 모두가 세속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왜냐 하면, 세간 사람들에게는 제법의 실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니,
그것을 듣게 되면 곧 고민하며 의심하고 후회하게 되기 때문에 최상의 진리ㆍ궁극의 진리를 제일의제(第一義諦, paramārtha-satya)인 으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 paramārtha)로써 핵심을 삼고 세속의 언어로써 설명하나니,
이 때문에 분별하여 모든 바라밀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하되, 중생이란 실로 어떠한 법도 없고 모두 공(空)한 것이어서, 불생불사(不生不死)이며, 물러나지도 않는 불퇴(不退)이고 일어나지도 않는 불기(不起)이며,
색법(色法) 등의 법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비록 공(空)하다 할지라도 이러함을 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최상(最上)이고, 최묘(最妙)한 것이니,
마치 옥녀보(玉女寶)가 여러 여인들 가운데서 최상(最上)이고, 최묘(最妙)한 것과 같은 것이다.
“須菩提白佛:佛以何意故常說般若最上”者,須菩提種種因緣說般若、五波羅蜜無差別,佛亦然可其所說,而復言般若最上。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항상 반야는 가장 최상이라고 말씀하십니까?”라고 함은, 수보리 존자는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와 다섯 바라밀은 차별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부처님께서도 그가 말한 것을 옳다고 하면서도 다시 “반야는 가장 으뜸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佛言:般若波羅蜜守護一切善法,至薩婆若中住”者,一切雖空,若無般若,一切諸善法皆不能至薩婆若。善法者,五波羅蜜、三十七品、大慈悲等諸菩薩法。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반야바라밀은 일체의 착한 선법을 수호하면서 살바야에 이르러 머문다”고 하신 것은, 일체법은 비록 공(空)하다 할지라도, 만약 반야가 없으면 일체의 착한 선법들 모두가 모두가 살바야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니,
착한 선법이란 다섯 가지 바라밀과 37조도품(37보리분법菩提分法)과 대자비(大慈悲) 등의 모든 보살법을 말하는 것이다.
問曰:若行諸善法亦能至薩婆若,何以但說“般若故得至”?
묻나니, 만약 모든 착한 선법을 행하여도 살바야에 이를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다만 반야 때문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雖諸善法和合能破煩惱、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而般若波羅蜜於中功力最大。譬如大軍摧敵,而主將得功名。
답하나니, 비록 모든 착한 선법은 서로가 화합하여 능히 번뇌를 깨뜨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한다 할지라도, 반야바라밀이 그 중에서도 공력(功力)이 가장 크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많은 군사가 적을 격멸하였지만, 그 공명(功名)은 수장(主將)이 차지하는 것과 같다.
復有人言:諸善法不得般若,不得至薩婆若;般若不得諸善法,獨能至薩婆若。如經說:“師子雷音佛國,寶樹莊嚴,其樹常出無量法音,所謂一切法畢竟空、無生無滅等。其土人民生便聞此法音故,不起惡心,得無生法忍。”如此人何有布施、持戒等諸功德?亦有狂人、醉人從佛聞四諦,卽時得道。如是等無有智慧,行餘法得道,無有是事!
또한 어떤 분은, “모든 착한 선법은 반야를 얻지 못하면 살바야에 이를 수 없지만, 반야는 모든 착한 선법을 얻지 못할지라도 홀로 살바야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나니,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사자뇌음(師子雷音) 부처님의 나라에 있는 보배나무인 보수(寶樹)는 장엄하여 그 나무는 항상 무량한 법음(法音)을 내고 있으니, 이른바 ‘일체법은 필경공이다. 생겨나는 것도 없는 무생(無生)이고 없어지지도 않는 무멸(無滅)이다’고 하는 등의 소리이다.
그 국토의 백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법음을 들으므로 악한 악심을 일으키지 않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고 말씀한 것과 같으니, 이러한 사람들에게 무슨 보시니 지계니 하는 등의 일체 공덕이 있겠는가?
또한 어떤 미치광이나 취한 사람이 부처님으로부터 사제(四諦)를 듣고 즉시 도를 얻는 일도 있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지혜조차 없는데 그 밖의 다른 법을 행하여서 도를 얻는다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는 것이다.
須菩提問佛:“般若畢竟空,不取聖法、不捨凡夫法,云何佛言‘是般若波羅蜜能至薩婆若住’?”
佛可其言:“如是!如是!是般若波羅蜜無取無捨。”雖言取薩婆若,以不取法故取。住義亦如是。
此中佛自說因緣,所謂一切法不取相。一切法者,色乃至菩提。
是法虛誑,從因緣生,自性無故不取,不取故不捨,以不憶念取相故。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반야는 필경공이므로 성인의 법을 취(取)하지도 않고 범부의 법도 버리지 않거늘,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이 반야바라밀은 능히 살바야에 이르러 머무른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의 말을 인가하시면서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이 반야바라밀은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나니, 비록 살바야를 취한다고 말할지라도 법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취하는 것이 된다”고 하셨으며,
머무른 주(住)는 뜻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일체법은 상(相)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며,
‘일체법’이란 물질(色)에서 보리(菩提)에 이르기까지이니, 이 법은 거짓된 것이요 인연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스스로의 성품이 없는 무성(自性)이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 불취(不取)이고, 불취이기 때문에 버리지도 않는 불사(不捨)이니, 그것은 기억하면서 상(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須菩提言:“若不憶念色等法,云何增長善根?善根不增長,云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答:若菩薩能滅一切法中憶念,卽是空、無相、無作解脫門,解脫卽是諸法實相。雖有善根,以取相著心顚倒故不增長;譬如種穀,其苗雖好,穢草多故,不能增長。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일 물질(色) 등의 법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근이 점점 자라겠으며?
선근이 더욱 자라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일체법 가운데에서 기억을 없앨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해탈문이니, 해탈은 그것이 곧 제법의 실상이다.
비록 선근이 있을지라도 상(相)만을 취하여 집착하면 마음이 뒤바뀌어 전도되기 때문에 더욱 자라지 않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곡식을 심어서 그 싹이 아주 잘 자랄지라도 잡초가 많이 섞이면, 그 때문에 더 자랄 수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