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80권 4

Skunky 2024. 10. 26. 08:01

大智度論 釋六度相攝品 第六十八 卷八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8. 육도상섭품(六度相攝品) 풀이함① 2

 

世尊!云何菩薩摩訶薩住尸羅波羅蜜取提波羅蜜?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시라(지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찬제(인욕)바라밀을 취하는 것인지요?”

 

佛言:菩薩摩訶薩住尸羅波羅蜜中,若有衆生來節節支解,菩薩於是中不生瞋恚心乃至一念,作是言:我得大利,衆生來取我支節用,我無一念瞋恚。是爲菩薩住尸羅波羅蜜中取羼提波羅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시라(지계)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만약 어떤 중생이 와서 그의 몸을 갈가리 찢어도 보살은 그러함에 화를 내거나 그러한 일념조차도 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큰 이익을 얻었다. 중생이 와서 나의 몸을 갈가리 찢어 가는데도 나는 일념의 성을 냄도 없었으니 말이다’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시라(지계)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찬제(인욕)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世尊!云何菩薩摩訶薩住尸羅波羅蜜取毘梨耶波羅蜜?

佛言:若菩薩摩訶薩身精進、心精進,常不捨,作是念:一切衆生在生死中,我當拔著甘露地。是爲菩薩住尸羅波羅蜜中取毘梨耶波羅蜜。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시라(지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비리야(정진)바라밀을 취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몸의 신정진(身精進)과 마음의 심정진(心精進)을 항상 버리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일체 중생들은 나고 죽는 생사 가운데에서 헤매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을 구하여 감로의 땅에 놓아 두어야 한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이 시라(지계)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비리야(정진)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世尊!云何菩薩摩訶薩住尸羅波羅蜜取禪波羅蜜?”佛言:“菩薩入初禪,第二、第三、第四禪,不貪聲聞、辟支佛地,作是念:‘我當住禪波羅蜜中,度一切衆生生死。’是爲菩薩住尸羅波羅蜜取禪波羅蜜。”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시라(지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선바라밀을 취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초선(初禪)ㆍ제2선ㆍ제3선ㆍ제4선에 들어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탐내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선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일체 중생들을 나고 죽음의 생사에서 건져 주리라’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시라(지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선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世尊!云何菩薩摩訶薩住尸羅波羅蜜取般若波羅蜜?”

佛言:“菩薩住尸羅波羅蜜中,無有法可見:若作法,若有爲法,若數法,若相法,若有、若無;但見諸法不過如相。以般若波羅蜜、漚和拘舍羅力故,不墮聲聞、辟支佛地。

是爲菩薩住尸羅波羅蜜取般若波羅蜜。”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시라(지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을 취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시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짓는법(作法)이라거나 유위법(有爲法)이라거나 수효의 수법(數法)이라거나 모양 있는 상법(相法)이라거나 있다 없다는 유무(有無)를 보는 어떠한 법도 없으며,  

다만법은 한결같은 여상(如相)에 불과하다고  뿐이며, 반야바라밀의 방편선교(Upāyakauśalya)의 힘인 구화구사라력(漚和拘舍羅力)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시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반야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니라.”


▶論. 釋曰:上品末說:“云何菩薩行般若波羅蜜時,具足六波羅蜜?”
佛一一答。

此品中,須菩提問:“云何菩薩行一波羅蜜攝五波羅蜜?”

▷논. 해석한다. 상품(上品)의 끝에서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6바라밀을 두루 갖추는지요?”라고여서, 부처님께서 낱낱이 대답하셨고,  품(品)에서는 수보리 존자가 여쭙기 “어떻게 보살이 하나의 바라밀을 행하면서 다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하는지요?”라고 한 것이다.


問曰:六波羅蜜各各異相,云何行一波羅蜜攝五波羅蜜?

묻나니, 6바라밀은 저마다 각각으로 다른 이상(異相)이거늘 어떻게 하나의 바라밀을 행하면서 다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한다는 것입니까?

 

答曰:菩薩以方便力故,行一波羅蜜能攝五波羅蜜。復次,有爲法因緣果報相續故相成,善法,善法因緣故。是波羅蜜皆是善法故,行一則攝五,以一波羅蜜爲主,餘波羅蜜有分。

답하나니, 보살은 방편력 때문에  가지 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다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할  있으며, 

 유위법은 인연(因緣)과 과보(果報)가 상속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이루게 하나니, 착한법은 착한법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바라밀 모두는 착한법이기 때문에 하나를 행하면  그나머지 다섯이 포섭되고,  가지의 바라밀을 주(主)로 삼으면  밖의 다섯 바라밀에는 분한이 있는 것이다.


有菩薩摩訶薩深行檀波羅蜜,安住檀波羅蜜中,布施衆生時得慈心,從慈能起慈身口業。是時菩薩卽取尸羅波羅蜜。

何以故?慈業是三善道,尸羅波羅蜜根本,所謂不貪、不瞋、正見。是三慈業能生三種身業、四種口業。慈卽是善業,爲利益衆生故名爲慈。

어떤 보살마하살은 단(보시)바라밀을 깊이 행하면서 단바라밀 가운데에 편히 머물러 중생에게 보시할 때, 인자한 자심(慈心)을 얻어서, 인자한 자심으로부터 인자한 신업(身業)과 인자한 구업(口業)을 일으키나니, 이때 보살이 곧 시라(지계)바라밀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한 자업(慈業)은 바로선도(三善道)이며, 시라바라밀이 그 근본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탐내지 않음의 불탐(不貪)ㆍ성내지 않음의 불진(不瞋)ㆍ바른 소견의 정견(正見)의  가지 인자한업(慈業)은  가지의 신업과  가지의 구업을 일으키나니, 인자한 자(慈), 그것이 바로 착한업이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인자한 자(慈)’라 한다.


“取羼提波羅蜜”者,菩薩爲一切智慧故布施,受者瞋。

若施主唱言:“我能一切施。”受者不得稱意,便作是言:“誰使汝請我而不隨我意?”

“瞋”者是心惡業,“罵”者是口惡業,“打害”者是身惡業。

瞋有上、中、下:上者害殺,中者罵詈,下者心瞋。

‘찬제(인욕)바라밀을 취한다’ 함이란, 보살이 일체 지혜를 위하여 보시하나, 받는 수자(受者) 화를 내므로  시주(施主)가 부르짖기를 “나는 일체의 모두를  보시할  있다”고 한다면,  받는 수자는 얻은 것이 뜻에 맞지 않으므로 말하기를 “누가 당신에게 나를 청하여 나의 뜻에 맞지 않게 보시하라고 했습니까?”라고 할 때,

화를 내면 그것은 마음의악업(心惡業)이요, 욕을 하면 그것은 입의악업(口惡業)이며, 때리고 해치면 그것은 몸의악업(身惡業)이다.

화를 내는 진(瞋)에도 상ㆍ중ㆍ하가 있어서 상(上)은 살해하는 것이요, 중(中)은 욕을 하고 꾸짖는 매리(罵詈)이며, 하(下)는 마음으로 화를 내는 심진(心瞋)이니라.


爾時,菩薩不生三種惡業。意業是根本故,但說意業。作是念:“是我之罪,我請彼人而不能得稱意,由我薄福,不能具足施與;我若瞋者,旣失財物,又失福德,是故不應瞋。”

이 때에도 보살은  가지의 악업을 내지 않나니, 

의업(意業)이 바로  근본이 되기 때문에 다만 의업만을 말한다면, 

그가 생각하기를 ‘이것은 바로 나의 죄다. 내가 사람을 청해 놓고 뜻에 맞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였구나. 나는 박복(薄福)한 까닭에 갖추어 베풀 수가 없구나. 만약 내가 성을 낸다면, 재물도 잃고 게다가 복덕까지 잃게 되리라’고 하나니,

이러한 때문에 성을 내지 않는 불응진(不應瞋)이어야 하는 것이다.


“取毘梨耶波羅蜜”者,若菩薩布施時,受者打害,心不沒不捨。布施,如先說。爲布施故,身、心勤精進,作是念:“我先世不强意布施故,今不能得稱受者意,但當勤布施,不應計餘小事。”

‘비리야(정진)바라밀을 취한다’ 함은, 만약 보살이 보시를  때, 받는 수자 때리고 해를 끼쳐도 마음으로 침몰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면서 보시하는 것이니,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보시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전생에 전혀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받는 수자 뜻을 맞추지 못하는구나. 다만 부지런히 보시만 할 뿐,  밖의 자잘한 일은 헤아리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이다.


“取禪波羅蜜”者,菩薩布施不求今世福樂,亦不求後世轉輪聖王、天王、人王,亦不求世閒禪定樂;爲衆生故,不求涅槃樂;但攝是諸意在一切種智中,不令散亂。

‘선바라밀을 취한다’ 함이란, 보살이 보시하면서  세상의 복과 쾌락을 구하지 않고 또한 후세(後世)에 전륜성왕이나 천상의 왕이나 인간의 왕이 되는 것도 구하지도 않으며, 또한 세간의 선정락(禪定樂)도 구하지 않고, 중생들을 위하여 열반락(涅槃樂)도 구하지 않으면서, 다만 일체종지(一切種智) 가운데에서 모든 뜻을 가다듬어서 산란하지 않게  뿐이다.


“取般若波羅蜜”者,菩薩布施時,常觀一切有爲作法虛誑不堅固、如幻、如夢。施衆生時,不見有益、無益。

何以故?是布施物,非定是樂因緣:或時得食腹脹而死,或時得財爲賊所害,亦以得財物故生慳貪心而墮餓鬼中。又此財物有爲相故,念念生滅無常,生苦因緣。

‘반야바라밀을 취한다’ 함이란, 보살이 보시를  때에 일체 유위의법(作法)은 거짓이요 견고하지 않아서 마치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관하면서, 중생에게 베풀에는 그에게 이익이 있고 없음을 보지 않나니, 

왜냐하면  보시한 보시물(布施物) 반드시 즐거움의인연(樂因緣)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음식을 먹고 배가 불러서 죽기도 하고, 때로는 재물을 얻어서 도둑의 해를 입기도 하며, 또한 재물을 얻었기 때문에 간탐하는 마음이 생겨서 아귀(餓鬼)에 떨어지기도 하나니,

 재물은 유위상(有爲相)이기 때문에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면서 무상한 것이라서 괴로움을 내는 생고인연(生苦因緣)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復次,此財物入諸法實相畢竟空中,不分別有利、無利,是故菩薩於受者不求恩分,於布施不望果報;設求報,若彼不報,則生怨恨。菩薩作是念:“諸法畢竟空故,我無所與;若求果報,當求畢竟空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布施相。”是故不見有益,以畢竟空故;亦不見無益。如是,於檀波羅蜜邊,取五波羅蜜。

또한  재물은 제법의 실상(實相)인 필경 가운데에 들어가 이익이 있고 없음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은 받는 수자(受者)에게 은분(恩分)을 구하지도 않고, 보시에 대한 과보도 바라지 않는 것이며,

설령 보답을 구할지라도 그가 갚지 않는다 하여 원망하지 않으면서 보살이 생각하기를 “제법은 필경공한이므로 나는  것도 없다”고 하나니, 

만약 과보를 구한다면 마땅히 필경공(畢竟空)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보시하는 보시상(布施相)과 같이 구해야 하며,

 때문에 이익이 있음도 보지 않으며, 필경공이기 때문에 이익이 없는 것도 보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단바라밀에서 다섯 가지 바라밀을 취하는 것이다.


菩薩以尸羅波羅蜜爲主,所有身口意 善業布施、多聞、思惟、持戒等助阿耨多羅三藐三菩提。持戒力大故,摠名尸羅波羅蜜。

何以故?欲界中持戒爲上;餘布施、聞、思、修慧等,以欲界心散亂故,得力微薄。如『阿毘曇』中說:“出法名欲界繫戒,色、無色界繫淨禪定,學、無學法及涅槃。”

보살이 시라(지계)바라밀을 주(主)로 삼아 그의 모든 신구의(身口意) 선업(善業)과 보시(布施)와 다문(多聞)과 사유(思惟)와 지계(持戒) 등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돕지만, 지계의 힘이 가장 크기 때문에 통틀어 시라바라밀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욕계(欲界)에서는 계율을 지니는 것이 으뜸이 되며,  밖의 보시와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 등은 마음이 산란한 욕계에서는 그 힘을 얻음이 미미하고 희박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비담(阿毘曇) 가운데서 벗어나는법(出法)을 말하면서 “욕계에서는 계(戒)에 매이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는 청정한 선정(禪定)과 유학(有學)ㆍ무학(無學)의   열반에 매인다”고  것과 같다.


菩薩以是持戒等法,不趣聲聞、辟支佛地,但安住尸羅波羅蜜中。不奪衆生命乃至不爲邪見,住是助道戒,具足十善道戒。菩薩住是二種戒中,布施衆生,須食與食。食等義,如初品中說。

보살이 지계(持戒) 등의 법으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나아가지 않고, 다만 시라(지계)바라밀 가운데에 편히 머무르면서 중생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며, 나아가 삿된 사견을 내지도 않고, 도를 돕는 계율의 조도계(助道戒)에 머물러 10선도(善道)의 계율을 두루 갖출 뿐이니, 

보살이 이  가지의 계율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에게 보시하나니, 음식을 구하면 음식을 주나니,

음식 등에 대한 이치는 초품(初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皆以此福迴向佛道,不趣二乘。何以故?菩薩有二種破戒:一者、十不善道,二者、向聲聞、辟支佛地。與此相違,則是二種持戒。

모두가 이 복으로써 부처님의 불도에 회향하며 이승(二乘)에 나아가지 않나니,

왜냐하면 보살에게는 두 가지의 파계(破戒)가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열 가지의 착하지 않은 십불선도(十不善道)요,

둘째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향하는 것이며, 이것과 반대의 것이 바로 두 가지의 지계(持戒)이다

 

“取羼提波羅蜜”者,菩薩住尸羅波羅蜜欲具足忍辱波羅蜜,

若衆生來節節支解持去,乃至不生一念瞋心,何況起身口惡業!

‘찬제바라밀을 취한다’ 함이란, 보살이 시라(지계)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인욕(忍辱)바라밀을 두루 갖추고자 하는 것이니, 어떤 중생이 와서 그의 몸을 갈갈이 찢어서 가져갈지라도 화를 내는 일념조차도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몸과 입의 악업(惡業)을 일으키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