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80권 2
大智度論 釋無盡方便品 第六十七 卷八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7. 무진방편품(無盡方便品)을 풀이함 2
色眞相卽是般若波羅蜜相,是故說:“色不可盡,般若波羅蜜亦不可盡。”
受想行識、檀波羅蜜乃至一切種智亦如是。
물질(色)의 진실한 진상(眞相)이 곧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니, 이 때문에 “물질(色)은 다할 수 없는 불가진(不可盡)이고 반야바라밀 또한 다할 수 없는 불가진이며, 수상행식(受想行識)과 단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 또한 그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復次,應生般若者,無明虛空不可盡故。若人但觀畢竟空,多墮斷滅邊;
若觀有,多墮常邊。離是二邊故,說十二因緣空。
何以故?若法從因緣和合生,是法無有定性;若法無定性,卽是畢竟空寂滅相。
離二邊故,假名爲中道。是故說:“十二因緣如虛空,無法故不盡。”
癡亦從因緣和合生,故無自相;無自相故畢竟空,如虛空。
또한 ‘반야바라밀을 내어야 한다는 응생반야(應生般若)’라고 함이란,
무명(無明)의 허공이 다할 수 없는 불가진(不可盡)이기 때문이며,
만약 사람이 필경공(畢竟空)만 관찰한다면 대개는 아주 없다는 단멸(斷滅, 단멸견)이라는 치우친 소견에 떨어지고,
만약 존재한다는 유(有)라고 관찰하면 대개는 항상하다는 상(常, 상견)의 치우친 소견에 떨어지나니,
이러한 단멸과 상견의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여의기 때문에 “12인연은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법이 인(因)과 연(緣)의 화합으로부터 생긴다면 이 법은 일정한 성품이 없는 것이며,
만약 법에 일정한 성품이 없다면 곧 그것이 필경공이요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라, 상견과 단견의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여의기 때문에 임시로 이름을 붙여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12인연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법이 없는 무법(無法)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 불진(不盡)이다”고 말하며,
어리석음의 치(癡) 또한 인과 연이 화합하여 생기기 때문에 스스로의 자상(自相)이 없으며,
자상(自相)이 없기 때문에 마치 허공과 같은 필경공이다.
復次,因緣生故無實,如經中說:“因眼緣色生觸念,觸念從癡生。”觸念不在眼中、不在色中,不在內、不在外、亦不在中閒,亦不從十方三世來,是法定相不可得。何以故?一切法入如故。
또한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이 없나니, 경에서의 설명과 같이,
눈(眼)을 인하고 빛깔(色)을 연하여 접촉의 생각인 촉념(觸念)이 생기며,
그 접촉한다는 생각의 촉념(觸念)은 어리석은 치(癡)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 접촉한다는 생각의 촉념(觸念)은 눈(眼)에 있는 것도 아니고, 빛깔(色)에 있는 것도 아니며,
안(內)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시방삼세(十方三世)세로부터 오는 것도 아닌 것으로, 이 법은 정해진 정상(定相)을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일체법은 여(如)에 들기 때문이다.
시방(十方)은 동서남북과 네 간방의 팔방(八方)에 상하(上下)를 더한, 무한한 공간을 말하며,
과거 현재 미래를 삼세(三世)라 하며, 시간과 공간을 시방삼세(十方三世)라 함.
若得是無明定相,卽是智慧,不名爲癡。是故癡相、智慧相無異,癡實相卽是智慧,取著智慧相卽是癡。
是故癡實相畢竟淸淨,如虛空,無生無滅。是故說:“得是觀故,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卽名般若波羅蜜。”
만약 이 무명(無明)의 정해진 정상(定相)을 얻는다면, 그것은 곧 지혜요 어리석음(癡)이라고는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치상(癡相)과 지혜상(智慧相)에는 다름이 없으며,
어리석음의 실상(實相)은 그것이 곧 지혜이며, 지혜상(智慧相)을 취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이 곧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어리석음의 실상인 치실상(癡實相)은 필경청정(畢竟淸淨)하며 마치 허공과 같아서 무생이고 무멸이며,
그러므로 “이러한 관(觀)을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곧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問曰:若無無明,亦無諸行等,云何說十二因緣?
묻나니, 만약 무명이 없다면 또한 모든 지어감의 행(行) 등도 없거늘, 어떻게 12인연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說十二因緣有三種:一者、凡夫肉眼所見,顚倒、著我心,起諸煩惱、業,往來生死中。
답하나니, 12인연을 말하는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범부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은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어서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에 집착하여 모든 번뇌의 업을 일으켜서 나고 죽는 생사(生死) 그 가운데에서 왕래하는 것이며,
二者、賢聖以法眼分別諸法,老、病、死,心厭,欲出世閒。求老死因緣,由生故。是生由諸煩惱、業因緣。何以故?無煩惱人則不生。是故知煩惱爲生因。
煩惱因緣是無明。無明故,應捨而取、應取而捨。何者應捨?老病諸苦因緣煩惱應捨,以少顚倒樂因緣故而取。
持戒、禪定、智慧,諸善根本,是涅槃樂因緣,是事應取而捨。是中無有知者、見者、作者。
何以故?是法無定相,但從虛誑因緣相續生。
行者知是虛誑不實,則不生戲論;是但滅苦故入於涅槃,不究盡求諸苦相。
둘째는 성현은 법안(法眼)으로 제법을 분별하면서 노병사(老病死)하는 것을 마음으로 싫어하여 세간을 벗어나고자 하나니, 노사인연(老死因緣)을 구하자면, 그것은 곧 태어남의 생(生)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이 태어남의 생(生)은 모든 번뇌의 업인연(業因緣)으로 말미암나니, 왜냐하면 번뇌가 없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러함으로 번뇌가 태어남의 생인(生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번뇌의 인과 연은 바로 무명(無明)이며, 무명 때문에 마땅히 버려야 함에도 취하며, 마땅히 취해야 함에도 버리나니,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는가? 늙고 병드는 모든 괴로움의 인연인 번뇌는 마땅히 버려야 하나, 작고 뒤바뀐 즐거움의 인연 때문에 취하고 있으며,
지계(持戒)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는 모든 선(善)의 근본이며, 이러한 것이 바로 열반의 즐거움의 인연이니, 마땅히 취해야 함에도 버리나니,
이 가운데에는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ㆍ짓는 작자(作者)가 없나니,
왜냐하면 이 법에는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고 다만 거짓된 인연이 상속(相續)하면서 생길 뿐이기 때문이니,
수행하는 행자가 이것은 거짓이요 진실이 아님을 알면, 쓸모없는 희론(戱論)도 내지 않고,
다만 괴로움을 멸하기 때문에 열반에 들 뿐, 모든 괴로움의 고상(苦相)을 끝까지 궁구하지는 않는다.
三者、諸菩薩摩訶薩,大智人利根故,但求究盡十二因緣根本相,不以憂怖自沒,
求時不得定相,老法畢竟空,但從虛誑假名有。
所以者何?分別諸法相者說:“老是心不相應行。”是相不可得。頭白等是色相,非老相。二事不可得故無老相。
셋째는 모든 보살마하살로서 큰 대지혜가 있는 사람은 근기가 예리하기 때문에 다만 12인연의 근본이되는 근본상(根本相)만을 끝까지 궁구할 뿐, 근심하거나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침몰하지 않으며,
그 근본상을 구할 때에도 일정한 정상(定相)을 얻지 못하나니, 늙음의 노법(老法)은 필경공이요, 다만 거짓으로 붙인 가명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제법의 상(相)을 분별해서 늙음의 노(老)를 말하나 이것은 마음에 상응하지 않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며, 이러한 상(相)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진 두백(頭白) 등은 바로 빛깔의 색상(色相)이요,
늙음의 노상(老相)이 아니며, 이 두 가지의 일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늙음의 노상(老相)은 없는 것이다.
復次,世人名老相:髮白、齒離,面皺、身曲,羸瘦、力薄,諸根闇塞,如是等名老相。但是事不然!所以者何?髮白非唯老者。又年壯而白、老年而黑者。羸瘦、皺曲亦爾。有人老而諸根明利、少而闇塞者;又服還年藥,雖老而壯。如是老無定相。無定相故,諸法和合,假名爲老。又如假輪、軸、轅、輻等爲車,是假名非實。
또 세간 사람들이 늙음의 노상(老相)을 말할 때에는 머리가 희고, 이가 빠지며, 얼굴에 주름이 지고, 몸이 구부러지며, 수척해지고, 힘이 약해지며, 모든 감관이 어두워지는 등을 늙음의 노상(老相)이라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으니,
왜냐하면 머리가 흰 것은 늙은이만 그런 것이 아니요 나이가 젊어도 머리가 흰 이가 있으며, 늙은 사람에게도 머리가 검은 이가 있기 때문이니, 수척하고 주름살지고 구부러진 것 등 또한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늙었으나 모든 감관이 밝고 예리한 이가 있으며, 젊었어도 모든 감관이 어둡고 막힌 이가 있기도 하며, 또한 나이를 돌리는 환연약(還年藥)을 먹으면 늙은이라 할지라도 건장하여지므로 이와 같은 늙음에 있어서도 일정한 정상(定相)이 없으며 일정한 정상(定相)이 없기 때문에 제법이 화합하여 임시로 늙음이라는 가명을 붙였을 뿐이며,
또한 마치 수레바퀴와 굴대와 끌채와 바퀴살이 임시로 합쳐진 것을 수레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이 모두는 임시로 붙인 가명이요 진실이 아니다.
復次,有人言說:“果報五衆故相名爲老。”是亦不然!所以者何?一切有爲法念念生滅不住,若不住則無故,無故則無老。一切有爲法若有住則無無常,若無無常卽是常,若常則無老,何況非常非無常、畢竟空中而有老!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과보(果報)의 오중(五衆, 오온)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 상(相)을 늙음의 노(老)라 한다”고 하나, 이것 역시 그렇지 않으니,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생각생각을 따라 나고 없어지면서 머무르지 않으니,
만약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면 그 상(相)도 없으며, 상(相)이 없으므로 늙음의 노(老)도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유위법에 만약 머무름이 있다면 무상(無常)하다는 것이 없고,
만약 무상이 없으면 곧 항상하다는 상(常)만 있는 것이니,
만약 항상한 상(常)만 있다면 늙음도 없을 것이거늘, 하물며 항상한 것도 아닌 비상(非常)과 무상함도 아닌 비무상(非無常)과 필경공 가운데에서 늙음의 노(老)가 있을 수 있겠는가?
復次,諸法畢竟空中生相不可得,何況有老!如是等種種因緣,求老法不可得,不可得故無相,如虛空,不可盡。如老,乃至無明亦如是。破無明,如上說
또한 제법의 필경공 가운데에서는 태어나는 생상(生相)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늙는 노상(老相)이겠는가?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늙음의 노법(老法)을 구하여도 얻을 수가 없는 불가득이며,
불가득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며, 마치 허공과 같이 다할 수 없는 불가진(不可盡)이나니,
늙음의 노(老)에서와 같이 무명(無明)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며,
무명을 깨뜨림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菩薩觀諸法實相畢竟空、無所有、無所得亦不著是事故,於衆生中而生大悲:
衆生愚癡故,於不實、顚倒、虛妄法中受諸苦惱。
보살은 제법의 실상(實相)은 필경공이라서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얻을 것도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고 관하며, 또한 이러함에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大悲)를 내지만,
중생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진실하지도 않고 뒤바뀌어 전도된 허망법(虛妄法) 가운데에서 모든 괴로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初十二因緣,但是凡夫人故,於是中不求是非;第二十二因緣,二乘人及未得無生忍法菩薩所觀;第三十二因緣,從得無生忍法乃至坐道場菩薩所觀。是故說:“無明虛空不可盡,乃至憂悲苦惱虛空不可盡故,菩薩行般若波羅蜜” 如是深觀因緣法,
처음의 12인연은 다만 범부인만을 위한 것이므로 여기에서 그 시비(是非)를 가리지 않을 것이며,
두 번째의 12인연은 이승인(二乘人)과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법을 얻지 못한 보살들이 관하는 것이며,
세 번째의 12인연은 무생법인을 얻은 이로부터 도량(道場)에 앉은 보살에 이르기까지가 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의 허공은 다할 수 없는 불가진(不可盡)이며, 나아가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의 우비고뇌(憂悲苦惱)의 허공도 다할 수 없는 불가진이다”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와 같이 인연법(因緣法)을 깊이 관하는 것이며,
離諸邊、顚倒者,邊名常邊、斷滅邊,有邊、無邊,實邊、空邊,
世閒有邊等著諸邊;顚倒者,無常中起常等諸顚倒煩惱。觀是十二因緣法,諸邊、顚倒滅。
“모든 치우친 소견과 뒤바뀜을 여읜다”고 함의 치우친 소견의 변견(邊見)이란, 항상하다는 소견의 상변(常邊)과 아주 없다 는 소견의 단멸변(斷滅邊)과 있다는 소견의 유변(有邊)과 없다는 소견의 무변(無邊)과 진실하다 소견의 실변(實邊)과 공하다 하는 소견의 공변(空邊)과 세간은 있는 것이라는 소견의 세간유변(世間有邊) 등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치우친 소견에 집착하여 뒤바뀌어 전도된 이는 무상함 가운데에서 항상하다는 등의 모든 뒤바뀐 전도번뇌(顚倒煩惱)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므로, 이 12인연의 법을 관하면 모든 치우친 소견의 뒤바뀜이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諸煩惱有二分:一者、外道邪見人名爲邊,二者、餘衆生煩惱名爲顚倒。觀十二因緣,是二種煩惱皆滅。是第三十二因緣觀甚深,唯諸菩薩坐道場者能觀;先雖能觀,未能具足。
如『城譬喩經』中說:“佛言:‘我本未得道時,如是思惟:'衆生可愍,深入嶮道,所謂數數生,數數老,數數死,往來世閒,不知出處' 我卽時復作是念:'何因緣有老死?'如是求覓時,得實智慧 生因緣是老死等。’”是故知:第三觀,坐道場乃得,如經廣說。
모든 번뇌에는 두 갈래가 있으니, 첫째는 외도의 삿된 소견의 사견(邪見)을 지닌 사람을 치우친 이라 하며,
둘째는 그 밖의 중생들의 번뇌를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것이라 하나니, 12인연을 관하면 이러한 두 가지의 번뇌는 모두 소멸한다.
이 세 번째의 12인연관(因緣觀)은 매우 깊어서 오로지 도량에 앉은 모든 보살만이 관할 수 있는 것이니, 앞에서 비록 관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구족하지는 못한 것이니,
마치 '성비유경(城譬喩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직 도를 얻지 못하였을 때, 생각하기를 ‘중생을 가엾이 여겨야 한다’하고는 험한 길로 들어간 것이니, 이른바 자주자주 태어나는 삭삭생(數數生), 자주자주 늙는 삭삭노(數數老), 자주자주 죽는 삭삭사(數數死) 하면서 세간을 왕래하며 벗어날 길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때 다시 생각하기를 ‘어떤 인연으로 늙어 죽는 노사(老死)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찾고 구하였다.
그 때에 ‘태어남의 생인연(生因緣)이 바로 노사(老死) 등이로구나’ 하는 등의 진실한 지혜를 얻게 되었다”고 하신 것과 같이,
세 번째의 관(觀)은 도량에 가서 앉아야만이 비로소 얻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경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