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9권 6
大智度論 釋囑累品 第六十六 卷七十八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6. 촉루품(囑累品)을 풀이함 4
釋提桓因白佛言:“世尊!須菩提好樂說空、善巧說空,於諸弟子中最爲第一。
有所言說,皆趣向空、無相、無作,所謂四念處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法中皆和合畢竟空說。”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수보리 존자는 공을 말하기 좋아하는 요설공(樂說空)이고, 공을 교묘히 잘 설하는 선교설공(善巧說空)으로서는 모든 제자 가운데에 첫째입니다.
하는 말마다 모두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으로 향해 나아가나니, 이른바 사념처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의 법은 모두 필경공(畢竟空)의 설과 합치됩니다”라고 하였다.
佛語釋提桓因:“須菩提是行畢竟空人,世世修集,非但今世。
是人以空解脫門入道,亦以此門教化衆生。是人若入深空法,尚不得法,何況行是法者!
如經說:“檀波羅蜜不可得,何況行檀者!乃至八十隨形好不可得,何況得八十種隨形好者!”
須菩提所行空行,欲比菩薩空行,百分不及一。
부처님께서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셨으니, “수보리는 바로 필경공을 수행한 사람으로써, 여러 세세에서마다 닦고 쌓은 것이요, 다만 이 세상에서만 쌓은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공해탈문(空解脫門)으로 도(道)에 들었으며, 또한 이 공문(空門)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나니,
이 사람이 깊은 심공(深空)에 들어갔다면 그 법조차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법을 행하는 사람이겠는가?”라고 하셨으며,
경에서 말씀하셨듯이 “단바라밀(檀波羅蜜)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단바라밀을 닦는 사람이겠는가?
나아가 80수형호(隨形好)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80수형호를 얻는 사람이겠는가?
수보리가 행한 공행(空行)을 보살이 행한 공행(空行)에 비교한다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問曰:法空、衆生空,復有何不盡,而言“百分不及一”?
묻나니, 법공(法空)이고 중생공(衆生空)이거늘, 다시 어느 것에 다하지 않음의 불진(不盡)이 있기에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佛此中自說“除佛,諸聲聞、辟支佛無有及菩薩”者,諸法實相有種種名字:或說空,或說畢竟空,或說般若波羅蜜,或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此中說諸法實相名爲空行。
如一切聲聞弟子中,須菩提空行最勝;如是,除佛,諸菩薩空行勝於二乘。
何以故?智慧分別利鈍,入有深淺故,皆名得諸法實相,但利根者得之了了。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이 가운데에서 친히 말씀하셨으니,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은 보살에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다”고 하신 것이며,
제법의 실상(實相)에는 여러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혹은 공(空)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필경공(畢竟空)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도 하나니, 여기에서는 제법의 실상을 공행(空行)이라 말하고 있으며,
마치 일체의 성문 제자 가운데에서 수보리 존자의 공행이 가장 뛰어나듯이,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보살의 공행이 이승(二乘)보다 뛰어나나니, 왜냐하면 지혜의 분별에는 예리한 이와 둔한 이가 있어서 들어감에도 깊고 얕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모두를 '제법의 실상을 얻은 이'라 하지만 다만 근기가 예리한 이가 분명히 더 얻을 뿐이다.
譬如破闇故然燈,更有大燈,明則轉勝。當知先燈雖炤,微闇不盡;若盡,後燈則無用。
行空者亦如是,雖俱得道,智慧有利鈍故,無明有盡、不盡;惟有佛智,能盡諸無明。
비유하자면, 마치 어둠을 깨뜨리기 위하여 등불을 켜는 것이나, 더 큰 등불이 있으면 더욱 더 밝아지는 것과 같으므로 먼저의 등불이 비록 비추어 주기는 하나, 아주 작은 구석의 어둠까지는 다하지 못하다가 나중의 큰 등불이 더하여 주면 앞의 등불이 필요없게 되는 것과 같이,
공을 닦는 행공자(行空者)도 그와 같아서 비록 다 같이 도를 얻었을지라도 지혜에 예리하고 둔함이 있으며, 무명(無明)에도 다하고 다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니,
오직 부처님의 지혜만이 모든 무명을 다할 뿐이다.
復次,聲聞、辟支佛無慈悲心,無度衆生心,無淨佛世界,無無量佛法願,無轉法輪度衆生,亦無入無餘涅槃乃至遺法度衆生願,無有三世度衆生心,所謂菩薩時、作佛時、滅度時,非但以空行故與菩薩等。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은 자비로심이 없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도 없으며, 부처님의 불세계를 청정하게 하지도 않고, 무량한 부처님의 불법도 없으며, 법륜(法輪)을 굴려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도 없고, 또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고 나아가 법을 남겨 주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함도 없으며, 삼세(三世) 동안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서원하는 마음도 없나니,
이른바 보살일 때와 부처님이 되실 때와 열반에 이르는 멸도(滅度)할 때에만 공행(空行)하여서 보살들과는 같지 않으며,
復次,二乘得空,有分有量;諸佛、菩薩無分無量。如渴者飮河,不過自足,何得言俱行空不應有異?
又如毛孔之空欲比十方空,無有是理!是故比佛、菩薩,千萬億分不及一。
佛分別是空行已,告釋提桓因:“若欲於一切衆生最上,當行般若波羅蜜。”
또 이승(二乘)이 공을 얻는 것은 분수가 있고 한량이 있지만, 모든 부처님과 보살에게는 분수도 없고 한량도 없나니, 마치 목마른 이가 강물을 마실 때, 만족하게 마시면 더 마시지 않는 것과 같이,
어찌 다 같이 공을 행한다 하여서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모공(毛孔)에 있는 공간을 시방의 허공에 비유한다는 것은 이치로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과 보살에게 비교하면 천만억 분의 1에도 미칠 수가 없다고 하신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이 공행(空行)을 분별하신 뒤에 석제환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일체 중생 가운데서 최상(最上)이 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菩薩學是般若波羅蜜空行,不取空相故,過於二地,得無生忍法,入菩薩位;入菩薩位故,具足佛法。”佛法是菩薩道,菩薩道具足故,當得一切種智;得一切種智故名爲佛,斷一切煩惱習人。是諸事,空行爲根本。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의 공행(空行)을 배우면서도 공상(空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과 벽지불의 이지(二地)를 지나서 무생법인을 얻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며,
보살의 지위에 들기 때문에 부처님의 불법을 두루 갖추며,
부처님의 불법이 바로 보살도이며, 보살도를 두루 갖추기 때문에 일체종지를 얻게 되고,
일체종지를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며, 일체 번뇌의 습기(習氣)를 끊은 사람이니,
이러한 모든 것은 공행(空行)이 그 근본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涅槃是無量,何以言“二乘所得有量”?
묻나니, 열반은 무량한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승이 얻는 것은 한량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言“智慧有分有量”,不說“諸法法性有量”。不聞說大水喩耶?器有量,非水有量。
復次,量、無量,相待法。於凡人是無量,佛皆能量。
爾所分是須陁洹,乃至爾所分是阿羅漢、辟支佛、菩薩,餘殘究盡法性是佛。
爾時,會中諸天以天曼陁羅華散佛等,如經中說。
답하나니, 지혜에 분수가 있고 유량(有量)하다고 말하는 것일 뿐, 제법의 법성(法性)이 유량(有量)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큰 물에 대한 비유를 듣지도 못했는가? 그 그릇에 한량이 있을 뿐, 물에 한량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유량(有量)과 무량(無量)은 상대되는 상대법(相對法)으로, 범부에게는 이것이 무량한 것일지라도 부처님께는 모두 유량한 것이 되나니, 이를 테면 그러한 분한을 지닌 이는 바로 수다원이요, 나아가 그러한 분한을 지닌 이는 바로 아라한이며, 벽지불이요 보살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까지를 다하여 법성(法性)을 지닌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 때에 모임에 있던 모든 하늘들이 하늘의 만다라꽃을 부처님과 다른 이들에게 뿌렸으니, 경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問曰:華供養佛及僧,是八百比丘何以獨取供養佛?
묻나니, 꽃은 부처님과 승(僧, 승가)에게 뿌린 것이거늘, 이 8백의 비구들은 무엇 때문에 독차지하여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입니까?
答曰:諸天所散華,諸比丘當分所得墮衣上者,見其色香甚妙,因以發心供養於佛,
白言:“我從今日,當行是無上行,所謂畢竟空、無相、無作等,
爲度一切衆生故,如佛所說,二乘所不及。”
답하나니, 모든 하늘들이 뿌린 꽃은 모든 비구들이 분배하여 가지는 것이며, 옷 위에 떨어진 꽃이 그 빛깔과 향기가 몹시 묘한 것을 보고, 그로 인하여 마음을 내어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말씀드리기를 “저희들은 오늘부터 이른바 필경공(畢竟空)과 무상(無相)ㆍ무작(無作) 등의 이 위없는 무상행을 행하겠습니다.
그것은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며,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이승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爾時,佛微笑。笑義,如「恒伽提婆品」中說。
是八百比丘皆是善知識,行同心等,世世共修集功德故,一時作佛,皆同一字。
五色天華供養佛故,世界中常雨五色天曼陁羅華。
그때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셨으니, 이 미소 지으시는 뜻에 관해서는 '항가제바품(恒伽提婆品)'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 8백의 비구는 모두가 선지식(善知識)이어서 행이 동일하고, 마음이 평등하며, 여러 세세에서 함께 공덕을 닦고 쌓았기 때문에 일시에 부처님이 되고 모두가 동일한 명호로 불리게 되는 것이며,
오색의 하늘 꽃으로 부처님께 공양한 때문에 그들의 세계에서는 항상 하늘의 오색 만다라꽃이 비내리는 것이다.
佛因是事讚般若,作是言:“阿難!欲行最上菩薩道,當行般若波羅蜜。”
“阿難!若有善男子能行是 深般若波羅蜜,當知是人人道中來,或兜率天上來。”
所以者何?三惡道中罪苦多,故不得行深般若;欲界天著淨妙五欲,心則狂惑,不能行;
色界天深著禪定味,故不能行;無色界無形,故不能行;鬼神道眼根等利,諸煩惱覆心,故不能專行深般若。
부처님께서는 이러함으로 인하여 반야를 찬탄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최상의 보살도를 행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아난아, 만약 어떤 선남자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사람의 갈래인 인도(人道)에서 왔거나, 혹은 도솔천(兜率天)에서 왔다고 알지니라”고 하셨으니,
왜냐하면 삼악도(三惡道)에는 죄의 고통이 많기 때문에 깊은 반야를 행할 수 없고,
욕계(欲界)의 하늘들은 맑고 묘한 5욕(欲)에 집착하여 마음이 미혹되어 있는지라 행할 수 없으며,
색계(色界)의 하늘들은 선정의 맛인 선정미(禪定味)에 깊이 집착하기 때문에 행할 수 없고,
무색계(無色界)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행할 수 없으며,
귀신 갈래인 귀신도(鬼神道)에서는 눈의 감관 등은 예리하지만 모든 번뇌가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에 깊은 반야를 전일하게 행할 수 없으며,
人道中,苦差三惡道,樂不如諸天,眼等諸根濁重,身多地種,故能制苦樂意而行般若。
兜率天上,常有一生補處菩薩,彼中諸天常聞說般若,五欲雖多,法力勝。是故說二處來。
若從他方佛世界來,若此閒有般若波羅蜜處來。
사람의 갈래인 인도(人道)에서는 고통이 삼악도와는 다르고, 즐거움은 모든 천상보다는 못하며, 눈 등의 모든 감관은 혼탁하고, 몸은 땅의 요소인 지종(地種)이 많기 때문에 고통과 안락에 대한 뜻을 억제하면서 반야를 행하나니,
도솔천 위에서는 항상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이 있으므로 그 안에 있는 모든 하늘은 항상 반야의 설법을 듣고 있어서, 비록 오욕이 많기는 하나 법력(法力)이 뛰어나기 때문에 두 군데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 그 밖의 다른 곳에 있는 부처님의 불세계에서 오기도 하고, 또는 이 세간의 반야바라밀이 있는 곳에서 오기도 하는 것이다.
復次,“阿難!若有求佛道者,能問、能信、受持乃至正憶念,當知是人,佛常以佛眼見是諸人等;
應當作是念:‘我等便是面從佛受,從佛發心、種善根,不從二乘發。’
阿難!若有人信心淸淨、不可破壞者,當知是人先世供養無量諸佛、爲善知識守護,故能受持。”
다시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만약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어떤 이가 능히 묻고 능히 믿으면서 받아 지니고 나아가 바르게 기억한다면, 그런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항상 불안(佛眼)으로써 보고 계신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이러한 모든 사람은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곧 부처님으로부터 눈앞에서 받았으며, 부처님을 좇아 발심하였으며, 선근을 심을 것이요, 2승으로부터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고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며,
또한 “아난아, 만약 어떤 사람이 믿는 마음이 청정하여 파괴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전생에 무량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으며, 선지식의 수호를 받았기 때문에 능히 수지(受持)한다고 알아야 한다”고도 하셨다.
問曰:佛亦名爲寶,亦名爲無上福田;若人從佛種善根,必以三乘法入涅槃不虛。如『法華』中說:“有人或以一華,或以少香供養於佛,乃至一稱南無佛,如是等人皆當作佛。”若爾者,有人作是念:“但行五波羅蜜,欲作佛時乃觀空,何用常行般若波羅蜜,難知難得空行?”
묻나니, 부처님을 보(寶)라 부르기도 하고, 위없는 복밭의 무상복전(無上福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만약 사람이 부처님을 따르면서 선근을 심는다면 반드시 삼승(三乘)의 법으로써 열반에 든다는 것이 거짓이 아닐 것이니,
마치 법화(法華, 법화경) 같은 곳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혹은 한 송이 꽃이나 조그마한 향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하거나, 나아가 한번 나무불(南無佛)하고 부르기만 하여도 이러한 사람들 모두는 부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다만 다섯 가지 바라밀만을 행하면서 부처님이 되고자 할 때에도 공을 관찰하거늘, 무엇 때문에 항상 알기도 어렵고 얻기도 어려운 반야바라밀의 공행(空行)을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答曰:以是事故,佛自答阿難:“於佛福田中雖不虛誑,要得三乘入涅槃,應當了了行六波羅蜜,乃至一切種智了了行故,疾得佛道,不久受生死苦。般若有如是等利益功德故,應當行。”“阿難!般若有如是功德利益故,我囑累汝。”
답하나니, 이러함 때문에 부처님께서 친히 대답하셨으니, “아난아, 부처님의 복전(福田) 가운데에서는 비록 거짓이 아니요, 반드시 삼승을 얻어서 열반에 든다 할지라도, 마땅히 분명하게 6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를 행하여야 하느니라.
분명하게 행하기 때문에 신속히 부처님의 불도를 얻고, 나고 죽는 생사의 괴로움을 오랫동안 받지 않나니,
반야에는 이와 같은 등의 이익과 공덕이 있기 때문에 행해야 하는 것이니라.
아난아, 반야에는 이와 같은 공덕과 이익이 있으므로 나는 너에게 부촉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佛無所貪,乃至一切種智、佛無㝵解脫 淸淨微妙諸佛法猶尚不貪,何以故以般若波羅蜜慇懃囑累阿難,似如貪惜?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탐내는 것이 없으시며, 나아가 일체종지의 부처님께서는 장애 없는 무애해탈로 청정하고 미묘하시며, 모든 부처님의 불법조차도 오히려 탐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마치 탐내고 애석히 여기는 듯, 반야바라밀을 은근히 아난에게 부촉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諸佛爲利益衆生故出世,現三十二相、八十種隨形好、無量光明、神足變化,皆爲衆生故。第一利益衆生無過般若波羅蜜,能盡諸苦故。是般若波羅蜜因語言、文字、章句可得其義,是故佛以般若經卷慇懃囑累阿難。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세간에 출현하신 것이며,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무량한 광명과 신족 변화를 나타내시는 것 모두가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중생을 가장 이익되게 하는 것으로는 반야바라밀보다 더한 것이 없나니, 그것은 모든 괴로움을 다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반야바라밀은 언어(言語)와 문자(文字)와 장구(章句)로 인하여 그 뜻을 얻을 수 있으니,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반야의 경전으로써 아난 존자에게 간절하게 부촉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