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9권 5
大智度論 釋囑累品 第六十六 卷七十八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6. 촉루품(囑累品)을 풀이함 3
阿難!汝爲諸聲聞人說法,令三千大千世界中衆生皆得阿羅漢果證,猶未爲我弟子事;汝若以般若波羅蜜相應一句教菩薩摩訶薩,則爲我弟子事,我亦歡喜,勝教三千大千世界中衆生令得阿羅漢果。
復次,阿難!是三千大千世界中衆生,不前不後,一時皆得阿羅漢果證;是諸阿羅漢行布施功德、持戒、禪定功德,是功德多不?”
阿難言:“甚多!世尊!”
아난아, 그대는 모든 성문들을 위하여 설법하여서, 삼천대천세계 안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아라한의 과위를 증득하게 하여도 오히려 아직 나의 제자로서의 할 일을 못한 것이 되겠지만,
만약 네가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한 글귀로써 보살마하살에게 가르쳐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제자로서의 할 일을 한 것이요, 나 또한 기뻐하나니, 삼천대천세계 안의 중생을 가르쳐서 아라한의 과위를 증득하게 하는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니라.
다시 아난아, 이 삼천대천세계 안의 중생들이 앞도 없고 뒤도 없이 한꺼번에 아라한의 과위를 증득하고, 이 모든 아라한이 보시(布施)의 공덕과 지계(持戒)ㆍ선정(禪定)의 공덕을 행한다면 이 공덕이 많겠는가?”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言:“阿難!不如弟子以般若波羅蜜相應法爲菩薩摩訶薩說,乃至一日,其福多!置一日,但半日;置半日,但一食頃;置一食頃,但須臾閒說,其福多!
何以故?菩薩摩訶薩善根勝一切聲聞、辟支佛故。菩薩摩訶薩自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示、教、利、喜他人,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阿難!如是菩薩行六波羅蜜,行四念處乃至行一切種智,增益善根,若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有是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것은 어느 한 제자가 반야바라밀과 상응한 법으로써 보살마하살에게 하루만이라도 설하여 받는 복보다는 못하느니라. 하루가 아니라 한나절만이라도, 아니 한나절이 아니라도 한 식경(食頃)만이라도, 아니 한 식경만이 아니라 잠깐 동안만이라도 설한다면, 그 얻는 복이 매우 많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의 선근이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 스스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 주고(示) 가르쳐 주고(敎) 이익되게 하고(利) 기쁘게(喜) 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고자 한다면,
아난아, 이러한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고 사념처를 행하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행하면서 선근을 더욱 늘어나게 하거늘,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면 이러함은 있을 수 없느니라!”
說是「般若波羅蜜品」時,佛在四衆中、天、人、龍、鬼神、甄陁羅、摩睺羅伽等,於大衆前而現神足變化:一切大衆皆見阿閦佛,比丘僧圍繞,說法;大衆譬如大海水,皆是阿羅漢;漏盡無煩惱,皆得自在,得好解脫 心好解脫,慧好解脫;其心調柔,譬如大象;
所作以辦,逮得己利,盡諸有結,正智得解脫;一切心、心數法中得自在;及諸菩薩摩訶薩無量功德成就。
이 '반야바라밀품(般若波羅蜜品)'을 설하실 때, 부처님께서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중(四衆) 안에 있는 하늘ㆍ사람ㆍ용ㆍ귀신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등의 대중 앞에서 신족변화(神足變化)를 나타내시어, 그 일체의 대중들에게 모두 아촉불의 비구승에게 에워싸여 대중에게 설법하고 계신 것을 보이셨으니, 대중이 마치 큰 바닷물과 같았으며,
그 모두가 아라한으로써 누가 다한 누진(漏盡)하여 번뇌가 없으며, 모두가 자재함을 얻었으며,
마음의 해탈인 심해탈(心解脫)과 지혜탈(慧解脫)의 좋은 해탈을 얻어서 그 마음이 마치 큰 코끼리처럼 조화되고 부드러웠으며,
할 일을 다 마치고 스스로의 이익을 체득하였으며,
모든 마음 속의 번뇌인 유결(有結)을 다하여서 바른 지혜로써 해탈을 얻었으며,
일체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 안에서 자유자재하였으며,
모든 보살마하살은 무량한 공덕이 성취되어 있었다.
결(結)은 번뇌가 유정을 괴로운 과보[苦果]가 생겨나는 상태에 묶어버리는[結] 작용을 한다는 뜻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결(結)은 흔히 속박(束縛) · 결박(繫縛) · 계박(繫縛)의 뜻으로 해석되고, 2결(二結) · 3결(三結) · 4결(四結) · 5결(五結) · 9결(九結) · 10결(十結) · 98결(九十八結) · 108결(百八結) 등으로 구분한다.- 위키
爾時,佛攝神足,一切大衆不復見阿閦佛、聲聞人、菩薩摩訶薩及其世界,不與眼作對。何以故?佛攝神足故。
그때 부처님께서 신족을 거두시니, 일체 대중들에게 다시는 아촉불의 성문인들과 보살마하살들 및 그 세계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그것은 눈으로 대(對)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부처님께서 신족을 거두셨기 때문이다.
爾時,佛告阿難:“如是,阿難!一切法不與眼作對,法法不相見、法法不相知。如是,
阿難!如阿閦佛、弟子、菩薩、世界,不與眼作對。
如是,阿難!一切法不與眼作對,法法不相知、法法不相見。
何以故?一切法無知、無見、無作、無動、不可捉、不可思議,如幻人無受、無覺、無眞實。
菩薩摩訶薩如是行,爲行般若波羅蜜,亦不著諸法。阿難!菩薩摩訶薩如是學,名爲學般若波羅蜜。
그때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아난아, 일체법은 눈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법은 법을 서로 보지 못하고, 법은 법을 서로 알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치 아촉부처님의 제자와 보살과 세계는 눈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아난아 일체법은 눈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법은 법을 서로 알지 못하고, 법은 법을 서로 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일체법은 아는 것도 없는 무지(無知)이고, 보는 것도 없는 무견(無見)이며, 지음도 없는 무작(無作)이고, 무동(無動)이며, 붙잡을 수도 없는 불가착(不可捉)이고, 생각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라서,
마치 환술로 만든 사람에게는 느끼는 것도 없고 깨닫는 것도 없고 진실한 것도 없는 것과 같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요,
또한 제법에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니,
아난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곧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이라 하느니라.
欲得諸波羅蜜,當學般若波羅蜜。何以故?如是學名爲第一學、最上學、微妙學。如是學,安樂、利益一切世閒,無護者爲作護,是諸佛所學。
諸佛住是學中,能以右手擧三千大千世界,還著本處,是中衆生無覺知者。
何以故?阿難!諸佛學是般若波羅蜜,過去、未來、現在法中得無㝵智見。
阿難!如般若波羅蜜於諸學中最尊、第一、微妙、無上。
모든 바라밀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나니,
왜냐하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바로 제일가는 배움의 제일학(第一學)이요
최사의 배움인 최상학(最上學)이며, 미묘학(微妙學)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배우면 일체 세간을 안락하게 하고 이익되게 하며, 수호자가 없는 이에게 수호자가 되어 주느니라.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께서 배우신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배움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오른손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본래 있던 곳에 놓아 두실지라도, 그 안에 있는 중생으로서 미처 깨닫거나 아는 이가 없나니,
왜냐하면 아난아,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반야바라밀을 배우셨으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법 가운데서 장애 없는 지혜의 무애지견(無礙智見)을 얻으셨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반야바라밀은 모든 배움 가운데서 제일이며, 미묘하고 위가 없는 무상(無上)이니라.
阿難!若有人欲得般若波羅蜜邊際,爲欲得虛空邊際。
何以故?阿難!般若波羅蜜無有量,我初不說般若波羅蜜量;名衆、句衆、字衆是有量,般若波羅蜜無有量。”
아난아, 만약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의 끝인 변제(邊際)를 얻고자 한다면, 허공의 끝인 변제(邊際)를 얻고자 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아난아, 반야바라밀은 무량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처음부터 반야바라밀의 양을 말하지 않았나니, 이름의 명중(名衆)ㆍ구절의 구중(句衆)ㆍ글자의 자중(字衆)에는 곧 한량이 있지만, 반야바라밀에는 한량이 없느니라.”
阿難白佛言:“世尊!般若波羅蜜何以故無有量?”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반야바라밀에는 한량이 없는지요?”
佛告阿難:“般若波羅蜜無盡故無有量,般若波羅蜜離故無有量。
阿難!過去諸佛皆學般若波羅蜜得度,般若波羅蜜故不盡;未來世諸佛亦學是般若波羅蜜得度,是般若波羅蜜故不盡;現在十方諸佛皆學是般若波羅蜜得度,般若波羅蜜故不盡,已不盡、今不盡、當不盡。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기 때문에 한량이 없으며,
반야바라밀은 여의는 이(離)이기 때문에 한량이 없느니라.
아난아,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도를 얻으셨으나 반야바라밀은 짐짓 다하지 않았고,
미래 세상의 모든 부처님도 역시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도를 얻을 것이나 이 반야바라밀은 짐짓 다하지 않을 것이며,
현재 시방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도를 얻으시지만 반야바라밀은 짐짓 다하지 않나니,
이미 다하지 않은 이불진(已不盡)이고, 지금도 다하지 않는 금불진(今不盡)이며, 장차에도 다하지 않을 당불진(當不盡)이니라.
阿難!欲盡般若波羅蜜,爲欲盡虛空。般若波羅蜜不可盡,已不盡、今不盡、當不盡;
禪波羅蜜乃至檀波羅蜜不可盡,已不盡、今不盡、當不盡;乃至一切種智亦如是。
何以故?是一切法皆無生;若法無生,云何有盡?”
아난아, 반야바라밀을 다하고자 하는 것은 곧 허공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니라.
반야바라밀은 다할 수 없는 이불진(已不盡)이고, 지금도 다하지 않는 금불진(今不盡)이며, 장차에도 다하지 않을 당불진(當不盡)이니라.
선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까지도 다할 수 없으니 이불진(已不盡)이고, 금불진(今不盡)이며, 당불진(當不盡)이니라.
나아가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나니, 왜냐하면 이 일체법 모두는 생함이 없는 무생(無生)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법이 무생(無生)이라면, 어떻게 다함이 있겠는가?”
爾時,佛出覆面舌相,告阿難:“從今日,於四衆中廣演、開示、分別般若波羅蜜,當令分明易解。
何以故?是深般若波羅蜜中廣說諸法相。是中求聲聞、辟支佛、求佛者,皆當於中學;學已,各得成就。
阿難!是深般若波羅蜜則是一切字門。行是深般若波羅蜜,能入陁羅尼門;學是陁羅尼門,諸菩薩得一切樂說辯才。
그때 부처님께서 혀로 얼굴을 덮으시는 설상(舌相)을 보이시고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오늘부터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4중(衆) 가운데에서 반야바라밀을 널리 연설하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면서 분명히 알기 쉽게 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제법의 법상(法相)을 널리 설한 때문이니, 성문이나 벽지불을 구하고 부처님을 구하는 이 모두가 이 가운데에서 배워야 하며 배운 뒤에는 각기 성취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곧 일체 글자의 자문(字門)이니라.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다라니문(陀羅尼門)에 들어가고
이 다라니문을 배워서 모든 보살은 일체의 요설변재(樂說辯才)를 얻게 되느니라.
阿難!般若波羅蜜是三世諸佛妙法。以是故,阿難!我爲汝了了說,若有人受持深般若波羅蜜,讀、誦、親近,是人則能持三世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阿難!我說般若波羅蜜是行者足。汝持是般若波羅蜜陁羅尼故,則能持一切諸法。”
아난아, 반야바라밀은 바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묘법(妙法)이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나는 너에게 분명히 알도록 말하는 것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면서 읽고 외우며 가까이한다면, 이 사람은 곧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능히 지니게 되는 것이니라.
아난아, 나는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은 바로 수행하는 행자의 발(足)이다’고 하나니,
그대는 이 반야바라밀의 다라니를 지니기 때문에 곧 일체 제법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니라.”
▶論. 問曰:釋提桓因何以自疑所說,言:“我爲隨順法、正答不?”
▷논. 묻나니, 석제환인은 무엇 때문에 그 자신이 하는 말을 의심하면서 “제가 법에 수순해서 바르게 대답하고 있습니까?”라고 말한 것입니까?
答曰:釋提桓因非一切智人,雖得初道,三毒未盡,猶有錯謬,而自籌量:“我雖福德因緣爲諸天主,雖得聖道味而未有一切智,一切漏未盡故,所說或能錯謬,不自覺知。”是故問。
답하나니, 석제환인은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사람이 아니다. 비록 그가 초도(初道)를 얻었을지라도 아직 탐진치의 삼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착오(錯謬)가 있으므로 스스로를 헤아리면서 “내가 비록 복덕의 인연으로 모든 하늘의 주인이 되었고 또 성인의 도의 맛인 도미(道味)를 얻었지만, 아직은 일체지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일체 번뇌가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는 말에 혹은 착오가 있을 수 있으나, 나 스스로가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이다.
復次,衆中大有阿鞞跋致菩薩、漏盡阿羅漢及離欲諸天,是諸人見釋提桓因與佛、須菩提共問難,心不怯弱,作是念:“是釋提桓因漏尚未盡,何能問難,盡諸法邊?”釋提桓因以是事故問佛。
復次,釋提桓因自知所說諸法相無違錯,求佛印可,使聽者信受,故佛卽可之。
또한 이 대중 가운데에는 큰 아비발치 보살과 번뇌가 다한 누진(漏盡) 아라한과 욕망을 여읜 하늘들이 있으며, 이 모든 이들은 석제환인이 부처님이나 수보리 존자와 함께 문답하면서도 마음에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 석제환인은 번뇌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문답하면서 제법의 끝인 법변(法邊)을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석제환인은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께 물은 것이며,
또 석제환인 스스로가 하는 말은 제법의 상(相)에 어긋남이 없음을 알고 있으므로, 듣는 이로 하여금 믿고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인가(印可)를 구하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곧 그의 말을 인가하신 것이다.
問曰:佛何以可釋提桓因說?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석제환인의 말을 인가하신 것입니까?
答曰:釋提桓因雖非一切智人,常從佛聞,誦讀力强,是故所說有理,佛便印可。
佛說有三種慧:聞慧、思慧、修慧。
有人聞慧、思慧明了故,能與修慧人問難。譬如乘船隨流,不自用力而疾於陸行;
如阿難雖未離欲,未得甚深禪定,而能與佛、漏盡阿羅漢等論議,隨法無違。
답하나니, 석제환인이 비록 일체지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항상 부처님으로부터 듣고 있고 독송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도리에 맞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인가하신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와 수혜(修慧)의 세 가지의 지혜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어떤 분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로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수혜(修慧)의 사람에게 묻고 따질 수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배를 타고 파도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스스로의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육지로 가는 것보다 빠른 것과 같이,
아난 존자와 같은 이도 비록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고 매우 깊은 선정은 얻지 못하였지만 부처님과 번뇌가 다한 누진(누漏盡) 아라한들과도 함께 논의(論議)하면서 법에 맞추어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