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8권 3

Skunky 2024. 10. 21. 08:02

大智度論 釋願樂品 第六十四 卷七十八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4. 원요품(願樂品) 풀이함 3

 

譬如一六神通阿羅漢,將一沙彌,令負衣鉢,循路而行,沙彌思惟:“我當以何乘入涅槃?”卽發心:“佛爲世尊,最上最妙,我當以佛乘入涅槃。”師知其念,卽取衣鉢自擔,推沙彌在前行。沙彌覆復思惟:“佛道甚難,夂住生死,受無量苦,且以小乘早入涅槃。”師復以衣鉢囊還與沙彌令擔,語在後行。如是至三。沙彌白師:“師年老耄,狀如小兒戲!方始令我在前,已復令我在後,何其太速?”

비유하자면, 마치 여섯 가지의 육신통(六神通)을 지닌 아라한이  사미에게 바랑을 지우고 길을 가면서 일어난 일과 같으니, 

사미가 길을 가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장차 어떤 승(乘)으로써 열반에 들어야 할까?’라고 하다가 이내 발심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존귀하신 세존(世尊)이시라 가장 높으시며 가장 미묘하신 분이니, 나는 장차 불승(佛乘)으로써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하자,  스승이 그의 마음을 알고 얼른 바랑을 벗겨서 자신이 짊어지고는 사미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사미가 조금 지난 다시 생각하기를 ‘부처님 도(道)는 매우 어려워서, 오래도록 생사(生死)의 무량한 고통을 받아야 하니, 우선 소승(小乘)으로써 일찍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하자, 그 스승이 다시 바랑을 벗어서 사미에게 지우고는 그를 뒤따라오게 하면서 자신이 앞서서 걸어갔다.

이렇게 하기를  번이나 되풀이하자 사미가 스승에게 묻기를 “스승께서는 늙으셨으는지, 하시는 일이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하듯 하십니다. 처음에는 저를 앞세우셨다가 뒤따르게 하셨으니, 어찌 그리 변덕이  끓듯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師答:“汝初念發心作佛,是心貴重,則住我師道中。如是人,諸辟支佛尚應供養,何況阿羅漢!以是故,推汝在前。汝心還悔,欲取小乘,而未便得,汝去我懸遠,是故令汝在後。”

沙彌聞已驚悟:“我師能知我心!我一發意已勝阿羅漢,何況成就!”卽自堅固住大乘法。

그러자 스승이 대답하기를 “너는 처음에는 발심하면서 부처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니,  마음은 귀중한 것이어서  나에게 있어서는 스승의 도(道)에 머문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은 모든 벽지불조차도 공양해야 되거늘 하물며 아라한인 나이겠는가! 그 때문에 너를 앞세워 모시고  것이다. 

그런데 네가 다시 마음으로 후회하면서 소승을 취하겠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너는 아직 도를 얻지 못하였고 나와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시 너를 뒤따라 걷게 한것이다”고 하였다.

사미는 스승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한편 깨달으면서, ‘나의 스승께서는 나의 마음을 아셨구나! 내가   발심한 것조차도 벌써 아라한보다 뛰어나거늘 하물며 성취하는 것이랴!’고 하고,  스스로가 견고하게 대승의 법에 머무르게 되었다.

 

復次,勝名不必一切事中皆勝,但以“一發心,欲作佛,度衆生”,是事爲勝;諸餘禪定、解脫等,猶尚未有,何得言勝?譬如以飛言之,鳥則勝人。未來當得功德,此事不論。

'뛰어나다는 승(勝)'이란, 반드시 모든  가운데에서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번만이라도 발심하여서 부처님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으로, 그 밖의 선정이나 해탈 등은 아직지도 않았거늘 어떻게 뛰어나다고 말할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마치 공중을 나는 비(飛)라 하여, 새가 날 수 있는 것이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미래에는 당연히 공덕을 얻겠지만, 그 미래에 있을 공덕을 여기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다.


小乘人言:“乃至補處菩薩,尚不勝小沙彌得無量律儀者。”

摩訶衍論中,或有人如是言:“其有發大乘心者,雖復在弊惡小人中,猶勝二乘得解脫者。”是名二邊。離是二邊,名爲中道。中道義,如上說。以其有義理實故,應當取。是故說:“初發心時,勝一切衆生,何況成佛!”

소승인은 말하기를 “한 생만 지나면 부처님이 될 보처(補處, 미륵 보살) 보살조차도 오히려 작은 사미로서 무량한 율의(律儀)를 얻은 이보다는 못하다”고 하며,

또한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 혹 어떤 분이 말하기를 “그 어떤 이가 대승의 마음을 일으켰다면, 비록 그가 못된 소인(小人) 가운데에 있을지라도 오히려승(二乘)으로서 해탈을 얻은 이보다 뛰어나다”고 하기도 하나니,

이러함을  가지의 치우침인 이변(二邊)이라 하고,  이변(二邊) 여의면 중도(中道)라 하며, 중도에 관한 이치는 위에서의 설명한 바와 같다.

 이치인 의리(義理)가 진실하기 때문에 마땅히 취해야 하며, 그러한 때문에 말하기를 “처음 발심할 때 조차도 일체 중생보다 뛰어나거늘 하물며 성불하는 것이랴!”고 한 것이다.

 

제1 발의(發意)보살, 제2 지지(持地)보살, 제3 응행(應行)보살, 제4 생귀(生貴)보살, 제5 수성(修成)보살, 제6 행등(行登)보살, 제7 불퇴전(不退轉)보살, 제8 동진(童眞)보살, 제9 요생(了生)보살, 제10 보처(補處)보살- 청정마실


聞薩婆若信者,得人中善利。有人言:“六波羅蜜是利。”

有人言:“六波羅蜜果報是利,所謂轉輪聖王、釋梵天王、人王、法王等。”

有人言:“得阿鞞跋致,不墮惡道,常生人天富貴處。”

有人言:“菩薩住於果報神通,遊至十方,供養諸佛,種種方便教化衆生;信受因緣,教化衆生,得如是等大利。”

살바야를 듣고 믿는 이는 인간 안에서 좋은 이익을 얻나니,

어떤 분은 “육바라밀이 바로  이익이다”고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6바라밀의 과보가 바로  이익이니, 이른바 전륜성왕과 제석ㆍ범천왕이 되고, 인간의 왕이나 법왕(法王)이 되는  등이다”고하기도 하며, 

어떤 분은, “아비발치(阿鞞跋致)를 얻고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며 항상 인간과 천상의 부귀한 곳에 태어나는 것이다”고하기도 하고, 

어떤 “보살은 과보의 신통에 머물러 시방을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갖가지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인연을 믿고 받으면서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이익을 얻는다”고하기도 한다.


壽命中最者,衆生有二種命:一者、命根,二者、智慧命。是人得智慧命故,說“壽命中最”。何況發心!

發心者可敬可貴。所以者何?如先說因緣:“能捨自樂、與他樂;不自憂苦,憂他人苦故”

爾時,釋提桓因欲現歡喜相,以天文陁羅花散佛上,如經廣說。

‘수명 가운데에서 으뜸인 최(最)’라 함이란, 중생에게  가지의 수명이 있으니,

첫째는 목숨인 명근(命根)요, 둘째는 지혜의 지혜명(智慧命)이다. 

 사람은 지혜명(智慧命)을 얻었기 때문에 수명 가운데서 으뜸인 최(最)라 하나니, 하물며 발심하는 것이겠는가?

발심한 이는 공경해야 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나니, 왜냐하면 앞에서 인연을 설명한 것과 같이 자기 스스로의 즐거움을 버리면서 남에게 즐거움을 주며, 자기 스스로의 괴로움은 근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은 근심하기 때문이다.

그때 석제환인이 환희상(歡喜相)을 나타내고자 하늘의 만다라꽃을 부처님 위에뿌렸으니,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다.


問曰:罪福不可以與人,雖欲與,亦不得,釋提桓因何以言:“以此福德令求佛道者具足佛法?”

묻나니, 죄와 복은 남에게  수도 없는 것으로, 아무리 주고자 하여도  없거늘, 석제환인은 무엇 때문에 “이 복덕으로써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이로 하여금 부처님의 불법을 완전히 갖추게 하리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雖不可與人,然自令心好。又是釋提桓因顯此不著福,是故以隨喜心與求佛道者。與聲聞人亦爾。

釋提桓因白佛:“我雖得聲聞道,亦不生一念令菩薩轉還向二乘心。所以者何?諸菩薩見衆生在生死中有種種苦,欲利益一切世閒故,作是願:‘未度者我當等度。’”

답하나니, 비록 남에게  수는 없지만, 스스로 자신들의 마음을 좋게 하는 것이며, 석제환인은 이러한 복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 기뻐하는 수희심(隨喜心)으로써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이들에게 주는 것이며, 성문인에게 주는  또한 그러한 것이다.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저는 비록 성문의 도를 얻었을 뿐이지만, 보살로 하여금 다시 물러나 2승(乘)의 마음을 향하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내지 않게 하겠습니다”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모든 보살은 중생이 생사 가운데에 있으면서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일체 세간을 이익되게 하고자 원을 세워서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저는 평등하게 제도 하겠습니다’고 하기 때문이다.


爾時,會中衆生有作是念:“若如上說隨喜有功德,初發心人隨喜,於久發心人隨喜,有何差別?”

釋提桓因欲解衆人疑故,問佛言:“世尊!於初發心菩薩功德隨喜得幾許福德?”

如經廣說。是福德無量無邊,以種無量無邊田中;人不能數知,故說譬喩令解,

如經中廣說。隨喜之德雖無量無邊,於近佛道者,隨喜福德轉多。

그때 모임 안에 있던 중생으로서 이렇게 생각을  이도 있었으니,  ‘만약 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따라 기뻐하는 수희(隨喜)의 공덕이 있다면, 초발심(初發心) 사람을 따라 기뻐하는 수희(隨喜)와 오래전에 발심한 구발심(久發心)의 사람을 따라 기뻐하는 것에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일까?’라고 하였으므로, 

석제환인은 여러 대중들의 의심을 풀어 주고자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발심한 보살의 공덕을 따라 수희(隨喜)하는 것으로 얼마의 복덕을 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복덕은 무량하고 무변하며,  종류 역시 무량하고 무변하기 때문에 복전(福田) 중의 사람의 공덕은 헤아려  수는 없는 것이므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셔서 알게 하셨으니,  가운데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과 같이 “따라 기뻐하는 수희공덕(隨喜功德)이 비록 무량하고 무변할지라 부처님의 불도에 가까워진 이가 (중생을) 따라 기뻐하는 수희공덕의 복덕이 더욱 더 많다”고 하신 것다.


是時,帝釋歡喜故白佛言:“世尊!諸有聞是功德不隨喜者,則是魔民,從魔天來。”所以者何?在魔境界,積集惡心故不隨喜。此中說因緣:“隨喜心能破魔界。是故求佛道者,欲愛敬三尊不捨者,當以隨喜心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 때에 제석이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러한 공덕을 듣고도 따라 기뻐하지 않는 이라면 그는 바로 악마의 백성이요, 악마의 하늘인 마천(魔天)에서  자입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경계에 있으면서 나쁜 악심을 쌓아 모은 까닭에 따라서 수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하였으며, 

 가운데서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따라 기뻐하는 수희심 악마의 경계를 부수기 때문에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는 이가존(三尊, 불법승의 삼보三寶)을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버리지 않고자 한다면 마땅히 따라 기뻐하는 수희심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不一不二相者,不見諸法有一定相不屬因緣者,故言“不一”;不分別隨喜心、迴向心,是名“不二”,畢竟空故。

佛可帝釋意已,更稱說隨喜功德:“是人常憶念十方諸佛功德隨喜故,疾得見佛。

又以深心,於一切衆生欲令離苦得樂,是故往來生死,六情初不受惡塵。終不離生諸佛前,以不斷種見佛行故。”

‘하나도 아닌 불일(不一), 둘도 아닌 불이(不二)의 상(相)’이란, 함은법에 일정하게 정해진 정상(定相)이 있어서 인연(因緣)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아닌 불일(不一)’이라 하며, 

따라 기뻐하는 수희심(隨喜心)과 회향하는 회향심(迴向心)을 분별하지 않으므로 ‘둘도 아닌 불이(不二)’라고 하는 것이니, 필경공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제석의 뜻을 옳다고 하신 뒤에 다시 수희공덕을 칭찬하시면서 “이 사람은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기억하고 따라 기뻐하기 때문에 신속히 부처님을 뵙게 된다”고 하셨으며, 

 깊은 마음으로 일체 중생들에게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생사를 왕래하면서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정(六情) 처음부터 나쁜 티끌의 악진(惡塵)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끝내 모든 부처님 앞에 태어나는 것을 여의지 않나니, 그것은 부처님을 뵙는 견불행(見佛行)을 심는 일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此中佛自說因緣:“是人於無央數阿僧祇初發心菩薩乃至無量一生補處菩薩皆隨喜故,得如上果報,疾成佛道,度無量阿僧祇衆生。”

復次,憍尸迦!是菩薩因是福德如諸法實相迴向。於實相中心不可得,是故說“非心,亦不離心”,如上說“不一不二”義,以事異故更說。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러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 무앙수(無央數)의 아승기 동안 처음발심한 보살에서부터 무량한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따라 기뻐하는 수희하였기 때문에 위에서와 같은 과보를 얻어서 신속히 부처님의 불도를 이루고, 무량한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신 것이며, 

다시 “교시가야, 이러한 보살은 이러한 복덕으로 인하여법의 실상(實相) 그대로 실상 가운데에 회향하느니라”고 하셨으며, 마음은 얻을  없는 심불가득(心不可得)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닌 비심(非心)이요, 또한 마음을 여의지도 않는 이심(離心)이다”고 하셨으며, 위에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라는 이치를 말씀하신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다시 설명한 것이다.


須菩提聞已,取是空無有心相難佛:“是心非心,空、無所有、如幻,云何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反問須菩提:“汝見是空心定相如幻不?”

須菩提作是念:“心若空如幻,云何可見?若可見,則非空。”是故答言:“不。”

수보리 존자가 듣고 나서  공에는 마음의 심상(心相) 없다는 대하여 부처님께 따지면서 “이 마음은 마음이 아닌 비심(非心)이요, 공하여 무소유(無所有)라서, 마치 허깨비와 같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반문하시기를, “그대는  공한 마음이 일정한 정상(定相)이라서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보는 것인가?”라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마음이 만약 공하여 허깨비와 같다면 어떻게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공한 것이 아닌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아닙니다”라고 한 것이다.


佛言:“心若空、無所有,汝見是中有是若有若無戲論不?”

答言:“不也。”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만약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라면 그대는 이러한 가운데에서 ‘있다 없다는 유무(有無, 상견과 단견)’쓸모없는론이 있다고 보는가?”라고 하시자,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離是空、無所有、如幻心,汝見更有法能得無上道不?”

答言:“不見。”不見、不可得故,何有法若有、若無?一切諸法畢竟離故、畢竟空故,不墮有、不墮無;

若法不墮有無中,是則畢竟無所有,不應得無上道。以是因緣故,般若波羅蜜畢竟離相,見有、無二俱過故。禪波羅蜜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如是畢竟離相。

若法畢竟離,則不可得見、不可得修、不可得斷、不可得證;行是法則更無所得,畢竟離故。

“이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이고 마치 허깨비와 같은 마음을 여의고 그대는 다시 어떠한 법이 있어서 위없는 무상도(無上道)를 얻을  있다고 보는가?”라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면 얻을 수도 없는 불가득이거늘 어찌 법이 있다 없다 하겠습니까!

일체 제법은 필경에 여의는 필경리(畢竟離)이고 필경공이기 때문에 있다는 유(有, 상견)에도 떨어지지 않고, 없다는 무(無, 단멸견)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법이 ‘유무(有無, 상견常見과 단멸견斷滅見)’에 떨어지지 않으면 이것은  필경에는 아무것도 없는 필경무소유(畢竟無所有)이므로 무상도 또한 필경무소유라서 얻지 못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의는 필경이상(畢竟離相)인 것입니다. 

있다 없다는 유무(有無, 상견과 단견)로 본다 유무의  가지에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이니, 선바라밀(禪波羅蜜)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아서 필경 여의는 필경이상(畢竟離相)입니다.

만약 법이 필경에 여의는 필경리(畢竟離)라면  수도 없고 닦을 수도 없으며, 끊을 수도 없고 증득할 수도 없으므로 이러한 법을 행한다면 다시는 얻을 것이 없나니, 그것은 필경에 여의는 필경리(畢竟離)이기 때문입니다.


“世尊!今般若波羅蜜畢竟離,阿耨多羅三藐三菩提畢竟離,云何以畢竟離得畢竟離?”

若一法畢竟離,尚不應有所得,何況二離!

譬如以指觸虛空,虛空無觸故,指不能觸,何況二皆無觸!亦如虛空、涅槃。般若波羅蜜畢竟離、阿耨多羅三藐三菩提畢竟離,云何用離得離?

세존이시여, 이제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의는 필경리(畢竟離)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필경리(畢竟離)이거늘 어떻게 필경 여의는 필경리(畢竟離)로써 필경리(畢竟離)를 얻겠습니까? 

만약 하나의법이라도 필경리(畢竟離)라면 오히려 얻을 것이 있지 않은 것이거늘, 하물며 유무의 둘다 여읜 것이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마치 손가락으로 허공을 대는 것과 같나니, 허공에는 접촉할 것이 없기 때문에 손가락이 닿을  없거늘, 하물며 유무의 둘 모두에 닿는 것이겠습니까?  마치 허공이요 열반과 같아서 반야바라밀은 필경 여읜 필경리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필경 여읜 필경리이거늘 어떻게 여읜 이(離)로써 여읜 것을 이(離)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