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7권 10
大智度論 釋同學品 第六十二 卷七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3. 등학품(等學品)을 풀이함 7
如是等利益,皆是學般若故得,是故言盡諸學邊。少有能如是學,是人難得!佛欲令此義明了,故說譬喩,金銀及轉輪聖王業等。
復次,菩薩學是般若時,不生慳等心。不生慳等心者,菩薩學般若波羅蜜故,抑制諸煩惱;煩惱雖未盡,無所能作,是故言不生。
이와 같은 등의 이익 모두는 반야를 배우기 때문에 얻는 것이니, “모든 배움의 끝을 다하는 진제학편(盡諸學邊)이다”고 말하는 것이며, 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배울 수 있으며, 이러한 사람은 만나기 어려우므로 부처님께서는 그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비유로 ‘금은과 전륜성왕의 업 등’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 보살이 이 반야를 배울 때에는 간탐 등의 마음을 내지 않나니,
‘간탐 등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 함이란, 보살이 반야바라밀 등을 배우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억제하며, 비록 번뇌가 다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지음이 없기 때문에 “내지 않는 불생(不生)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菩薩行般若,知一切諸法相皆虛誑不實故,是以不取色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
何以故?不欲令墮有無見中故,直行中道,集菩薩行。
此中佛自說因緣:“菩薩行般若,於一切法無所得,無所得故,無有法可取相 若善、若不善等。”菩薩若能如是學,摠攝諸波羅蜜。
檀等諸波羅蜜不離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力故,令餘波羅蜜離諸邪見、貪著,各得增長。
佛欲令此義明了故,說譬喩:如我見及命根等。
보살이 반야를 행하면서 일체법의 상(相)은 모두가 거짓된 허광의 것이요, 진실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물질(色) 내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相)을 취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있다 없다는 유무(有無)'의 소견에 떨어지지 않고 싶은 까닭에, 곧바로 중도(中道)를 행하면서 보살행을 쌓는 것이며,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이 반야를 행하면, 일체법에서 얻는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고, 무소득이기 때문에 선(善)이라거나 불선(不善)이라는 등의 상(相)을 취할 수 있는 어떤 법도 없다”고 하신 것이며,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통틀어 모든 바라밀을 포섭하는 총섭(總攝)게 되는 것이다.
단(檀,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의 힘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바라밀로 하여금 모든 삿된 소견과 탐착을 여의고 저마다 더욱 자랄 수 있게 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비유로 ‘나라는 소견의 아견(我見)과 목숨의 명근(命根) 등’에 관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問曰:我見、諸見各有別相,云何攝入我見中?
묻나니, 나라는 소견의 아견(我見)과 여러 소견들은 저마다 각각의 상(相)이 있거늘, 어떻게 나라는 소견의 아견(我見)에 포함된다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雖有別相,我見是本。人以無明因緣故,空五衆中生我見;
生我見故,言“是身死,如去、不如去”。若如去,則是常見;若不如去,則是斷見。若謂斷滅,現今受樂、著五欲,以惡法爲最,則生見取。若謂常,出家學道,持戒、苦行,則生戒取。
或時見斷、常俱有過故,便言無因緣果報,則生邪見。
住是五見中,世閒常無常、前際後際等,生五十七見。是故說“身見攝六十二見”,無咎。
답하나니, 비록 따로따로 각각의 상(相)이 있을지라도 나라는 아견(我見)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무명(無明)의 인연 때문에 공한 오중(五衆) 가운데에서 '나'라는 아견(我見)을 내는 것이며,
'나'라는 아견(我見)을 내기 때문에 ‘이 몸이 죽는 것은 여여하게 가는 여거(如去)라거나, 여여하게 가는 것이 아닌, 불여거(不如去)이다’고 하나니,
만약 여여하게 가는 여거(如去)라 한다면, 그것은 곧 항상하다는 상견(常見)이요,
만약 여여하게 가는 것이 아닌 불여거(不如去)라면, 그것은 곧 아주 없다는 단견(斷見)이다.
만약 아주 없다는 단멸(斷滅)이라 한다면, 현재의 쾌락만을 받으면서 오욕(五欲)에 집착하고, 나쁜 악법을 으뜸으로 삼으면서 견취(見取)를 내며,
만약 항상하다는 상견(常見)이라면,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계율을 지니며 고행(苦行)하는 등의 계취(戒取)를 내나니,
단견과 상견이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에 곧 “인(因)과 연(緣)과 과(果)가 없다”고 하면서 삿된 사견을 내는 이가 있게 되며,
유신견(有身見), 변집견(邊執見, 상견 단견), 사견(邪見),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의 다섯 가지의 오견(五見, 염오견染汚見)에 머무르면서 세간이 항상하다, 무상하다는 것과 전제(前際)ㆍ후제(後際) 등의 57견(見)을 내기 때문에 “몸에 대한 소견의 신견(身見, 유신견)이 62견(見)을 포섭한다”고 말하여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
如是等種種因緣譬喩故,知般若波羅蜜諸法中最第一;般若波羅蜜諸法中最第一故,菩薩學是般若故,於衆生中第一。
佛欲以是事善化衆生故,說譬喩:“須菩提!於汝意云何?三千大千世界中衆生多不?”如是等,乃至“菩薩如是學,當知是不退轉,遠離二乘,近佛乘。”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반야바라밀이 제법 가운데서 제일 첫째가는 것임을 알며,
반야바라밀은 제법 가운데에서 제일 첫째이고, 보살은 이 반야를 배우기 때문에 중생들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함으로써 중생들을 잘 교화하시고자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곧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들이 많은가?”라는 등에서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바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이라서 2승(乘)을 멀리 여의고 불승(佛乘)에 가까워진다고 알아야 한다”고 하신 것에 이르기까지이다.
復次,佛告須菩提:“若菩薩作是念:‘是般若波羅蜜。’”是般若波羅蜜者,示般若波羅蜜相若有、若無等,見般若、得般若、著般若等。
我以是般若波羅蜜得一切種智者,五衆和合假名菩薩;菩薩隨逐假名字計以爲我,以是般若有所作。
般若是無著相,而是人說有相般若是第一義,是人隨假名而生我心。般若是無作相,而是人欲用般若有所作,所謂我用是般若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佛言:“作如是念者,不名行般若。”若不如是念,名爲行般若波羅蜜。
또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라고 생각한다면”이라 하신 것은, 이 반야바라밀이 있다 없다는 유무(有無)등의 반야바라밀의 상(相)으로써 반야를 보고, 반야를 얻고, 반야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반야바라밀로써 일체종지를 얻는다’고 하는 것은, 오중(五衆)이 화합해서 임시의 가명으로 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데, 보살은 임시로 붙인 가명을 따르면서 '나(我)'라고 헤아리기 때문에 반야에 짓는 바가 있는 유소작(有所作)이 되나니,
반야는 집착할 것이 없는 무착상(無著相)인데도 이 사람은 “반야에 상(相)이 있다”고 말하며,
반야는 바로 제일의(第一義)인데도 이 사람은 임시로 붙인 가명을 따르면서 '나'라는 아심(我心)을 내며,
반야는 지음이 없는 무작상(無作相)인데도 이 사람은 반야를 이용하여 짓는 바가 있는 유소작(有所作)이 되게 하고 싶어하나니,
이른바 “나는 이 반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이는 반야를 행한다고 하지 못하며, 만약 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問曰:作是念、不作是念,事已盡,何以復有第三說?
묻나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작시념(作是念),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불작시념(不作是念)’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말씀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세 번째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初者是邪行相,第二遮邪行;未說正行相,是故第三說正行相。
復次,初是著心取相;第二破是著相,不說云何是諸法相;第三中破邪著,亦說實相。
답하나니, 처음에는 바로 삿된 행의 사행상(邪行相)이요,
두 번째는 삿된 행을 막으면서도 아직 바른 행의 정행상(正行相)을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세 번째로 바른 행의 정행상(正行相)을 말씀하신 것이며,
또 처음에는 집착하는 마음의 착심(着心)으로 상(相)을 취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집착하는 착상(著相)을 깨뜨리면서도 어떠한 것이 제법의 상(相)인가를 말씀하지 않았으며,
세 번째는 삿된 집착의 사착(邪著)을 깨뜨리는 한편 실상(實相)을 말씀하신 것이다.
菩薩作是念:“於一切處,不顯示般若波羅蜜相;亦不生我心、我用般若波羅蜜有所作;
但知一切法常住如、法性、實際中,於如、法性、實際中不諍。”是故說第三無咎。
보살이 생각하기를 ‘일체처(一切處)에서 반야바라밀의 상(相)을 드러내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나'라는 아심(我心)도, '나'는 반야바라밀로써 짓는 유소작(有所作)이 있다는 마음도 내지 않고,
다만 일체법의 상주(常住)ㆍ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 가운데에서 알 뿐이다’고 하나니,
여ㆍ법성ㆍ실제 안에서는 다툼이 없기 때문에 세 번을 설명하여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七十七 終 대지도론 77권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