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원문과 해설

17 범행품(梵行品) 3

Skunky 2021. 7. 1. 15:06

(11)戒律  청정범행과 제일 밀접.

若戒가 是梵行者인댄 爲壇場이 是戒耶아 問淸淨이 是戒耶아 敎威儀가 是戒耶아 三說羯磨가 是戒耶아

和尙이 是戒耶아 阿闍黎가 是戒耶아 剃髮이 是戒耶아 着袈裟衣가 是戒耶아 乞食이 是戒耶아 正命이 是戒耶아

 

若戒 是梵行잔댄, 만약 계가 범행이라면 爲壇場(위단장) 是戒耶? 제단이 계인가,

[계를 설할  늘 차려져있는 곳도 있고, 임시로 차리는 경우도 있는데, 삼사칠정이라 해서 열 명의 스님들이 앉는 단=계단=壇場(단장) 목수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계이냐?] 

 問淸淨 是戒耶? 청정을 묻는 것이 계인가,

[를 받을 때 “네가 자격이 있느냐? 현재 청정하냐?”고 물으면, “예”라고 대답하듯이, 그래서 청정하냐?고 묻는 것이 계이냐?]

敎威儀(교위의) 是戒耶? 위의를 가르치는 것[敎威儀]이 계인가,

[교수사가 威儀를, 승려는 이렇게, 사미는 이렇게, 보살은 이렇게, 비구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

三說羯磨(삼설갈마) 是戒耶? 갈마가 계인가,

[갈마(羯磨)는 ⓢkarm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의식’을 뜻한다.]

[羯磨는 세 번 묻습니다. 말하자면 “네가 계를 받는데, 하자가 없느냐? 오역죄를 짓지 않았느냐? 지은 사람은 나가거라.” 이런 식으로 羯磨=作法 계를 받을 수 있는 법도를 짓는 것을 세 번 설하는 것] 

和尙(화상) 是戒耶화상=승려가 계인가,

阿闍黎(아도려) 是戒耶? 아사리(阿闍梨)가 계인가,

[아사리(阿闍梨)는 법어 ācārya의 음역(音譯)으로, 궤범사(軌範師), 계사(戒師) 등으로 의역되며 바른 행동을 보여준다 하여 정행(正行)이라 하기도 하며, ‘스승’이라는 뜻이다. 계율과 의식에 밝아 출가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덕이 높고, 또 선법(善法)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옷을 단정히 입고 걸식(乞食)을 법답게 하며, 항상 제자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승려를 아사리라고 하였다. 그 자격은 10회 이상의 안거(安居)를 마쳤고 계율에 밝으며, 지혜와 복덕을 겸비해야만 한다.승려를 말한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는 이에게 10계(戒)를 주는 출가아사리(出家阿闍梨), 구족계를 줄 때 의식을 주관하는 갈마아사리(羯磨阿闍梨), 구족계를 받는 이에게 규율이나 몸가짐 등을 가르치는 교수아사리(敎授阿闍梨), 경전을 가르치는 수경아사리(受經阿闍梨)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아사리라고 하면 은사(恩師)·법사(法師)·계사(戒師) 중 계사를 지칭하게 된다. 이들 아사리는 13덕(德)을 갖추어야 한다.]

剃髮(체발) 是戒耶삭발이 계인가, 着袈裟衣(착가사의) 是戒耶가사옷 입는 것이 계인가,

乞食(걸식) 是戒耶? 걸식이 계인가, 正命 是戒耶정명이 계인가 살피고 [8 정도의 정명]

[바르게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겁니다. 맹자에 모순이라는 말이 있지요.

창을 파는 것 보다 방패를 파는 것이 오히려 좋은 직업이다.

창은 사람 죽이는 물건이지만, 창 만드는 사람은 창을 만드는 것이 正命입니다. 

正命이 상황 따라서 바른 직업이라는 뜻으로 바르게 생명을 유지한다. 바른 직업이라는 뜻이지만 바른 직업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비구는 걸식을 해야 되고, 백정은 도살해야 되고, 어부는 고기 잡아야 되고, 창 만드는 사람은 창 만들어야 되고, 방패 만드는 사람은 방패 만들어야 되고요.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그 사실 하나ㆍ하나가 전부 正命이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창 보다는 방패의 장사를 하는 것이 낫지요. 그거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니까요. 

그 전에 어느 암자의 신도회장이 인쇄소를 하다가 漁具(어구). 부산사람이니까, 고기 잡는 도구를 파는 장사를 해서, 제가 실망 많이 했습니다. 고기 잡는 漁具를 팔다가 그것을 버리고 인쇄소를 차려야 옳지, 왜 인쇄소, 문화 사업을 하다가 漁具를 파느냐고요. 하지만 살아가면 그런 입장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고준한 화엄경의 안목이지만, 중도적인 관점에서 치우치지 않고, 다 수용하는 입장에서 정명을 살펴야지요.]

[계율도 이렇게ㆍ이렇게 분석해보니까 계율이라고 하는 자체가 없는데, 청정범행을 또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敎法, 意業語業身業이 그렇고, 모든 것이 분석해보니까 실체가 없는 것을 얼기설기 이론적으로 묶어 놓은 것을 청정범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위와 같은 觀과 行과 行에 의거해 身·口·意의 업과 佛·法·僧의 戒와 色·受·想·行·識과 身邊:신견과 변견) 見과삼세의 멀고 가까움을 모두 없게 하고, 능히 관하는 마음[能觀心] 관해지는 마음[所觀心]까지 없앰으로써 침체하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으며 生하지도 않고 滅하지도 않아서 理에 맡겨 사념이 없으면 여래의 가지 智力이 이로 인해 나타난다.

무릇 부처님의 지혜는 침체해 가라앉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마음을 미혹해 相을 좇기 때문이니, 情이 무너지면 지혜가 나타나 一體라서 것이 아니며, 지혜가 나타나면 집착의 장애가 없어서 시방이 확연자재(廓然自在)하다. 티끌에처하면서도 작아지지 않고 空에 두루하면서도 넓혀지지 않으니, 자취를 窮究하면 시방에 터럭만한 자취도 없고, 작용을 일으키면 찰나의 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몸과 행이 편만하고 두루하여 허공처럼 다함이 없으니, 만약 有를 간직하면 그대로 일체의 刹海에 色像이 겹쳐서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고, 만약 無를 불러들이면 가지 경게에서도 體를 엿볼 없다.

생각하지 않아도 온갖 법을 알고 작위하지 않아도 공을 성취하니, 생사로도 뜻을 변하게 하지 못하며, 고통과 즐거움으로도 성품을 바꾸지 못하는 지라, 만약 神이 理에 부합한 자가 아니라면 정견의 상념으로 있는 것도 아니며, 소멸한 마음[滅心]으로 얻을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여래께서 청정한 행의 가르침을 시설해서 법을 관함이 극진하면, 그때 정법이 응당 일어나고 온갖 견해가 사그라지면서 부처님 지혜가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니, 견해가 사그라지고 지혜가 응하는 것을 ‘초발심 시에 문득 정각을 성취한다’고 이름붙이는 것이라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면서도 타자를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후대에 배우는 선비는 법에 응해 수행할 것이지, 경계를 좇아 빠져 들어가서 영겁을 헤매면서도 된다.

~중략~ 가령 140願을 청정한 행이라고 칭한 것은 10신위에서는 願을 통해 세간의 지견과 만법을 성취함으로써 청정한 행을 삼는 것이지만, 10住位에서는 행의 體에 작위가 없는 것을 청정한 행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니, 청정한 행을 말미암아 지혜 작용의 자재로움을 이루기 때문에 [정행품] 10 초발심의 불과를 이루는 이며, 또한 이후의 10행·10회향·10 등의 불과도 짓게 되는 것이다.

자체성 없는 행으로부터 행이 청정하기 때문에 일체 모든 행이 청정한 것이며, 모든 행이 청정하니 지혜가 청정하고, 지혜가 청정하니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니 모든 법이 청정하고, 모든 법이 청정하기에 법계의 청정이라 이름붙이고, 법계의 청정함이 중생의 청정함이며, 중생의 청정함이 불국토의 청정함이니, 법의 평등함을 행하는 것이 명칭이 '청정한 ' 되는 것이다.]]

 

(12) 觀察成就相

如是觀已에 於身에 無所取며 於修에 無所着이며 於法에 無所住며 過去已滅이며 未來未至며 

現在空寂이며 無作業者며 無受報者며 此世不移動이며 彼世不改變이니라

 

如是觀已이렇게 살피고 나서 於身 無所取몸에서도 취하지 말고 

於修 無所着이며닦는 일에 집착하지도 말며 於法 無所住법에도 머물지 말아서

過去 已滅이며 未來 未至, 과거는 이미 소멸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1초 이전의 과거라 하더라도 이미 지나가 버리고 없는,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미래는, 1초 이후의 미래라 하더라도 아직 오지 않은 未來未至입니다.그러므로 現在 空寂한, 현재는 실체가 없습니다.]

現在空寂이며 현재는 공적한 것이라 無作業者업을 짓는다는 것도 없고 

無受報者(무수보자), 과보를 받는다는 것도 없으며 

此世不移動(차세부이동)이며, 이 세상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彼世 不改變(피세불개변)이니라. 저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닐 터인데

[過去已滅未來未至現在空寂이며,업을 짓는 자도 없으며, 과보를 받는 사람도 없으며,이 세상이 이동하지도 아니하고, 저 세상이 변하거나 고쳐지지도 않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해서 이렇게 성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無로 돌아가는, 空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一切皆空입니다]

  

(13) 梵行의 如實觀察

此中何法이 名爲梵行고 梵行이 從何處來며 誰之所有며 體爲是誰며 由誰而作고 爲是有아 爲是無아 

爲是色가 爲非色가 爲是受아 爲非受아 爲是想가 爲非想가 爲是行가 爲非行가 爲是識가 爲非識가

 

此中何法 중에 어느 법이 名爲梵行범행인가? 梵行 從何處來, 법행은 어디서 오고 

誰之所有(수지소유)누구의 소유이며, 體爲是誰(체위시수)실체는 무엇이며,

由誰而作(유수이작)? 무엇으로 인해 지어지는가?

爲是有? 이것이 있는 것인가 爲是無없는 것인가,

[空耶有耶 吾未知其所以(공야유야오미지기소이)로다. 함허스님의 금강경오가해 서문에, 손꼽을 만한 불교의 명작이지요.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絶名相(절명상)호대

  貫古今(관고금)하고 處一塵(처일진)호대 圍六合(위육합)이로다

  內含衆妙(내함중묘)하고 外應群機(외응군기)하며

  主於三才(주어삼재)하고 王於萬法(왕어만법)하니

  蕩蕩乎其無比(탕탕호기무비)요 巍巍乎其無倫(외외호기무륜)이로다

그러면서 그러한 사실이 이것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 空耶有耶

吾未知其所以로다. 내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아주 빼어난 법문입니다.]

爲是色인가 爲非色색이 아닌가,

爲是受爲非受? 인가 수가 아닌가, [色ㆍ受ㆍ想ㆍ行ㆍ識= 오온= 수]

爲是想爲非想인가 상이 아닌가,

爲是行爲非行인가 행이 아닌가,

爲是識爲非識인가 식이아닌가? 

 

(14) 梵行成就相

如是觀察에 梵行法을 不可得故며 三世法이皆空寂故며 意無取着故며 心無障礙故며 所行無二故며 方便自在故며 受無相法故며 觀無相法故며 知佛法平等故며  具一切佛法故니 如是가 名爲淸淨梵行이니라

 

如是觀察(여시관찰)이렇게 관찰한다면 梵行法 不可得故(불가득고)범행을 얻을 수도 없고,

[如實觀察. 그렇게 관찰해보면 그 무엇도 실체가 없고 주체가 없는 그것이 진정한 청정범행이다. 

그렇게 관찰하고 또 관찰해서 그 관찰이 아주 깊어 졌을 때 그것이 청정범행인 것이지요. 그것을 닦고 닦는다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해야 제대로 된 것입니다. 일종식을 하고, 옆도 안 돌아보고 살고, 제 때에 시간 맞춰 일어나서 예불하는 것도 다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실체가 없고 고정되어있는 것이 없고, 보장이 안 되어있습니다. 감기 걸려도 안 되고, 다치고 병나면 3 시 세끼는 고사하고 한끼도 제대로 못 먹는, 아무것도 고정된 것이 없고 실체가 없는 것을 청정범행이라고 생각하는데, 화엄경의 안목은 그것이 아니다.

화엄경의 안목은 청정범행을 여실관찰해서 바로 그 상황이면, 그 때는 무엇을 해도 청정범행입니다. 자도 청정범행이고, 깨도 청정범행이고, 염불을 해도 청정범행이요 낮잠을 자도 청정범행이요.]

三世法 皆空寂故(개공적고), 삼세(과거 현재 미래)의 법이 모두 공적하며, 

意無取着故(의무취착고), 마음으로 취해 집착할 것도 없고,[생각으로 取着할 것이 없다.]

心無障碍故(심무장애고)마음에 장애도 없으며, 

所行 無二故(소행무이고)행할 바에 둘이 없고,

方便 自在故(방편자재고)방편이 자재하며, 

受無相法故(수무상법고)모양(형상)없는 법을 받고,

觀無相法故(관무상법고)모양없는 법을 보며, 

知佛法平等故(지불법평등고)불법의 평등함을 보고, 

具一切佛法故(구일체불법고), 일체의 불법을 갖추게 되기 때문에[본래로 일체 불법을 구족한 연고다.]

[본래로 일체 불법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무엇이 불법이다.고해서 그것을 도입해서 물고 늘어지는 “꼭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 없습니다본래로 일체 불법이 다 갖춰져 있는, 기존의 갖춰져 있는 것에 눈을 뜨는 것이 화엄경의 이치입니다다른 데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如是 名爲淸淨梵行이니라. 이것을 청정한 범행이라 하느니라.

[옛날에는 멀리 가서 걸식을 해서 도량에 이르면 열두시가 넘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럼 실컷 탁발해 왔는데, 시간 지났다고 안 먹을 수 있나요? 안 먹고 버리면, 시주 은혜를 갚는 일이 아닌 겁니다. 수행자가 잘 먹어 소화를 해야 그것이 시주 은혜를 갚는 것인데, 시간 넘었다고 안 먹으면 그것 어떻게 돼요? 그런 것을 가지고 시시비비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손가락 마디,  “한마디 정도는 해가 지나가도 괜찮도록 하자ㆍ먹도록 하자”  이런 등등 이야기. 그 다음에

소금을 탁발해 왔다. 소금은 쉬는 것도 아닌데, 소금 탁발해 온 것을 그때 다 먹어야 되느냐? 그 짠 것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소금은 남겨놔도 된다. 딴 음식은 못 남겨놓게 돼있어서 그때 다 먹어야 되는 겁니다.

 “소금은 남겨놔도 된다.ㆍ안 된다. 된다.ㆍ안 된다.” 이것 때문에 종파가 나눠지고, 시시비비가 생긴 사례들이 초기불교에 너무 많았던 것은 형식적인 것에 너무 매달리고 승단중심ㆍ또 승단의 권리중심의 불교가 되어서, 그것이  “본래의 부처님 뜻이 아니다. 부처님의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자.” 라고 운동을 일으킨 것이 대승불교 운동이고 그 때부터 대승 경전이 세상에 빛을 보기시작 하는 것이지요.]

 

(15) 修習十種法  부처님의 10력

復應修習十種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處非處智와 過現未來業報智와 諸禪解脫三昧智와 諸根勝劣智와

種種解智와 種種界智와 一切至處道智와 天眼無礙智와 宿命無礙智와 永斷習氣智니라

於如來十力에 一一觀察하면 一一力中에 有無量義니 悉應諮問이니라

 

復應修習十種法(부응수습십종법)이니, 또 열 가지 법을 닦아 익혀야 하는데 何者 爲十?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하면,

所謂 處非處智(소위처비처지) 소위 옳은 곳과 그른 곳을 아는 지혜,

[ 非處도리와 도리 아닌 것. 앉을 자리ㆍ설 자리 아는 것.]

過現未來業報智(과현미래업보지)삼세의 업보를 아는 지혜,

諸禪解脫三昧智(제선해탈삼매지), 모든 선정 해탈 삼매를 아는 지혜,

諸根勝劣智(제근승렬지), 모든 근기의 우열을 아는 지혜,

[불법에 대해서 근기가 수승한지 하열한지는 아무도 몰라요. 불법을 이해하는 기준은 따로 있습니다.] 

種種解智갖가지 이해를 아는 지혜, 種種界智갖가지 세계=경계를 아는 지혜, 

一切至處道智도달할 모든 곳으로 가는 길을 아는 지혜,[죽은 뒤에 어디에 가서 태어나고 어디에 이르는가? 등]

天眼無碍智(천안무애지)천안통이 걸림없는 지혜,

宿命(숙명無碍智숙명통이 걸림없는 지혜,

永斷習氣智(영단습기지)니라습기를 영원히 끊어내는 지혜이니라.

於如來十力 一一觀察하면 여래의 십력 하나하나 살펴보면=관찰하면

一一力中하나하나의 힘 안에 有無量義무량한 뜻이 있으니 [한량없는 뜻이 있으니]

悉應諮問(실응자문)이니라모두 여쭈어야 마땅하느니라.

[응당히 물어야 된다. 자꾸 물어서 깨달아야 되고, 물어서 알 아야 된다는 말.]

 

(16) 起大慈悲心

聞已에 應起大慈悲心하야 觀察衆生하야 而不捨離하며 思惟諸法하야 無有休息하며

行無上業하야 不求果報하고 了知境界가 如幻如夢하며 如影如響하며 亦如變化니

 

聞已(문이), 듣고 나면  應起大慈悲心하야마땅히 자비심을 크게 일으켜서 

觀察衆生하야, 중생을 살피고  不捨離(이불사리)하며, 버리지 말며, [내치거나 버리지 말며] 

思惟諸法(사유제법)하야모든 법을 깊이 思惟하기를  無有休息(무유휴식)하며쉴 새 없이 하고,  

 無上業하야위 없는 업을 행하되 不求果報(불구과보)하고과보를 바라지 말며,

[수행해서, 아니면 도를 통해서 이익을 구하는 사람은 장사꾼과 같은 것이다. 불법가지고 장사하면 안 됩니다. 그냥 꾸준히 불자들을 선도=좋은 길로 인도하고, 복 짓는 길로 인도하다 보면 물질적인 이익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지, 물질적인 이익을 바라서 수행을, 불법을 권하거나 선전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了知境界(요지경계)모든 경계가  如幻如夢(여환여몽)하며 환상 같고 꿈 같으며   

如影如響(여영여향)하며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으며 

亦如變化(역여변화), 또 변화와 같음을 了知=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17) 修如是觀行 成就智身

若諸菩薩이 能與如是觀行相應하야 於諸法中에 不生二解하면 一切佛法이 疾得現前하야

初發心時에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知一切法이 卽心自性하야 成就慧身호대 不由他悟하리라

 

若諸菩薩만약 보살들이 能與 如是 觀行相應(능여여시관행상응)하야, 이러한 관찰과 행이 상응할 수 있어서

[觀行관행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보통 우리는  “참선”으로 표현하는데, 옛날 부처님 때의 정통 사유법은 觀行입니다.

예를 들어 무상을 관하는 것도 관행이라 하고, 그림자 같고ㆍ환영과 같고ㆍ꿈과 같은 것으로 사유하는 것도 觀行입니다.

그것이 관법입니다. 觀法. 요즘 數息觀(수식관)이라 해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대단히 유행하고 있지요.  “호흡을 예의주시한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다 예의주시한다.” 모두가 觀行입니다.]

於諸法中모든 법 안에 不生二解하면,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않는다면

疾得現前(질득현전)하야, 일체의 불법이 빨리 그 앞에 드러나서 

初發心時(초발심시), 초발심했을 때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요 

[다음이 초발심 공덕 품이니까 살짝 맛을 보여 주는 구절로, 이 범행품과 초발심 공덕품을 연결해주는 방법입니다]

 

知一切法 卽心自性하야, 일체법이 곧 마음의 자성임을 알아서 [일체법이 곧 자기 마음의 자성임을 알아서]

成就慧身(성취혜신)호대 不由他悟(불유타오)하리라. 남의 깨달음에 연유하지 않고 지혜의 몸을 성취하게 되리라."

[결국은 내 자신 속에서 내가 눈을 뜨는, 卽心自性 成就慧身이라.→ 一切唯心造지요. 

화엄경의 4구게가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知一切法 卽心自性 成就慧身.다른 이를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아미타불ㆍ지장보살ㆍ관세음보살을 불러도 결코 타력신앙이 아니고, 念彼觀音力(염피관음력)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부르는 그 힘은 내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령으로 운동을 하면, 운동하는 그 힘으로 알통이 생기고 팔이 튼튼해지고 몸이 건강해지는 이치입니다. 

아미타불을 부르면 아미타불이 와서 어떻게 해준다는 것은 방편으로 유혹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내가 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힘이 내 자생력= 나한테서 저절로 생긴 내 힘입니다.

그것이 관음보문품을 해석 하는 길이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관세음보살의 힘을 생각해서” 라고 번역하는 사람이 있고, 또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그 힘으로”  ‘아령을 가지고 내가 팔 운동을 하는 그 힘으로 내 몸이 건강해졌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결국 知一切法 卽心自性하야 成就慧身호대 不由他悟이것이 참~~ 중요한 말입니다.] 

 

[梵行品. 짧은 이지만 아주 파격적이고 기상천외한 품으로, 계율의 문제ㆍ청정범행의 실체를 사정없이 파헤친 품입니다. 화엄경은 부처님, 당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그냥 펼쳐 보이는 것으로, 듣는 사람의 수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설해진 경전입니다. 그래서 한편 梵行品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품이기도 하면서, 시원한 품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