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7권 9

Skunky 2024. 10. 20. 08:01

大智度論 釋同學品 第六十二 卷七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3. 등학품(等學品) 풀이함 6

 

此中說究竟事,於是佛讚歎:“如是學,雖不定爲一法故學而學薩婆若。”若學薩婆若,卽是學六波羅蜜等;若能學六波羅蜜等,是爲盡諸學邊。若盡諸學邊,是人無量福德、智慧具足故,魔、若魔民無能降伏。

여기에서는 마지막의 구경사(究竟事)를 말씀하셨으니,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면서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이 비록 일정하게 정해진 일법(一法) 때문에 배우는 것은 아니나,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니, 만일 살바야를 배우면 그것이  6바라밀 등을 배우는 것이니라. 

만약 6바라밀을  배우면 이것이 바로 모든 배움의 끝을 다하는 것이요, 만약 모든 배움의 끝을 다하였다면  사람은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완전히 갖추었기 때문에 악마나 악마의 백성이 그를 항복시킬  없느니라.

 

如是正學故,直到阿鞞跋致地。如是學,爲學佛所行道。

如是學,皆爲十方諸佛及大菩薩、諸天、善人所守護。

能如是學,是人無有邪見、心無所著,於一切衆生,能起大慈大悲;大慈大悲故,能教化衆生;

衆生心淸淨故,佛界淸淨;佛界淸淨已,得佛道,三轉十二行法輪,以三乘度無量衆生。

以大乘度衆生故,不斷佛種;不斷佛種故,於世閒常開甘露法門,常示衆生無爲性。

이와 같이 바르게 배우는 정학(正學)하기 때문에 곧바로 아비발치의 지위에 이르게 되며,

이와 같이 배우면 부처님이 행하신 바의 도(道)를 배우는 것이요

이와 같이 배우면 시방의 부처님과 큰 대보살과 그리고 모든 하늘과 착한 선인들의 수호를 받게 되며,

이와 같이 배우면 이 사람은 삿된 사견이 없고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일체 중생들에 대하여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일으키고 대자대비 때문에 중생을 잘 교화하느니라.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불계(佛界)가 청정하고,

부처님 불계가 청정하면 벌써 부처님의 불도(佛道)를 얻어서 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 법륜의 삼승(三乘)으로써 무량한 중생들을 제도하며,

대승(大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불종(佛種)을 끊지 않으며,

부처님의 불종을 끊지 않기 때문에 세간에 감로(甘露)의 법문을 열어서 언제나 중생에게 무위성(無爲性)을 보이느니라”고 하셨다.

 

'無爲性'者,所謂如、法性、實際、涅槃。'甘露'者,無爲性;'門'者,三解脫門。

'下劣'者,名懈怠、放逸,不樂佛法,不一心行道,罪福雜行。如是等,不能學是法。

何以故?是下劣者作是念:“我身及親屬是我所應護,諸餘衆生何豫我事,而以頭目髓腦施之,令其得樂? 一切人皆方便求樂,我今何爲捨樂求苦?”

或生邪見,復作是念:“衆生無量無邊,度不可盡;若可度盡,卽是有量有邊,一佛便可度盡。”

무위성(無爲性)이란 이른바 여(如)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와 열반(涅槃)이요, 

감로(甘露)라 함은 무위성이며, 문(門)이란, 공 무상 무작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이다.

‘하열(下劣)’ 이라 함은, 게으르고 방일(放逸)하면서 부처님의 불법을 좋아하지 않고, 일심으로 도를 수행하지 않으며, 죄와 복의 잡다한 잡행(雜行)을 하는 이를 말하며, 이러한 이들은  법을 배우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하열한 이는 생각하기를 ‘나의 몸과 친속(親屬)은 내가 보호해야 하지만,  밖의 다른 중생이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까지도 보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며, 모든 사람들이 방편으로 즐거움을 구하고 있거늘, 지금 내가 무엇 때문에 즐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을 구하겠는가!’하고 하기 때문이다.

혹은 삿된견을 내어서 생각하기를 ‘중생들은 무량하 무변하므로 그 전부를 다 제도할 수는 없으리니, 만약 모두를 제도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량하지 않은 것이 끝이 있는 것이므로  분의 부처님이 제도하실  있는 것이다’고 하기도 하며, 

 

或作是念:“佛說一切法空、不生不滅,我復何所度?求佛道、不求佛道,同如幻夢”

如是等下劣人,以種種邪見、貪欲因緣故,不能學此大法。

혹은 다시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은 공(空)한 것이라서 불생이고 불멸이다'고 하셨거늘, 내가 어떻게 제도하겠는가!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든, 부처님의 불도를 구하지 않든, 똑같이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하기도 하나니, 

이와 같이 하열한 사람들은 갖가지 삿된견과 탐욕의 인연으로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或時有大人出世,籌量、思惟諸法實相,所謂非常非無常,非有邊非無邊,非有非無等;

行如是道,破顚倒見;還捨此道,直入法性,常住是淸淨法性中。

以一切衆生不知是事故,生大悲心,然後修集六波羅蜜等諸功德、佛神通、智慧、無㝵解脫,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以種種方便門,廣度衆生。如是人爲希有。

간혹 대인(大人)이 세간에 출현하여 제법의 실상(實相)을 헤아리고 사유하나니, 

이른바 항상함도 아닌 비상(非常)이고, 무상한 것도 아닌 비무상(非無常)이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닌 비유변(非有邊)이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닌 비무변(非無邊)이며, 

있는 것도 아닌 비유(非有)이고 없는 것도 아닌 비무(非無)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도를 수행하면서 뒤바뀌어 전도된 소견을 깨뜨리나, 도리어  도(道)를 버리고 곧바로 법성(法性)에 들어가서 항상  청정한 법성 가운데에 머무르나니, 

일체 중생들은 이러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크게 가엾이 여기는 대비심(大悲心)을 내어서 6바라밀 등의 모든 공덕과 부처님의 신통지혜와 막힘없는 무애해탈(無礙解脫)을 닦고 쌓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갖가지 방편의 문으로 중생을 널리 제도하나니, 이와 같은 사람을 희유(希有)하다 하는 것이다.

 

問曰:如先說“衆生無量無邊”,又言:“衆生空,復何所度?”如是云何可有所度?

묻나니, 먼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중생은 무량하고 무변하다”고 하셨으며,  말씀하시기를 “중생공(衆生空)이거늘 다시 무엇을 제도할 것인가”라고 하셨거늘, 어떻게 제도할 것이 있겠습니까?

 

答曰:此是下劣人所說,何足以之爲證?復次,先所說:以邪見、貪欲因緣故,下劣之人作是念言:“衆生有邊、無邊”、“一切法空無所有、一切法常實” 皆是六十二邪見所攝。

답하나니, 그것은 바로 하열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어찌 그런 말을 증명할 것으로 삼겠는가?

또한 앞에서 말한 바는 삿된 소견과 탐욕의 인연 때문에 하열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중생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 일체법은 공(空)한 것이라 무소유(無所有)이다. 일체법은 언제나 진실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모두는 62사견(邪見)에 들어가는 것이다.

 

大人無欲,思惟、籌量,離如是過罪,住於法性,生大悲心。譬如大人但以施心施與他財,而不取價。貪欲之人,求因緣而與;邪見之人,依有邊、無邊等,無有能無利事而有所作。譬如小人市易,求利乃與。

대인(大人)은 사유하거나 헤아리고자 함이 없으므로 이와 같은 허물을 여의고 법성(法性)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대비심을  내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대인은 다만 보시할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재물을 주기만 하고  대가를 받지 않지만, 탐욕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인연을 기대하면서 주는 것과 같으며, 

삿된견을 지닌 사람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는 등에 의지하면서 가능성이 없고 이익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소인(小人)이 시장에서 물건을 교환할 때, 이익이 있어야 주는 것과 같다.

 

又復大人菩薩無所求欲,能以頭、目等施與衆生,所得果報,亦以施與;

一切法心無所依,而能集諸功德。是故佛說:“欲拔一切衆生沈沒生死者,能如是學。”

또한 대인인 보살은 바라거나 구하는 바도 없이 머리ㆍ눈 등까지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며, 얻게  과보 또한 베풀어 주나, 일체법이나 마음에 의지함이 없이 모든 공덕을 능히 쌓나니,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으로서 생사(生死)에 빠져 있는 이들을 구하고자 이와 같이 배운다”고 하신 것이다.

 

復次,菩薩如是學者,常有慈悲憐愍心,不惱衆生故,不墮地獄;常觀因緣諸法實相,不生愚癡故,不墮畜生;常行布施,破慳貪心故,不生餓鬼中。

佛所說十二部經、八萬四千法聚,常不悋惜故,不生邊地。常供養尊長、善人,破憍慢故,不生旃陁羅等下賤人中。

또한 보살로서 이와 같이 배우는 이는 항상 자비심과 연민심이 있어서 중생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인연(因緣)과법의 실상(實相)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어리석은 우치(愚癡)를 내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며, 

항상 보시를 행하면서 간탐하는 마음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귀 가운데에도 떨어지지 않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부경(部經)과 8만 4천의 법취(法聚)에서도 '항상 아까워함없이 나누기 때문에 변두리 땅에도 태어나지 않으며, 항상 높은 어른과 착한 선인에 공양하면서 교만을 깨뜨리기 때문에 전다라(旃陀羅, 백정, 처님) 등의 하천한 가운데에도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深心愛衆生,具足行利益事故,受身完具。以善法多化衆生故,眷屬成就,終不孤窮。深愛樂尸羅波羅蜜故,不行十惡道及以邪命。無有我心,但利益衆生、不自爲身故,不攝惡人及破戒者。

'惡人'名心惡,'破戒者'名身、口惡。復次,行三不善道名惡人,行七不善道名破戒。

復次,菩薩,若在家攝惡人名惡人,出家攝惡人名破戒。

깊은 마음으로 중생을 사랑하며, 이익되는 일을 골고루 행하기 때문에 몸을 받되 그 몸이 완전하고, 착한법으로써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때문에 권속을 성취하면서 끝내 고단하거나 궁하지 않으며, 깊이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 지계바라밀)을 좋아하기 때문에악도(十惡道)와 삿된 생활방법의 사명(邪命)을 행하지 않고,  '나'라는 아심(我心) 없으며, 다만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할 뿐, 자기 스스로를 위하지 않기 때문에 나쁜 악인 파계(破戒)한 이에게 포섭되지 않나니, 

'나쁜 악인(惡人)'이란 마음이 악한 이를 말하고, 파계자(破戒者)는 몸과 입이 나쁜 이를 말하는 것이며,  

  가지의 삼불선도(三不善道)를 행하는 이를 나쁜 악인(惡人)이라 하고, 

일곱 가지의 칠불선도(七不善道)를 행하는 이를 파계자(破戒者)라 한다.

또한 보살이 재가(在家)할 때에 나쁜 악인에게 포섭된다면 나쁜 악인(惡人)이라 하고, 

출가(出家)하여서 나쁜 사람에게 포섭되면 파계자(破戒者)라 한다.

 

問曰:菩薩爲度惡人故出現於世,譬如良醫療諸疾病,何以故不攝惡人?

묻나니, 보살은 마치 뛰어난 의사가 모든 질병을 치료하듯 나쁜 악인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세간에 출현한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나쁜 악인 포섭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惡人、破戒者,有可化、有不可化,此中但說不可化者。若攝取共住,則自壞其道,於彼無益;譬如救溺,自不能浮而欲濟彼,二俱不免。是故說遠離惡人。

以欲界多惡,生憐愍心故,生欲界中;雖行禪,心調柔軟,以方便力故,命終時不隨禪生,如經中廣說。

답하나니, 나쁜 악인이나 파계자 중에는 교화할  있는 사람도 있고 교화할  없는 사람도 있으니,

여기에서는 다만 교화할  없는 사람에 한하여 말하는 것이다. 

만약 거두어서 같이 살게 되면  자기 스스로는 도(道)를 파괴하게 되고, 그 악인에게도 아무런 이익이 없게 되나니,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자신이 물에  줄도 모르면서 그를 구하고자 한다면  사람이  같이 빠져 죽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나쁜 사람을 멀리 여의는 원리악인(遠離惡人)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욕계(欲界)에는 많은 악이 일어나지만, 가엾이 여기는 연민심 때문에 일부러 욕계에 태어나는 것이니, 비록 선(禪)을 수행하여 마음이 조화되고 유연할지라도 방편의  때문에 목숨을 마칠 때에는 선정을 따라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니, 경에서 널리 설명한 것과 같다.

 

須菩提!菩薩如是學,於一切法中得淸淨,所謂淨聲聞、辟支佛心。”淨名捨離無所有、畢竟空。

須菩提白佛言:“若一切法從本已來空、淸淨,云何言‘菩薩如是學,得一切法中淸淨’?”

“수보리야,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일체 가운데에서 청정함을 얻나니, 이른바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에서,

‘청정하다’는 것은 버리는 사(捨)이고 여의는 이(離)이며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의 필경공을 말하는 것이다.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제법이 본래부터 공하여 청정하다면, 보살이 어떻게 이와 같이 배워서 일체법 가운데에서 청정함을 얻는다고 할 수 있는지요?”라고 하였으니, 

 

佛可須菩提言,爲說因緣:“若菩薩知一切法從本已來空、淸淨,於是中心不沒、不卻。

不沒名不疑、不生邪見。通達,不與空諍,是名般若波羅蜜。

一切凡夫人不知不見如是淸淨法,爲是人故,行六波羅蜜等諸助道法。”菩薩法應教化是衆生,是名菩薩一切法中得淸淨,

所謂捨三界顚倒,過聲聞、辟支佛地,一切法中得淸淨智慧力;

得是功德故,三世十方一切衆生心心數法,心所行起種種業因緣悉能遍知;知已,隨其所應,爲說法開化。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말이 옳다 하시며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만약 보살이 일체법은 본래부터 공하고 청정하다는 것을 안다면, 이 가운데에서 마음이 침몰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고 하신 것이니,

'침몰하지 않는, 불몰(不沒)'이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삿된 사견을 내지 않고 환히 통달하여 공과도 다투지 않는, 이러함을 바로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며, 

모든 범부는 이러한 청정법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나니,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6바라밀 등과 도를 돕는 조도법(助道法)을 행하는 것이니,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중생을 교화하여야 하며, 이를 바로 ‘보살은 일체법 가운데에서 청정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이른바 삼계(三界)의 뒤바뀐 전도(轉倒)를 버리고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초월하여 일체법 가운데에서 청정한 지혜의 힘을 얻는 것이니, 이러한 공덕을 얻기 때문에 삼세(世) 시방(十方)의 일체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과 마음으로 행하는 바의 갖가지 업을 일으키는 인연을 모두 다 알며, 안 뒤에는 그에 맞추어 설법하고 교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