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7권 4
大智度論 釋夢中不證品 第六十一之餘 卷七十七 卷七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1. 몽중부증품을 풀이함② 4
須菩提問佛:“世尊!假名字故,人不行;諸法亦和合因緣生、無自性故亦不行,誰當行般若?若不行,云何得無上道?”
今佛以反問答:“於汝意云何?”
須菩提從佛急求行般若者,是故佛問:“汝以慧眼見,定有一法行般若不?”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임시로 붙인 가명자(假名字)이기 때문에 사람이 행하지 않고, 제법 또한 화합한 인연으로 생기면서 자성이 없기 때문에 역시 행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 반야를 행하는 것인지요?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없는 무상도(無上道)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반문(反問)으로 답하셨으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신 것이며,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으로부터 반야를 행함을 급히 구하는 까닭에 여쭌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묻기를 “그대는 혜안(慧眼)으로 보아라. 일체법에 반야를 행하는 어떠한 일법(一法)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신 것이며,
須菩提因三解脫門入諸法實相中,法相不可得,何況行者!
是故答言:“世尊!不見有行般若者。”
수보리 존자 스스로는 공 무상 무작의 삼해탈문(三解脫門)에 의하여 제법의 실상(實相)에 들어갔으나, 법의 법상(法相)을 얻을 수 없었거늘, 하물며 수행하고 있는 행자이겠는가?
때문에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반야를 행하는 어떠한 것도 보지 못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復問:“汝見是般若波羅蜜菩薩行處不?” 須菩提答:“不見。”
何以故?般若波羅蜜中一切諸觀滅:若常若無常、若生滅等,無一法定相是般若,云何當說是般若波羅蜜?
다시 묻기를 “그대는 이 반야바라밀을 보살이 행할 행처(行處)라고 보는가?”고 하시자,
수보리 존자가 대답하기를 “보지 않습니다”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는 모든 관(觀)이 소멸하였으므로 항상하다거나, 무상(無相)하다거나, 생멸(生滅)하는 등의 어떠한 일법(一法)도 반야라고 확정할 정상(定相)이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 할 수 있겠는가!
復問:“若汝以智惠眼不見法,是不見法爲有爲無?” 答言:“無。”
何以故?佛說智慧眼實,肉眼、天眼虛誑;須菩提以慧眼觀,不見,故言無。
다시 물으시기를, “만약 네가 지혜안(智慧眼)으로써도 법을 보지 못한다면, 그 보지 못하는 법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지혜안은 진실이지만, 육안(肉眼)과 천안(天眼)은 거짓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나, 수보리 존자는 혜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없습니다”고 말한 것이다.
復問:“若法無、不可得,是法有生不?” 答言:“不生。”
是法本自無、畢竟空、無所有,是法有無等戲論已滅,云何有生?
다시 물으시기를, “만약 법이 없어서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라면, 이 법은 생김이 있는 유생(有生)인가?”하고 하신 것이며,
대답하기를 “생기지 않는 불생(不生)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없는 본자무()本自無이고, 필경공이며,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이러한 법에서는 있다 없다는 쓸모없는 희론조차도 이미 사라진 것이거늘 어떻게 생기는 유생(有生)이 있을 수 있겠는가!
佛語須菩提:“若菩薩於是法中通達無疑,信力、智慧力故,能住是法中,是名無生忍”
五衆中假名菩薩,得如是法,是名行般若波羅蜜。世俗法故說,非第一義;第一義中,諸戲論語言卽是無生。得是無生忍,便受無上道記。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이 법 가운데에서 환하게 통달하여 의심이 없게 되면, 믿음의 신력(信力)과 지혜의 힘 때문에 이 법 가운데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니, 이를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한다”고 하셨다.
오중(五衆) 가운데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에서 보살이 이와 같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 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 하지만, 이는 세속의 법으로써 말하는 것일 뿐, 제일의(第一義)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서는 모든 쓸모없는 희론과 언어(言語)가 생기지 않는 무생(無生)이며,
이 무생법인을 얻으면 곧 위없는 무상도의 수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佛言:“若菩薩一心勤精進,不休不息,隨無生忍行,不得是大智慧、無上智慧、一切智,無有是處!”
何以故?如經說:“若無因無緣則無果報,耶因緣亦無果報,因緣少亦無果報。”
如是菩薩得是無生法忍,捨是生死肉身,得法性生身,住菩薩果報神通中,一時能作無量變化身,淨佛世界、度脫衆生。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일심으로 부지런히 정진하여서 쉬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으며, 무생법인에 따라 행한다면 이 큰 대지혜(大智慧)요 위없는 무상지혜(無上智慧)이며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다”고 하셨으니,
왜냐하면 경에서 설하신 바와 같이, “만일 인(因)이 없고 연(緣)이 없으면 곧 과보(果報)도 없으며,
삿된 사인연(邪因緣)라도 또한 과보가 없는 것이며, 인연이 적은 것 역시 과보가 없기 때문이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보살이 이 무생법인을 얻어서 생사(生死)하는 육신을 버리고 법성생신(法性生身)을 얻으며,
보살의 과보인 신통(神通)에 머물러 일시에 무량한 변화의 몸을 지어서 부처님의 불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는 것이다.
是人末後身具足佛法,坐道場。具足正因緣,若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有是處!
所以者何?是人得無生忍法,一心直進,無有廢退故。
菩薩未得無生法忍,深著世閒法,諸煩惱厚,雖有福德善心,軟薄不進故,爲煩惱所遮;得無生忍法,無復是事。
이 사람은 맨 마지막의 말후신(末後身)으로 부처님의 불법을 구족하여서 도량(道場)에 앉아 바른 인연을 두루 갖출 것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으니,
왜냐하면 이 사람은 무생법인을 얻은 뒤에 일심으로 곧장 나아가서 그만두거나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로서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이라면, 세간의 법에 깊이 집착하여서 모든 번뇌가 두터운지라, 비록 복덕이 있을지라도 착한 선심(善心)이 연하고 희박하여서 쉽게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로 인하여 막히게 되지만,
무생법인을 얻으면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는 것이다.
未得無生忍法,用力艱難,譬如陸行;得無生法忍已,用力甚易,譬如乘船。
是故無生法忍,諸菩薩所貴。以是貴故,須菩提問:“世尊!得無生法故受記?”
佛言:“不也!”何以故?無生法不生不滅、無得相,云何因是受記?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하였다면 힘을 쓰기가 어려운 것은 마치 육지를 걷는 것과 같지만,
무생법인을 얻은 뒤에는 힘을 쓰기가 아주 쉬운 것이 마치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모든 보살들은 무생법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이렇게 귀히 여기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여쭈기를 “무생법인을 얻었기 때문에 수기를 받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왜냐하면 무생법(無生法, 무생법인)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이며, 얻는 얻었다는 득상(得相)도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이로 인하여 수기를 받겠는가?
復問:“生法得記耶? ”佛言:“不得。”
何以故?生法虛誑妄語、作法,云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眞實法?
다시 묻기를 “생멸하는 생법(生法)으로 수기를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얻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왜냐하면 생멸하는 생법(生法)은 속임수요 거짓으로 만들어진 법이거늘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진실한 실법을 얻을 수 있겠는가!
復問:“生不生得受記不?”佛言:“不也!”何以故?此二俱有過故。
다시 묻기를 “생멸하고 생멸하지 않는 생불생(生不生)으로 수기를 받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모두는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復問:“世尊!若爾者,云何當授記?”
佛反問:“汝以慧眼觀,見有法與菩薩授記不?” 答言:“不見。”
何以故?是法從本已來寂滅相,是中無見不見、授記不授記,亦不見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無得法、亦無得者。此中自說因緣:“般若波羅蜜無是憶想分別。”
다시 묻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그러하다면 어떻게 하여 수기를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는 반문(反問)하시면서 “그대는 혜안으로써 보아라. 보살에게 수기를 주는 어떠한 법이 있다고 보는가?”라고 하신 것이며, 대답하기를 “보지 않습니다”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이 법은 본래부터 적멸상이니, 이 가운데에서는 ‘본다, 보지 않는다, 수기를 얻는다, 수기를 얻지 않는다’라는 것이 없으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보지도 않고 얻을 법도 없으며, 또한 얻는 이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반야바라밀에는 이러한 생각(念)과 분별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須菩提上問“菩薩得無生忍故受記”,佛言“不”;佛何以還以無生理答,所謂“菩薩行般若時,無一切憶想分別”?
묻나니, 수보리 존자가 위에서 묻기를 “보살은 무생법인을 얻기 때문에 수기를 받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도리어 생멸이 없는 이치의 무생리(無生理)로 대답하시면서 “이른바 보살이 반야를 행할 때에는 일체의 생각이나 분별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까?
答曰:行者實以無生忍故受記,而須菩提爲菩薩故,以著心、得心問,以是故言“不”。如一切法實無我,
婆蹉梵志問佛:“有我不?”佛默然不答。“無我不?”佛亦不答。
一切雖實無我,以梵志著心問,欲戲弄無我,故不答。
답하나니, 수행하는 행자들은 실로 무생법인 때문에 수기를 받지만, 그러나 수보리 존자는 보살들을 위하여 집착하는 마음의 착심(著心)과 얻는 마음의 득심(得心)으로써 묻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일체법은 실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바차 범지(婆蹉梵志)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나는 유아(有我)입니까?”라고 하였으나, 부처님께서는 잠자코 계시면서 대답하지 않았으며,
“무아(無我)입니까?”라고 하였으나, 부처님께서는 역시 대답하지 않으셨다.
모든 것이 비록 진실로 무아(無我)일지라도 그 범지가 집착하는 마음으로 물은 것이며,
무아(無我)를 비난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須菩提問意:知定有受記事,但不知觀何法得記,故問。
是故佛以須菩提所得法問:“汝以慧眼見定有法受記不?”
수보리 존자가 여쭌 뜻은 틀림없이 수기하는 일이 있음을 알지만, 다만 어떠한 법을 관해야 수기를 얻을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물었을 뿐이니,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가 얻은 법으로써 되물으시기를,
“그대는 혜안으로 보아라. 수기를 받는 확정된 어떤 법을 볼 수 있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住三解脫門中,觀法性,不見定有受記者,諸法法性無相、無量故;
若不見受記法,云何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須菩提聞是受記者空,難情則息,自解無疑。
佛可其意:“如是!如是!汝不見不得法是實。何以故?般若波羅蜜相,無所分別故。”
수보리 존자는 공 무상 무작의 삼해탈문에 머무르면서 법의 성품을 보아도 수기를 받는 확정된 어떠한 법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모든 제법의 법성은 무상(無相)이고 무량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수기하는 수기법(受記法)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 존자는 이 수기를 받는 이가 공하다는 말을 듣고는 따지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스스로 이해하여서 의심이 없어졌으니,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그의 뜻을 옳다고 하신면서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보지 못하고 얻을 수 없는 법이 바로 진실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상(相)은 분별할 바가 없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