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7권 1
大智度論 釋夢中不證品 第六十一之餘 卷七十七 卷七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1. 몽중부증품을 풀이함② 1
▶經. 爾時,須菩提白佛言:“世尊!何等是般若波羅蜜相?”
佛告須菩提:“如虛空相是般若波羅蜜相。須菩提!般若波羅蜜無所有相。”
須菩提白佛言:“世尊!頗有因緣,如般若波羅蜜相,諸法相亦如是耶?” 頗 자못 파,
▷경. 그때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반야바라밀의 상(相)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허공과 같은 허공상(虛空相)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니,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상(無所有相)이니라.”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혹 인연이 있다면 반야바라밀의 상(相)과 같이 제법의 상(相) 또한 같은 것인지요?”
佛告須菩提:“如是!如是!如般若波羅蜜相,諸法相亦如是。何以故?須菩提!一切法離相、空相。以是因緣故,須菩提!如般若波羅蜜相,諸法相亦如是,所謂離相、空相故。”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이 반야바라밀의 상(相)과 같이 제법의 상(相)도 그와 같나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법은 여읜 이상(離相)이요, 공한 공상(空相)이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인연으로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의 상(相)에서와 같이 제법의 상(相) 또한 그와 같나니, 이른바 여읜 이상(離相)이요 공한 공상(空相)이기 때문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一切法一切法離,一切法一切法空,云何知衆生若垢、若淨?世尊!離相法無垢、無淨,空相法無垢、無淨;離相、空相法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離相、空相無法可得。世尊!離相中,空相中,無有菩薩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世尊!我云何當知佛所說義?”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을 일체법으로서 여의고, 일체법이 일체법으로서 공하다면, 어떻게 중생의 더러운 구(垢)와 깨끗하다는 정(淨)을 아는 것인지요?
세존이시여, 여읜 이상(離相)의 법에는 더러운 구(垢)도 없고, 깨끗한 정(淨)도 없으며,
공한 공상(空相)의 법에는 더러운 구(垢)도 없고, 깨끗한 정(淨)도 없다면, 여읜 이상(離相)과 공한 공상(空相)의 법으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으니, 그것은 이상(離相)과 공상(空相)에서는 얻을 만한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상(離相)과 공상(空相) 가운데에서 어떠한 보살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이가 없다면,
세존이시여, 저는 어떻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알아야 하는지요?”
佛告須菩提:“於汝意云何?是衆生長夜行我、我所心不?”
“如是!世尊!衆生長夜行我我所心。”
“於汝意云何?是我、我所心離相不?空相不?”
須菩提言:“世尊!我、我所心離相、空相。”
“於汝意云何?以此我、我所心,衆生往來生死中不?”
“如是!世尊!以此我、我所心,衆生往來生死中。”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중생들이 장야(長夜, 오랜 세월) 동안 나(我)와 내 것의 아소(我所)의 마음을 행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은 장야(長夜, 오랜 세월) 동안 나와 내 것의 아아소(我我所)의 마음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나(我)와 내 것의 아소(我所)의 마음이 여읜 이상(離相)인가? 공한 공상(空相)인가?”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나와 내 것이란 마음이 여읜 이상(離相)이며, 공한 공상(空相)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나와 내 것이란 마음으로써 중생들은 나고 죽는 생사(生死) 가운데에서 왕래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나와 내 것이란 마음으로써 중생들은 나고 죽는 생사 가운데에서 왕래하고 있습니다.”
“如是!須菩提!衆生往來生死中故,知有垢惱。須菩提!若衆生無我我所心、無著心,是衆生不復往來生死中;若不往來生死中,則無垢惱。如是,須菩提!衆生有淨。”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중생들은 나고 죽는 생사 가운데에서 왕래하기 때문에 더러운 번뇌의 구뇌(垢惱)가 있다고 아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중생에게 나와 내 것이란 마음이 없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중생은 다시는 나고 죽는 생사 가운데에서 왕래하지 않을 것이요, 만약 나고 죽는 생사 가운데에서 왕래하지 않는다면 곧 더러운 번뇌의 구뇌(垢惱)도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중생에게는 깨끗한 정(淨)도 있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菩薩摩訶薩如是行,爲不行色,不行受、想、行、識,爲不行四念處乃至八聖道分,爲不行內空乃至無法有法空,爲不行佛十力乃至一切種智。何以故?是法不可得,亦無行者,亦無行處,亦無行法。
世尊!菩薩摩訶薩如是行,一切世閒諸天、人、阿修羅不能降伏。是菩薩摩訶薩,一切聲聞、辟支佛所不能及。何以故?所住處無能及故,所謂菩薩位。世尊!是菩薩摩訶薩行應薩婆若心,無能及者!”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그것은 물질(色)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을 행하지 않는 것이요, 사념처 내지 팔성도분을 행하지 않는 것이며,
내공(內空)에서부터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까지를 행하지 않는 것이요,
부처님의 십력과 일체종지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얻을 수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고, 또한 행하는 이도 없는 무행자(無行者)이며, 행할 곳도 없는 무행처(無行處)이고, 행할 법도 없는 무행법(無行法)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일체 세간의 모든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로서는 이 보살마하살을 항복시킬 수 있는 이가 없으며,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로서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머무는 처소, 즉 보살위(菩薩位)에 미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의 행은 살바야(薩婆若)의 마음에 상응한 것이라서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입니다.”
“須菩提!菩薩摩訶薩如是行,疾近薩婆若。須菩提!於汝意云何?若閻浮提衆生盡得人身,得人身已,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若有善男子、善女人盡其形壽供養、恭敬、尊重、讚歎,持是善根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人以是因緣得福多不?”
須菩提言:“甚多!世尊!”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신속히 살바야에 가까워지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염부제(閻浮提)의 중생들 모두가 다 사람의 몸이 되고, 사람의 몸이 된 후에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면,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그 몸의 수명이 다하기까지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이 선근(善根)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迴向)한다면, 이러한 인연으로 이 사람이 많은 복을 얻겠는가?”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言:“不如是善男子、善女人於大衆中說是般若波羅蜜,出示、分別。照明、開演,亦應般若波羅蜜行正憶念,其福多。乃至三千大千世界中衆生,亦如是。須菩提!於汝意云何?閻浮提中衆生一時皆得人身,得人身已,若善男子、善女人教行十善道、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教令得須陁洹道乃至阿羅漢、辟支佛道,教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持是善근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於汝意云何?是善男子、善女人得福多不?”
須菩提言:“甚多!世尊!”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ㆍ선여인보다 저 대중 가운데에서 이 반야바라밀을 설하여서 출시(出示)하고 분별하여서 밝게 비추어 주고, 널리 설명하며, 또한 반야바라밀의 행과 상응하게 바르게 정억념(正憶念)하는 이의 복이 더 많느니라.
나아가 삼천대천세계 안의 중생 또한 그와 같으니,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염부제 안의 중생들 모두가 일시에 사람 몸이 되고, 사람 몸이 된 후에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그들을 교화하여서 십선도(十善道)와 사선과 사무량심과 사무색정을 행하게 하고,
그들을 교화하여서 수다원의 도 내지는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하며,
그들을 교화하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면서 이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게 한다면
수보리야, 그대가 생각하기에 이 선남자나 선여인은 많은 복을 얻겠는가?”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言:“不如是善男子、善女人以是甚深般若波羅蜜爲衆生說,出示、分別,照明、開演,亦不離薩婆若,得福多。乃至三千大千世界,亦如是。是菩薩摩訶薩不遠離應薩婆若心,則到一切福田邊。何以故?除諸佛,無有餘法如菩薩摩訶薩勢力。何以故?諸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於一切衆生中起大慈心;見諸衆生趣死地故,而起大悲;行是道時歡悅而生大喜;不與想俱,便得大捨。須菩提!是爲菩薩摩訶薩大智光明。大智明者,所謂六波羅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ㆍ선여인보다 이 매우 깊은 심(深)반야바라밀로써 중생들에게 설하여서 펼쳐 보이고 분별하고 밝게 비추고 널리 펴는 한편 살바야를 여의지 않는 이의 복이 더 많으니, 나아가 삼천대천세계에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살바야의 마음을 멀리 여의지 않으므로 일체의 복전(福田)의 변(邊, 끝)에 이르게 되나니,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법으로서 보살마하살의 세력과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일체 중생들에 대하여 대자심(大慈心)을 일으키고, 일체 중생들이 죽는 곳의 사지(死地)에 나아가는 것을 보기 때문에 대비(大悲)를 일으키며,
이 도(道)를 행할 때에 기뻐하면서 대희(大喜)를 내고, 생각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곧 대사(大捨)를 얻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큰 지혜광명(大智光明)이니, 큰 지혜의 광명이란 이른바 육바라밀이니라.
須菩提!是諸善男子雖未作佛,能爲一切衆生作大福田,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不轉;所受供養,衣服、飮食、臥具、牀敷、疾藥、資生所須,行應般若波羅蜜,念能畢報施主之恩,疾近薩婆若。
수보리야, 이 모든 선남자는 비록 아직 부처님이 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큰 복전이 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생활에 필요해서 받았던 의복ㆍ음식ㆍ침구ㆍ깔개ㆍ의약 등 공양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 생각(念)을 행하여 시주(施主)의 은혜에 보답하여 마치면 신속히 살바야에 가까워지느니라.
以是故,須菩提!若菩薩摩訶薩欲不虛食國中施,欲示衆生三乘道,欲爲衆生作大明,欲拔出三界牢獄,欲與一切衆生眼,應常行般若波羅蜜。行般若波羅蜜時,若欲有說,但說般若波羅蜜;說般若波羅蜜已,常憶念般若波羅蜜;常憶念般若波羅蜜已,常行般若波羅蜜,不令餘念得生,晝夜勤行般若波羅蜜相應念,不息不休。
그러므로 수보리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나라 안의 보시를 헛되이 먹지 않고자 하고, 중생에게 삼승의 도를 보이고자 하며, 중생에게 큰 광명이 되고자 하고, 삼계(三界)의 굳은 감옥에서 구해 내고자 하며, 일체 중생들에게 눈(眼)을 주고자 한다면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느니라.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 만약 설하여야 한다면 오로지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반야바라밀을 설한 뒤에는 항상 반야바라밀을 기억하며, 항상 반야바라밀을 기억한 뒤에는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그 밖의 기억은 나지 않게 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반야바라밀과 상응한 기억을 행하면서 그치지도 않고 쉬지도 않느니라.
須菩提!譬如士夫未曾得摩尼珠,後時得,得已,大歡喜踊躍;後復失之,便大憂愁,常憶念是摩尼珠,作是念:‘我奈何忽亡失此大寶!’須菩提!菩薩摩訶薩亦如是,常憶念般若波羅蜜,不離薩婆若心。”
須菩提白佛言:“世尊!一切念性自離、一切念性自空,云何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離應薩婆若念?是遠離空法中無菩薩,亦無念、無應薩婆若。”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일찍이 마니주(摩尼珠)를 얻지 못하였던 장부가 뒷날 그것을 얻게 되자 춤을 추며 크게 기뻐하다가, 후에 다시 마니주를 잃어버리고 크게 근심하면서 항상 이 마니주를 기억하며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 큰 보주(寶珠)를 갑자기 잃어버렸단 말인가!’라고 하는 것과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항상 반야바라밀을 기억하면서 살바야의 마음을 여의지 않느니라.”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일체의 기억하는 성품의 염성(念性)은 스스로 여의는 것이고, 일체의 기억하는 성품의 염성(念性)은 스스로가 공한 것이거늘,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살바야에 상응한 기억을 여의지 않는지요?
멀리 여의는 이법(離法)과 공한 공법(空法) 가운데에서는 보살도 없고, 기억도 없으며, 살바야에 상응하는 것도 없습니다.”
佛告須菩提:“若菩薩摩訶薩如是知一切法性自離、一切法性自空,非聲聞、辟支佛作,亦非佛作;諸法相常住、法相、法住、法位、如、實際,是名菩薩行般若波羅蜜不離薩婆若念。
何以故?般若波羅蜜性自離、性自空,不增不減故。”
須菩提白佛言:“世尊!若般若波羅蜜性自離、性自空,云何菩薩摩訶薩與般若波羅蜜等,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일체법의 성품이 스스로 여의는 자리(自離)이고, 일체법의 성품이 스스로 공한 자공(自空)으로, 성문이나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며, 제법의 상(相)은 항상 법상(法相)ㆍ법주(法住)ㆍ법위(法位)ㆍ여(如)ㆍ실제(實際)에 머무는 것이라고 안다면,
이를 바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살바야의 기억을 여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성품 자체가 여의는 성자리(性自離)이고, 자체가 공한 성자공(性自空)이라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반야바라밀이 성품 자체가 여의는 성자리(性自離)이고, 자체가 공한 성자공(性自空)이라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과 평등하게 되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지요?”
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與般若波羅蜜等,不增不減。何以故?如、法性、實際不增不減故。
所以者何?般若波羅蜜非一非異故。若菩薩聞如是般若波羅蜜相,不驚、不沒、不畏不怖、不疑。須菩提!當知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當知是菩薩摩訶薩必住阿鞞跋致地中。”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과 평등하여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니,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하나도 아닌 비일(非一)이고 다르지도 않은 비이(非異)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의 상(相)을 듣고 마음으로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수보리야, 그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할것이요,
그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물러 있다고 알아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