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5권 2
大智度論 釋燈炷品 第五十七之餘 卷七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57. 등주품(燈炷品)을 풀이함② 2
▶論. 須菩提問佛:以初心得無上道,爲用後心得者。
▷논. 해석한다.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처음의 초심(初心)으로 위없는 무상도를 얻는지, 아니면 나중의 후심(後心)으로 얻는지를 물은 것이다.
問曰:須菩提何因緣故作是問難?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어떠한 인연으로 이러한 어려운 질문을 한 것입니까?
答曰:須菩提上聞諸法不增不減,心自生疑:“若諸法不增不減,云何得無上道?
復次,若以如實正行得無上道,唯佛能爾;菩薩未斷無明等煩惱,云何能如實正行?”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가 앞에서는 제법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것을 듣고 의심을 내어서, ‘만약 제법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위없는 무상도를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며,
또한 ‘여실(如實)한 바른 정행(正行)으로 위없는 무상도를 얻는 이는 오직 부처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 보살은 아직 무명(無明) 등의 번뇌를 끊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여실한 바른 정행을 하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復次,須菩提此中自說難問因緣,所謂:“初心不至後心,後心不在初心,云何增益善根得無上道?”如是等因緣,故作是問:“以初心得、後心得?”
또한 수보리 존자는 여기에서 스스로가 질문하는 인연을 말하면서 “이른바 처음의 초심은 나중의 후심에 이르지 못하고, 나중의 후심은 처음의 초심에 있지도 않거늘, 어떻게 선근을 더욱 불리어 위없는 무상도를 얻겠는가?”라 하고,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이렇게 질문을 하면서 “처음의 초심으로 얻는지요?, 아니면 나중의 후심으로 얻는지요?”라고 한 것이다.
佛以深因緣法答,所謂:“不但以初心得,亦不離初心得。”所以者何?若但以初心得、不以後心者,菩薩初發心,便應是佛;若無初心,云何有第二、第三心?第二、第三心以初心爲根本因緣。
부처님께서는 깊은 인연의 법으로써 대답하시면서 “이른바 처음의 초심으로 얻지 못하고, 처음의 초심을 여의지도 않는다”고 하셨으니, 왜냐하면 만약 처음의 초심으로만 얻고, 나중의 후심으로는 얻지 못한다면, 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에 마땅히 부처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의 초심이 없다면 어떻게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마음이 있겠는가?
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마음은 처음의 초심을 근본인연을 삼기 때문이다.
“亦不但後心、亦不離後心”者,是後心亦不離初心,若無初心,則無後心。初心集種種無量功德,後心則具足;具足故能斷煩惱習,得無上道。”
‘또한 나중의 후심으로만 얻는 것도 아니고, 나중의 후심을 여의지도 않는다’고 함이란,
이 나중의 후심 역시 처음의 초심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 만약 처음의 초심이 없다면 나중의 후심도 없는 것이며,
처음의 초심으로 갖가지의 무량한 공덕을 쌓은 뒤에 나중의 후심으로 완전하게 갖추게 되는 것이요,
완전히 갖추었기 때문에 번뇌의 습기(習氣)를 끊고 위없는 무상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須菩提此中自說難因緣:“初、後心心數法不俱,不俱者,則過去已滅,不得和合;若無和合,則善根不集;善根不集,云何成無上道?”
수보리 존자는 이 가운데에서 스스로가 질문한 인연을 말하면서 “처음과 나중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은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함께하지 않는 불구(不俱)'라 함이란, 곧 과거는 이미 사라졌으므로 화합할 수 없으며, 만약 화합이 없다면 선근이 쌓이지 않을 것이요, 선근이 쌓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없는 무상도를 이루겠는가 하는 것이다.
佛以現事譬喩答:“如燈炷,非獨初焰燋,亦不離初焰,非獨後焰燋,亦不離後焰而燈炷燋。”
부처님께서는 현재의 일로써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으니, “등불의 심지는 처음의 불꽃으로만 타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처음의 불꽃을 여의지도 않으며, 나중의 불꽃으로만 타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나중의 불꽃을 여의지도 않고 등불의 심지는 타는 것이다”고 하셨으며,
佛語須菩提:“汝自見炷燋,非初非後而炷燋;我亦以佛眼見菩薩得無上道,不以初心得,亦不離初心,亦不以後心得,亦不離後心而得無上道。”
燈譬菩薩道,炷喩無明等煩惱,焰如初地相應智慧乃至金剛三昧相應智慧。燋無明等煩惱炷,亦非初心智焰,亦非後心智焰,而無明等煩惱炷燋盡,得成無上道。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눈으로 심지가 타고 있는 것을 보는데, 처음의 것도 아니요 나중의 것도 아니나 그 심지는 타고 있다. 나 역시 불안(佛眼)으로써 보살이 위없는 무상도 얻는 것을 보나니, 그것은 처음의 초심으로 얻는 것도 아니요, 처음의 초심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나중의 후심으로 얻는 것도 아니요, 나중의 후심을 여의지 않으면서 위없는 무상도를 얻고 있다”고 하셨다.
등불은 보살도(菩薩道)를 비유한 것이고, 심지는 무명 등의 번뇌를 비유한 것이며,
불꽃은 초지(初地)와 상응한 지혜 내지는 금강삼매(金剛三昧)와 상응한 지혜와 같으며,
무명 등 번뇌의 심지를 태우는 것 역시 초심지(初心智)의 불꽃도 아니요, 후심지(後心智)의 불꽃도 아닌 것으로 무명 등의 번뇌의 심지가 다 타고 나면 위없는 무상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此中佛更解得無上道因緣,所謂:“菩薩從初發心來行般若波羅蜜,具足初地乃至十地,是十地皆佐助成無上道。”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위없는 무상도를 얻는 인연을 풀이하셨으니,
“이른바 보살은 처음 초발심해서부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초지에서 10지(地)까지를 구족하나니,
이 10지 모두가 도우는 좌조(佐助)하여서 위없는 무상도를 이룬다”고 하신 것이며,
“十地”者,乾慧地等。“乾慧地”有二種:一者、聲聞,二者、菩薩。聲聞人獨爲涅槃故,勤精進,持戒心淸淨,堪任受道;或習觀佛三昧、或不淨觀,或行慈悲、無常等觀,分別集諸善法、捨不善法。雖有智慧,不得禪定水則不能得道,故名乾慧地。於菩薩,則初發心乃至未得順忍。
'십지(十地, 통교십지)'란, 간혜지(乾慧地), 성지(性地), 팔인지(八人地), 견지(見地), 박지(薄地), 이작지(已作地), 이욕지(離欲地), 벽지불지(辟支佛地), 보살지(菩薩地), 불지(佛地)등이다.
‘간혜지(乾慧地, 外凡외범)’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성문(聲聞)에서요, 둘째는 보살(菩薩)에서이다.
성문은 유독 열반만을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고 계율을 지니어 마음을 청정히 하고 인내하여 도를 받나니, 혹은 관불삼매(觀佛三昧)나 부정관(不淨觀)을 익히거나 혹은 자비관(慈悲觀)ㆍ무상관(無常觀) 등을 행하기도 하면서 분별하여 모든 착한 선법을 쌓고 착하지 않은 불선법을 버리나니, 비록 지혜가 있을지라도 선정의 선정수(禪定水)를 얻지 못하나니, 도(道)를 얻을 수 없으므로 간혜지(乾慧地)라 하는 것이며,
보살에게 있어서는 처음 초발심에서부터 진리에 순종하는 지혜인 순인(順忍)을 얻기 전까지이다.
“性地”者,聲聞人,從煖法乃至世閒第一法。於菩薩,得順忍,愛著諸法實相,亦不生邪見,得禪定水。
‘성지(性地, 內凡내범)’라 함은, 성문은 난법(煖法)으로부터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에 이르기까지이며, 보살에게 있어서는 진리에 순종하는 지혜인 순인(順忍)을 얻어서 제법의 실상(實相)에 애착하면서도 삿된 사견(邪見)을 내지 않으며 선정의 선정수(禪定水)를 얻는 지위이다.
“八人地”者,從苦法忍乃至道比智忍,是十五心。於菩薩則是無生法忍,入菩薩位。
‘팔인지(八人地, 見道十五心견도십오심)’라 함은 고법인(苦法忍)으로부터 고류인(苦類忍) 집법인(集法忍) 집류인(集類忍) 멸법인(滅法忍) 멸류인(滅類忍) 도법인(道法忍) 도비지인(道比智忍)까지이니, 이것은 바로 15심(心)이다. 보살에게 있어서는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며 보살위(菩薩位, 보살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팔인지(八人地)= 팔인(八人)은 팔인(八忍) 人은 忍이니, 達忍(통달)한다는 뜻이며, 삼계의 見惑(견혹)은 본래 空(공)하다고 깨달아 8忍(팔인)을 구족하는 지위를 말하니, 見道(견도) 15心의 지위이며, 8忍(인)이라 하고 8智(지)라 하지 않는 것은, 15심 가운데는 道類智(도류지) 하나가 모자라므로 8智를 구족하지 못한 까닭이다. - 불교사랑
15심(十五心)= 아비달마(소승)의 교학에 있어서 견도(見道)로 받아들여진 15심(十五心)을 말한다. 즉 8인(八忍)ㆍ8지(八智)의 16심중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부터 도류지인(道類智忍)에 이르는 15가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즉 고법인(苦法忍) 고법지(苦法智)” “고류인(苦類忍) 고류지(苦類智)” “집법인(集法忍) 집법지(集法智)” “집류인(集類忍) 집류지(集類智)” “멸법인(滅法忍) 멸법지(滅法智)” “멸류인(滅類忍) 멸류지(滅類智)” “도법인(道法忍) 도법지(道法智)” “도류인(道類忍) 도류지(道類智)”에서 “도류지(道類智)”를 뺀 나머지이며,
이 15심의 사이에 무루지(無漏智)를 가지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4제(四諦)의 진리를 본다고 한다
“見地”者,初得聖果,所謂須陁洹果。於菩薩則是阿鞞跋致地。
‘견지(見地, 初果초과)’라 함은, 처음 성인의 과위를 얻는 지위이니, 이른바 수다원의 과위이고,
보살에게 있어서는 곧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이다.
“薄地”者,或須陁洹、或斯陁含,欲界九種煩惱分斷故。於菩薩,過阿鞞跋致地,乃至未成佛;斷諸煩惱,餘氣亦薄。
‘박지(薄地, 一來果일래과)’라 함은 혹 수다원이기도 하고 혹 사다함이기도 하나니, 욕계(欲界)의 愛(애, 애욕), 慢(만, 아만), 無明(무명), 見(견, 삿된 견해), 取(취, 집착), 疑(의, 의심), 嫉(질, 질투), 慳(간, 인색함), 진(嗔, 성냄)의 아홉 가지의 구종번뇌(九種煩惱)를 부분적으로 끊었기 때문이며,
보살에게 있어서는 아비발치의 지위를 지나서부터 부처님을 이루기 전까지이며, 모든 번뇌를 끊고 남은 습기도 얇아지는 것이다.
“離欲地”者,離欲界等貪欲諸煩惱,是名阿那含。於菩薩,離欲因緣故,得五神通。
‘이욕지(離欲地, 不還果불환과)’라 함은 욕계 등 탐욕의 모든 번뇌를 여읜 이이니, 이것을 바로 아나함이라 한다.
보살에게 있어서는 욕망을 여읜 인연으로 다섯 가지의 오신통을 얻는다.
“已作地”者,聲聞人得盡智、無生智,得阿羅漢。於菩薩,成就佛地。
‘이작지(已作地, 已辦地이변지, 阿羅漢果(아라한과)’라 함은 성문은 진지(盡智, 무루지)와 지(智) · 견(見) · 명(明) · 각(覺) · 해(解) · 혜(慧) · 광(光) · 관(觀)의 무생지(無生智, 무루지)를 얻어서 아라한이 되며,
보살에게 있어서는 불지(佛地)를 성취하는 것이다.
“辟支佛地”者,先世種辟支佛道因緣,今世得少因緣出家,亦觀深因緣法成道,名辟支佛。辟支迦,秦言因緣,亦名覺。
‘벽지불지(辟支佛地, 支佛地지불지, 緣覺地연각지)’라 함은 전생에 벽지불 도(道)의 인연을 심었으므로 이 세상에서는 조그마한 인연을 얻어 출가하고 또한 깊은 인연법을 관찰하면서 도를 이루므로 벽지불이라 하며,
‘벽지가(辟支迦 pratyeka-buddha)는 진나라 말로 ‘인연(因緣)’ 또는 ‘깨달음의 각(覺)’이라 한다.
“菩薩地”者,從乾慧地乃至離欲地,如上說。復次,菩薩地,從歡喜地乃至法雲地,皆名菩薩地。有人言:從一發心來乃至金剛三昧,名菩薩地。
‘보살지(菩薩地)’라 함은 간혜지로부터 이욕지까지이니,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또 보살지라 함은, 환희지(歡喜地)에서부터 이구지(離垢地), 발광지(發光地), 염혜지(焰慧地), 난승지(難勝地), 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 부동지(不動地), 선혜지(善慧地), 법운지(法雲地, 9지)까지를 모두 보살지라고 하기도 하며,
어떤 분은, “한 번 발심해서부터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이르기까지를 보살지라 한다”고 말하였다.
“佛地”者,一切種智等諸佛法,菩薩於自地中行具足,於他地中觀具足,二事具故名具足。
‘불지(佛地)’라 함은 일체종지(一切種智) 등의 모든 부처님의 불법이다. 보살은 자기의 지위 가운데서 구족(具足)함을 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위 가운데에서도 구족함을 관찰하나니, 이 두 가지가 완전히 갖추어지기 때문에 ‘구족한다’고 한다.
問曰:何以故不說菩薩似辟支佛地?
묻나니, 무엇 때문에 보살이 벽지불의 지위와 비슷한 지위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餘地不說名字,辟支佛地說辟支佛名字故。
답하나니, 그 밖의 지위에서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벽지불의 지위에서는 벽지불의 이름을 말하기 때문이며,
復次,菩薩能分別知衆生可以辟支佛因緣度者,是故菩薩以智慧行辟支佛事。如『首楞嚴經』中,文殊尸利七十二億反作辟支佛。
또한 보살은 벽지불의 인연으로 제도할 수 있는 중생을 잘 분별하여 알기 때문에 보살은 지혜로써 벽지불이 하는 일을 행하나니, 마치 '수능엄경(首楞嚴經)' 가운데서 “문수시리(文殊尸利) 보살은 72억 번을 거듭 벽지불이 되었다”고 한 것과 같이,
菩薩亦如是,滿足九地,修集佛法,十力、四無所畏等雖未具足,以修習近佛道故,名“具足”。以是故言:“十地具足故,得無上道。”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9지(地, 법운지)를 원만하게 이루고서 부처님의 불법을 닦고 쌓으며,
비록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이 아직 완전히 구족되어 갖춰지지 못하였을지라도 부처님 불도를 닦아 익히어 가까워져 있기 때문에 완전히 갖추었다는 구족(具足)이라 하며, 이러한 까닭에 ‘10지가 구족되어서 위없는 무상도를 얻었다’고 한 것이다.
是諸法皆因緣和合故,非初、亦不離初,非後、亦不離後,而得無上道。
이 제법 모두는 인연(因緣)이 화합한 때문이니, 처음의 것도 아니요, 처음의 것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나중의 것도 아니요, 또한 나중의 것을 여읜 것도 아니라서 위없는 무상도를 얻는 것이다.
須菩提尊重是法故歎言:“世尊!是因緣法甚深,所謂過去心不滅、不住,而能增益得無上道。是事甚深希有,難可信解!此心爲住、爲滅耶?”
수보리 존자는 이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찬탄하면서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 인연의 법은 매우 깊습니다. 이른바 과거의 마음인 과거심(過去心)은 소멸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으면서 더욱 더 늘어나 위없는 무상도를 얻으니,
이러함은 매우 깊고 희유하여 믿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마음은 머무르는 것인지요, 아니면 소멸하는 것인지요?”라고 하였다.
“佛反問須菩提:‘於汝意云何?若心滅已更生不’”者,諸法雖畢竟空、不生不滅,爲衆生以六情所見生滅法故,問:“心已滅更生不?”
부처님께서는 되받아 반문하시기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마음이 소멸하고 나면 다시 생기는 것인가?”라고 하셨다.
제법은 비록 필경공이라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중생을 위하여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ㆍ 뜻(意)의 육정(六情)으로 생멸법으로써 보기 때문에 마음이 이미 소멸하면서 다시 생기는 것인가?라고 물으신 것이다.
須菩提言:“不也!世尊!”何以故?心滅已,云何當更生?若心滅已更生,則墮常中。
수보리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마음이 소멸한 뒤라면 어떻게 다시 생기겠는가? 만약 마음이 소멸하였다가 다시 생긴다면 곧 상견(常見) 가운데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통교십지(通敎十地) : 三乘共十地(삼승공십지)와 같으며, 대지도론 78권에서 주장하고 있는 성문·연각·보살을 통하여 만들어진 十地(십지)로 천태종에서 通敎(통교)를 說(설)하여 수행의 단계로 한다. (1) 乾慧地(간혜지) 곧 外凡(외범). (2) 性地(성지) 곧 內凡(내범). (3) 八人地(팔인지) 곧 見道十五心(견도십오심). (4) 見地(견지) 곧 初果(초과). (5) 薄地(박지) 곧 一來果(일래과). (6) 離欲地(이욕지) 곧 不還果(불환과). (7) 已辦地(이변지 )곧 阿羅漢果(아라한과). (8) 支佛地(지불지) 곧 緣覺地(연각지). (9) 菩薩地(보살지). (10) 佛地(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