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범행품(梵行品) 1
卷第十七
十六, 梵行品
[[梵이란 한역하면 淨이라 한다. 청정한 행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항상 세간에 거처하면서 일체의 행을 행해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그 행마다 청정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그 명칭을 범행이라 하는 것이다.
또 能問: 능히 묻는 주체를 잡는 것을 正念이라 하는데, 무념의 念을 정념이라 하고, 행을 따라 염이 없는 것을 상념이라 하며 행과 염이 모두 없는 것으로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第一義天이라 이름하고, 天으로 자비가 있는 것을 天子라 이름붙인다.
또 能說: 능히 설하는 사람을 잡아서 그 명칭을 法慧라 하는데, 행을 따라 염이 없는 것을 法이라 하고 법으로 情을 가려내는 것을 慧라 하니, 情을 일으켜 理에 어긋나는 것을 無法慧라 하고 이를 요달해 정이 없어지는 것을 법혜라 이름한다. 能問의 주체와 법을 설하는 사람과 설해지는 법을 잡아서 총체적으로 淨行이라 칭하는 것이니, 品이란 理의 가르침을 균등히 나눈다는 뜻이다.
머묾이 없는 머묾을 부처님의 머묾이라 이름붙이고, 행함이 없는 행으로 중생 없는 중생을 이롭게 함을 淨行이라 이름붙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이 품이 반드시 오는 것이다.]]
[[앞의 십주품에서는 보살의 열 가지 경계에서 보살의 수행을 十住라고 했습니다. 본 품에서는 보살이 십주를 실현하기 위해서 청정한행 즉 梵行을 지어야 하는데 일반적인 청정행이 무수하게 많지만 여기에서는 삼세가 공적하여 얻을 바가 없는 無上청정행을 실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위없는 최고의 청정이란 얻을 바가 없는 법이며 삼세가 공적하여 일체상이 없는 까닭에 절대 평등할 때 청정한 범행을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먼저 신구의 삼업으로부터 시작되는 열 가지 청정행을 닦아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무념 무상 무주라는 삼세가 공적한 최고 최상의 거룩한 행을 배우고 대자대비를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梵行品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청정범행이 과연 무엇인가? 물론 기본인 계율을 잘 지켜서, 3천위와 8만 세행= 세부적인 행동 지침을 다 준수하고 살아가는 것을 청정범행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일반불교의 안목입니다.
과연 깨달음의 입장, 다시 말해서 화엄경의 안목의 청정범행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이 梵行品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차원이 다른 아주 파격적인 화엄경의 안목입니다. 이것을 잘못 읽으면 사실은 좀 넘 칠 수도 있고, 건방스러워 질수도 있는 내용이 되기도 합니다.]
一, 正念天子의 請法
爾時에 正念天子가 白法慧菩薩言호대 佛子야 一切世界諸菩薩衆이 依如來敎하야
染衣出家인댄 云何而得梵行淸淨하야 從菩薩位로 逮於無上菩提之道이닛고
爾時(이시)에 正念天子가 그때 정념천자가 白法慧菩薩言(백법혜보살언)호대, 볍혜보살에게 말했다.[고해 말하되,]
佛子야 一切世界諸菩薩衆이, "불자여 일체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依如來敎(의여래교)하야, 여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染衣出家(염의출가)인댄, 가사를 입고 출가하였다면 [染衣= 먹물 옷, 물들인 가사 입는 것이 染衣出家지요.]
云何而得梵行淸淨(운하이득범행청정)하여 어떻게 범행을 청정히 하여야
從菩薩位(종보살위)로, 보살지위에서
逮於無上菩提之道(체어무상보리지도)이닛고? 무상보리=최상의 깨달음의 도에 이르겠습니까?"[逮 미칠 체]
[보살지위= 우리 모두가 보살지위고, 모든 불자를 다 보살지위라고 봅니다. 즉 불교에 입문한 사람 모두는 화엄경 안목으로 모두가 보살지위입니다. 몰론 중생이라는 말은 필요에 따라서 자주 합니다만, 불교에 입문한 사람으로부터 최상 가는 깨달음의 보리의 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를 正念天子가 물었습니다.]
二, 法慧菩薩의 說法
(1) 十種觀察名
法慧菩薩이 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修梵行時에 應以十法으로 而爲所緣하야 作意觀察이니
所謂身과 身業과 語와 語業과 意와 意業과 佛과 法과 僧과 戒니라
應如是觀호대 爲身是梵行耶아 乃至戒是梵行耶아
[대체적인 제목으로 열 가지 관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法慧菩薩이 言하사대, 법혜보살이 말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修梵行時(수범행시)에, 범행을 닦을 때에는 應以十法(응이십법)으로, 응당히 열 가지 법으로
而爲所緣(이위소연)하야, 열 가지 법에 반연하여 作意觀察(작의관찰)이니, 뜻을 세우고 관찰해야 하느니라.
[作意= 굳이 마음을 지어서ㆍ뜻을 내어서ㆍ생각을지어서 관찰한다.
사물을 보되 거기에 다른 생각 개입시키지 않고 그냥 그대로 보는 것, 作意觀察= 지을 作ㆍ뜻 意. 생각을 지어서 관찰한다. 예를 들어 꽃이 있다면 아, 저 꽃은 본질적으로는 지수화풍 4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는 꽃이라고 하는 그 현상에 이끌릴 것이 아니라, 저것 또한 하나의 식물이라고 보는 본질적인 관찰을 作意觀察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所謂身(소위신)과 소위 신= 몸, 신업(身業)과, 어(語), 어업(語業)과 말과 말이 지니는 업과,
의(意), 의업(意業)과 생각과 생각의 업과 불(佛), 법(法), 승(僧), 그리고 계(戒)의
[완전무결하고 본래 원만항 십수에 의거한 10 가지]
應如是觀호대, 응당히 이와 같이 관하되, [그렇게 관찰하기를]
爲身是梵行耶(위신시범행야)아? '몸[身]이 범행인가?'에서부터
[몸뚱이 자체가 청정한 범행인가? 身業인가? 語業인가? 意業인가? 佛인가? 法인가? 僧인가? 戒가 범행인가?
이런 식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乃至戒是梵行耶(내지계시범행야)아? '계(戒)가 범행인가?' 하고 살펴서
[진정 청정범행이란 무엇인가?를 살펴서]
(2) 身
若身이 是梵行者인댄 當知梵行이 則爲非善이며 則爲非法이며 則爲渾濁이며 則爲臭惡이며 則爲不淨이며 則爲可厭이며 則爲違逆이며 則爲雜染이며 則爲死屍며 則爲蟲聚니라
[냉정하게 그 동안의 기존의 어떤 불교적인 지식을 다 내려놓고 새로운 시각에서 몸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若身이 是梵行잔댄, 만약 몸이 범행이라면
當知梵行(당지범행)이 則爲非善(즉위비선)이며, 그 범행은 곧 선한 것이 아니요
則爲非法이며, 법도 아닌 것이며, 則爲 渾濁(혼탁)이며 혼탁하고 則爲臭惡(취악)이며 악취 풍기는 것이며,
則爲不淨(부정)이며 깨끗치 못하고 則爲可厭(가염)이며 좋아할 수 없는 것이며,[가염= 싫은 것]
則爲 違逆(위역)이며, 어긋난 것이요 則爲 雜染(잡염)이며, 여러가지로 물든 것이며,
則爲 死屍(사시)며, 죽은 시체요 [종내는 죽음이며] 則爲 蟲聚(충취)니라. 구더기 더미인 것이며,
[만약 이 몸뚱이가 청정범행이라고 한다면, 이 몸뚱이 좋은 것이 뭐 있습니까? 설사 건강한 사람도 병나기도 하고, 그 병이 끝나면 또 다른 병이 생길수도 있고, 또 법답지 못해서 부정하지ㆍ취악하지ㆍ혼탁하지ㆍ계속, 계속 씻겨줘야지ㆍ먹여줘야지ㆍ입혀줘도 계속 탈나지요. 좀 따뜻했으면 좋겠는데 춥다ㆍ춥다ㆍ춥다고 내 마음과 다르게 어기고 있는 겁니다.
또 이것저것 다 물들어 뒤섞여있고 끝내가서는 송장입니다. 그냥 가만히 송장이 아닌 벌레덩어리입니다. 살아있어도 벌레덩어리인데, 죽고 나서는 말할 나위가 없지요.
이 몸뚱이를 청정범행이라고 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잘못 읽으면 사람이 아주 건방스러워지기도 하지만 속이 시원한, 화엄경만이 설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일체가 主宰(주재)가, 실체가 없다. 또 몸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니 전부 空한 송장덩어리이다]
(3) 身業
若身業이 是梵行者인댄 梵行이 則是行住坐臥며 左右顧視며 屈伸俯仰이니라
若身業이 是梵行잔댄, 만약 신업이 범행이라면
梵行이 則是行住坐臥(즉시행주좌와)며, 범행은 곧 行=다니고, 住=머물고, 坐=앉고, 臥=눕는 것이거나
左右顧視(좌우고시)며, 좌우를 돌아보는 것이나 [顧 돌아볼 고]
屈伸俯仰(굴신부앙)이니라. 몸을 구부리고 펴고
[이것 전부 몸이 하는 짓인데, 만약 앉는 것이 범행이라면 서는 것은 범행이 아니어야 되고, 또 눕는 것이 범행이라면 걸어 다니는 것은 범행이 아니어야 되는 것, 즉 고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정말 착각해서 너무너무 많은 세월을 너무 엄청난 것에 속아 사는지 몰라요.
어떤 사기꾼이 와서 나를 속여서 속은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잘못 된 의식에 속아서 산 세월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읽고 툭 터져야 됩니다.]
(4) 語
若語가 是梵行者인댄 梵行이 則是音聲風息이며 脣舌喉吻이며 吐納抑縱이며 高低淸濁이니라
若語가 是梵行잔댄, 만약 말이 범행이라면
梵行이 則是音聲風息(즉시음성풍식)이며, 범행은 곧 음성이나 호흡소리, 가슴,
脣舌喉吻(순설후문)이며, 혀, 목구멍, 입술의 [脣 입술 순]
吐ㆍ納ㆍ抑ㆍ縱(토납억종)이며, 내 뱉고 들이키고 억제하고 내버려두고
高ㆍ低ㆍ淸ㆍ濁(고저청탁)이니라. 높고 낮고 맑고 탁하고 하는 것들일 것이며,
[바람이 없으면 말이 생길 수가 없고, 입술ㆍ혀ㆍ목구멍이 전부 동원이 돼서 소리를 내고 말을 하고 토하고ㆍ받아들이고, 거부하고ㆍ쫓아가고, 높은 소리ㆍ낮은 소리, 맑은소리ㆍ탁한 소리, 무엇을 꼬집어서 범행이라고 할 것이냐?]
(5) 語業
若語業이 是梵行者인댄 梵行이 則是起居問訊이며 略說廣說이며 喩說直說이며
讚說毁說이며 安立說 隨俗說 顯了說이니라
若語業이 是梵잔댄 말의 업[語業]이 범행이라면
梵行이 則是 起居에 問訊(기거문신)이며, 범행은 곧 사람이 살아가고 문안하고 [問訊= 문안 인사]
略說(약설), 간단히 말하고 廣說(광설)이며, 자세히 말하고 [길게도 말하기도하고,]
喩說(유설), 비유로 말하고 直說(직설)이며, 직설하고
讚說(찬설), 칭찬하고 毁說(훼설)이며, 비난하고 [훼방하는 소리,]
安立說(안립설), 편안하게 말하고[정돈하고 배대해서 안배 하는 소리]
隨俗說(수속설), 속되게 말하고 [세속의 관념이나 관습을 따르는 이야기]
顯了說(현요설)이니라. 분명히 말하는 것들일 것이며,[이치를 다 드러내는 소리]
[말의 業이라고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지, 거기에서 하나도 벗어난 것이 없다.]
(6) 意
若意가 是梵行者인댄 梵行이 則應是覺이며 是觀이며 是分別이며
是種種分別이며 是憶念이며 是種種憶念이며 是思惟며 是種種思惟며 是幻術이며 是眠夢이니라
若意가 是梵行잔댄, 만약 뜻[意]가 범행이라면 梵行이 則應是覺(즉응시각)이며, 범행은 곧 깨달음,
是觀이며, 관찰, 是分別이며, 분별이며, 是種種分別이며, 여러가지, 종종 분별하는 것이며,
是憶念(시억념)이며, 기억, 是種種憶念이며, 여러가지의 기억하는 것이며,
是思惟(시사유)며, 생각함, 是種種思惟며,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생각함이며,[思惟도 의식이 하는 것이며]
是幻術(시환술)이며, 요술, [幻術= 의식이 헛것을 생각하는 것]
是眠夢(시면몽)이니라. 꿈들일 것이며,[잠들어 꿈꾸는 것도 우리의 의식의 작용입니다]
[뜻의 업[意業]이 범행이라면 범행은 곧 사상(思想), 추위, 더위, 배고픔, 갈증, 괴로움, 즐거움, 근심, 기쁨들일 것이며,
그러니까 意=감각도 범행이 아니고, 語도 범행이 아니고, 身도 범행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청정범행 닦고 닦아 서리같이 엄한 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털끝마저도 범하지 않는 입장을 지키면서 또 이렇게 범행의 실체를 완전히 깨뜨려서 일체 존재의 공성으로 보는, 중도적인 입장을 함께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7) 意業
若意業이 是梵行者인댄 當知梵行이 則是思想寒熱飢渴苦樂憂喜니라
若意業이 是梵行잔댄, 만약 뜻의 업[意業]이 범행이라면
當知(당지), 마땅히 알아라. 梵行이 범행은
則是, 思想ㆍ寒ㆍ熱ㆍ飢ㆍ渴ㆍ苦ㆍ樂ㆍ憂ㆍ喜(사상한열기갈고락우희)니라.
곧 사상(思想), 추위, 더위, 배고픔, 갈증, 괴로움, 즐거움, 근심, 기쁨들일 것이며,
[전부 이렇게 숫자를 한번 나열해 본 것입니다. 意業= 춥다ㆍ덥다. 괴롭다ㆍ즐겁다. 기쁘다ㆍ근심스럽다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생각=의식으로 짓는 業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 겨울에 영하 10도나 되면 춥다고 그러는데, 인도에는 영상 5도만 돼도 추워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부 의식작용, 우리의 습관입니다.]
[[보살의 청정행이란 육체나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법의 체성이 공함을 깨달아 어디에도 걸리지 않을 때 모든 부처님 법을 얻게 되고 여기에서 나오는 행은 무엇이든 청정행이 되며 이와 같은 청정행이 곧 초발심이며, 초발심이 바로 정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러한 청정을 완성하기 위해서 대자대비심을 일으켜 고통 받는 중생을 외면하지 말고 구제하되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을 때 보살도를 완성하고 청정행을 구족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장에서 이러한 화엄의 본질적 청정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순수한 발심을 해야 하고 또 부단하게 노력하고 닦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