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2권 4

Skunky 2024. 10. 4. 08:01

大智度論 釋大如品 第五十四 卷七十二 卷七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54. 대여품(大如品) 풀이함 4

 

舍利弗!菩薩摩訶薩雖念過去、未來、現在諸佛持戒、禪定、智慧、解脫、解脫知見,取相受持;是人不知不解諸佛戒、定、慧、解脫、解脫知見,但聞空、無相、無作名字聲,而取名字聲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菩薩摩訶薩若如是迴向,住聲聞、辟支佛地中,不能得過。何以故?遠離般若波羅蜜及方便力,持諸善根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비록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지계와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염(念)할지라도 상(相) 취하면서 수지(受持)한다면, 

 사람은 모든 부처님의 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이라 이름과 소리만을 듣고 이름과 소리를 취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廻向)하였느니라.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회향한다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머무르면서  뛰어날  없나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과 방편력(方便力)을 멀리 여읜 모든 선근(善根)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舍利弗!有菩薩摩訶薩從初發意已來,不遠離薩婆若心,行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不遠離般若波羅蜜及方便力故,不取相;於過去、未來、現在諸佛戒、定、慧、解脫、解脫知見,不取空解脫門相,不取無相、無作解脫門相。舍利弗!當知是菩薩摩訶薩不墮聲聞、辟支佛道,直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是菩薩摩訶薩從初發心已來行布施不取相,持戒、忍辱、精進、禪定不取相;過去、未來、現在諸佛戒、定、慧、解脫、解脫知見不取相。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처음발심에서부터 살바야심을 여의지 않으면서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행하고, 반야바라밀과 방편력을 멀리하지 않기 때문에 상(相) 취하지도 않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지계ㆍ선정ㆍ지혜ㆍ해탈  해탈지견에서 공해탈문(空解脫門)의 상(相) 취하지도 않고 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해탈문을 취하지도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고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는 것으로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처음 초발심에서부터 보시를 행하면서도 상(相) 취하지 않고,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을 행하면서도 상(相) 취하지 않으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ㆍ해탈지견에서도 상(相)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舍利弗!是名菩薩方便力,以離相心行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乃至離相心行一切種智。”

사리불아, 이러함을 바로 보살이 방편력과 상(相) 여읜 마음으로써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행하는 것이며, 나아가 상(相) 여읜 마음으로써 일체종지를 행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舍利弗白佛言:“世尊!如我解佛所說義,若菩薩摩訶薩不遠離般若波羅蜜、方便力,當知是菩薩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是菩薩摩訶薩從初發心已來無法可知,若色,若受想行識 乃至一切種智。

世尊!有求菩薩道善男子、善女人遠離般若波羅蜜、方便力,當知是人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或得、或不得。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제가 이해한 바로는,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의 방편력을 멀리 여의지 않는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진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처음발심에서부터 물질(色) 또는 수상행식(受想行識) 내지는 일체종지라고 알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의 방편력을 멀리 여읜다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혹은 얻기도 하고 혹은 얻지 못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何以故?世尊!是求菩薩道善男子、善女人所有布施皆取相,所有持戒、忍辱、精進、禪定皆取相。以是故,是善男子、善女人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定。世尊!以是因緣故,菩薩摩訶薩欲得阿
耨多羅三藐三菩提,不應遠離般若波羅蜜、方便力。是菩薩摩訶薩住般若波羅蜜、方便力中,以無得無相心,應修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乃至以無得無相心,應修一切種智。”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보살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은 일체의 보시 모두에서 상(相)을 취하며, 일체의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 모두에서 상(相)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남자ㆍ선여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정해지지 못한 부정(不定)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인연으로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한다 반야바라밀의 방편력을 멀리 여의지 않아야 하며,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력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얻음이 없고 상이 없는 무득무상심(無得無相心)으로써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닦아야 하며, 나아가 무득무상심(無得無相心)으로써 일체종지를 닦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論. 釋曰:“諸天子歡喜,以末栴檀香,散佛及須菩提上。歎言‘希有!世尊!須菩提以如來如隨佛生’”者,諸天子意謂:“須菩提智慧力故,令一切法皆如佛法,是故說隨佛生。”

▷논. 해석한다; 모든 천자들이 기뻐하면서 전단향을 가루를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의 위에 뿌리고는 찬탄하면서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다.

“수보리 존자는 여래의 여(如)로써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이다”고 함이란, 모든 천자들은 생각하기를 ‘수보리 존자는 지혜의  때문에 일체법으로 하여금 모두가 부처님의법과 같게끔 하는구나’고 하였으므로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이라 설한 것이다.

 

須菩提知諸天子心少貴尚是諸法如,是故須菩提欲斷諸天子心故說:“是如畢竟空相。”以四種破著如心,所謂:“須菩提不在色中,不在色如中,不以色等,不以色等如,不離色等、不離色等如,隨佛生。”佛此中自說因緣:“此法皆空、不可得。”舍利弗言:“世尊!是如甚深!是如中但色等法不可得,何況色等法如當可得!”

수보리 존자는 모든 천자들의 마음이 조금은 법의 여(如)를 귀하게 여긴다고 알았기 때문에, 모든 천자들의 마음을 끊게 하고자 여(如)의 필경공의 상(相)을하면서  가지로 여(如)에 집착하는 마음을 깨뜨린 것이니, 

이른바 ‘물질(色) 가운데에 있지도 않고, 물질의 색여(色如) 가운데에 있지도 않으며, 

물질(色) 등의 여(如) 아니고, 물질(色) 등의 색여(色如)도 아니며, 

물질(色) 등을 여의지도 않고, 물질(色) 등의 색여(色如) 여의지도 않으면서 부처님을 따라 수불생(隨佛生)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모두가 공(空)이라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다”고 하셨으며, 

사리불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여(如)는 매우 깊습니다.  여(如) 가운데에서는 물질(色) 등의 법도 얻을  없거늘, 하물며 물질(色) 등의 법여(法如)를 얻을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問曰:何者是色等法?何者是色等法如?

묻나니, 어떠한 것이 물질(色) 등의 법이며, 어떠한 것이 물질(色)  법여(法如)입니까?


答曰:色等法,眼所見等諸法;如名‘色等法實相,不虛誑’。人於色等如法中錯謬故,或起不善業墮惡道中,或起善業生於人天中,終歸磨滅,還生諸苦。或起無漏業,應求大利而取小乘,不得畢竟淸淨如相。

답하나니, 물질(色) 등의 법이란 눈에 보이는법들이니,

여(如)라 함은 물질(色) 등의 법실상(法實相)이요 거짓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질(色) 등의 여법(如法) 가운데에서 착각에 의한 착류(錯謬) 때문에 혹은 착하지 않은 불선업(不善業)을 일으켜 악도(惡道)에 떨어지기도 하며, 혹은 착한 선도(善道)를 일으켜서 인간과 천상에 태어 나되, 마지막에는 마멸되어서 돌아가 다시 모든 고통을기도 하며, 혹은 무루업(無漏業)을 일으켜서  이익을 구해야 하거늘, 소승(小乘)을 취하여서 마침내 청정한 여상(如相)을 얻지 못하기도 하나니, 


故色等法皆是作法、有爲、虛妄、從顚倒生、凡夫所憶想分別行處,是故色等法虛妄,不卽是如。知色等法如實故卽是如,因色等法得如名,是故言:“不離色等法得如。”色等法入如中,皆一相無異;是故須菩提謙言:“非但我隨佛生,一切法亦如是相。”

그러므로 물질(色) 등의 법은 모두가 짓는 작법(作法)이요, 유위(有爲)이며, 허망한 것으로서 뒤바뀜의 전도(顚倒)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범부의 생각과 분별이 작용하는 곳이다.

이러한 까닭 물질(色) 등의 법은 허망한 것으로 곧 그것은 여(如)가 아니며, 

물질(色)  법의 여실(如實)함을 알게 되면 그것이  여(如)가 되는 것이다.

물질(色) 등의 법으로 인하여 여(如)라는 이름을 얻게 되기 때문에 물질(色) 등의 법을 여의지 않는다고 하며,

여(如)를 얻으면 물질(色) 등의 법은 여(如) 가운데에 들어가므로 모두가 하나의 일상(一相)이면서 다르지 않은 무이(無異)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보리 존자가 겸양하면서 말하기를 “비단만이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 아니요, 일체 또한 이와 같은 상(相)입니다”라고 하였다.


舍利弗讚歎須菩提所說:“色等法亦畢竟空,何況如!”因若空,何況果?聞如是甚深如相,衆生各得道利益。

사리불 존자는 수보리 존자가 하는 말을 찬탄하면서 “물질(色) 등의 법도 필경에 공(空)한 것이거늘 하물며 여(如)이겠으며, 원인의 인(因)이 공(空)하거늘 하물며  결과의 과(果)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매우 깊은 여상(如相)을 듣고 중생들은 저마다 도를 얻는 이익을 것이다.


問曰:是般若波羅蜜爲菩薩說,何故六千人成阿羅漢道?

묻나니, 이 반야바라밀은 보살들을 위하여 설한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6천의 사람들이 아라한의 도를 이룬 것입니까?


答曰:佛知必有難者,自爲舍利弗說因緣:“是人無般若波羅蜜、無方便力。”過去作功德,無方便故,邪行不正,是人離般若波羅蜜故,深著善法;今從佛聞般若波羅蜜,深厭世閒,慈悲心薄故求自利,不受一切法,卽得阿羅漢,於般若無咎。如人持器詣海,隨器大小,各自取足。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어려워할 이가 있을 것이라고 아셨으므로 사리불 존자에게 스스로의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이 없고, 방편의 힘이 없으며, 과거에 공덕을 지었으나 방편이 없었기 때문에 삿된행을 하고 올바르지 않았으며,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었기 때문에 착한법에 깊이 집착하는 것이다.

지금 부처님으로부터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도 세간을 깊이 싫어하거나, 자비로운 마음이 희박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이익만을 구하면서 일체법을 받지 않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라, 반야에는 허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그릇을 지니고 바다에 가서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저마다 스스로족하게 바닷물을 취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如經說:“六千菩薩無般若波羅蜜、方便力故,行五波羅蜜,不得是無分別法,作阿羅漢。”若一切聖人皆得無爲法,得無爲法卽是無分別,何以此中說“不得無分別法,作阿羅漢”?

묻나니, 경전에서 설한 것과 같이, 6천의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이 없기 때문에 다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분별이 없는 무분별법(無分別法)을 얻지 못하여 아라한이 된다고 하셨는데, 

만약 일체 성인이 모두 무위법(無爲法)을 얻는다면, 무위법을 얻는 것이 바로 분별이 없는 무분별이거늘,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법(無分別法) 얻지 못하여 아라한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非說今世聽法時;乃是過去五百世時,不得般若、方便,修集五波羅蜜功德,以是故言:“不得無分別。”失菩薩信等五根;失菩薩信等五根故,雖聞般若,不得如菩薩所聞卽於實際作證。

답하나니, 이 세상에서 법을 듣는 때를 말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곧 과거의 5백 세상 동안에 반야의 방편을 얻지 못하고서 다섯 가지 바라밀의 공덕을 닦아 모은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분별법을 얻지 못여 보살의 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 신근(信根) 등의근(五根)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며,

보살의근을 잃었기 때문에 비록 반야를 들을지라도 보살로서의 들은 바대 못하면서  분명하게 대할 수 있는 실제(實際)인 열반만 증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問曰:俱行空、無相、無作,何以一人得作佛、一人作阿羅漢?

묻나니,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을 갖추어 행하거늘 무엇 때문에  사람은 부처님이 되고  사람은 아라한이 되는 것입니까?


答曰:雖有種種因緣,得阿羅漢大因緣,所謂離薩婆若心行空等故。

“大鳥”者,金翅鳥在於天上,如此閒人鳥雀等無異。是鳥所以不來者,此鳥食龍,翅出毒風,扇一切人眼失明故。是鳥初出㲉,羽翼未成,意欲飛去,卽時墮落,中道心悔:“我未應飛。”還欲住本天,上舍摩梨樹上;是鳥身大,羽翼未成,不能擧身。

답하나니, 비록 여러 가지의 인연이 있기는 하나 아라한이 되는  인연은 이른바 살바야의 마음을 여의고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 행하였기 때문이다.

‘큰 새’는 천상에 살고 있는 금시조(金翅鳥)를 말하는 것으로, 마치  세간에서 사람들고 함께 살고 있는 새와 참새인 조작(鳥雀)과 다름이 없으나, 이 새가 이 세간에 내려오지 않는 까닭은,  새는 용을 잡아먹으며  날개에서는 독풍(毒風)이 나오는데 날개를 저으면 사람들이 실명하게 되기 때문이다.

 새가 처음에 알에서 나와 아직 날개가 나오지 않았을 때에는,  새가 날아오르려고 하여도  떨어져버리므로  중도에서 뉘우치면서 ‘나는 아직 날아서는  되겠구나’라고 하고는 다시 그가 살던 천상의 사마리수(舍摩梨樹, Śābari 공중에 뿌리를 내린 나무라 합니다) 위로 올라가려 하지만  새의 몸은 크고 날개가 아직 나지 않았으므로 몸을 들어 올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鳥身”,是菩薩 身“大”者,世世廣集五波羅蜜功德。“無兩翅”者,是無般若波羅蜜、無方便。
“須彌山”者,是三界。“虛空”,是無量佛法。“未應飛而飛”者,是菩薩功德未成滿,欲行菩薩三解脫門、欲遊無量佛法虛空中而自退沒,是心雖欲願作佛而不能得。“若死”者,是阿羅漢道;“死等”者,辟支佛道。“若痛、若惱”者,失菩薩本願功德。

佛自結句:“乃至住是無得無相心中應布施等。”此經中合喩,義自明了,故不說。

‘새의 몸인 조신(鳥身)’이란 바로 보살이며, 

'몸이 큰 것’은 세세에서 다섯 가지 바라밀의 공덕을 널리 쌓은 것이며,

‘두 날개가 없는 것’은 바로 반야바라밀이 없고 방편이 없는 것이며,

‘수미산(須彌山)’이란 바로 삼계(三界)이고,

‘허공’이란 바로 무량한 부처님의 불법이다.

‘아직 날지 않아야 하는데도 나는 것’은 바로 보살의 공덕이 아직 원만하지 못한데도 보살의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을 행하면서 무량한 부처님의 불법의 허공 가운데에서 노닐고자 하나, 스스로 물러나 가라앉게 되는 것이니, 이 마음은 비록 부처님이 되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죽는 사(死)'란 것은 바로 아라한의 도요, ‘죽는 것과 같다’는 것은 벽지불의 도이며,

‘아파서 괴로워한다’는 것은 보살로서 본래 서원한 공덕을 잃어버린 것이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이 구절을 맺으시면서 “나아가 얻을 것도 없는 무득상(無得相)이고, 상도 없는 무상상(無相相)의 마음에  머무르면서 보시 등을 행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이 경에서의 비유를 통해 밝히고자 한 법이 자명하기 때문에 다시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