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제71권 7
大智度論 釋譬喩品 第五十一 卷七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51. 비유품(譬喩品)을 풀이함 5
須菩提!一切法趣夢,是趣不過。何以故?夢中,趣、非趣不可得故。
須菩提!一切法趣幻、趣嚮、趣影、趣化,趣是趣不過。何以故?是化等中,趣、非趣不可得故。
須菩提!一切法趣無量、無邊,是趣不過。何以故?無量、無邊中,趣、非趣不可得故。
수보리야, 일체법은 꿈(夢)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꿈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허깨비의 환(幻)를 향해 가며, 메아리의 향(嚮)를 향해 가며, 그림자의 영(影)를 향해 가며, 변화한 화(化)를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라. 왜냐하면 이 변화한 것 등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이 나아가는 취(趣)는 한량없고 끝이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무량무변한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須菩提!一切法趣不與不取,是趣不過。何以故?不與不取中,趣、非趣不可得故。
須菩提!一切法趣不擧不下,是趣不過。何以故?不擧不下中,趣、非趣不可得故。
수보리야, 일체법은 주지도 않는 불여(不與)이고 취하지도 않는 불취(不取)를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주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이 나아가는 취(趣)는 들어 올리지 않는 불거(不擧) 내리지도 않는 불하(不下)를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라. 왜냐하면 들고 내리지도 않는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須菩提!一切法趣不增不減,是趣不過。何以故?無增無減中,趣、非趣不可得故。
須菩提!一切法趣不來不去,是趣不過。何以故?不來不去中,趣、非趣不可得故。
須菩提!一切法趣不入不出、不合不散、不著不斷,是趣不過。何以故?不著不斷中,趣、非趣不可得故。
수보리야, 일체법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불증불감(不增不減)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라. 왜냐하면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불래불거(不來不去)를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라. 왜냐하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는 불입불출(不入不出)이고, 합하지도 흩어지지도 않는 불합불산(不合不散)이며, 붙지도 않는 불착(不著)이며, 끊어지지도 않는 불단(不斷)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라. 왜냐하면 들어가지도 않고 나아가 끊어지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須菩提!一切法趣我、衆生、壽命、人、起、使起、作、使作、知者、見者,是趣不過。何以故?我乃至知者、見者畢竟不可得,何況當有趣非趣!
수보리야, 일체법은 나(我)와 중생(衆生)과 수명(壽命)과 사람(人)과 일어나는 기자(起者)와 일어나게 하는 사기자(使起者)와 짓는 작자(作者)와 짓게 하는 사작자(使作者)와 아는 지자(知者)와 보는 견자(見者)를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라. 왜냐하면 나에서 아는 이, 보는 이에 이르기까지는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한 것이니 하물며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須菩提!一切法趣有常,是趣不過。何以故?常畢竟不可得,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樂、淨、我,是趣不過。何以故?樂、淨、我畢竟不可得,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無常、苦、不淨、無我,是趣不過。何以故?無常、苦、不淨、無我畢竟不可得,云何當有趣、非趣?
수보리야, 일체법은 항상한 유상(有常)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라. 왜냐하면 항상 있는 유상도 필경에 얻을 수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즐거움(樂)과 깨끗한 정(淨)과 나(我)를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즐거운 것과 깨끗한 것과 나는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항상하지 않은 무상(無常)ㆍ괴로움(苦)ㆍ깨끗하지 않은 부정(不淨)ㆍ무아(無我)를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무상한 것과 괴로운 것과 부정과 무아는 필경에 얻을 수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須菩提!一切法趣欲事,是趣不過。何以故?欲事畢竟不可得,何況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瞋事、癡事、見事,是趣不過。何以故?瞋事、癡事、見事畢竟不可得,何況當有趣、非趣?
수보리야, 일체법은 탐욕의 욕사(欲事)를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탐욕의 욕사는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성내는 진사(瞋事)ㆍ어리석은 치사(癡事)ㆍ삿된 소견의 견사(見事)를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성내는 일과 어리석은 일과 삿된 소견의 일은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須菩提!一切法趣如,是趣不過。何以故?如中無來無去故。
須菩提!一切法趣法性、實際、不可思議性,是趣不過。何以故?法性、實際、不可思議性中無來無去故。
須菩提!一切法趣平等,是趣不過。何以故?平等中,趣非趣不可得故。
須菩提!一切法趣不動相,是趣不過。何以故?不動相中,趣、非趣不可得故。
수보리야, 일체법은 한결같이 여여한 여(如)를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여(如) 가운데에서는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는 무래무거(無來無去)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불가사의(不可思議)를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법성과 실제와 불가사의한 가운데에서는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는 무래무거(無來無去)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평등(平等)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평등한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동요하지 않는 부동상(不動相)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부동상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도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須菩提!一切法趣色,是趣不過。何以故?色畢竟不可得,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受、想、行、識,是趣不過。何以故?受想、行、識畢竟不可得,云何當有趣、非趣?十二處、十八界亦如是。
수보리야, 일체법은 물질(色)을 향해 가나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물질(色)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을 향해가니,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지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12처(處)와 18계(界) 또한 그러하느니라.
須菩提!一切法趣檀波羅蜜,是趣不過。何以故?檀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尸羅波羅蜜,是趣不過。何以故?尸羅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羼提波羅蜜,是趣不過。何以故?羼提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수보리야, 일체법은 단바라밀(檀波羅蜜)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단(보시)은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취(趣非趣)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시라는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찬제는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須菩提!一切法趣毘梨耶波羅蜜,是趣不過。何以故?毘梨耶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禪波羅蜜,是趣不過。何以故?禪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般若波羅蜜,是趣不過。何以故?般若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수보리야, 일체법은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비리야는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선바라밀(禪波羅蜜)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선은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반야는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須菩提!一切法趣內空,是趣不過。何以故?內空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外空,是趣不過。何以故?外空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須菩提!一切法趣內外空,是趣不過。何以故?內外空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乃至一切法趣無法有法空,是趣不過。何以故?無法有法空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수보리야, 일체법은 내공(內空)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내공은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외공(外空)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외공은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과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일체법은 내외공(內外空)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내외공은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일체법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무법유법공은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須菩提!一切法趣四念處乃至八聖道分,是趣不過。何以故?四念處乃至八聖道分畢竟不可得故,云何當有趣、非趣?
수보리야, 일체법은 사념처 내지는 8성도(팔정도)분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사념처 내지 8성도분은 필경에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須菩提!一切法趣佛十力乃至一切種智,是趣不過。何以故?一切種智中,趣非趣不可得故。
수보리야, 일체법은 부처님의 십력 내지는 일체종지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일체종지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취비치(趣非趣)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須菩提!一切法趣須陁洹果、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辟支佛道,是趣不過。何以故?須陁洹果乃至辟支佛道中,趣、非趣不可得故。
須菩提!一切法趣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趣不過。何以故?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趣、非趣不可得故。
須菩提!一切法趣須陁洹乃至佛,是趣不過。何以故?須陁洹乃至佛中,趣、非趣不可得故。”
수보리야, 일체법은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수다원의 과위 내지 벽지불의 도 가운데서는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일체법은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을 향해 가나, 이렇게 향해 감에 불과할 뿐이니, 왜냐하면 수다원 내지 부처님 가운데에서는 향하는 것이나 향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是深般若波羅蜜誰能信解者?”
佛告須菩提:“有菩薩摩訶薩先於諸佛所久行六波羅蜜、善根純熟、供養無數百千萬億諸佛、與善知識相隨,是輩人能信解深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그 누가 믿고 이해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먼저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오랫동안 6바라밀을 수행하였고, 선근이 무르익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였고, 선지식(善知識)을 따랐으니, 이러한 사람들은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잘 믿고 이해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能信解是深般若波羅蜜者,有何等性、何等相、何等貌?”
佛言:“欲、瞋、癡斷離是性、相、貌,是菩薩摩訶薩則能信解深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믿고 이해하는 이는 어떠한 성(性, 성품)과 어떠한 상(相)과 어떠한 모습의 모(貌)를 하고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고 여의었다면 그것이 바로 그 성(性, 성품)과 상(相)과 모습의 모(貌)이니, 이런 보살마하살이면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능히 믿고 이해하느니라.”
▶論. 問曰:上諸事中略說,今“趣”中何以廣說?
▷논. 묻나니, 위의 여러 가지 일에서는 간략하게 말씀하셨으나, 지금 향하는 취(趣)에서는 무엇 때문에 자세히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趣”是摠上九事之會歸,是故多說。復次,安樂等及趣皆同一義,俱出衆生著涅槃故。若事事廣說則不可盡,“趣”最在後故廣說;當知餘者亦皆應廣說。
답하나니, 향하는 취(趣)란 통틀어 위의 아홉 가지의 구사(九事)가 모이는 귀착점이기 때문에 많이 설명하신 것이다.
또한 안락(安樂) 등과 향하는 취(趣)란 모두가 동일한 뜻이며, 다 같이 중생에서 벗어나 열반에 도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만약 각각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다할 수가 없을 것이며, 향하는 취(趣)는 제일 뒤에 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신 것이니, 그 밖의 것 모두도 자세히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色等法趣空”者,如虛空但有名而無法;色等法亦爾,終歸於空。諸法究竟相必空故,餘者皆虛妄。如人初雖有善言,久久乃知情實;色等諸法亦如是,入無餘涅槃時與虛空無異,當知先亦如是,但凡夫顚倒果報故見異。一切法無有過出空等諸相,如人欲出過虛空不可得。
‘물질(色) 등의 법은 공을 향하는 취공(趣空)’ 이라 함은, 허공이 마치 이름만 있고 법이 없는 것과 같이, 물질(色) 등의 법 또한 그러하여 마침내는 공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제법의 궁극의 구경상(究竟相)은 반드시 공이기 때문에 그 밖의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마치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에는 착한 말을 할지라도 오래된 뒤에야 진실한 속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물질(色) 등의 제법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 때에는 허공과 다름이 없나니, 앞에서의 것들 역시도 그와 같다고 알아야 하나, 범부는 단지 뒤바뀌어 전도된 과보 때문에 다르게 볼 뿐, 일체법은 공(空) 등의 여러 상(相)에서 벗어나지 않나니, 마치 사람이 허공을 벗어나려 하여도 불가득인 것과 같은 것이다.
我等十六名,皆因五衆和合假有此名,無有實法,云何當有趣非趣?若常、淨、樂、我等四顚倒破四聖行。如常等四法不可得,以顚倒故;色等諸法亦如是。如常等不可得,無常等從常等出故亦不可得。是故說:“一切法趣常等、趣無常等。”
나(我) 등의 열여섯 가지 이름(16행상行相))은 모두가 오중(五衆, 오온)의 화합으로 인하여 임시로 붙인 가명이 있을 뿐이며 진실한 실법이 없거늘 어떻게 향하는 것과 향하는 취비취(趣非趣)가 아님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항상함(常)ㆍ청정함(淨)ㆍ즐거움(樂)ㆍ나(我) 등의 네 가지 뒤바뀜인 사전도(四顚倒, 상락아정)가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네 가지의 사성행(四聖行)을 파괴한다면, 한결같이 여여하고 항상한, 여상(如常) 등의 네 가지의 사법(四法)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니, 물질(色) 등의 제법 또한 그와 같으며,
항상함(常) 등을 얻을 수 없듯이, 무상함 등도 항상함(常) 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일체법은 항상함 등을 향(趣)하고 무상함 등으로 향(趣)한다고 설명한 것이다.
十六行(십육행, ṣodaṡa-ākāra) 또는 16행상(行相)이란 열여섯 가지 행상으로 4성제를 관찰하는 법을 말하며,
먼저 고를 관찰함의 네 가지는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요,
고의 원인을 관찰함의 네 가지는 '쌓임=集(집)ㆍ인(因)ㆍ연(緣)ㆍ生(생)'이요,
고가 멸함을 관찰함의 네 가지는 '盡(진)ㆍ滅(멸)ㆍ妙(묘)ㆍ出(출)'이라.→ (滅 靜 妙 離)
고(苦)가 滅(멸)에 이르는 도(道)를 관찰함의 네 가지는 '도(道) 정(正) 행(行) 적(跡)'이니라. → (道如行出)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1권 4
須菩提問佛:“是法甚深微細,誰當信解者?”
佛答說:“久行等因緣能信。”
更問:“久行等人有何等相?”
佛答:“是人離三毒心,亦不見是離,深入諸法實相故。”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이 법은 매우 깊은 심심(甚深)한 것이고 미세하거늘 그 누가 믿고 이해하겠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오랫동안 수행한 등의 인연으로 믿을 수 있다”고 하셨으며,
다시 묻기를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 등은 어떠한 상(相)이 있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은 탐진치 삼독(三毒)의 마음을 여의었으며, 또한 여읜 것조차도 보지 않나니, 제법의 실상(實相)에 깊이 들었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問曰:是人未得無生忍法,云何言“斷三毒”?
묻나니, 이 사람은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삼독을 끊은 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斷有二種:一者、根本斷,二者、薄少斷。此中說薄少斷。行者不分別是斷、是煩惱。何以故?煩惱相顚倒不定故,煩惱卽是斷,是故言離。
답하나니, 끊는다는 단(斷)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까지 끊는 근본단(根本斷)이요, 둘째는 조금만 끊은 박소단(薄少斷)이니,
여기에서는 조금만 끊은 박소단(薄少斷)을 말씀하신 것이며, 수행자는 ‘이것이 끊는 것이다,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번뇌의 상(相)은 전도되어서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가 곧 끊음의 단(斷)이니, 이 때문에 ‘여의는 이(離)’라고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