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70권 6

Skunky 2024. 9. 24. 08:00

大智度論 釋問相品 第四十九 卷七十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잡법사 구마라집 역.  

49. 문상품(問相品)을 풀이함 3

 

▶論. 釋曰:般若波羅蜜是諸佛母,是因緣故,諸佛依止般若波羅蜜住。餘經中說:“諸佛依止法,以法爲師。”佛此中告須菩提:“法者,卽是般若波羅蜜。”

▷논. 해석한다;  반야바라밀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머무르시나, 다른 경에서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에 의지하고 법으로써 스승을 삼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법이라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니라”고 하셨다.


一切不善法中無過邪見,邪見故不識恩分,我自然應爾。知恩者,諸世閒善法中最上,能與今世好名聲,後與上妙果報。是故佛自說知恩、報恩中第一。“我尚知布施、持戒等恩,何況般若波羅蜜!”

일체의 착하지 않은 불선법 가운데에서 삿된 사견(邪見)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삿된 사견 때문에 은분(恩分)을 알지 못하나, 우리는 응당 그러한 은혜를 알아야 하며, 은혜를 아는 것이 모든 세간의 착한 선법 가운데에서 가장 으뜸이며, 금세에서는 좋은 명성(名聲)을 주고, 후세에서는 가장 훌륭한 과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은혜를 아는 것이 은혜를 보답하는 것 가운데서 첫째이다. '나'도 오히려 보시와 지계 등의 은혜를 알거늘 하물며 반야바라밀이겠는가?”라고 하셨으며, 


復次,諸天子作是念:“般若波羅蜜畢竟空無定相故,或有人不貪不貴。”是故佛說:“我爲三界尊,尚供養般若波羅蜜,何況餘人!”

또한 여러 천자들이 생각하기를 “반야바라밀은 필경공이니,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혹 어떤 사람은 탐내지도 않고 귀히 여기지도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처럼 삼계(三界)에서 존귀한 이조차도 반야바라밀에 공양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사람들이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며, 


復有人生疑:“佛於一切世閒如虛空無所著,何以故貪是般若波羅蜜,尊重、供養,似如貪著?”是故佛說:“我無貪心。但分別知諸法好醜、力用多少;知是般若波羅蜜能斷一切戲論、開三乘道、能滅衆苦等,有無量無邊功德,是故讚歎、尊重、供養。”譬如人行安隱道,免諸患難,常念此道以示於人。

다시 어떤 사람은 의심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일체 세간에 대해서도 마치 허공과 같이 여기시어 집착함이 없으시거늘, 무엇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을 탐내면서 존중하고 공양하시는 것인가? 마치 탐착하는 것과 같구나!”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탐착하는 마음이 없다. 다만 제법의 아름답고 추한 호추(好醜)와 힘(力)의 작용이 많고 적음을 분별해서 아는 것일 뿐이니, 이 반야바라밀은 일체의 쓸모없는 희론(戱論)을 끊고, 삼승(三乘)의 도(道)를 열며, 능히 여러 고통 등을 소멸시키며, 무량하고 무변한 공덕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찬탄하고 존중하고 공양하는 것이다”고 하셨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안온한 길을 걸으면서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되면 항상 이 길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佛知作人”者,知他作恩於已。餘處說“佛不知作人”,恐人疑。是故說:“佛知一切法無作相。”知一切法無作相故言無作人,不以不知恩分故名不知作人。言知作人、不知作人、無咎。

‘부처님께서는 지음을 아는 지작인(知作人)’이라 함이란, 다른 이가 지은 은혜를 아는 것은 이미 그 밖의 곳에서 설명하였으나, 부처님께서 짓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마 사람들은 의심할 것이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의 지음 없는무작상(無作相)을 안다”고 말씀하셨으며, 일체법의 무작상(無作相)을 아시기 때문에 ‘지음이 없는 무작인(無作人)’이라 하며,

은혜를 알지 못함이 없기 때문에 ‘지음을 모르는 불지작인(不知作人)’이라 하며, 지음을 아는 지작인(知作人)이거나 지음을 모르는 불지작인(不知作人)이거나 간에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 


爾時,須菩提以畢竟空難:“世尊!若一切法畢竟空故,無知者、無作者,云何般若波羅蜜能生諸佛、能示諸佛世閒?”
佛可其問,此中自說因緣:“一切法空、虛誑、無堅固。”

그때 수보리 존자가 필경공으로써 묻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필경에 공하기 때문에 아는 이도 없는 무지자(無知者)이고 짓는 이도 없는 무작자(無作者)라면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모든 부처님의 세간을 능히 보여 주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 질문을 옳다 하시고,

스스로의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은 공하고 거짓의 허광된 것이니 견고함이 없다”고 하셨다.


須菩提意:“一切法鈍相,無見、無知,云何般若波羅蜜獨能知見?”

佛意:“一切法非但無知、無見;一切法空、不牢固,無知者、無見者,亦不可得,故不應難。”

수보리 존자의 뜻에는 “일체법은 둔한 둔상(鈍相)이라서 보는 것도 없는 무견(無見)이고, 아는 것도 없는 무지(無知)이거늘, 어떻게 반야바라밀만이 유독 알고 볼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한 것이며,

부처님의 뜻으로는 “일체법이 오직 무지(無知)이고 무견(無見)일 뿐만 아니라, 일체법은 공하고 견고하지 않아서, 아는 이도 없는 무지자(無知者)이고 보는 이도 없는 무견자(無見者)이며, 그것 또한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에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으며, 


復次,一切法無所依止、無繫故,無知者、無見者。種種門破諸法令空:或破常,行無常入空;或破實入空;或畢竟盡故入空;或一切法遠離故入空。如是等入空。

또한 일체법은 의지함도 없는 무소의지(無所依止)이고, 매이지도 않은 무계(無繫)이기 때문에 무지자(無知者)이며,  갖가지의 문으로 제법을 파하면서 공하게 하나니, 혹은 항상하다는 상(常)을 파하기도 하고, 무상을 행하면서 공에 드는 입공(入空)하기도 하고, 혹은 진실을 파하면서 입공(入空)하기도 하며, 혹은 필경에 다하기 때문에 입공(入空)하기도 하고, 혹은 일체법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입공(入空)하기도 하는 등, 이와 같이 입공(入空)하는 것이다.


今以一切法無住處故,無依止、無繫;無依止故,亦無生滅,以是故卽是空。不繫者,一切法實相不繫,出三界。所以者何?三界虛誑故。是以一切法無知者、無見者,如是示世閒。是般若不見色等諸法故示世閒。色等法無依止、無繫、虛誑故不見。此中佛自說不見因緣,所謂“不生緣色識,乃至不生緣一切種智識,是名不見色等法。”

지금 일체법은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이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는 무의지(無依止)이고, 매이지 않은 무계(無繫)이며, 무의지(無依止)이기 때문에 또한 나거나 없어지는 것도 없는 무생멸(無生滅)이니,

이러한 때문에 그것이 곧 공(空)인 것이다.

‘매이지 않은 불계(不繫)’ 란, 일체법의 실상(實相)은 매이지 않는 불계이고 삼계(三界)를 벗어나는 것이니, 왜냐하면 삼계는 거짓의 허광된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일체법에는 아는 지자(知者)도 없고 보는 견자(見者)도 없으니, 이와 같이 세간을 보이는 것이다.

이 반야는 물질(色) 등의 제법을 보지 않기 때문에 세간을 보이는 것이며,

물질(色) 등의 법에 의지하지 않는 무의지(無依止)이고, 매이지 않은 무계(無繫)이며 거짓이기 때문에 보지 않는 불견(不見)인 것이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그 보지 않는 불견의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물질(色)을 반연하여 분별(識)을 내지 않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반연하여 분별(識)을 내지 않는 것이 곧 물질(色) 등의 법을 보지 않는 불견(不見)이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識可不生,色云何不生?

묻나니, 분별(識)은 내지 않을 수 있겠지만, 물질(色)은 어떻게 내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惱壞相是色,因識故分別知;無識,亦無惱壞相。復次,一切諸法從因緣和合故生相,無有自性。如有身識、觸諸緣和合故,知地堅相,堅相不離身、識。是故諸法皆由和合生,無有自性。

답하나니, 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뇌괴상(惱壞相)이 바로 물질(色)이며, 분별(識)로 인하여 구분하면서 아는 것이니, 분별(識)이 없다면 또한 뇌괴상(惱壞相)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일체법은 인연(因緣) 화합으로부터 상(相)이 생기는 것으로서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니, 마치 몸과 분별의 신식(身識)이 있으므로, 모든 대상의 연(緣)에 촉(觸, 접촉)하여 화합한 땅이 견고한 견상(堅相)이라고 알며, 그 견상(堅相)은 신식(身識)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제법 모두는 화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고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子性)인 것이다.


“般若波羅蜜示世閒空”者,世閒名五衆乃至一切種智。菩薩行般若波羅蜜時,觀是法若大若小、若內若外無不空者,是名般若波羅蜜示世閒空。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공함을 보이는 시세간공(示世閒空)’이라 한 것은, 세간이란 오중(五衆)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말하는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이 법이 크거나 작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간에 공하지 않음이 없다고 관찰하나니, 이를 바로 반야바라밀은 세간의 공함을 보이는 시세간공(示世閒空)이라 하는 것이며, 


“佛示世閒空”者,或有人疑:“佛愛著法故,說般若波羅蜜示世閒空,非是諸法常實相。”是故佛說:“我非愛法故說。佛知諸法相,本末籌量、思惟、分別,無有法出於空者。我非但讀誦、從他聞故說,我以內心覺、知、思惟、分別故,說示世閒空。”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공함을 보이는 시세간공(示世閒空)’이라 하셨는데,

혹 어떤 사람은 의심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법에 애착한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세간의 공함을 보이는 것이며, 이것은 제법의 항상한 실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법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제법의 상(相)을 알므로 그 본말(本末)을 헤아리고 사유하며 분별하여서 어떠한 법도 공(空)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시며, 나는 비단 읽고 외우고 다른 이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깨닫고(覺) 알고(知) 사유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세간의 공함을 보이는 시세간공(示世閒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고 하셨으며, 


此一段說“示世閒空”者,上廣說“離六十二見”等,今但說“五衆乃至一切種智”。

時會者謂般若波羅蜜是畢竟空,心想取著,是故說“不可思議”。不可思議者 畢竟空亦不可得。

이 일단(一段)에서 세간공(世閒空)을 말씀하여 보이신 것은, 앞에서 자세하게 62사견 등을 여의는 것에서 설명하셨기에 여기서는 다만 오중 내지는 일체종지를 말씀하신 뿐이며,

모인 이들이 ‘반야바라밀은 바로 필경공’이라고 여기면서 마음으로 취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말씀하셨으니, ‘불가사의(不可思議)’ 란, 필경공 또한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라는 것이다.

 

畢竟空,或名離、或名寂滅。離名分散,諸法久後無遺餘,又自離其性。知畢竟空已,無心數法、無語言故,名寂滅。畢竟空等,如先說。

필경공을 혹은 여의는 이(離)라 하기도 하고, 혹은 적멸(寂滅)이라 하기도 하나니,

여의는 이(離)라는 것은 갈라져서 여기저기 흩어진지는 분산(分散)하는 것이며,

오랜 뒤에는 제법이 남음이 없게 되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그 성(性)을 여의는 것이니,

필경에 공하다는 것을 안 뒤에는 마음에 속한 심수법도 없고 언어도 없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라 하며, 필경공 등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問曰:云何是獨空?

묻나니, 어찌하여 독공(獨空)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十八空皆因緣相待,如內空因內法故名內空;若無內法,則無內空。十八空皆爾。是獨空無因無待,故名獨空。復次,獨空者,如虛空、如、法性、實際、涅槃。

답하나니, 18공(空)은 모두 인(因)과 연(緣)이 서로 상대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마치 내공(內空)은, 안(眼, 눈)ㆍ이(耳, 귀)ㆍ비(鼻, 코)ㆍ설(舌, 혀)ㆍ신(身, 몸)ㆍ의(意, 뜻)의 내육입(內六入)의 내법(內法)이 공한 것을 내공이라 하는 것과 같나니,

만약 내법이 없으면 내공도 없는 것이며, 십팔공의 모두가 그러하나, 이 독공(獨空)은 인연도 없고 상대도 없기 때문에 독공이라 하는 것이며, 

또한 독공이라 함은 마치 허공(虛空)ㆍ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열반(涅槃)과 같은 것이다.


“示世閒非今世相、非後世相”者,有諸外道但說今世,不說後世;是人邪見,墮斷滅中。有人說今世、後世,言:“今世神入後世。”是人邪見,墮常中。

세간을 보이되, 금세의 상(相)도 아니고 후세의 상(相)도 아니다’고 한 것은,

어떤 외도는 금세(今世)만을 말할 뿐, 후세(後世)를 말하지 않으니, 이 사람의 삿된 사견은 단멸(斷滅)에 떨어진 것이며,

어떤 사람은 금세와 후세를 말하면서도 ‘금세의 신(神, 정신)이 후세에 들어간다’고 하나니, 이 사람의 삿된 사견은 상견(常見)에 떨어진 것이다.

 

般若波羅蜜離二邊,說中道:雖空而不著空故,爲說罪福;雖說罪福,不生常邪見,亦於空無㝵。此中佛自說因緣:“此中畢竟空故,云何有今世、後世見 若斷、若常?”

반야바라밀은 이러한 단(斷)과 상(常)의 치우친 소견인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말하나니,

비록 공할지라도 공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죄와 복을 말하는 것이며,

비록 죄와 복을 말할지라도 항상 삿된 사견을 내지도 않고 또한 공에 대해서도 걸림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 가운데서는 필경공이거늘 어떻게 금세와 후세가 있어서 아주 없는 단(斷)이거나 항상한 상(常)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